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원고를 읽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홉이라는 꽉 찬 충만의 숫자에 걸맞게 그의 시는 한여름의 시원한 계곡물처럼 나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아홉 구비의 고개를 넘는 동안 그의 시는, 깎일 것은 깎이고 보탤 것은 보태고 버릴 것은 버리고 다시 주워 담을 것은 주워 담았다. 주렁주렁 매달고 왔던 화려한 장식과 과도한 치우침을 버렸다. 그런 시의 광주리가 초록으로 동색이다. 약속을 잡은 날이 마침 스승의 날이었다. 몇 시쯤 가는 게 좋을지 물어보려고 전화를 걸면서도 오늘은 아무래도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화선을 통해 전해온 시인의 응답은 예상대로였다. 제자들이 오기로 되어 있으니 약속을 내일로 미루자는 것이었다. 20년 전의 어느 봄날 처음 만났을 때 시인은 진해남중 교사였다. 80년대와, 국어교사라는 직업이 잘 어울리는 풍모였다. 그 당시 접했던 시인의 신춘문예 당선 시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와도 잘 어울렸다. 80년대의 분위기가 그랬다. 좀은 진지하고 좀은 과격하고 좀은 파격적이고 좀은 낭만적이고 좀은 혁명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던 시대였다. 같은 신문 신춘문예 당선 연년생으로, 나에게 시인의 시는 일종의 본보기였다. 처음 만난 우리는 용두산 입구에서 산 솜사탕을 들고 공원길을 올랐었다. 서른 이쪽저쪽이었다. 무슨 이야긴가를 계속 주고받았는데 경남 부산 젊은 시인들의 길트기가 주요 화제였던 것 같다. 아직도 어제처럼 선명한 그 시간이 벌써 20년 전이라니. 다음날, 시인을 만나기 위해 마을 입구의 대숲을 지날 때쯤 멀리서 저녁 짓는 내음이 났다. 길을 멈추고 은, 현, 리, 하고 발음해 보았다. <으>와 <혀>를 <ㄴ>이 공손하게 떠받치고 있는 소리의 생김새나 은현[銀峴]이라는 깊은 울림의 뜻이 또한 시인의 거처로 맞춤한 곳이었다. 시는 금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이 아니라 은처럼 수수한 멋을 안으로 감추는 보석이다. 그것은 한겨울 온 세상을 희고 밝게 덮는 눈과 같아서 조그마한 티끌에도 그늘이 지고 얼룩이 앉는다. 시의 속살이 그렇지 아니한가. 너무나 순박하고 여려서 무심결에 스치고 가는 세상의 작은 파장에도 아픈 상체기를 남긴다. 시인의 집은 그런 은세계의 고갯마루에 있다. 은현의 지점, 그것은 순백의 시가 탁류의 세파를 향해 배수진을 친 경계 지점이다.
銀峴里은현리로 첫눈 오시는 날 눈 위에 받고 싶은 이름 있다 하늘이 시인의 마당에 올해 처음 보내주신 희고 순결한 雪紙설지를 머리 숙여 받아들고 오늘은 詩시가 아니라 함께 죽고 싶은 이름 있다 - <붉은 이름> 일부
시인은 우선 최근 가꾸기 시작한 집 앞의 텃밭을 보여주었다. 시인의 집은 직각으로 갈라지는 길의 모서리에 있는데 그 초입의 뾰족한 나대지에 쌓여 있던 건축 폐자재를 걷어내고 꽃과 채소를 심은 것이었다. 도시 한가운데라면 모를까 둘러보면 사방 천지가 농경지인 시골에서 손바닥만한 밭을 자랑하고 있는 걸 보면 거기에 들인 공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바깥일에 쫓기느라 그동안 집 주변을 가꾸는 일에 부지런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 이 작은 텃밭을 일굴 엄두를 낸 것은 아마 최근 진해 살림을 정리하고 아들 곁으로 오신 모친의 힘이 컸을 것이다. 시인의 설명 역시 그랬다. 모친과 함께 쓰레기와 돌멩이를 걷어내고 심은 꽃이 60여 종이라고 했다. 수선화와 금낭화와 모란이 피어 있었다. 올해 봄 영랑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기념으로 무작정 모란을 심었는데 꽃피는 거 보고 백모란인 줄 알았다고 했다. 땡잡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굳이 백모란이 아니더라도 작은 씨앗 하나가 제 힘으로 커서 색색의 화사한 꽃을 피워내는 걸 보면 다 땡잡은 기분일 것이다. 심지도 않은 홀씨가 날아와 피운 꽃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리라.
그렇게 서너 해 달개비 農事농사 망치고 사람의 손이 받는 달개비 꽃씨와 自然자연의 손이 거두는 달개비 꽃씨는 전혀 다른 꽃씨라는 것을 배웠다 나의 손은 익지 않은 씨를 털거나 땅에 떨어져 늙어버린 씨를 주웠고 자연의 손은 손 내밀지 않아도, 꽃 피울 씨를 받아 꽃밭 수북수북 이뤘다 은현리 모든 풀꽃 씨앗 소중히 받아주는 따뜻하고 거룩한 그 분의 손 있는데 생명이 발아하는 때를 알지 못하고 나는 욕심 많은 손을 내밀었구나 그 손으로 달개비 꽃물 들이려 했구나 또 그 손으로 시를 썼구나 -<自然자연의 손> 일부
농사를 짓고 자연을 가꾼다는 말이 있지만 시인의 자연관에 의하면 그것은 모두 틀린 말이다. 대자연 속의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인간이 운용하기 전에 스스로 번식하고 성장하고 개체수를 조정할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자연은 말뜻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일진대 인간이 그 자연의 질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자구촌의 대재앙은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자연의 균형이 깨지면서 발생한 무서운 재난은 잇따른 강진, 해일, 폭우, 가뭄과 같은 기상이변으로 순식간에 수많은 목숨을 뺏어가고 있다. 본래 있었던 조화를 기반으로 하여 움직이는 자연의 생리를 인위적으로 운용하려한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중국 도교 철학이 주장한대로 인간의 이상적인 상태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만 가능하다.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는 본연의 능력들이 충돌하지 않고 어울릴 때 우주의 평화는 가능하다. 큰 것이 작은 것을 지나치게 억압하지 않는 자연의 순리를 무시하고. 인간은 모든 자연을 지배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빚은 결과가 오늘의 재앙이다. 자연적인 가치는 얼마나 단순하고 명징한 것이던가. 삶과 죽음, 생성과 소멸, 조화와 부조화 등은 이론의 개입이 불가능한 확실한 경계를 지닌 것이었지만 기술문명은 그 경계에 이의를 제기하고 벽을 허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인위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수천 명 수만 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간 자연의 대재앙 앞에 지금 우리는 속수무책이지 않은가. 앞의 인용 시에서 보듯 사람의 손이 하는 일은 도통 부질없고 소용없다. 고작해야 ‘익지 않은 씨를 털거나/땅에 떨어져 늙어버린 씨를 주’워 담는 것에 불과하다. 시인은 이 자연의 가르침을 통해 시 쓰기의 정도를 깨우친다. 시 쓰기의 두 유형을 구분하자면 만들어 짓는 행위와 부르는대로 받아 적는 행위가 있을 것이다. 도시문명을 기반으로 한 시 쓰기는 만들고 구축하고 짓는 행위에 가까울 것이며 무위자연을 기반으로 한 시는 삼라만상이 보여주고 들려주는대로 옮기고 받아 적는 행위에 가까울 것이다.
마당에 다 있다, 시를 쓰는 나는 마당에 나가면 시는 기다리고 있다 (중략) 대백과사전에도 인터넷 검색창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시가 마당에 있다, -<마당論론> 일부
시인의 통나무집 마당에 나란히 퍼질러 앉았다. 해 뜨기 전 일어나 시를 쓰고 산책을 한다는 시인은 낮잠을 자고 난 부스스한 얼굴을 편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손님이랄 수도 없는 이십년 동무 앞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으나 그것은 은현리가 허용한 무장해제였다. 대자연의 질서에 긴장과 갈등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자연계의 생명들은 서로 적대적이지만은 않다. 긴장은 있으나 갈등은 미미하다. 자연 속의 긴장은 자기 자리의 직분을 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진다. 최소한의 영역 보존을 위한 다툼이다. 거기에 비해 인간사회는 타자와의 공생을 모색하는 과정인 긴장은 미미하고 갈등만이 증폭되어 있다. 대결이 끊일 날이 없다. 인간의 마당이랄 수 있는 도시는 그래서 이전투구의 장이다. 자연계의 약육강식은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위해 일어나지만 인간들의 약육강식은 그와 상관없이 무차별로 진행된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쾌락의 한 방식으로 살육이 저질러진다. 은현리에 거처를 마련하기 전까지 사십 년 넘게 시인은 도시에서 살았다. 도시에서 밥벌이를 하고 도시가 야기한 문제들에 반응하고 도시가 만든 양식을 받아먹고 도시의 품에 안겨 살았다. 이 시절 시인의 시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만들고 구축하고 짓는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공산품이 그렇듯 문명이 만든 재료를 적절히 배합해 문명이 요구하는 자극적인 색깔과 맛을 내는 시를 쓰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해 지금 우리가 퍼질러 앉은 마당은 삼라만상이 보여주고 들려주는대로 옮기고 받아 적는 행위가 용이해진 지점이다. 거대도시에 비해 이 마당은 턱없이 협소하고 단조로워 보이기도 하겠으나 도시에 사느라 닫아놓았던 오감을 활짝 열고 밖의 기운을 받아들이기에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철갑을 두른 방어태세의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우주의 파장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시인의 마당은 그렇게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시인을 따라 나 역시 의심과 불안과 경계를 풀고 무장을 해제했다. 그 보상으로 은현리의 마당은 넓고 고요한 평화를 선사했다. 여기에 이르러 나는 ‘마당에 다 있다’고 한 시인의 고백을 수긍했다. 마당 한 평에 200가지의 식물이 사는 것처럼 마당 한 평에 200편의 시가 있다고 한 시인의 고백이 과장이 아님을 수긍했다. 대백과사전이나 인터넷 검색창에서 시를 찾는 도시의 시인들을 나무라는 시인의 질책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 하나 잃은 도둑고양이 식구처럼 돌보시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 安안 菩薩보살님 절에 절하러 가시면서 밥상 차려놓았으니 너는 밥 먹고 고양이는 밥 차려 드려라 꼭 데워서 따뜻한 밥 드려라 추운 날 찬 밥 주는 일 그것은 죄가 된다 내게 몇 번이나 당부하시는 어머니 -<밥 菩提薩陀보리살타> 일부
시인의 어머니는 텃밭에서 금방 뜯은 푸성귀를 씻고 다듬어 이웃집에 나누어 주고 오시는 길이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차려놓으신 밥상에 앉아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시인의 진해 시절 나는 글동무들과 어울려 몇 차례 어머니가 하시던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술에 절어 살던 철없는 시인들의 속을 어머니는 그렇게 말없이 쓰다듬어 주셨다. 2년 전이었던가. 문화관광부가 주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을 받기도 하셨는데, 젊어 혼자 되셔서 오늘의 정일근을 키우신 공적도 있지만 그와 함께 난감한 80년대를 끌어안고 휘청거렸던 경남부산 젊은 시인들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주신 공적도 분명히 그 속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시인에게는 훌륭한 어머니가 계셨다. 예술 전반에 고루 해당되는 이야기겠으나 시 쓰기는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험적 기질과 능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시 쓰기는 불현듯 떠오른 것을 받아 적는 행위에 가깝다. 누가 불러주듯이 말이다. 그 선험적 능력을 보통 선천적 자질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그것은 어머니가 물려주신 자질이다. 어머니가 불러준 것들이다. 태아였을 때, 젖먹이였을 때, 성장기였을 때 뇌리와 가슴에 와서 박힌 어머니의 말과 가락이 시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시인은 어머니의 오래 전 말과 가락을 받아 적는 대리인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의 이번 시집에도 어머니의 그런 시심詩心이 드러나 있다. 다리 하나를 잃은 도둑고양이를 보살피는 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시심을 넘어 부처에 버금가는 보살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는 밥 차려놓고 고양이를 위해서는 밥 차려드리라고 한다. 고양이에게 지극한 존칭이 사용된 것은 아들이 고양이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아들은 스스로 밥 챙겨 먹을 수 있지만 고양이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냥하거나 버려진 것을 뒤져 먹을 수도 있으나 다리 하나를 잃은 고양이는 생존경쟁에서 도태되기 일보 직전이다. 이 쓰러져 가는 것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야말로 시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일 것인데, 어머니는 칠십 평생 그것을 잃지 않으셨고 지금도 몸으로 실천하고 계신다. 거기에다 떠돌이 고양이라고 함부로 먹다 남은 찬밥 주지 말고 더운 밥 주라는 당부까지 하고 있으니 어머니야말로 천상시인이시다.
詩시는 뱀이 되어 스쳐간다 예언을 담은 단 한 문장 은유가 되어 휙 지나간다 그건 찰나보다 더 짧은 일 깊은 꿈속으로 사유의 틈새로 뱀이 번쩍하며 지나갈 때 재빠르게 잡아야 하느니! 그 놈은 불에 달군 철사처럼 살이 타는 뜨거운 화인을 허공을 베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유혈이 낭자한 아픈 상처를 내 몸에 남기고 지나가지만 接神접신하지 못한다면 끝이다 - 詩시는 뱀이 되어
자연을 읽고 자연과 대화하며 자연에 반응하는 일이 느슨한 방관자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자연의 파장은 각양각색의 소리가 뒤엉킨 거대한 오케스트라일 때도 있지만 조용한 실내악일 때도 있고 귀를 쫑긋해 모든 감각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가녀린 독주일 때도 있다. 언제나 주의를 기울여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자연의 소리들은 바람처럼 획 스치고 지나가버린다. 그렇게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와 같은 자연의 기척들을 우리는 잘 해야 십만 분의 일, 천만 분의 일쯤을 겨우 알아듣고 있을 뿐이다. 그럴진대 자연의 파장을 포착하고자 하는 서정시인의 노력은 그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겠는가. 뱀은 섬세한 감각을 가진 놈이다. 가늘고 긴 몸을 소리 없이 움직이는 특성 때문에 혐오감과 사악한 느낌을 주는 놈이다. 그와 달리 일부 나라에서는 초자연적인 신의 상징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시인이 시와 뱀을 동일시한 것은 그 예민한 감각과 민첩성 때문이다. 예민한 감각과 민첩성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늘 오감을 열어놓은 예민한 상태가 아니면 주어진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할 수 없다. 시인의 덕목과 자격 역시 모든 상황 변화에 먼저 반응하는 민첩성에 있을 것이다. 시는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직감에 따라 움직인다. 은유가 되어 휙 지나가는 시가 찾아 왔을 때 시인이 전열을 흩트린 느슨한 상태라면 시는 그냥 지나치고 말 것이다. 찰나보다 짧은 순간을 스치고 가는 시를 붙잡지 못하면 모든 것은 공수표다. 그것은 두 번 다시 찾아와 주지 않는다. 깊은 사유의 틈새로 번쩍하며 지나갈 때 재빠르게 낚아채야 한다. 그리고 그 수확은 시인에게 행복하고 풍성한 수확이 아니라 ‘살이 타는 뜨거운 화인’이다. ‘허공을 베는 날카로운 칼날’이다. ‘유혈이 낭자한 아픈 상처’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꽃이 피었다 지는 슬픔보다 빈 몸의 나무가 찬바람에 우는 아픔보다 슬프고 아픈 일이지만
사랑하며 기다리는 것이 기다리며 눈물 훔치는 것이 내 사랑의 전부라 할지라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 그 일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라
흐르는 눈물 손가락에 찍어 빈 손바닥 빼곡하게 그대 이름 불처럼 적어 보느니
활활활 타오르는 그 이름 내 손금에 불도장으로 새겨질 때까지 그대 이름 내 손금이 될 때까지 - <그대 이름 내 손금이 될 때까지> 전부
저녁을 먹고 시인의 통나무집 방을 옮겨 다니며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5년 동안 살고 있는 집을 그것도 철따라 놀러오는 동무에게 구경시켜 줄만큼 집안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아들 딸 두 아이들이 장성해 나가 살고 있는 집은 그 전보다 더 넓어보였다. 두 개의 방을 오가며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들판을 향해 있는 방 은현시사는 글 쓰는 방이고 산을 향해 있는 솥발산방은 책 읽고 사유하는 방이라 했다. 방이 앉은 위치를 살펴보니 정말 그랬다. 들판을 향해 탁 트인 방은 새로운 생각들을 풀어내기에 맞춤한 곳이고 솥발산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는 방은 사유를 축적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시인은 이 집에서 5년을 살았지만 그간의 우여곡절을 생각하면 생의 절반을 보낸 듯 아득한 느낌일 갓이다. 여기 사는 5년 동안 시인은 매년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를 썼다. 그 시들은 쓰려고 작정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저절로 터져 나온 것들이었다. 오랫동안 은현리 산과 들에 묻혀있던 시들이 시인을 보자 일제히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고 시인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기꺼이 맞아들인 것이었다. 그 일은 시인으로서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요 축복이었지만 평범한 자연인으로서는 더할 수 없이 힘겨운 형벌이었을 것이다. 시를 제 몸에 받아들이고 품고 다듬어 내보내는 일의 팍팍한 고통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시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맛보아야 하는 산통은 초산을 겪는 어머니의 고통에 견줄만한 것이 아니던가. 그 고통을 감내한 산모만이 어머니로서의 진정한 환희를 누릴 수 있다. 시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산통을 견디는 힘은 시적 자아를 절대적 운명체로 수락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정일근의 시는 깊고 질긴 시인의 운명을 수락한 자만이 그려낼 수 있는 눈물이 있다. 시인에게 사랑은 꽃이 지는 슬픔보다 빈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아픔보다 더 슬프고 아프다. 꽃은 지었다 다시 피고 빈 가지에도 새봄이면 잎이 나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아무 기약도 속절도 없다. 그럼에도 사랑하며 기다리고 기다리며 눈물 훔치는 일을 한시라도 멈출 수 없다. 그 끝없는 사랑에 대한 탐구는 운명으로 짐 지워진 것이어서 게을리 하거나 물리칠 수도 없다. 사랑의 고통을 온몸으로 수락하는 시인의 자세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 않고 손가락에 찍어 빈 손바닥 빼곡히 불도장으로 새기겠다는 표현에 적극적으로 드러나 있다. 정일근은 어쩔 수 없는, 탁월한 서정시인이다. 그의 주요한 시적 재료인 사랑 슬픔 아픔 눈물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다. 은현리에 와서 나는 또 한 바가지의 시원한 샘물을 마시고 간다. 그가 퍼준 한 바가지의 샘물로는 부족해 그가 보지 못하는 사이 나는 두어 바가지의 물을 더 길어 마셨다. 그런데도 그의 샘물은 끄떡도 없다. 여전히 맑고 깊고 넓다.
첫댓글 그대 이름 내 손금이 될 때까지***** 참으로 가슴아린 시어들만 모았군요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