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절망서 진리 찾으려 절규 동거생활 등 인간적 욕망 추구 하느님 발견으로 참 자아 찾아
『주여, 언제까지나? 주여, 끝내 진노하시려나이까? 행여 우리 옛 죄악을 기억치 마옵소서.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이옵니까? 지금은 왜 아니랍니까? 어찌하여 내 더러움이 지금 당장 끝나지 않나이까?』(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중에서). 죄 많은 인간, 하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절규이다.
육체적 욕망, 거짓된 사랑, 유한한 「지혜」에 대한 열정으로 젊은 날을 보낸 뒤, 아우구스티노는 막다른 길에서 그렇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참된 진리를 찾았고, 그 감격과 희열을 또 이렇게 표현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고백록 중에서). 우리에게 낯익은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주는 감흥을 훌쩍 넘어서는 이 고백은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절망 속으로부터, 급기야 참 진리를 찾고, 참 행복과 사랑을 발견한 한 위대한 성인의 환희를 담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 당시의 모든 영적 보화를 한 몸에 지닌 듯한 느낌을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준다. 성인이자 히포(Hippo)의 주교이며 교회 학자로서 서방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아우구스티노를 두고 독일의 교부학자 알타너(B. Altaner)는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테르툴리아노의 창조적 정열, 오리제네스의 영적 풍부함, 치프리아노의 교회적 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논리를 플라톤의 높은 이상주의와 사변에 결합시켰다. 그리고 라틴인의 실용적 감각을 그리스인의 영적 유연성에 일치시켰다』 그래서 그는 교부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며 전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오리제네스에 필적할 만큼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 저서들은 자아 인식에서 시작해 존재와 진리, 사랑, 하느님 인식의 가능성, 인간 본성, 영원성, 시간, 자유, 악, 섭리, 역사, 행복, 정의, 평화 등 철학의 주요한 주제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철학자, 신학자, 신비가, 시인, 논박가, 저술가, 목자, 그리고 수도자라는 모든 명칭이 두루 훌륭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천재성과 현대 교회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는 학문적, 영성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에게 깊은 매력을 주는 것 중의 하나는 스스로 고백록에서 이야기하듯 죄 많은 인간이 하느님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참 모습을 찾고 참 행복을 느끼게 되는 장면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로마 제국에 속해있던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타카스테(지금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교도였지만 열심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영향으로 그는 그리스도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은인의 도움으로 북아프리카의 수도였던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계속하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아우구스티노는 부끄러운 사랑을 꽃피운다. 떳떳하지 않은 동거생활이 14년 동안이나 계속됐고 그는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얻기도 한다. 18살 때 그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지혜에 대한 사랑」(철학)에 빠지고 진리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기 시작한다. 부친의 사망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카르타고에서 돌아와 수사학 학교를 차렸고 다시 카르타고로 가서 9년 동안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마니교에 기울어지기도 했는데, 그 어설픈 교리와 지도자들에게 실망해 떠나온다. 384년 암브로시오가 주교로 있던 밀라노에 가서 수사학을 가르치던 아우구스티노는 여기에서 자신의 일생을 결정짓는 회심의 순간을 맞게 된다.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 주교의 강연을 들으면서 성서의 참뜻과 그리스도교 진리를 조금씩 깨우치던 그는 어느날 안토니오 성인과 여러 은수자들의 삶에 대해 듣고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괴로워 무화과 나무 밑에서 홀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하는 노래소리를 듣고 방으로 달려가 성서를 펼쳐 바오로의 서간들을 읽었다. 『포식과 폭음,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새움을 멀리합시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 그리고 욕정을 만족시키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는 로마서의 말씀에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387년 부활성야에 밀라노 대성당에서 암브로시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고향집에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이후 크게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그는 우연히 히포를 방문하게 됐고 여기서 그를 알아본 시민들에 의해 발레리우스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것이 그의 나이 37살의 일이었다. 397년 히포의 주교가 된 그는 참된 사목자이며 탁월한 사상가로서 뜨거운 복음적 열정으로 주교로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엄청난 양의 저서를 저술했다.
<== 아우구스티노의 저술들은 엄청나다. 그중에서도 방황을 거쳐 하느님 안에서 참 평화를 얻기까지 자신의 신앙을 묘사한 「고백론」이 친근하다.
평생 이단맞서 정통교리 수호 마니교 지도자와 토론, 개종시켜 삼위일체론 고백론 등 저술 왕성
아우구스티노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몇 가지 이단 논쟁이 교회를 휩쓸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이단들과의 논쟁에 맞서서 정통 교리를 수호함으로써 당대의 아프리카 교회와 서방교회, 더 나아가 세계교회 안에서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다. 그가 히포의 주교로서 생애에 걸쳐 맞선 논쟁은 크게 네 가지이다. 가장 먼저 자신이 몸을 담고 기웃거렸던 마니교 논박은 그가 사제 시절부터 399년까지 주력했던 이단 논쟁이었다. 마니교는 영지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극단적인 이원론을 주장했다. 그들은 세상이 선과 악의 원리가 맞서 있으며, 선악의 잔혹한 싸움터가 바로 이 세상이라고 했다. 이는 『과연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Unde Malum)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풀리지 않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9년 동안이나 마니교도로 지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만큼 마니교에 대해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었다. 특히 398년 12월 7일 히포의 성당에서 마니교 지도자인 펠릭스와 벌인 토론에서 그를 승복시키고 개종시킨 이야기는 유명하다.
두 번째 논쟁은 도나투스주의에 대한 것이다. 당시 아우구스티노가 주교로 있던 히포는 이미 도나투스주의자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거룩하고 순결한 교회」, 가톨릭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라고 주장했다. 히포에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교리적 논쟁에 더해 민족주의적 요소를 가미해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들이 정통 교회로 돌아오도록 쉼없이 설득하고 논박했으나 이들의 폭력 행위가 심화되면서 점차 공권력의 개입을 정당시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저술과 강연, 공개 토론 등을 통해 도나투스주의의 허구를 지적하고 정통 가톨릭 신앙과 교리를 확인해나갔고 411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공개 토론회에서 가톨릭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도나투스주의는 막을 내린다.
세 번째는 펠라지우스주의와 벌어졌다. 펠라지우스는 아일랜드에서 로마로 건너 온 금욕적 수도자로서 느슨해진 신앙생활에 반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결국 은총의 역할을 최소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자신의 회심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깊은 영적 체험으로 여기던 아우구스티노에게 이러한 주장은 충격이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20여년 동안 그는 펠라지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의 와중에서 인간의 욕정, 홀로 내버려진 인간의 비참함, 예정과 은총에 대한 교의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작품을 썼다. 마지막 논쟁은 아리우스주의와의 논쟁이다. 생애 마지막 10여년을 이들과의 논쟁에 개입하면서 보냈던 그는 자신의 신학저서 중에서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근 20여년에 걸쳐 저술했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술들은 엄청나다. 그의 전기를 쓴 포시디오(Possidius)는 그의 저서명을 모두 1030개나 열거했다.
아우구스티노가 자신의 저서 「재론고」에서 열거한 것은 93개로 이는 강론과 서간들을 모두 제외한 것이다.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친근한 것은 아마도 「고백록」(Confessiones, 397~401)일 것이다. 오랜 방황을 거쳐 하느님 안에서 참 평화를 얻기까지 자신의 종교적 발전과 신앙을 영혼 깊숙이 묘사한 「고백록」은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찬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고백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론」은 오랜 묵상을 통해 무르익었고, 한때 중단됐다가 다시 작업을 한 저서이다. 「고백록」을 반영하며 신학과 신비주의의 경계에 자리잡은 이 저서는 아우구스티노 자신이 고백하듯 『원기왕성한 나이에 시작해서 늙어서야 그 끝을 보았다』고 할 만큼 오랜 세월, 엄청난 노력과 정성이 깃들인 작품이다. 교의신학 분야에서 최고의 걸작이자 삼위일체에 관한 교부시대의 신학을 총괄하고 완성시킨 작품으로 이후 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저서는 삼위일체에 관한 성서적 논거를 제시한 제4권까지에 이어 5권부터 7권까지는 사변 신학적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의 정식(定式)을 설명한다. 제8권에서는 하느님에 관한 신비신학을 도입했고 이후 14권까지는 인간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모상을 찾았으며 제15권에서는 모든 내용을 요약, 보완했다. 모든 역사의 전환점에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지난 역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신국론」(De civitate Dei, 413~427)이다. 400여개 이상의 필사본을 만들어낸 신국론은 인간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한 방대한 역사 신학서이자 호교론적 저서로서, 지상의 도시와 천상의 도시를 드러내면서 선과 악, 신앙과 불신앙의 갈등과 싸움으로서 인간 역사와 그 현실을 성찰한다. 그는 지상 도시는 천상 도시의 예형이며, 이는 결국 지상의 순례자들을 위해 현세의 지평선에 걸쳐진 천상 도시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여러분 고향의 사랑 노래를 부르시오.
깊은 절망서 진리 찾으려 절규 동거생활 등 인간적 욕망 추구 하느님 발견으로 참 자아 찾아
『주여, 언제까지나? 주여, 끝내 진노하시려나이까? 행여 우리 옛 죄악을 기억치 마옵소서.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이옵니까? 지금은 왜 아니랍니까? 어찌하여 내 더러움이 지금 당장 끝나지 않나이까?』(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 중에서). 죄 많은 인간, 하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의 절규이다.
육체적 욕망, 거짓된 사랑, 유한한 「지혜」에 대한 열정으로 젊은 날을 보낸 뒤, 아우구스티노는 막다른 길에서 그렇게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자신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참된 진리를 찾았고, 그 감격과 희열을 또 이렇게 표현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번 만지시매 위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고백록 중에서). 우리에게 낯익은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주는 감흥을 훌쩍 넘어서는 이 고백은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절망 속으로부터, 급기야 참 진리를 찾고, 참 행복과 사랑을 발견한 한 위대한 성인의 환희를 담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 당시의 모든 영적 보화를 한 몸에 지닌 듯한 느낌을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준다. 성인이자 히포(Hippo)의 주교이며 교회 학자로서 서방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아우구스티노를 두고 독일의 교부학자 알타너(B. Altaner)는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주교 아우구스티노는 테르툴리아노의 창조적 정열, 오리제네스의 영적 풍부함, 치프리아노의 교회적 의식, 아리스토텔레스의 예리한 논리를 플라톤의 높은 이상주의와 사변에 결합시켰다. 그리고 라틴인의 실용적 감각을 그리스인의 영적 유연성에 일치시켰다』 그래서 그는 교부 시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며 전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오리제네스에 필적할 만큼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 저서들은 자아 인식에서 시작해 존재와 진리, 사랑, 하느님 인식의 가능성, 인간 본성, 영원성, 시간, 자유, 악, 섭리, 역사, 행복, 정의, 평화 등 철학의 주요한 주제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학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철학자, 신학자, 신비가, 시인, 논박가, 저술가, 목자, 그리고 수도자라는 모든 명칭이 두루 훌륭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이러한 천재성과 현대 교회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는 학문적, 영성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에게 깊은 매력을 주는 것 중의 하나는 스스로 고백록에서 이야기하듯 죄 많은 인간이 하느님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참 모습을 찾고 참 행복을 느끼게 되는 장면이다. 아우구스티노는 로마 제국에 속해있던 북아프리카의 작은 도시 타카스테(지금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교도였지만 열심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영향으로 그는 그리스도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했던 그는 은인의 도움으로 북아프리카의 수도였던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계속하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아우구스티노는 부끄러운 사랑을 꽃피운다. 떳떳하지 않은 동거생활이 14년 동안이나 계속됐고 그는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얻기도 한다. 18살 때 그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읽고 「지혜에 대한 사랑」(철학)에 빠지고 진리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기 시작한다. 부친의 사망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카르타고에서 돌아와 수사학 학교를 차렸고 다시 카르타고로 가서 9년 동안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마니교에 기울어지기도 했는데, 그 어설픈 교리와 지도자들에게 실망해 떠나온다. 384년 암브로시오가 주교로 있던 밀라노에 가서 수사학을 가르치던 아우구스티노는 여기에서 자신의 일생을 결정짓는 회심의 순간을 맞게 된다.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 주교의 강연을 들으면서 성서의 참뜻과 그리스도교 진리를 조금씩 깨우치던 그는 어느날 안토니오 성인과 여러 은수자들의 삶에 대해 듣고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괴로워 무화과 나무 밑에서 홀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하는 노래소리를 듣고 방으로 달려가 성서를 펼쳐 바오로의 서간들을 읽었다. 『포식과 폭음,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새움을 멀리합시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 그리고 욕정을 만족시키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라는 로마서의 말씀에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방황을 끝내고 마침내 387년 부활성야에 밀라노 대성당에서 암브로시오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고향집에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이후 크게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그는 우연히 히포를 방문하게 됐고 여기서 그를 알아본 시민들에 의해 발레리우스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것이 그의 나이 37살의 일이었다. 397년 히포의 주교가 된 그는 참된 사목자이며 탁월한 사상가로서 뜨거운 복음적 열정으로 주교로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엄청난 양의 저서를 저술했다.
<== 아우구스티노의 저술들은 엄청나다. 그중에서도 방황을 거쳐 하느님 안에서 참 평화를 얻기까지 자신의 신앙을 묘사한 「고백론」이 친근하다.
평생 이단맞서 정통교리 수호 마니교 지도자와 토론, 개종시켜 삼위일체론 고백론 등 저술 왕성
아우구스티노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몇 가지 이단 논쟁이 교회를 휩쓸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러한 이단들과의 논쟁에 맞서서 정통 교리를 수호함으로써 당대의 아프리카 교회와 서방교회, 더 나아가 세계교회 안에서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이는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 신학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다. 그가 히포의 주교로서 생애에 걸쳐 맞선 논쟁은 크게 네 가지이다. 가장 먼저 자신이 몸을 담고 기웃거렸던 마니교 논박은 그가 사제 시절부터 399년까지 주력했던 이단 논쟁이었다. 마니교는 영지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극단적인 이원론을 주장했다. 그들은 세상이 선과 악의 원리가 맞서 있으며, 선악의 잔혹한 싸움터가 바로 이 세상이라고 했다. 이는 『과연 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Unde Malum)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풀리지 않는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9년 동안이나 마니교도로 지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몸담았던 만큼 마니교에 대해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논박할 수 있었다. 특히 398년 12월 7일 히포의 성당에서 마니교 지도자인 펠릭스와 벌인 토론에서 그를 승복시키고 개종시킨 이야기는 유명하다.
두 번째 논쟁은 도나투스주의에 대한 것이다. 당시 아우구스티노가 주교로 있던 히포는 이미 도나투스주의자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거룩하고 순결한 교회」, 가톨릭 교회는 「죄인들의 교회」라고 주장했다. 히포에서 도나투스주의자들은 교리적 논쟁에 더해 민족주의적 요소를 가미해 사태는 더욱 심각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들이 정통 교회로 돌아오도록 쉼없이 설득하고 논박했으나 이들의 폭력 행위가 심화되면서 점차 공권력의 개입을 정당시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저술과 강연, 공개 토론 등을 통해 도나투스주의의 허구를 지적하고 정통 가톨릭 신앙과 교리를 확인해나갔고 411년 카르타고에서 열린 공개 토론회에서 가톨릭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도나투스주의는 막을 내린다.
세 번째는 펠라지우스주의와 벌어졌다. 펠라지우스는 아일랜드에서 로마로 건너 온 금욕적 수도자로서 느슨해진 신앙생활에 반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결국 은총의 역할을 최소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 자신의 회심을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깊은 영적 체험으로 여기던 아우구스티노에게 이러한 주장은 충격이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20여년 동안 그는 펠라지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의 와중에서 인간의 욕정, 홀로 내버려진 인간의 비참함, 예정과 은총에 대한 교의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작품을 썼다. 마지막 논쟁은 아리우스주의와의 논쟁이다. 생애 마지막 10여년을 이들과의 논쟁에 개입하면서 보냈던 그는 자신의 신학저서 중에서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근 20여년에 걸쳐 저술했다. 아우구스티노의 저술들은 엄청나다. 그의 전기를 쓴 포시디오(Possidius)는 그의 저서명을 모두 1030개나 열거했다.
아우구스티노가 자신의 저서 「재론고」에서 열거한 것은 93개로 이는 강론과 서간들을 모두 제외한 것이다.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친근한 것은 아마도 「고백록」(Confessiones, 397~401)일 것이다. 오랜 방황을 거쳐 하느님 안에서 참 평화를 얻기까지 자신의 종교적 발전과 신앙을 영혼 깊숙이 묘사한 「고백록」은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찬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고백한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론」은 오랜 묵상을 통해 무르익었고, 한때 중단됐다가 다시 작업을 한 저서이다. 「고백록」을 반영하며 신학과 신비주의의 경계에 자리잡은 이 저서는 아우구스티노 자신이 고백하듯 『원기왕성한 나이에 시작해서 늙어서야 그 끝을 보았다』고 할 만큼 오랜 세월, 엄청난 노력과 정성이 깃들인 작품이다. 교의신학 분야에서 최고의 걸작이자 삼위일체에 관한 교부시대의 신학을 총괄하고 완성시킨 작품으로 이후 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저서는 삼위일체에 관한 성서적 논거를 제시한 제4권까지에 이어 5권부터 7권까지는 사변 신학적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의 정식(定式)을 설명한다. 제8권에서는 하느님에 관한 신비신학을 도입했고 이후 14권까지는 인간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모상을 찾았으며 제15권에서는 모든 내용을 요약, 보완했다. 모든 역사의 전환점에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지난 역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신국론」(De civitate Dei, 413~427)이다. 400여개 이상의 필사본을 만들어낸 신국론은 인간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옹호한 방대한 역사 신학서이자 호교론적 저서로서, 지상의 도시와 천상의 도시를 드러내면서 선과 악, 신앙과 불신앙의 갈등과 싸움으로서 인간 역사와 그 현실을 성찰한다. 그는 지상 도시는 천상 도시의 예형이며, 이는 결국 지상의 순례자들을 위해 현세의 지평선에 걸쳐진 천상 도시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여러분 고향의 사랑 노래를 부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