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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주김씨중앙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근학/36세
敬順大王 春季陵享大祭 新羅紀元 2067年 庚寅(西紀 2010年) 5月 2日 (陰 3月 19日) 日曜日 11時 (每年 5月 첫째 日曜日 奉行) 主催 : 新羅金氏聯合大宗院 主管 : 羅州金氏中央宗親會 |
만물이 약동하고 백화난만한 희망의 푸른 계절, 계절의 여왕인 5월의 첫째 일요일인 2010년 경인년 5월 2일 11:00에 천년 신라의 마지막 56대 경순대왕께서 승하하신지 1032주년을 추모하는 춘계릉향대제를 사적 244호인 경순왕릉에서 600여명의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신라 김씨 연합 대종원(총재 부안 후인 김수길)에서 주최하고 대왕님의 季子(죽방왕후) 즉 2자인 湟王子, 범공선사, 의영공의 장남인 羅州君, 門下侍中 雲發공을 관조로 하는 나주김씨 중앙 종친회(회장 대왕 38세손 김근학)주관으로 엄숙하고 장중하게 성황리에 봉행 하였다.
대제의 봉행은 1천만을 헤아리는 신라 김씨 후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행사이므로 대종원에서는 총제단 및 제례 위원회를 수시로 개최하고 ‘경순대왕 제례 위원회(위원장, 나주인 김근학)를 별도로 구성하여 대제 준비에 철저를 기하도록 하였다.
제례 위원회에서는 대제를 직접 봉행하는 헌집 분정을 아래 분정기와 같이 확정하고 대제의 원만한 봉행을 지원하는 대제위원회를 구성 하였다. 이번 능향대제를 맡은 나주김씨 종친회에서는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등 3헌관은 물론 대축관, 전사관등 거의 모든 제례 참사자들의 헌집을 분정한 이외에 청장년회(회장34세 원길)와 부녀회(회장34세 안웅의 처 이순자)에서 대제 진행시의 안내, 질서 유지 사진 및 비디오 촬영, 중식 및 제물 분배등 뒤처리를 맡아 대제가 모범적으로 원만히 마칠 수 있도록 준비 하였다.
대제 당일 직전에 대제위원장인 신라김씨 연합 대종원 총재겸 (사)신라 문화 보존회 이사장인 김수길 위원장의 “대제를 모시는 감회와 후손간의 화합을 다지자”는 인사말에 이어, 제례 위원장인 나주김씨 종친회장의 “대왕의 경천순민의 은근한 대의를 기리고 자손들의 번성을 기원 하자”는 요지의 인사말에 이어 전사관을 맡은
明熙나주김씨 중앙 종친회 수석 부회장의 헌집 분정의 창방을 시작으로 대제는 시작되어 은은한 주악속에 헌관들의 분향과 헌작, 대축관의 독축, 참여자들의 배례, 음복례, 망료제 등의 순서로 대제를 마치게 되었다.
대왕의 춘계릉향대제의 봉행을 계기로 선조님들의 祭香을 봉행하는 의미를 음미해 보면 제향은 조상과 자손이 서로 만나서 소통하고 교감하며 조상님들의 높은 덕과 뜻을 기리고 선양하며, 자손간의 정의를 돈돈히 하고 나누며 안부를 묻고 화목을 돈후하게 하며 내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시에 자손들의 번성과 영달을 기원하고 재앙을 예방하기 위하여 원시 씨족사회로부터 조상의 영혼을 지성으로 모시던 것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중요한 전통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번에 대왕님의 대제를 봉행하면서 나주김씨의 선시조인 신라김씨의 천년 역사를 회고해 보면 BC57년 건국한 신라는 朴, 昔, 金 삼성이 왕위를 계승하고 천년을 연면히 이어오며 삼국을 통일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만세 융성할 배달의 터전을 다졌지만 935년 신라 56대 마지막 대왕이신 경순왕대에 이르러 민심이 떠나고 천명이 다하여 더 이상 국가를 존속 유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대왕께서는 무수한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번민과 고뇌를 되뇌고 되뇌며 ‘무고한 백성과 생령들을 전쟁의 참화와 질곡에서 구하고 보전하자’는 가없이 은근하고 인자한 경천순민의 대의를 따르시어 마침내 천년사직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손양하는 세기적 결단을 내리시게 되었다.
이 때 태자 鎰(일)과 季子湟(계자황)은 “어찌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남에게 줄 수 있는가"라고 불가함을 극간 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자 통곡하며 태자는 모후 죽방부인과 왕자빈과 두 아들을 데리고(率妻子 솔처자) 금강산에 입산하여 속세와 절연하고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 초식으로 종신하시니 이분이 지금도 우리 후손의 심금을 비통하게 울리고 그 절의와 기개 때문에 만백성이 우러러 보고 있고
칭송하고 있는 마의태자 이며, 季子는 충절과 의열로 고려 태조가 제수한 평장사를 사작불수(賜爵不授)하고 왕자빈과 두 아들을 속세에 두고(棄妻子 기처자) 부왕의 영정을 그려 모시고 가야산 법수사에 영사입산(永辭入山)하여 참회와 발원을 하시다 종신하시니 고려 조정에서는 湟왕자의 아름답고 거룩한 행적과 덕망을 기려 懿英公(의영공)의 시호를 중시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건국한지 992년 만에 종언을 고하고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지게 되었다.
이 해 11월에 대왕께서는 백관을 거느리고 香車(향거)와 寶馬(보마)를 지참하고 개경에 이르니 고려 태조가 교외까지 나가 영접하여 위로하고 궁동쪽에 있는 정승원을 주고 장녀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하고 정승에 봉하니 그 위치가 태자보다 높았고 1천석의 녹을 지급 하였다.
대왕의 부인과 자녀를 살펴보면 슬하에 9형제 4자매를 두셨는데 신라김씨에서 공통으로 정리한 내용을 보면 죽방왕비 박씨와의 사이에 태자 鎰과 계자 湟, 3남 鳴鐘(명종, 경주군), 덕주공주등 3남 1녀가 있고 고려 태조 장녀인 낙랑공주와의 사이에 4자 殷說(은열, 대안군 경주김씨 ), 5자 重錫(중석, 의성군), 6자 鍵(건, 강릉군), 7자 鐥(선, 언양군), 8자 錘(추, 삼척군)등 5형제 3자매가 있고 별빈 安(안)씨 소생인 德摯(덕지, 학성군)까지 포함하면 9형제 4자매를 두셨다.
대왕의 9형제 중에서 태자와 계자를 제외한 7형제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봉군되고 신라김씨계 관조가 되었다.
태자는 솔처자하고 개골선으로 입산하여 세상과 절연하였기 때문에 태자 鎰은 물론 그의 소생들이 봉군되거나 사작 또는 출사 하였다는 기록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季子湟(황) 왕자의 경우는 기처자 하고 고려 태조가 제수한 평장사를 받지 않으시고(사작불수) 가야산에 영사입산하여 범공선사가 되었으나 천명이 이미 고려에 있음을 활연히 인식하고 雲發(운발), 雨發(우발) 두 아드님을 출사시켜 장남 운발은 나주군에 책봉되어 나주김씨 관조가 되었고 작은 아들 우발은 경주군으로 책봉 되어 경주김씨 선계가 되게 함으로서 신라 천년사직에 대한 절의를 지키면서 현실을 존중한 매우 사려 깊고 분별력 있는 선택을하였다.
대왕께서는 손국하신지 43년 만인 978년 4월 4일에 승하 하시어 경기도 연천군에 묻히시었다.
이와 같이 대왕께서 가없이 은근하고 인자한 대의에 따라 결단을 내리신 음덕과 은택으로 오늘날 우리 신라김씨가 1천만 명에 이르는 대성으로 번성하게 되었고 찬란한 신라 문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거룩한 일을 이루게 되었다.
경순대왕의 승하 1032주년의 춘향대제를 나주김씨 문중에서 봉행하면서 천 년 전 민족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신 선조님들을 추모하고 기리며 특히 935년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손국할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보고 대왕님의 가없이 은근하고 인자하며 백성을 사랑하신 큰 뜻을 천만후손과 더불어 헤아리고 길이 기리며 또한 신라의 천년사직이 종언을 고할 때 보여준 태자와 계자의 높은 충절과 의열, 효경심을 되새겨 보고 높이 선양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매우 소중한 기회로 활용하여야 할 것이며, 자라나는 신라김씨 후손들에게도 이러한 정신을 널리 알리어 좋은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대왕님의 춘향대제를 신라김씨 연합 대종원이 주최하고 나주김문 주관으로 봉행하게 되자 나주김씨 종인들 중에서 978년 대왕께서 승하 하였을 당시의 장례는 고려 조정에서 因山(인산)으로 봉행 하였겠지만 유족측 대표 상주는 누가 맡았으며, 그 후 제례는 누구의 주관으로 봉행 하였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 하고 있었다.
당시의 법도나 관습은 작위, 제사등 상속은 장자 상속 또는 장자 세습의 원칙적으로 이루어 졌던 시대이지만, 장남인 태자 鎰께서는 손국 당시 솔처자하고 개골산으로 입산하여 마의 초식으로 종신하시었기 때문에 태자나 그의 소생들이 장례나 제사를 주관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계자황은 비록 가야산 법수사로 영사입산하고 범공스님이 되어 종신 하시었지만 입산전 왕자빈 옥저하씨와 운발, 우발 두 공자를 기처자하고 입산하시어 큰 아들은 문하시중에 까지 승차하시었기 때문에 나주군 운발공이 실직적인 경순대왕의 장손 역할을 하실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 이 뜻 깊은 대왕님의 춘향대제를 계기로 1천만 신라김씨 자손일동은 서로 화합과 돈목하며 세계화, 국제화 시대에 자기의 본분과 역할에 소홀함이 없이 무실역행하기 바라며 삶의 보람과 기쁨 속에 신라김씨 종인 모두가 융성하고 복락을 누리며 세세연연 존조 숭선을 다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첨부 1. 경순대왕 춘계능향대제 헌집 분정기
2. 대제 위원회 명단
3. 축문
첨부 1.
敬順大王 |
春季陵享大祭 |
獻執分定記 | |
初獻官 |
羅州 |
管理官 |
金謹鶴 |
亞獻官 |
羅州 |
碩學 |
金東九 |
終獻官 |
羅州 |
碩學 |
金元吉 |
大祝官 |
羅州 |
碩學 |
金倫熙 |
都執禮 |
金寧 |
大邱鄕校典敎 |
金佑英 |
典祀官 |
羅州 |
碩學 |
金明熙 |
贊 唱 |
慶州 |
參奉 |
金井洙 |
謁 者 |
羅州 |
幼學 |
金光熙 |
贊 引 |
羅州 |
幼學 |
金仁衡 |
贊 者 |
羅州 |
幼學 |
金成福 |
判陳設 |
羅州 |
幼學 |
金晟淑 |
奉 香 |
羅州 |
幼學 |
金孝章 |
奉 爐 |
羅州 |
幼學 |
金有顯 |
司 樽 |
羅州 |
幼學 |
金洪起 |
奉 爵 |
羅州 |
幼學 |
金載玄 |
奠 爵 |
羅州 |
幼學 |
金伯衡 |
直 日 |
光山 |
碩學 |
金吉洙 |
直 日 |
金寧 |
碩學 |
金琪洙 |
直 日 |
羅州 |
碩學 |
金敏熙 |
첨부 2. 대제 위원회 명단
大 祭 委 員 |
|||||
顧 問 |
金吉洙 |
新羅金氏聯合大宗院 |
名譽總裁 | ||
金璂洙 |
(社)新羅文化保存會 |
常任顧問 | |||
委 員 長 |
金秀吉 |
新羅金氏聯合大宗院 |
總 裁 理 事 長 | ||
(社)新羅文化保存會 | |||||
副委員長 |
金容鈞 |
新羅金氏聯合大宗院 副總裁 |
常任祭禮 | ||
(社)新羅文化保存會 理 事 |
委 員 長 | ||||
敬順大王 |
金謹鶴 |
羅州金氏中央宗親會 |
會 長 | ||
祭禮委員長 | |||||
幹 事 |
金昌圭 |
||||
祭禮委員 |
金炯晋 |
金長元 |
金世寧 | ||
金昌源 |
金成珏 |
金明熙 | |||
金在熙 |
金鳳柱 |
金益壽 | |||
權景晳 |
金榮水 |
金原植 | |||
崔讚鎔 |
金安雄 |
金明煥 | |||
崔承喆 |
權五宣 |
韓敬洙 | |||
(無順) |
3. 축문
註
歆饗 ⌢ 흠향 ⌣신이 제물을
받아먹음
|
향하소서 ∘
|
늦봄을
맞이하여
삼가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제수를
예법에
따라
차렸으니
흠 |
확립하였으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임금의
자리를
버리셨습니다 ∘
이에 |
신라
경순대왕께서는
어려움을
무릎쓰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셔서
임금의
도를 |
근학은
밝게
고합니다 ∘
|
신라기원
이천육십칠년
세자
경인
삼월
초하루
갑오
이십구일
임자
삼십팔세손 |
饗
|
粢盛庶品
式陳明薦
尙
|
不有萬乘
以拯黎庶
慈値暮春
謹以淸酌
|
新羅
敬順大王
伏以
克艱大統
扶植王紀
|
敢昭告于
|
十九日壬子
三十八世孫
謹鶴
|
新羅紀元
二千六十七年
歲次庚寅
三月甲午朔 |
維
|
경순대왕 춘계 능향대제 제례위원장 김 근 학
(나주김씨중앙종친회장 대보공 65세손 나주군36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