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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산성과 동사지 답사자료집]
이성산성 (二聖山城)
이성산성은 이성산(해발 209.8m)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南漢山城이 있는 淸凉山(479m)에서 갈라져 나온 하나의 줄기가 북쪽으로 올라가며 金岩山(317m)을 이루고 더 올라와서 이성산을 이룹니다. 청량산에서 갈라져 나온 또 하나의 줄기는 북동쪽으로 올라가 客山(291m)을 이루고 동쪽으로 黔丹山(검단산)과 연결됩니다.
이성산의 남쪽과 북쪽에는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있으며, 이 평야를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러 덕풍천과 산곡천이 흘러 한강으로 유입됩니다. 이곳에는 현재 춘궁동, 하사창동, 상사창동, 교산동, 창우동, 하산곡동, 상산곡동, 덕풍동 등 여러 개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남쪽에는 높은 산들이 있어 시야가 막혀있지만 북쪽에는 黃山(783m), 聖山峯(104.9m) 등 작은 구릉밖에 없어 부채살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는 한강의 주변지역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당정리, 미사리, 선리, 암사동, 천호동 등 한강의 이남지역은 물론이고, 팔당리, 수석동, 광장동 등 한강 이북지역의 동태를 파악하기 매우 용이합니다. 또한 이성산성에서 서쪽으로 5km 지점에는 백제의 왕도로 추정되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등이 있고, 남쪽 5km 지점에는 남한산성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성산성은 강북의 적으로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는데 매우 유리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이성산성은 백제의 도읍지와는 관계가 없는 신라의 성으로서 진흥왕대에 축성되어 9세기 중엽까지 사용된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이성산성을 백제의 도성으로 보는 견해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으며, 계속되는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의 유물이나 유구가 찾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城壁
이성산성의 축조된 성벽의 길이는 1,925m이고 해발 209.8m인 주봉을 중심으로 하여 남쪽으로 능선을 따라 축조하여, 형태는 부정형의 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는 포곡형의 석축성입니다. 성 내부의 면적은 성 내부의 면적은 47,200평입니다.
축조방법은 내탁법(內托法)을 사용하였으며, 부분적으로 내외협축(內外夾築)을 하였습니다. 성벽에는 4개의 문이 있었는데, 북-서남-동-남문으로 남문이 정문이었습니다. 또한 여장(성가퀴)과 치는 10개 정도로 파악되었고, 회곽도가 있었습니다. 또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며 성벽의 높이는 4∼5m로 들여쌓기를 하였습니다.
성벽의 낮은 곳과 높은 곳의 높이차는 60m 정도입니다. 지표에는 면석 부분이 전혀 노출되지 않았으나 6차 발굴조사에서 기저부를 포함한 면석 부분이 발굴되었습니다.
성벽은 2차에 걸쳐서 축조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차 성벽은 2차 성벽의 안쪽 2~3.8m 안쪽에서 노출되었습니다. 1차 성벽과 2차 성벽의 축성기법은 외형상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차 성벽은 퇴물림 쌓기를 하지 않고 거의 수직에 가깝게 올라가고 있으며, 바른층 막힌 줄눈쌓기를 하여 윗단의 성돌과 아랫단 성돌은 1/2-1/3 정도가 물리도록 쌓았습니다. 성돌은 화강 편마암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장방형으로 다듬었으나 모서리부분은 다듬지 않았으며, 표면은 판판합니다.
뒷채움돌은 마름모꼴의 양쪽이 뾰족한 견치석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쌓았습니다. 이 1차 성벽의 앞쪽에는 다시 뒷채움돌을 쌓고 표면에는 바닥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크기가 정연하고 잘 다듬어진 성돌을 놓아서 쌓았습니다. 지대석 위에 놓이는 성돌은 전체적인 형태는 사각추형이지만 외면에서 보이는 표면는 장방형입니다. 성돌의 표면은 네 모서리와 각진 부분은 정으로 쪼아 각을 없앴으며, 표면은 가운데 부분이 약간 블록하고 아래에서 중간부분에서 약 50° 정도의 경사가 지도록 다듬었기 때문에 성벽을 쌓을 때 윗단의 성돌을 아랫단의 성돌의 상단에 면을 맞추더라도 약 10cm 정도의 들여쌓기를 한 효과가 있기 때문에 성벽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성벽으로 기어오르기 어렵도록 한 두 가지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9차 발굴조사에서는 남문지와 마찬가지로 사다리를 걸쳐놓고 올라가야 하는 懸文式 구조의 동문지가 확인되었습니다.
성벽에는 여장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여장은 성벽 위에서 적과 대치하면서 적의 화살이나 총알을 피하고, 공격하기 쉽도록 만든 낮은 담장으로 북쪽성벽에 회곽도 보다 1m 정도 높게 두께 1.5m 정도 쌓은 석축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성산성은 표고 209.8m의 주봉을 중심으로 하여 출토유물이 통일기 이전의 것들이고 이성산성의 축성시기를 6세기 중엽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축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성산성은 신라가 한산주를 춘궁리 일대에 설치하면서 쌓은 신라의 한성(漢城)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성산성은 신라의 입장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즉 이성산은 비록 표고 209.8m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는 한강유역의 움직임을 살피는데 쉽고 편리합니다. 이성산 북쪽의 산들은 모두 표고 100m 안팎의 구릉들이기 때문에 팔당에서 잠실 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쉽게 관찰할 수 있으며, 이성산 주변의 사방 5km 정도마다 크고 작은 성들이 분포하고 있어 일단 유사시 이러한 성들의 중심적인 위치에서 연합작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발굴조사결과 성내부에서 저수지 2곳, 장방형 건물지 4개소, 12각 건물지 1개소, 9각 건물지 2개소, 8각 건물지 1개소, 기타유구 5개소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중 다각형 건물지들은 우리나라 산성내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유구로 주목되며 장방형 건물지들도 1개소를 제외하면 면적이 80-90평에 이르는 대형 건물지 들입니다. 건물지의 초석들은 화강 편마암 계통으로 주변에 흔한 석재를 사용하였으며 다듬지 않은 자연석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2곳에서 발견된 저수지 유구는 성의 남쪽계곡을 막아 자연스럽게 축조된 1차 저수지와 이 저수지가 기능을 상실한 후 저수지의 일부를 준설하고 만든 2차 저수지가 있습니다.
1차 저수지의 크기는 약 54×30m, 내부면적은 약 1,500m"이며 시굴 조사된 내부에서 산성의 사용연대를 가늠하게 해 줄 수 있는 목간(木簡)이 발견되었습니다. 목간에 기록된 글자의 수는 모두 35자로 그 중 판독이 가능한 글자는 26자였습니다.
판독이 가능한 목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前面 : 戊辰年正月十二日朋南漢城
道使‥‥‥(缺失)
側面 : 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0 0
‥‥‥(缺失)
後面 : 0 0蒲
0 0 0 0 0 0‥‥‥(缺失)
이 목간에는 '戊辰年'이라는 간지와 직제인 '道使' '村主'가 기록되어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산성의 사용연대는 물론이고 당시사회에 대한 새로운 고찰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2차 저수지는 18×27 m 규모의 장방형 석축저수지입니다. 내부면적은 약 486m"이며, 매 단은50×30×30cm 정도의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들여쌓기를 하였습니다. 2차 저수지의 내부에서도 목간이 여러 점 발견되었습니다. 이들 목간은 경주 안압지에서 발견된 목간들과 흡사한 모양이었으나 목간에 글자가 기록돼 있지 않거나 내용판독이 어려운 한, 두 글자만이 기록돼 있어 정확한 성격은 알 수 없습니다.
산성내부에서 출토된 토기의 기형은 고배, 합, 완, 시루 등을 포함하여 매우 다양하며 벼루편도 몇 점이 출토되어 저수지내부의 목간과 관련하여 당시의 문자생활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토기의 태토는 매우 정선돼 있었으며 문양은 파상문, 삼각집선문, 반원점문이 있는 약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인화문입니다.
이성산성에서는 이외에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우선 철기류로는 철부, 유공철부, 철촉, 쇠스랑 등이 수습되었고 버들고리, 목제빗 등의 생활목제품류와 칠기류, 당시 정신세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목제 인형, 목제 인면조각품 등이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어 복원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드문 자료로서 주목됩니다.
이성산성의 인조마들
역사란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과거에 인간과 사회가 겪었던 경험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이를 통해 현세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좀더 나은 미래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대한 연구는 사료(史料)를 기초로 하여 가설을 세우면서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나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때문에 사료 수집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사료에는 문자로 기록된 문헌사료 외에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남겨진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즉 인간의 활동 결과로 남겨진 모든 물체나 언어, 노래, 구전되는 이야기, 관습 등도 훌륭한 사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은 수천년 동안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이는 우리 역사에도 예외는 아니며, 기마민족의 후예라고 일컬어지는 우리 민족과 말의 끈끈한 연계성은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말과 관련된 제반 문화도 좋은 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2차 발굴 때 이 장소에서 말의 유물이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자그맣게 인위적으로 만든 토제마(土製馬)와 철제마로 모두 17마리 분이며, 유물은 전부 44점입니다. 우리의 옛 유적지에서 토마나 철마가 발견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이 곳의 말 유구들은 또 다른 특징을 갖고 있어 말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정신 영역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이 유물들의 특징은 먼저 신앙유적에서 발굴되었다는 점입니다. 신앙유적이라고 해서 무슨 고분(古墳)이나 제단은 아니고, 폐기된 건물의 초석(礎石) 부근에 1∼1.5m의 커다란 돌을 세워 놓고 그 주변에 잔돌들을 쌓아 놓은 형태입니다. 마치 우리의 옛 서낭당을 연상케 하는 신앙유적은 모두 4개소가 발굴되었는데, 말 유물들은 이 중 2개소에서 잔돌들 아래의 흙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토제품 27점, 철제품 17점 등 도합 44점의 말 유물들은 또한 특이하게도 모두 인위적으로 부러뜨려서 흩뿌려져 있어 이러한 의식이 희생 제물로서의 헌마(獻馬)의식 외에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토마들은 7∼8cm에서 15∼16cm까지 다양한 크기였으며, 대체로 다리가 짧고 머리·몸통 부분이 커서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맞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몸통에는 가는 선으로 말안장·고삐·갈기 등이 묘사되어 있고, 얼굴 부분에는 속눈썹까지 그려 넣을 정도로 섬세한 묘사가 돋보입니다. 토마는 회백색의 점토로 구워서 만들어졌고 철마는 주조(鑄造), 즉 틀에 넣어서 만들거나 철판을 두드려 만들어졌습니다. 철마의 크기는 대부분 10∼15cm 크기로 토마 만큼 섬세하지는 않지만 안장과 고삐, 갈기 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남춘궁동동사지 (河男春宮洞棟寺地)
동사는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거대한 규모입니다. 웅장하고 거대한 고려시대의 절로 조선 초기까지 남아 계속 남아 있었으나, 그 후에 폐사 되었습니다. 동사는 폐사 되었으나 함께 있던 석탑인 춘궁동오층석탑과 춘궁동삼층석탑은 아직 그대로 있으므로 이 동사지와 함께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절터는 남한산성과 이성산성이 동북으로 바라보이는 분지에 자리잡았습니다. 1988년 발굴조사 되어 금당자리 등 네 곳의 집 자리가 드러났는데 금당자리 동쪽에 두 개의 석탑(보물 제12,13호)이 서 있습니다. 금당은 경주 황룡사 금당에 버금가는 큰 건물이었습니다. 금당에 앉혀졌던 본존불의 하대석은 직경이 5.1m에 이르는 8각 대좌로 그 시대 최대의 것입니다. 이 절은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거대한 규모입니다. 발굴 과정에서 금동불상과 막새 기와들, 동사라는 명문 기와와 동으로 만든 불기류 및 도자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동사라는 명문기와가 발견되어 이 절의 이름이 동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 춘궁동오층석탑 (春宮洞五層石塔) 보물 제 12호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형성한 일반형 석탑입니다. 상, 하기단의 면석과 갑석은 여러 장의 석재로 구성되었고, 상층기단 갑석에는 얕은 부연이 있습니다. 탑신부는 초층 탑신이 5개석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든가, 옥개석 하면의 받침이 5단에서 4단, 3단으로 줄어든 것 등은 구조상 불규칙한 면을 보이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각층의 체감률은 바로 옆에 있는 삼층석탑과 비슷하나 그 규모가 큰 데 비하여, 각부의 조화가 잘 잡혀 고려 초기인 10세기 후반의 미탑이라 하겠습니다.
- 춘궁동삼층석탑 (春宮洞三層石塔) 보물 제 13호
이 탑은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형성한 일반형 석탑입니다. 하층기단 면석에는 안상을 조각하고, 상층기단 면석에는 양 우주와 하나의 탱주가 모각 되었으며, 상층기단 갑석에는 얕은 부연이 있습니다. 탑신부는 탑신, 옥개석이 각 1석씩이며, 각층 탑신에는 양 우주가 있고, 옥개석 받침은 5단씩입니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습니다. 건립연대는 고려 초기인 10세기 후반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