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지구를 착취하는 경제에서, 지구와 함께 사는 경제로 ㅡ'지대본위화폐' 시대를 열자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AI동료들
화폐는 무엇을 담보로 삼는가. 이 오래된 질문은 지금도 문명의 방향을 가르는 핵심 물음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피아트화폐는 국가의 신용, 곧 정부의 조세권과 강제통용력을 바탕으로 발행된다. 새롭게 부상한 블록체인 기반 화폐는 탈중앙화된 합의와 네트워크의 검증 체계를 신뢰의 원천으로 내세운다. 둘은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실물의 사용가치보다는 무형의 신뢰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 신뢰가 눈에 보이지 않는 만큼 흔들리기 쉽고, 때로는 정치와 금융, 기술 권력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신뢰 위에서 현대 경제는 오랫동안 지구의 토지와 자원을 사실상의 담보처럼 활용해 부를 축적해왔다. 특히 부동산담보대출은 토지의 소유가치를 근거로 신용을 창출해왔다. 미래의 금리와 성장률, 개발 기대를 현재 가치로 끌어와 가격을 부풀리고, 그 가격이 다시 추가 대출의 근거가 되는 구조가 반복되어온 것이다. 그 결과 오늘의 화폐 질서는 생산과 생활의 기반인 지구와 공존하기보다는, 지구의 가치를 앞당겨 소비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해온 측면이 있다.
지대의 두 얼굴
토지에는 서로 구별해야 할 두 가지 가치가 있다. 하나는 사용가치다. 땅이 실제로 생산과 거주, 이동과 교류를 가능하게 하며 공동체 속에서 창출하는 가치, 다시 말해 토지 사용권에 대해 사회가 지불하는 경제적 몫이 바로 지대(地代)다. 다른 하나는 소유가치다. 이는 미래의 지대, 금리, 성장률, 개발 기대를 현재가치로 환산한 가격이다.
문제는 후자가 오늘날 금융의 중심축이 되었다는 데 있다. 소유가치는 본질적으로 기대에 민감하다.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가격을 올리고, 오른 가격이 다시 대출을 부르고, 그 대출이 다시 가격 상승을 자극하는 자기강화적 순환이 만들어진다. 이때 화폐 창출의 근거가 되는 것은 실물의 안정된 사용가치라기보다 미래에 대한 낙관과 투기적 기대다. 금융이 생산을 돕는 수준을 넘어 자산가격 상승 자체에 의존하게 될 때, 경제는 불안정해지고 불평등은 심화되기 쉽다.
이 지점에서 토지를 자본과 같은 범주로만 다뤄온 주류 경제학의 한계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 이후 토지는 점차 자본의 한 형태로 포섭되었고, 공급이 고정돼 있으며 위치와 공동체의 발전에 따라 가치가 형성되는 토지의 특수성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헨리 조지에서 매슨 개프니, 프레드 해리슨, 마이클 허드슨, 스티브 킨에 이르는 문제제기는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물론 학계 전체를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토지와 금융의 결합이 자산 불평등과 경기 순환의 핵심 변수라는 사실은 더 진지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정책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나라에서 부동산담보대출은 금융시스템의 뼈대가 되었고, 자산가격 조정은 정치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었다. 그 결과 문제를 알면서도 근본 처방을 미루는 구조가 고착돼 왔다. 지금 필요한 것은 토지의 소유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 곧 지대를 화폐와 금융의 기준으로 다시 사유하려는 전환적 상상력이다.
AI 시대, 실물에 닻을 내리는 화폐
여기에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더해지고 있다. AI가 발전할수록 금융시장과 정보 환경의 변동성은 더 커질 수 있다. 초고속 알고리즘 거래는 가격 신호를 증폭시키고, 정교한 정보 조작은 정책 신뢰를 흔들 수 있다. 중앙은행의 신호든, 탈중앙 네트워크의 합의든, 무형의 신뢰에 크게 의존하는 체계일수록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더 민감하게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앞으로의 화폐는 기술적 정교함만이 아니라 실물의 사용가치에 닻을 내리는 장치를 필요로 한다. 지대는 완전히 조작 불가능한 지표는 아니지만, 적어도 단일한 정치 권력이나 특정 금융 주체가 임의로 만들어낼 수 있는 숫자와는 다르다. 광범위한 토지 이용, 임대료, 생산 활동, 인구와 인프라의 분포가 함께 반영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왜곡하려면 훨씬 더 큰 비용과 광범위한 개입이 필요하다. 바로 이 점에서 지대는 화폐가치의 한 축을 떠받칠 수 있는 실물적 앵커가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지대본위화폐가 장부의 정확성까지 저절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블록체인 기술은 오히려 보완재가 될 수 있다. 블록체인이 거래 기록과 등기의 무결성을 담보하고, 지대본위 구상이 그 기록이 가리키는 실물적 의미를 붙잡는다면, 디지털 검증과 실물 앵커링이 결합된 새로운 통화 질서를 상상해볼 수 있다.
지구를 담보 잡던 화폐에서, 지구와 함께 사는 화폐로
이 발상을 지구 전체로 확장하면 어떨까. 케인스가 브레튼우즈 체제 구상 과정에서 제안했던 방코르(Bancor), 그리고 오늘의 IMF 특별인출권(SDR)은 모두 특정 국가의 통화에만 의존하지 않는 제3의 국제적 화폐 단위를 상상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선례다. 다만 그 담보와 기능은 제한적이었다. 방코르는 국제청산의 질서를 겨냥한 구상이었고, SDR은 회원국 통화 바스켓에 기초한 국제 준비자산이다. 어느 것도 지구의 토지와 생태적 사용가치를 화폐의 근거로 삼지는 않았다.
지대본위화폐를 지구 단위로 확장한다는 것은, 화폐의 기준을 특정 국가의 권력이나 단일 통화의 패권에서만 찾지 않고, 인류가 공동으로 의존하는 지구의 사용가치에서 일부 찾자는 제안이다. 이는 단순한 금융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법과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구를 법적·정치적 고려의 중심에 두는 지구법학, 행성적 공공성, 새로운 형태의 국제 거버넌스가 함께 논의되어야 비로소 완결될 수 있는 구상이다.
필자는 이 화폐에 ‘환(環, Hwan)’이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다. 순환하고, 회복하고, 연대하는 고리라는 뜻이다. 남북 연합의 단계에서는 북의 지대와 남의 보유세 기반을 함께 고려하는 제3의 매개 화폐로 제시한 바 있다. 몇달전 글을 소개한다.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577
필자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구촌 차원에서는 착취가 아닌 공생의 질서를 지향하는 화폐를 상상한다.
처음부터 기존 국가통화를 대체하는 방식이 아니라, 국제 청산, 생태 전환 투자, 공공 배당 같은 제한된 영역에서 단계적으로 실험하는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화폐는 단지 교환의 도구가 아니다. 무엇을 가치의 근거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의 집단적 선택이다. 지난 세기 화폐가 성장과 팽창, 자산가격 상승의 논리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었다면, 앞으로의 화폐는 사용가치와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더 깊이 반영해야 한다. 지구를 끝없이 담보 잡아 부를 쌓는 경제에서, 지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경제로 옮겨가기 위해서다.
지대본위화폐는 아직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제기이자 방향 제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있다. 이제는 화폐를 다시 묻고, 토지를 다시 생각하며, 경제를 생태와 공동체의 질서 위에 재정렬할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대본위화폐의 시대를 논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