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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런웨이》
제33회 ― 학생으로 만드는 마지막 옷
월요일 아침.
K예술대학교 의상디자인과 실습실.
칠판 한가운데에는 김태석 교수가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졸업작품 주제 발표
그 아래에는 네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미송.
윤소희.
최현우.
오세나.
졸업반 학생들이 가장 오래 바라보게 되는 네 글자.
졸업작품.
학생으로서 만드는 마지막 옷이자, 디자이너로 세상에 내놓는 첫 번째 자기소개였다.
실습실 안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미송은 빈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있었다.
종이는 깨끗했다.
그 위에는 아직 선 하나도 그어져 있지 않았다.
소희는 연필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현우는 창가에 서서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나는 여러 장의 스케치를 작업대 위에 펼쳤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하나씩 구겨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윤이 강인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다들 무섭다."
강인이 대답했다.
"졸업작품이니까."
"우리는 졸업반 아니라 다행이다."
강인이 도윤을 바라봤다.
"너도 도와야 해."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갑자기 나도 무서워졌다."
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박도윤."
"네."
"아침부터 떠들 거면 나가."
도윤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제 조용히 하겠습니다."
잠시 뒤.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강인에게 물었다.
"이 정도면 조용하지?"
소희가 연필을 던졌다.
도윤은 가까스로 피했다.
"위험하잖아요!"
"조용히 하랬지?"
"입은 조용했어요."
"표정이 시끄러워."
도윤이 강인을 바라봤다.
"내 표정이 시끄럽냐?"
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너까지?"
미송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하던 실습실에 작은 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실습실 문이 열렸다.
김태석 교수와 이영숙 교수가 들어왔다.
학생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김태석 교수는 칠판 앞에 섰다.
"주제는 정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김태석의 눈썹이 움직였다.
"내가 분명히 월요일까지 정해 오라고 했을 텐데."
현우가 먼저 손을 들었다.
"정했습니다."
"말해 봐."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졸업작품 주제는 「서울 1978」입니다."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현우는 준비해 온 스케치를 칠판에 붙였다.
빠르게 솟아오르는 건물.
복잡한 버스 정류장.
네온사인이 켜진 밤거리.
그 속을 바쁘게 걸어가는 젊은이들.
"지금 서울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현우가 말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한 거리에 있고, 사람들은 모두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는 남성복 스케치를 가리켰다.
"도시의 구조와 젊은 세대의 움직임을 옷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김태석 교수가 물었다.
"지난번 「도시의 밤」과 무엇이 다르지?"
현우의 표정이 굳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도시의 밤」에서는 도시의 겉모습을 만들었습니다."
잠시 멈췄다.
"이번에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만들겠습니다."
김태석은 한동안 현우를 바라봤다.
"좋다."
현우가 자리에 앉았다.
세나가 그를 힐끗 바라봤다.
"제법이네."
현우가 작게 물었다.
"칭찬이야?"
"아니."
"분명히 들었는데."
"착각이야."
도윤이 강인에게 속삭였다.
"어디서 많이 듣던 대화인데."
소희가 도윤을 바라봤다.
"뭐?"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김태석 교수는 세나를 바라봤다.
"오세나."
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처럼 당당해 보였지만,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 주제는 「유리정원」입니다."
세나가 스케치를 펼쳤다.
투명한 소재.
차갑고 선명한 선.
꽃잎처럼 겹쳐진 옷자락.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람의 몸을 단단하게 감싸는 구조가 숨어 있었다.
이영숙 교수가 물었다.
"왜 유리정원이니?"
세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봤다.
평소의 세나라면 자신의 작품을 거침없이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세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름답지만 쉽게 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완벽해 보여도, 안에서는 늘 깨질까 봐 두려운 것."
미송은 말없이 세나를 바라봤다.
사라진 스케치 사건 때 세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항상 일등이어야 했던 아이.
잘했다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아이.
세나가 말했다.
"깨지지 않기 위해 단단해진 사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김태석 교수가 물었다.
"그것이 자네 이야기인가?"
세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네."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김태석 교수는 짧게 말했다.
"그렇다면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만들어."
세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
현우가 아주 작게 말했다.
"좋은 주제야."
세나가 그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알아."
도윤이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오세나."
소희가 말했다.
"조용히 해."
"이번에는 칭찬이었는데요."
"그래도."
김태석 교수의 시선이 소희에게 향했다.
"윤소희."
소희의 손이 멈췄다.
"네."
"자네 주제는?"
소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손에는 스케치가 없었다.
김태석의 표정이 굳었다.
"준비하지 않았나?"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소희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바늘에 찔린 작은 상처.
오랜 봉제로 단단해진 손끝.
"제 주제는……."
잠시 머뭇거렸다.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도윤이 장난을 멈추고 소희를 바라봤다.
소희는 작업대 위에 놓인 재킷 한 벌을 들어 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정하고 소박한 재킷이었다.
하지만 안쪽을 펼치자 수많은 봉제선과 세밀한 마감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완성된 옷을 봅니다."
"하지만 그 옷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가 몇 번이나 실을 뜯었는지는 보지 못합니다."
소희는 재킷 안쪽을 손끝으로 쓸었다.
"바늘에 몇 번 찔렸는지."
"몇 번을 다시 박았는지."
"밤을 얼마나 새웠는지도 모릅니다."
도윤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소희는 말을 이었다.
"저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이영숙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소희답구나."
소희가 조금 놀라 교수를 바라봤다.
이영숙 교수는 말했다.
"네가 그동안 다른 사람의 옷을 얼마나 많이 완성해 줬는지 알고 있어."
"교수님……."
"이번에는 네 옷을 만들어."
소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늘 미송의 곁에서 봉제를 도왔고.
친구들의 옷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마지막 실밥을 정리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건 옷을 만드는 일은 처음이었다.
김태석 교수가 물었다.
"디자인은?"
소희의 표정이 굳었다.
"아직……."
"없나?"
"네."
김태석 교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봉제는 디자인을 살리는 기술이다."
"하지만 살릴 디자인이 없다면 기술만 남아."
소희가 고개를 숙였다.
"네."
이영숙 교수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네 손이 잘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네 마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생각해 봐."
소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도윤은 말없이 소희를 바라봤다.
그녀가 앉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멋있었습니다."
소희가 그를 바라봤다.
"뭐가?"
"주제요."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닌데요."
소희는 잠시 도윤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시끄러워."
하지만 입가에는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지막으로 김태석 교수의 시선이 미송에게 향했다.
"하미송."
미송의 손끝이 굳었다.
"네."
"자네 주제는?"
미송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케치북을 들었다.
하지만 펼치지 못했다.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도윤이 강인을 바라봤다.
강인의 표정도 굳었다.
김태석 교수가 물었다.
"이유는?"
"만들고 싶은 옷이 너무 많습니다."
"그건 이유가 아니야."
미송은 입술을 깨물었다.
"전국대회 작품을 만들 때는 강인이와 함께 이야기를 정했습니다."
잠시 강인을 바라봤다.
강인은 미송과 눈이 마주치자 몸이 굳었다.
귀 끝이 붉어졌다.
그러나 미송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 이야기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태석 교수가 말했다.
"맞아."
"그런데……."
미송은 빈 스케치북을 내려다봤다.
"제가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어떤 옷으로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영숙 교수가 물었다.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
미송은 망설이지 않았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옷을 만들고 싶습니다."
김태석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행복이 뭔데?"
미송은 대답하지 못했다.
"예쁜 옷을 입는 것?"
"아닙니다."
"비싼 원단을 쓰는 것?"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
"그것도 아닙니다."
김태석 교수는 미송을 바라봤다.
"그럼 찾아."
"네?"
"자네가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
미송은 입을 다물었다.
"그걸 찾기 전에는 선 하나도 그리지 마."
강인이 놀라 김태석 교수를 바라봤다.
최종 작품을 준비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스케치조차 하지 말라니.
하지만 미송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네."
김태석 교수가 학생들을 둘러봤다.
"졸업작품은 지난 사 년 동안 배운 기술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고 옷을 만드는지 보여 주는 자리다."
그는 칠판에 크게 적었다.
나는 왜 옷을 만드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도 졸업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학생들의 표정이 굳었다.
김태석 교수는 분필을 내려놓았다.
"일주일 뒤, 첫 번째 스케치 평가다."
도윤의 입이 벌어졌다.
"일주일이요?"
김태석 교수가 그를 바라봤다.
"자네도 바쁜가?"
도윤이 바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졸업반을 도와."
도윤은 소희를 바라봤다.
"무엇부터 하면 됩니까?"
소희가 말했다.
"말없이 옆에 있기."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제일 어려운데."
실습실에 웃음이 번졌다.
그날 오후.
미송과 소희는 학교 운동장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무릎 위에는 빈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미송이 한숨을 쉬었다.
"행복이 뭘까?"
소희가 대답했다.
"갑자기 너무 큰 질문을 한다."
"교수님이 찾으라잖아."
"나는 내 디자인부터 찾아야 해."
두 사람은 동시에 스케치북을 바라봤다.
여전히 비어 있었다.
미송이 소희에게 물었다.
"너는 왜 옷을 만들어?"
소희는 잠시 생각했다.
"완성됐을 때 좋으니까."
"그게 다야?"
"응."
"정말?"
소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찢어진 천이 다시 이어지고."
"아무 모양도 없던 원단이 누군가의 몸에 꼭 맞는 옷이 되는 게 좋아."
미송이 웃었다.
"그게 네 이야기잖아."
소희가 미송을 바라봤다.
"뭐가?"
"흩어진 걸 이어 주는 사람."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운동장 저편에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들!"
두 사람이 돌아봤다.
도윤과 강인이 달려오고 있었다.
도윤의 양손에는 붕어빵 봉지가 들려 있었다.
강인은 우유병 네 개를 들고 있었다.
도윤이 벤치 앞에 멈췄다.
"졸업작품 회의에는 먹을 게 필요합니다."
소희가 물었다.
"누가 그랬어?"
"제가요."
"네 말은 왜 전부 네가 만들었어?"
도윤은 붕어빵을 하나 꺼냈다.
"그래도 드실 거죠?"
소희는 잠시 바라보다 받아 들었다.
"고마워."
도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방금 고맙다고 하셨습니까?"
소희가 붕어빵을 다시 돌려주려 했다.
"싫으면 말고."
도윤은 얼른 봉지를 뒤로 숨겼다.
"감사히 듣겠습니다."
강인은 미송 옆에 앉았다.
우유병 하나를 내밀었다.
"드십시오."
미송이 받아 들었다.
"고마워."
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빈 스케치북을 바라봤다.
"아직 못 정하셨습니까?"
"응."
"제가 도와드릴까요?"
미송은 잠시 강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내가 찾아야 할 것 같아."
강인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제가 방해됩니까?"
미송이 놀랐다.
"아니."
"그럼?"
미송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람과 나무」는 우리 둘의 이야기였잖아."
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졸업작품은 내가 혼자서도 설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강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미송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서운해?"
"아닙니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미송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운하네."
"아닙니다."
"맞아."
"아닙니다."
도윤이 붕어빵을 먹으며 말했다.
"서운한 얼굴입니다."
강인이 그를 노려봤다.
"조용히 해."
미송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강인에게 말했다.
"그래도 도와줘."
강인의 눈빛이 조금 밝아졌다.
"무엇을요?"
"내가 길을 잃으면."
미송은 빈 스케치북을 바라봤다.
"옆에서 내가 왜 시작했는지 기억하게 해 줘."
강인은 미송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귀가 천천히 붉어졌다.
"네."
미송이 웃었다.
"이번에는 응이라고 안 해?"
강인은 잠시 망설였다.
"응."
도윤이 손뼉을 쳤다.
"발전했다."
소희가 붕어빵을 그의 입에 넣었다.
"먹기나 해."
도윤은 입안 가득 붕어빵을 문 채 웃었다.
그날 저녁.
미송의 집.
미송은 자신의 방 바닥에 앉아 오래된 스케치들을 펼쳐 놓았다.
입학 후 처음 그린 옷.
실패한 과제.
교수에게 혹평받았던 디자인.
분홍색 실을 골랐던 날의 메모.
강인과 함께 갔던 동대문 원단시장의 영수증.
그리고 「바람과 나무」의 첫 스케치.
수많은 선 속에는 지난 사 년의 시간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졸업작품을 위한 선은 아직 없었다.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정인숙이 따뜻한 차를 들고 들어왔다.
"아직도 못 정했니?"
미송이 놀라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어?"
"네가 고민할 때는 방이 유난히 조용하거든."
정인숙은 딸 옆에 앉았다.
바닥에 펼쳐진 스케치를 천천히 바라봤다.
그중 갈색 체크 재킷의 그림에서 손이 멈췄다.
"이 옷."
"응."
"강인 학생이 만든 거지?"
미송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응."
정인숙이 딸을 바라봤다.
"좋아하니?"
미송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니."
"옷 말이야."
미송은 입을 다물었다.
정인숙은 웃었다.
"나는 강인 학생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어머니!"
정인숙은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미송아."
"응."
"네가 어렸을 때 처음 옷을 그린 이유를 기억하니?"
미송은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
"네가 일곱 살 때였어."
정인숙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듯 말했다.
"동네에 몸이 불편해서 밖에 잘 나오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지."
미송의 눈빛이 달라졌다.
"영희?"
"그래."
"기억나."
"그 아이가 소풍에 가고 싶어 했는데 입을 옷이 없다고 울었어."
정인숙은 웃었다.
"너는 집에 돌아와 종이 위에 꽃이 가득한 원피스를 그렸지."
미송은 그 기억을 더듬었다.
희미한 어린 날.
색연필.
꽃무늬 원피스.
웃고 있던 친구의 얼굴.
정인숙이 말했다.
"네가 그 그림을 영희에게 보여 주자 그 아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
미송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네가 나한테 말했어."
정인숙은 어린 딸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엄마, 예쁜 옷을 그려 주니까 영희가 웃었어."
미송의 눈빛이 흔들렸다.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정인숙이 딸의 손을 잡았다.
"너는 처음부터 사람을 웃게 해 주는 옷을 만들고 싶어 했어."
미송은 천천히 빈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리고 연필을 들었다.
첫 번째 선을 그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곡선.
사람의 몸을 억지로 바꾸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편안하게 감싸 주는 옷.
정인숙이 물었다.
"주제가 떠올랐니?"
미송은 스케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응."
스케치북 위에 제목을 적었다.
「당신을 위한 봄」
정인숙이 그 제목을 바라봤다.
미송은 말했다.
"누구든 이 옷을 입으면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꼈으면 좋겠어."
"몸이 다르든."
"나이가 다르든."
"평범하든."
"누군가에게는 특별하지 않아 보여도."
미송은 연필을 움직였다.
"그 사람만을 위한 봄 같은 옷을 만들고 싶어."
정인숙은 딸의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같은 시각.
소희의 집.
소희는 낡은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자투리 천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버려진 천.
잘못 잘린 조각.
길이가 모자란 원단.
색이 맞지 않아 사용하지 못한 천.
소희는 그중 작은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다른 조각을 곁에 놓았다.
어울리지 않았다.
다시 바꿨다.
이번에는 색이 이어졌다.
소희는 두 조각을 천천히 꿰매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륵―
작은 천들이 하나씩 이어졌다.
꽃무늬.
체크.
무지.
서로 다른 자투리 천이 모여 새로운 원단이 되어 갔다.
그때 창문 밖에서 작은 돌멩이가 날아왔다.
톡.
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톡.
창문을 열자 아래에 도윤이 서 있었다.
"뭐 해?"
도윤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이 시간에?"
"낮에 말없이 옆에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연습하려고요."
소희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냥 집에 가."
"정말 갑니까?"
"……."
"갑니다."
도윤이 돌아섰다.
소희가 급히 불렀다.
"잠깐."
도윤이 바로 돌아봤다.
"왜요?"
소희는 잠시 망설였다.
"모델이 필요해."
도윤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세계적인 모델이 필요하셨군요."
"그냥 남자 몸이 필요해."
도윤의 미소가 굳었다.
"말을 꼭 그렇게 하셔야 합니까?"
"올 거야, 말 거야?"
"갑니다."
도윤은 대문을 향해 달려갔다.
잠시 후 작업실로 들어온 그는 자투리 천을 이어 붙인 원단을 바라봤다.
"이거 예쁜데요?"
소희가 놀라 물었다.
"정말?"
"네."
"어디가?"
도윤은 원단을 들어 올렸다.
"전부 다 다르잖아요."
"응."
"그런데 붙여 놓으니까 하나 같아요."
소희의 손이 멈췄다.
도윤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소희에게는 달랐다.
흩어진 것.
버려진 것.
쓸모없다고 여겨진 것.
그것을 다시 잇는 손.
소희는 새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제목을 적었다.
「이어진 마음」
도윤이 물었다.
"주제 정했습니까?"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제가 도움이 됐습니까?"
"조금."
도윤이 활짝 웃었다.
"조금이면 충분합니다."
소희는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옷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윤은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십 초 동안.
소희가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도윤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말없이 옆에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소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말해."
"정말요?"
"응."
도윤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럼 제가 생각한 무대 연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소희는 곧바로 후회했다.
"다시 조용히 해."
"너무하십니다."
재봉틀 소리와 두 사람의 웃음이 작은 방 안을 채웠다.
다음 날 아침.
실습실.
미송과 소희가 거의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서로의 손에는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마주 보았다.
미송이 물었다.
"찾았어?"
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응."
두 사람은 나란히 작업대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강인과 도윤도 들어왔다.
도윤이 두 사람의 스케치북을 발견했다.
"정했습니까?"
소희가 대답했다.
"응."
강인은 미송을 바라봤다.
"찾으셨습니까?"
미송이 웃었다.
"응."
"무엇입니까?"
미송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당신을 위한 봄」
강인은 한동안 제목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림을 살폈다.
부드러운 선.
따뜻한 색.
입는 사람의 몸을 편안하게 감싸는 옷.
"어떻게 생각해?"
강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미송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별로야?"
강인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강인은 스케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답습니다."
미송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정말?"
"네."
강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덧붙였다.
"예쁩니다."
미송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옷이?"
강인의 몸이 굳었다.
도윤이 옆에서 입을 틀어막았다.
강인은 미송을 바라봤다.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둘 다입니다."
순간.
미송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윤은 참지 못하고 작업대 아래로 몸을 숙였다.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인이 말했다.
"도윤아."
"왜."
"나가."
"친구의 성장을 축하한 것뿐이야."
소희가 웃으며 자신의 스케치북도 펼쳤다.
「이어진 마음」
각기 다른 자투리 천을 이어 만든 옷.
밖으로 드러나는 봉제선.
숨기지 않은 시접.
손으로 만든 흔적 자체가 장식이 되는 디자인.
도윤의 눈이 반짝였다.
"이게 제가 입을 옷입니까?"
소희가 말했다.
"아직 네가 모델이라고 안 했어."
도윤의 표정이 굳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입습니까?"
"찾아보면 많아."
"저보다 잘생겼습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
"키는?"
"적당하면 돼."
"비율은?"
"옷이 좋으면 돼."
도윤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저는 필요 없는 사람입니까?"
소희는 웃음을 참다가 말했다.
"네가 해."
도윤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강인이 말했다.
"방금까지 상처받지 않았어?"
"회복이 빠른 남자야."
네 사람의 웃음소리가 실습실에 퍼졌다.
그때 문이 열렸다.
현우와 세나가 들어왔다.
두 사람 역시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현우가 물었다.
"다들 정했어?"
미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세나가 작업대 위의 두 스케치를 살폈다.
"괜찮네."
소희가 놀라 물었다.
"칭찬이야?"
세나가 대답했다.
"객관적인 평가야."
현우가 웃었다.
"칭찬 맞아."
"최현우."
"왜?"
"조용히 해."
뒤이어 혜린도 들어왔다.
"여자 모델은 누가 필요해?"
미송이 손을 들었다.
"나."
세나도 말했다.
"나도."
혜린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둘 다?"
세나가 팔짱을 꼈다.
"할 수 있잖아."
혜린이 웃었다.
"대신 내 순서는 내가 정해."
이영숙 교수도 실습실로 들어왔다.
학생들의 스케치를 한 장씩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김태석 교수가 들어섰다.
그는 작업대 위에 나란히 놓인 네 권의 스케치북을 바라봤다.
「서울 1978」
「유리정원」
「이어진 마음」
「당신을 위한 봄」
김태석 교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학생들은 그의 표정을 살폈다.
도윤이 강인에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화난 것 같아?"
"모르겠어."
"좋은 것 같아?"
"모르겠어."
"역시 어려워."
그때 김태석 교수가 말했다.
"이제야 조금 졸업작품 같군."
네 사람의 눈빛이 밝아졌다.
하지만 다음 말이 바로 이어졌다.
"스케치는 아직 형편없어."
표정들이 다시 굳었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교수님."
김태석의 시선이 도윤에게 향했다.
"뭐가 역시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김태석은 네 졸업반 학생을 바라봤다.
"일주일 안에 원단과 첫 번째 패턴을 준비해."
그리고 강인과 도윤을 바라봤다.
"송강인."
"네."
"박도윤."
"네."
"졸업반을 돕는 것은 좋다."
두 사람은 교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대신 만들어 주지는 마."
강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움은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김태석 교수는 미송과 소희를 바라봤다.
"기대는 것과 함께 걷는 것은 다르다."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미송이 강인을 바라봤다.
강인도 미송을 바라봤다.
소희는 도윤을 바라봤다.
도윤은 평소와 달리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태석 교수가 손뼉을 쳤다.
짝!
"시작해."
순간 실습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케치북이 펼쳐졌다.
줄자가 풀렸다.
원단 견본이 작업대 위에 놓였다.
현우는 도시의 건축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세나는 투명한 소재와 단단한 보강재를 비교했다.
소희는 자투리 원단을 색깔별로 나누었다.
도윤은 옆에서 원단을 분류하다가 같은 색을 세 번이나 잘못 놓았다.
"박도윤."
"네."
"빨강과 주황도 구분 못 해?"
"둘 다 따뜻한 색 아닙니까?"
"나가."
"다시 하겠습니다."
미송은 봄을 닮은 색을 찾았다.
연한 분홍.
따뜻한 베이지.
새싹 같은 연두.
강인은 그녀의 옆에서 원단 견본을 조용히 건넸다.
미송이 물었다.
"이건 어때?"
강인은 원단을 만져 봤다.
"부드럽지만 형태가 잘 잡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안감을 보강하면?"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미송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원단을 집었다.
강인은 답을 대신 정하지 않았다.
그저 미송이 선택할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미송이 한 원단 위에 손을 올렸다.
"이걸로 할래."
강인이 물었다.
"이유는요?"
미송은 부드러운 천을 들어 올렸다.
햇빛 아래에서 은은한 빛이 번졌다.
"봄 햇살 같아."
강인은 미송을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말했다.
"그러네요."
미송이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찾았어."
강인도 아주 조금 웃었다.
"네."
미송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인은 바로 고쳐 말했다.
"응."
늦가을의 끝.
실습실 안에서는 벌써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학생으로 만드는 마지막 옷.
누군가를 위한 옷.
자신을 보여 주는 옷.
그리고 함께했던 시간을 오래 기억하게 해 줄 옷.
네 사람의 졸업작품이—
이제 첫 번째 선을 긋기 시작했다.
― 제33회 끝 ―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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