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재(省齋) 이시영, 민족의 맥을 잇는 선비 법률가, 민족지도자
오늘은 성재 이시영 선생에 대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시영 선생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반듯한 민족의 선비, 사표라고 할 만한 분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고 하지만, 참으로 ‘자유민주적’ 인간형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탐욕스러운 이익추구의 경제적 인간형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의염치 불문하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 ‘자유’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내세우고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덕성에 대하여는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각자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경쟁의 질서’, 그로부터 나오는 사회진화(발전)가 ‘자유민주주의’라고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모든 ‘작은 인간’들이 스스로 존엄을 소중히 여기고 각자의 명예를 세워나가는 가상한 분투를 고취하는 것이라면, 이는 참으로 인류 역사의 위대한 성취이며, 온 세상이 기억해야 할 보편적 자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유민주주의의 현실은 어떤지요? 결국 기득권자들이 그 이익을 최대한 향유하고 그 행운을 마음껏 누리는, 그리고 그것이 세상 이치의 전부인 양 치부하는 나르시시즘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요? 각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인간의 경지를 드높이는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특권과 위세를 다투는 이전투구에 불과하고, 각자 존엄을 지킨다는 것이 인간과 삶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천박한 과시와 허영, 인간상실로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데 굳이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이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이들, ‘민주주의’에 앞서 ‘자유’를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이들이 과연 받드는 분들은 누구일까요? 저는 ‘자유민주주의’의 성도(聖徒)를 자처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위인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받드는 이들이 단지 우리 사회 주류로 이어진 정치경제적인 기득권세력에 불과하다면, 그들이 말하는 자유와 민주의 빈곤함, 그 몰염치한 특권의식, 그 무지함과 오만함은 오히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어찌하여 우리는 우리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위인들, 앞서 살펴본 분들만 꼽자면, 김병로, 조소앙, 김홍섭 같은 분들을 모르고 자라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아마도 여기 이시영 선생에 대하여도 잘 아는 분들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간난(艱難)의 역사에서 탐욕과 부정을 경계하며 인간적 가치와 덕목으로 일관한 분들을 가르치지 못하고, 단지 출세에 성공한 이들, 권력을 쟁취한 이들에 대한 선망만 키운다면 그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사회에서 추앙받는 이들이 그저 돈을 많이 벌고, 흥행에 성공한 유명인들에 불과하다면 그 사회란 도대체 어떤 수준이라고 해야 될까요?
성재 이시영 선생, 조선시대부터 현대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80평생을 나라와 민족에 오롯이 바친 우리 현대사의 ‘마지막 사대부’라고 할 수 있는 이시영 선생을 다시 얘기하고 기념하고 추억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점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시영 선생의 집안은 소위 명문거족(名門巨族),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분으로는 그의 10대조 할아버지 오성대감 이항복을 꼽을 수 있습니다. 선조, 광해군 그 전란의 어려운 시절 사직(社稷)과 백성을 위해 사심없이 헌신하였던 청백리였습니다. 물론 조선 대대로 이어진 권문세족은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강점에 지조를 잃지 않고, 전 재산, 온 가족을 민족의 독립과 부흥을 위하여 다 바친 가문은 찾기 힘듭니다.
얼마나 많은 양반들이 그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여 일제에 굴복하고 아첨하였던가요? 조선 말 사대부의 기상이 이미 잦아들었다고 하지만, 일제 침탈기에 조선의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이 보여준 무기력과 무책임은 참으로 의문스러운 것이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물을 펴기도 전에 고기가 뛰어 들어왔다’는 일본인들의 조롱에 할 말이 있을까요? 다행히도 이시영의 가문은 그러한 수치와 암흑의 시절에 민족의 정기를 지키고, 민족의 미래를 위한 서광을 보존하였으니, 이는 교목세신(喬木世臣: 여러 대에 걸쳐 중요한 벼슬을 지내,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는 신하) 가운데 유일한 사례였습니다.
이시영 선생은 1869년 태어나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出仕)하여, 동궁경연(세자를 가르치는 직분)을 맡는 등 여러 중요 직위를 거치고, 당대의 재상이었던 김홍집의 사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김홍집 자신도 민중들에게 타살당하자, 이시영은 벼슬을 버리고 10년을 재야에서 보냅니다. 물론 그 기간에도 이상설 등 다른 우국지사들과 교류하며 나라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였습니다. 한편 이시영이 육법전서 등 법학 공부에 열중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1905년 이시영은 다시 외무 교섭국장으로 관계에 복귀합니다. 때는 일제의 침탈이 더욱 확대되어 대한제국의 존망이 위태롭던 시절이었습니다. 일본은 같은 해 8월 영국과 영일동맹을 개정하여 영국으로부터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받습니다. 미국으로부터도 그 직전 7월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라고 하여 그와 같은 권한을 인정받아 놓은 바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일본은 그 해 11월 마침내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해 가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을 예감하였는지, 이시영은 영일동맹이 발표되자 바로 영국에 항의 전문을 발송하게 됩니다. 영국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한 것은 일찍이 조선과 영국이 체결한 조-영 수호통상조약에 반하는 것이라는 정당한 주장이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이시영은 일제에 의하여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마침내 을사조약이 강요될 때, 이시영은 외무대신 박제순에게 일본의 요구를 거부할 것을 강력하게 주청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시영은 박제순 집안과의 혼사(조카)를 파기하였다고 합니다.
이시영은 다시 사퇴의 뜻을 밝혔으나, 이시영을 아꼈던 고종은 그 뜻을 수용하지 않고 대신 평안남도 관찰사직을 제수합니다. 평양에 부임한 이시영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일본인이 관장하고 있던 민/형사 송사의 재결권을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에 일본식의 근대 사법제도를 도입하였고, 사법보좌관제도(일본인)를 통하여 한국의 재판권을 장악하였던 것입니다. 즉 이시영의 조치는 곧 그와 같은 일본의 침탈에 맞서 사법적 자주성을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평안감사로서 이시영은 교육사업을 진흥하였습니다. 지역 유지 50명을 학무위원으로 위촉하여 관하 24개 군에 교육기관을 세워 국민계몽에 힘썼습니다. 그러한 노력에 힘입어 평안남도 전도에서 학생대회와 시국강연회가 이어지고 큰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도내 민족의식이 점점 커가자 일제가 용납하지 않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평남 관찰사처럼 도민사상을 고취시키는 자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이시영은 평안감사직을 지속할 수 없었고, 이후 법률직으로 옮겨, 한성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 고등법원 판사직을 역임하게 됩니다.
(이은우, 임시정부와 이시영, 범우사, 1997, 33쪽)
흥미로운 것은 이시영은 1908년부터 일본 통감부가 실시한 법전편찬사업에도 참여하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이시영의 역할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일본 근대법을 이식하려는 일본에 대항하여 우리 고유의 법과 관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그 법전편찬사업은 일본 민법과 상법의 기초자였던 동경대 법학 교수 우메 겐지로(梅謙次郞)가 책임을 맡았었는데, 그 역시 한국의 고유법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메 겐지로의 방침은 일본 내의 강경주의자들의 반발에 부딪혔고, 그의 후견인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마저 저격당하면서, 결국 좌절되고 맙니다. 우메 겐지로 자신도 1910년 8월 서울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합니다.
(최종고, 한국의 법률가상, 길안사, 1995, 109쪽)
한편 이시영의 중형(仲兄) 이회영을 비롯한 많은 민족지사들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부터 해외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뜻을 모으고 있었고, 실제로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이 창설됩니다. 잠깐 용정촌(龍井村) 얘기를 조금 더 하면, 백두산 위쪽에 있는 용정촌은 1870년대부터 시작된 간도 대량 이주 시기에 한인들의 중심지였습니다. 김약연 선생을 지도자로 하여 윤동주, 문익환의 집안 등 다섯 가족들이 이주하여 건설한 명동촌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헤이그 밀사로 떠나면서 그만 문을 닫게 되었고, 대신 명동촌에 명동서숙이 생깁니다. 이 명동서숙이 명동학교로 발전하였고, 우리 현대사에 큰 자취를 남긴 시인 윤동주, 목사 문익환 목사를 배출하였던 것입니다.
이시영, 이회영의 6형제들도 기울어가는 국운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간도 이주를 결심합니다. 망명 결의는 이회영이 주도하였으며, 영의정이었던 이유승의 양자로 들어갔던 둘째 형 이석영이 그의 만석 재산을 처분하여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40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 설명자료) 소요 경비를 마련하였습니다. 마침내 1910년 12월 이시영 6형제는 그의 가솔들을 50여명을 모두 이끌고 1910년 12월 압록강을 건넙니다.
서두에서 얘기하였듯이, 이와 같은 이시영 6형제의 간도 이주는 우리 독립운동사상 가장 장한 사건의 하나로 기억됩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동서 역사상에 국가가 망할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이회영) 일가족처럼 6형제 가족 40여명이 한마음으로 결의를 하고 일제히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 대대로 이어질 선비의 맑고 바른 기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2001, 37쪽)
한편 북방의 혹한 속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을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부모지국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이 있으리요. 그러나 상하 없이 애국심이 맹렬하고 왜놈의 학대에서 벗어난 것만 상쾌하고, 장차 앞길을 희망하고 환희만만으로 지나가니...”
(이은숙,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 정음사, 1974, 18쪽; 서중석, 앞의 책, 38쪽에서 재인용)
이어서 이시영-회영 형제와 연결되었던 안동 지역의 혁신 유림 지사들, 이상룡, 김대락, 황호의 가문 또한 그와 뜻을 같이 하여 온 식솔들을 이끌고 역시 압록강을 건넙니다.
이렇게 이시영 형제들을 비롯하여 서간도로 이주한 우국지사들은 1911년 서간도 삼원포 지역에 ‘신흥무관학교(공식 이름은 경학사, 신흥강습소 등이었음)’를 건설하여 1910년대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의 근거를 마련하게 됩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후 1919년까지(실제 학교는 1920년까지 지속되었지만, 이시영이 관여한 것은 1919년경까지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수많은 학도들(800여명으로 추산됨) 배출하여 이후 봉오동, 청산리 전투 등에서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일본의 한 신문은 이시영을 가리켜, ‘만주의 무관왕(武冠王)’ 및 ‘살인강도 두령’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답니다.
(이은우, 임시정부와 이시영, 범우사, 1997, 118쪽).
실로 만주에 공산주의 물결이 닥치기 이전에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 북간도의 명동학교는 우리 민족 부흥의 본산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편 이들이 서간도 생활에서 겪어야 했던 곤란과 슬픔들은 참으로 애닯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척박한 동토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일도 힘겨운 일일뿐더러 끼니를 옳게 때우기도 어려웠습니다. 이시영의 손주 남매는 수수밥으로 연명하다 결국 병을 얻어 둘 다 사망하고, 그들의 아비인 이시영의 큰 아들은 정신병을 얻어 신흥무관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충격에 이시영의 부인 박씨도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서중석, 앞의 책, 81쪽)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전개되면서, 이시영-회영 형제는 북경에서 항일운동세력의 결집을 추진합니다. 마침내 임시정부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이시영-회영 형제는 상해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합니다. 두 형제 모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음은 물론이고, 이시영은 법무총장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1919년 4월 우리의 국호를 최초로 대한민국이라 칭하고, 그 정치 체제를 ‘민주공화국’으로 정한 임시헌장이 발표되는데, 주지하듯이 그 기초자는 조소앙이지만, 법무총장 이시영의 격려와 승인도 중요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이시영은 임시정부를 지킵니다. 이시영은 김구보다 연배도 위였고, 굳이 출신을 따지자면, 지체도 높았지만, 김구의 지도력을 신뢰하고, 항상 그의 뒤에서 김구를 지원하고 격려하였습니다. 임시정부가 상해, 항주, 중경 등을 전전하면서, 그 회의와 부침의 시간에서도 이시영은 한결같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중시하였고, 또 그 어려운 시절 재무총장직을 맡아 임시정부의 살림을 꾸리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경 임시정부 시절 70을 넘긴 이시영이 혼자 자취생활을 하며 재무총장직을 수행한 것은 후배 독립운동가들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광복군 청년들이 돕겠다는 것을 사양하며, “독립운동이 끝날 때까지는 내가 해먹기로 했다”는 일화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고 있습니다.
(이은우, 앞의 책, 43쪽)
이렇게 참으로 풍찬노숙(風餐露宿)과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세월 속에서도 민족의 존엄과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던 이시영은 마침내 감격의 해방을 맞아 귀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비통하게도 이시영, 아니 임시정부 자체가 미군정에 의하여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한 바도 없었고, 또 군정이 실시되는 상황에서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통치권에 유리할 것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국가이고, 그로부터 우리 역사의 정통성이 과거에서 현재로 옳게 승계되고 있다고 할 때, 미국이 임시정부를 전면 부정한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한 처사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북한도 아니고 남한으로 귀국하였는데, 그들에게 순전히 개인자격만 부여하고, 심지어 귀국 성명도 제한한 것은 몰상식한 폭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의 미군정에 대한 반감은 절로 커지게 되고 열혈 청년들은 미군정에 대항하여 제2의 독립운동, 실력으로 맞서자는 주장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군정은 이를 다시 쿠데타 음모로 이해하여 김구를 제거할 것까지 생각하였으니, 미군정과 임시정부의 단절과 적대에서 우리 현대사의 굴절이 시작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임시정부 인사들의 귀국을 위하여 미국이 마련해 준 특별기는 15인승에 불과하였습니다. 임시정부 요인 29명도 한 번에 다 타지 못하는 규모였습니다. 11월 23일 비로소 환국하게 된 이시영은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평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77세의 노애국자의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해방과 귀국의 감격도 있었겠지만, 남북이 분할 점령되어 다시 다른 나라의 치하에 놓인 민족의 처지, 그가 혼신의 전력으로 지켜왔던 임시정부가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 대한 설움이 복받치지 않았을까요? 형제, 가족들을 잃은 슬픔, 아이들, 부인, 손주들의 비극적 운명이 눈앞을 가리지 않았을까요?
1910년 그들이 가진 것을 모두를 바쳐 이국의 땅 간도로 건너갔던 이시영 6형제들 가운데 살아서 해방을 맞이한 이는 이시영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서글픈 것은 해방 조국의 사분오열, 부정부패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시영은 민족주의 세력의 대단결을 위하여 이승만과 김구가 협력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나, 정파들 간의 불신과 증오, 적대에 환멸을 느껴 곧 사퇴하고, 심지어 임시정부 국무위원직까지 버리고 백의종군을 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본래 국가의 독립은 멸사(滅私)적, 헌신적이지 않으면 달성키 어려우니 정신 단결하여 대의(大義) 정로(正路)로 매진해야 한다.”
(이은우, 앞의 책, 165쪽)
좌우 대립의 격화로 통일 정부의 구성이 난망해진 상황에서 이시영은 결국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고 부통령직을 수용합니다. 원래 이시영은 부통령에 김구, 총리에 조소앙을 천거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구와 조소앙은 단독정부 수립에 끝내 찬성하지 않았고(조소앙은 제2대 총선에는 참여합니다), 이승만도 그들을 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로지 애국의 책임감으로 부통령직을 수락한 이시영은 곧 대통령 이승만과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이시영은 당연히 계파를 망라한 거국 내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시영은 항의 표시로 이승만의 내방을 피해 수원으로 내려가기도 하였습니다. 이승만 정부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은 한국전쟁 기간 중 극심해졌습니다. 공비토벌을 이유로 600여 명의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거창양민학살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어서 군간부들이 예산을 빼돌려 수많은 병사들이(천 여 명으로 추산됨) 1.4후퇴 겨울 추위 속에 굶어죽고, 병들어 죽는 국민방위군 사건도 발생하였습니다.
이시영은 분노와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부통령직을 사임하기에 이릅니다. 이시영은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사임의 변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사임사의 우국 충정은 언제라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가히 민족의 유산이라고 할 만합니다. 또 그 글에서 나타난 문제들은 오늘의 우리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몇 구절을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략)...
“내 본래 무능한 중에도 모든 환경은 나로 하여금 더구나 무위하게 만들어 이 이상 고위에 앉아 국록만 축낸다는 것은 첫째로 국가에 불충한 것이 되고, 둘째로는 국민에게 참괴(慙愧)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국가가 흥망(興亡) 간두(竿頭; 장대 끝)에 걸렸고 국민이 존몰(存沒) 단애(斷崖; 낭떠러지)에 달려 위기일발에 있건만 이것을 광정(匡正; 널리 바로잡음)하고 홍사(弘赦; 널리 구함)할 성충(誠忠)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동량지재(棟梁之材)가 별로 없음은 어쩐 까닭인가?
그러나 간혹 인재다운 인재가 있다 하되 양두구육(羊頭狗肉)인 가면을 쓴 애국위정자(愛國爲政者)들의 도량(跳梁; 거리낌없이 날뜀)으로 말미암아 초야에 묻혀 비육(髀肉; 허벅지 살)의 탄식(비육지탄; 일을 해야 할 사람이 일을 못하여 살만 찌는 모습을 말함)을 자아내고 있는 현상에 유지자(有志者; 뜻이 있는 이)로서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뿐만 아니라 나는 정부수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관의 지위에 앉은 인재로서 그 적소에 등용된 것을 별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탐관오리는 도비(都鄙; 서울과 지방)에 발호하여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여 정부의 위신을 훼손하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니 이 어찌 신생 국민의 눈물겨운 일이 아니며,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마다 이것을 그르다 하되 고칠줄 모르며, 나쁘다 하되 바로 잡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시비를 논하던 그 사람조차 관위에 앉게 되면 또한 마찬가지로 탁수(濁水) 오류(汚流)에 휩쓸려 들어가고 마니 누가 참으로 애국자인지 나로서는 흑백과 옥석을 가릴 도리가 없다.”
...(후략)...
(이시영, “국민에게 고함”, 성재 이시영 기념사업회 편, 감시만어(感時漫語), 일조각, 1983, 131-132쪽)
관직에서 물러난 이시영은 국가 원로로서 우리의 정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하였습니다. 역시 오늘날 들어도 너무나 지당하고 또 우리 가슴이 와닿는 말씀이라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1) 기거의 불편을 논하지 말고 음식을 과식하지 말며, 현재의 위생에 부족이 없으면 과채어육을 삼가자.
(2) 좋은 것은 좋은 것대로, 나쁜 것은 나쁜 것대로 정확하게 고르자. 좋은 것에도 나쁜 데가 있고 나쁜 것에도 좋은 데가 있기 때문이다. ‘야무유현(野無遺賢; 인재를 잘 중용하여 어진 이가 초야에 묻혀 지내지 않도록 함)’의 참뜻을 생각하자.
(3) 특권정치를 부인하고 민주정치를 확립하자. 대한민국에도 훌륭한 헌법이 있으나 이를 사용하면서 대개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민의를 빙자하지 아니하는 자가 없다.
(4) 사욕에 급급하고 권세만 부리는 사람들이 국리민복(國利民福)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이들 특수 계급의 권리 획득의 대상이 되어 함부로 농단되고, 그 결과 산업은 나날이 위축되어 가고 있다.
(5) 폐풍을 시정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운영을 국민의 의사 그대로 반영할 수 있고 정부 실정상 책임을 물어 교정할 수 있는 책임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이은우, 앞의 책, 188쪽)
이시영 선생은 1952년 84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강권에 못이겨 국가와 인민을 위한 마지막 충성의 염으로 1952년 대통령선거에 나섭니다. 그러나 당시 선거는 이승만과 조봉암의 대결 구도였으며, 이시영 선생의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이듬해 이시영 선생은 곧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시영 선생의 고귀한 인생 역정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바로 전통 유교 사대부의 책임감, 의리(義理)와 염결(廉潔)의식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시영 선생은 부산 피난 시절 동포에게 보내는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로 윤리도덕이 고도 발전하여 왔다. 제일 특수한 점은 의리에서 살고 의리에서 죽는 것인바, 자연히 범치 못하던 전통적 심리이다. 여항(閭巷)부유(婦幼)(일반 동네와 부녀자들)까지라도 의리에 위반되는 생활은 거개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은우, 앞의 책, 167쪽)
이러한 의리란 본래 도학적 옳고 그름의 원칙으로서 권력과 이익에 굴하지 않는 인간됨의 원리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간단히 줄여서 의주리종(義主利從)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서구 자유민주주의 법철학에서 많이 얘기되는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the priority of the right to the good)’과 상통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우리의 전통, 민족의 정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어째서 당장의 결과와 현실적 유익만 앞세우는 기회주의적 실용주의가 지배하게 되었을까요? 언제부터 우리는 ‘떳떳함’ 대신 ‘간사함’이, ‘겸허함’ 대신 ‘허영’이 판을 치는 세태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우리 시대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새로운 단계로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유학의 덕목, 참된 선비의 덕목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시영 선생은 비록 민족의 밝은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작고하고 말았지만, 그의 귀한 정신, 그의 깨끗한 생애, “백성들의 걱정에 앞서 걱정하고, 백성들의 복락 뒤에 복락을 누리는” 사대부의 높은 기상은 우리 민족의 유산으로 영원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