신작 수필: 進化하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이원우(’79 <수필 문학(김승우 교수 발행) 초회 추천-서울대 차주환 교수 / ’84 <한국 수필> 천료-조경희 회장/ ’97 <한글 문학> 소설 신인상-서울대 구인환 교수/ 지은 책 16권/ 오케스트라 협연 3회)
재작년 11월 10일 부산 어머니 오케스트라의 삼랑진 오순절 평화의 마을 공연 때 겁도 없이 내가 부른 노래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였다. 그것도 주로 지적(知的) 장애인인 3백 명 앞에서였으니 글쎄 그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나는 가끔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라며 스스로 추켜세우는 데 반해, 남들은 개발에 편자 아니냐고 손가락질하기 예사이리라. 아니 난센스라 폄하한들 내가 뭐라 할 것인가?
현장에서의 반응은 약간 뜨거웠다고 해도 괜찮았다고 확신한다. 장애 가족들은 안면 보고 내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입장이니까.
작년 봄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서면 영광 도서 문화 사랑방에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선보일 기회가 있었다. 어느 시 낭송 행사에 곁방석을 깐 셈이다. 음악을 아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니, 나더러 기역자 왼다리도 못 그린다며 수군대었을지 모를 일이고.
11월 말, 가톨릭 문협 시상식 무대에 나는 ‘10월의 어느…’를 들고 다시 서게 된다. 상을 받는 사람 둘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고 싶어서였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악보를 보고서도 엉망일 정도였다. 무턱대고 한번 부딪쳐 보자는 심산, 그걸로 버텨냈다고나 하자.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날이면 날마다 노래와 더불어 살되 거의 대중가요(그것도 흘러간 옛 노래)를 입에 달고 있는 처지라-잠들어서도 그런다-‘10월의 어느…’는 가끔씩 혼자서도 흥얼거리는 정도였다. 무슨 시 낭송회 같은 데서도 어찌된 영문인지 내게 손짓을 해 주지 않더라. 외압?, 뭐 그게 전혀 근거가 없는 게 아니겠지만 설마 그럴 리야 있나. 착각이겠지. 어쨌든 내가 되레 옳다구나 싶어 포기한 게 정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줄이야. ‘가거라 삼팔선아’며 ‘삼팔선의 봄’ 등 삼팔선 시리즈로 조갑제 기자 강연장인 부산 일보 대강당 무대에 서서 4백 명 원로들 앞에서 열창하는 ‘고정 출연자’가 되었으니…….
그런데 신묘년 벽두부터 내게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청한 팬(?)이 있었으니, 바로 외손자 종빈이다. 자세히 들어 보니 독창이 아니다. 제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학예 발표회를 여는데, 장기 자랑 프로가 있으니 거기 우리 가족 넷이 제창을 하자는 것이다. 아마 제 할미와 사전에 의논이 되었던 모양으로, 녀석은 노래 전에 바이올린 연주도 하겠단다.
바이올린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제 만 여섯 살 되는 녀석이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른다? 나도 정확하게 익히지 못했는데…….나는 적이 걱정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한 달 후면 우리 곁을 떠나 제 어미 아비한테 갈 녀석의 기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부랴부랴 악보와 키보드를 빌릴 수밖에.
부분 2부 중창이다. 일자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으니 빠듯하지만, 한번 연습을 해 볼까 했다.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안 되겠다는 눈치다. 내가 소프라노, 종빈이와 제 어미(곧 내려온댔으니까), 아내 등 셋이서 알토 파트를 맡아, 가족들이 넷이 모이면 어디서든 4부 중창도 가능하다는 이태리 이야기를 재현시켜 보고 싶었던 꿈은 그래서 막을 내린다.
그런데 나 참, 이번에 희한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종빈이 녀석이 ‘10월의…’에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 것이다. 하기야 멋도 모르니 용감하기야 하겠지만, 키보드로 첫 음만 잡아 주면 거리낌 없이 노래가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끝내 우리가 녀석을 따라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최고로 높은 음이 ‘레’인데 녀석은 잘도 넘긴다. 물론 내가 짬짬이 흥얼거린 덕분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녀석의 머릿속에 어느 새 멜로디가 입력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틀린 부분은 모두 내 책임 아니고 무언가. 나는 허허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녀석의 팬이라는 게 맞는 말이겠다.
그렇게 극성을 떤 끝에 우리 가족이 스무 네 번 째 프로그램, 피날레를 장식하게 되었다. 녀석은 용감하였다. 솔로를 이어나가는데 음정이며 박자가 덜 맞긴 하지만 걱정스런 정도는 아니다. 내가 이어 받았다. 가끔 두려워져 지난 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가끔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옆에 있는 너를 기도해/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마지막은 다 같이 장식할 수밖에.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아아아/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건 없을 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문자 그대로 대단원의 막은 그렇게 내렸다. 우레와 같지는 않았지만 거기 버금가는 박수 소리가 안겨 주던 감격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아니 나는 오히려 지금 이 ‘역사적인’ 노래에 더 빠져 있다. 바깥에 나갈 때는 웬만하면 악보를 집어 든다. 근래 교육청이며 세무서 은행, 새마을 금고에 다녀왔는데, 순번을 기다리는 시간 그걸 펼쳐놓고 계명창을 나지막이 한다.미파솔도솔파 레미파레파미 도레미도라솔피솔…(눈을 감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오른손으로 6/8박자 지휘까지 해가면서 삼매경. 문득 사범학교 시절 엄마와 아버지와 함께 논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면서 콜위붕겐 즉 시창에 열중하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내 죽음의 수렁에서 스스로를 건지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도 그래서 다시 한 번 갖는다. 노래가 날 살렸다는 사실 차원에서의 강조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참 좋다. 나는 한 번도 그 드라마를 보지 못했어도, 시크릿 세레나데의 주제 음악이라 했던가? 세레나데라니 소야곡이다. 즉 밤에 애인의 집 창가에서 부르거나 연주하는 사랑의 노래! 내가 대중가요에 사족을 못 쓰는 위인이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퍼뜩 떠오른 게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따위다. 그렇듯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근처에도 못 가는 내가 ‘10월의 어느……’과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 무슨 억하심정(?)에서일까?
나는 이 순간에도 악보를 앞에 놓아 놓고 있다. 아침부터 망건 쓰고 세수한다는 비웃음을 살지언정, 애인이 있을 턱이 없는 이 나이에 차라리 아직도 서로 앙금이 남아 있는 친구와 이걸 듀엣으로 한번 불러 본다? 참 파격일 것 같다. 우리 주님도 내게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으니. 나아가 종교가 달라 서로 맞서 있는 어느 신앙인과 어울리면 어떨까 싶기도 하고. 그 화합도 참 멋질 것 같다.
또 진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팔을 걷어 올린다. 네 번째 ‘10월의 어느…’는 어느덧 막을 내렸으니, 다음 차례는 숙명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17장 / 2011년 1월 12일 오후
첫댓글 애지중지 키운 손자가 가고 나면 한동안 서운하시겠습니다. 늘 좋은 글 올려 주셔서 생활에 힘을 얻습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은 성가대에서 특송으로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심 선생님, 언제나 감사합니다. 정말 시원찮은 글을 읽어 주신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잖아도 손자는 올라가야 하고, 그 뒤의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까 걱정입니다. 제가 더 충격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근래에는 제가 안고 자는데요. 아내가 오르내려야지요. 말하자면 두 집 살림입니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찾아 헤매던 노래를 오늘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기뻐 날뛰는 중입니다. 수백 명에게 물어도 곡목을 몰랐고, 노래방 기기에도 없었으며 가요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산마도르스/ 김용만 노래/// 쌍고동 울어다오 징소리도 울어다오/ 오륙도 돌아서면 태평야 항로--아직 악보를 찾지 못했지만 제가 노래하며 기보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