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버니(Charles Burney 1726-1814)에 대해
영국의 음악사가,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인 버니와 그의 쌍둥이 누이동생은 맥버니(James Macburney)의 12자녀 중 마지막으로 1726년 슈르버리(Shrewbury)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 주자이자 초상화가였던 찰스의 아버지는 이때쯤 그의 성씨를 버니(Burney)로 바꾸어 쓰기 시작했다. 찰스가 13세때에 그의 가족은 체스터(Chester)로 옮겼고 이때 올간과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다. 찰스는 1739~42년 체스터 프리 학교를 마친 후 16세때 그가 태어났던 슈르버리로 돌아와 그의 교회 오르간 연주자인 형을 도우면서 올간 공부와 바이올린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18세때인 1744년 런던으로 가서 당시 영국에서 유명한 음악가였던 아르노(Thomas Augustine Arno)에게서 올간을 배웠으며 아노르밑에 있는 동안 찰스는 당대 유명 음악인들, 즉 월간리뷰(Monthly Review)의 편집자였던 개릭(Garrik)과 작곡가 헨델(George Frederick Handel, 1685-1759)등을 만날 수 있었다. 1748년에 에스더 슬립과 결혼한 찰스 버니는 그 다음해에 런던에 있는 성 도니스 벅(Dionis-Buck)교회의 정식 올간주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릴때부터 약했던 그는 곧 사임하고 노르폭(Norfolk)에 있는 린-레지스(Lynn-Regis)로 옮겨 성 마가렛(Margaret)교회에서 올간주자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9년간 시골에서 요양한 버니는 1760년 런던으로 돌아왔으나 1761년 그의 부인과 사별하고 1767년에 재혼한다. 1764년 파리를 방문했던 버니는 루소(J. J. Rousseau)의 오페레타인 『마을의 점장이』 (Le Devin de Village)를 『교활한 사람』(The Cunning Man)이란 제목으로 번역하여 영국에 소개 하였다. 또한 1764년 영국학회(Royal Society of Arts)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767년과 1774년에는 왕실 음악기구 직책에 임명되었다. 1769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음악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에 그는 익명으로 『혜성의 역사에 관한 논문』 (An Essay Towards a History of Comets)를 발표하여 음악에서 뿐만 아니라 천문학에도 깊은 조에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버니는 그의 음악사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이 책을 정확하고 실제경험을 토대로 쓰기위하여 버니는 1770년 6월부터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등을 6개월간 여행하였다. 이 여행을 통하여 버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음악사가로 잘 알려져 있고 또한 이에 관한 저서를 준비중에 있던 마티니(Padre Martini)를 만나 많은 조언과 자료를 교환하며 친교를 맺게된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1771년 영국으로 돌아온 버니는 이 여행담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계 현황』 (The Present State of Music in France and Italy: or the Journal of a Tour through those Countries, Undertaken to Collect Materials for a General History of Music)아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었고 1772년에는 독일과 네델란드를 같은 여행 목적으로 여행하였는데 이때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이었던 글룩(Willibald Gluck, 1714-1787), 하세(Johann Adolpf Hasse, 1699-1783), 임마누엘 바하(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와 오페라 대본가였던 메타스타지오(Pietro Metastasio, 1698-1782)등을 만나고 인터뷰를 하였다. 그리하여 1733년에 『독일, 네델란드와 연합지방의 음악계 현황』(The Present State of Music in Germany, the Netherlands, and the United Provinces)을 출간하였다. 그 후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음악사 』(Generl History of Music) (전4권, 1776~89)를 써서 출판했다. 그의 마지막 직책은 첼시 병원의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1783년 이후 계속되었다. 또한 1783년 버니는 첼레스타대학에 올간교수로 취임하였으며 1784년에는 도서클럽의 멤버로 선출되는등 다방면에 걸쳐서 활약하였다. 한편 1791년 하이든(Frams Joseph Haydn, 1732-1809)이 런던을 처음 방문했을때 이들은 곧 친구가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버니는 하이든과 그의 음악에 관한 기사를 여러번 발표하였다. 그리고 1796년 『메타스타시오의 생애와 저술의 회상』 (Memoirs of the Life and Writings of the Abate Metastasic)을 출간했다. 한편 1810년부터는 프랑스의 문학기관에 외국인 멤버로 선출되는 등 바쁜일정을 보냈다, 이외에도 버니는 올간을 가르칠 목적으로 올간 작품도 작곡하였다.
악보1) FUGHETTA IN A
악보2) FUGUE IN MINOR
버니의 자녀들 중에서 여러명의 유명인사가 배출되었다. 맏딸인 에스더(Esther)는 유명한 하프식코드 연주자였고 둘째딸 프란시스(Francis)는 뛰어난 작곡가로서 에벨리나(Evelina)라는 소설을 발표하였고 『찰스 버니박사에 대한 회상록』 (Memoir of Dr. Charles Burney)를 쓰기도 하였다. 아들 제임스는 해군 제독으로 5권에 걸친 『남해와 태평양에서의 항해와 발견의 역사』(History of the Voyage and Discoveries in the South Sea or Pacific Ocean)을 썻다. 그리고 막내아들 찰스 D. D. 는 탁월한 희랍어 학자였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현재 음악 상태』(The Present State of Music in France and Italy) (1771)에 대해
“음악사” 출간에 필요한 자료수집을 위한 여행일지로 그 당시 현지 음악계를 둘러보고 썼으며 그 당시의 자료 등을 알 수 있는 책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현재 음악 상태』(The Present State of Music in France and Italy)에서 발췌 (1771)
내가 이 도시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 도시가 내가 실제적인 음악을 찾아야만 하는 완벽한 상태에 있다는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다. 이탈리아가 선사할 수 있는 모든 음악적 사치품들과 세련된 것들로 내 귀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유일한 곳은 바로 나폴리였다. 다른 장소를 방문한 것은 내가 내 자신에게 할당한 일을 하기 위해 업무차 들린 것이었다. ....나는 10월 16일 화요일 저녁 5시경에 여기 도착하였다. 그리고 밤에는 피치니씨가 곡을 붙인 코믹오페라 “겔로지아 페르 겔로지아” (Gelosia per gelosia)를 보기위해 피오렌티니(Fiorentini) 극장에 갔다......실제로 이 오페라는 드라마나 노래가 나빴기 때문에, 작곡가의 뛰어남과 명성말고는 특별히 오페라를 지탱할만한 것이 없었다...실제로 유머와 유괘함과 익살은 이탈리아 전역에 널리 퍼져있고 이 부를렛타(burletta)의 가락들은 예쁜 악구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일반적으로 정교한 반주가 수반된다. 춤은 없었으며, 따라서 3막이었던 것이 다소 길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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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목요일. 내 첫 번째 조사는 나폴리의 콘서바토리들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내 질문을 4개의 영역으로 한정하였다.
1. 이 단체들의 역사
2. 이 단체들의 이름들
3. 교수와 학생들의 수
4. 입학 가능 시기와 학교를 그만둘 수 있는 시기
나는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거세한 소년들이 노래하기에 적합한 곳이 어느 곳인지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특별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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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나는 오늘밤 누오보 극장(Teatro Nuovo)에서 있었던 코믹오페라에 대해 본격적으로 언급하겠다. 이 오페라 극장은 피오렌티니 극장보다 그다지 작지는 않았지만, 더 오래되었고 더 더러웠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은 매우 좁고 아주 불편하였다. 이 부를렛타는 “사랑을 위한 음모”(Trame per Amore)라는 제목이었고 나폴리의 마에스트로 디 카렐라(Maestro di Cappella Napolitano)인 지오반니 파에지엘로(Giovanni paesiello)씨가 무대장치를 맡았다. 가수들은 평범하였다. 작품에는 9명의 등장인물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어느 한 명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음악은 나를 매우 즐겁게 하였는데, 음악은 열정과 상상력으로 가득차 있었다. 리토르넬(ritornel)은 새로운 악절들이 가득하였고, 성악 파트는 우아하고 단순한 선율들로 되어있어서 한 번만 듣고도 쉽게 외워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였고, 소규모의 악단이 개인적으로 연주하거나 또는 하프시코드만으로도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1악장의 서곡만이 매우 희극적이었고, 유쾌한 악구들로 계속 이어져 있었다. 춤은 없었는데, 그래서 막들은 지루하게 길 정도로 질질 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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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금요일. 오늘 아침 나는 처음으로 욤멜리씨를 만나고 얘기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어젯밤에 나폴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극도로 뚱뚱하였고 헨델과 비슷한 인상을 주었는데, 예의는 보다 공손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내가 착수하는 분야가 현재 이탈리아에서는 많이 무시되는 부분이고, 내가 그에게 정보를 청하였던 콘서바토리들은 예전에는 위인들을 많이 배출하였지만, 이제는 쇠퇴기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나에게 다윗의 시편을 이탈리아어로 훌륭하게 번역한 학식있는 사람에 대하여 알려주었다. 그 학식있는 사람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고대의 음악에 대한 논문을 써야할 필요성을 발견하였고 이것에 대하여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하였다. 나는 현재 살아있는 세계 최고의 작곡가와 즐거운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는 이탈리아의 무대 작곡가들의 명단을 뛰어난 순서로 꼽으라면, 욤메리, 갈루피(Galuppi), 피치니, 사키니(Sacchini)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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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베리의 작품은 위대하고 우아한 생각들로 넘치며, 안목과 학식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그
러나 갈루피의 작품은 상상력과 열정, 감정이 풍부하며 피치니는 코믹 스타일에서는 모든 동시대인들을 초월하였고 사키니는 오페라 세리아에서 가장 촉망받는 작곡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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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목요일. 오늘 아침을 먹고 젊은 올리버(Oliver)와 그의 산 오노프리오 콘서바토리에 가서 소년들이 먹고 자고 연습하는 모든 곳을 살펴보았다. 이 학교는 일년 내내 유일한 방학은 단지 가을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단지 몇 일뿐이다. 겨울동안 소년들은 해뜨기 2시간 전에 일어나서 저녁을 먹는 1시간 반을 제외하고는 밤 8시까지 계속 연습을 해야한다. 수년간에 걸친 이런 끈질긴 연습은 재능과 좋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훌륭한 음악가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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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일요일. 오늘밤에 나는 욤멜리씨의 오페라 “데모푼테”의 초연을 보기 위해 산 카를로 극장에 갔다. 나는 이극장이 세부적인 면이나 음악에 있어서도 파리에 있는 프랑스 오페라 대극장보다도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랑드(M. de la Lande)는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음악이나 가사에 있어서 훌륭하다”고 인정하면서 “그러나 내 의견에는 다른 점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라고 결론 맺고 있다.
1. 이탈리아 오페라에는 기계장치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2. 이탈리아에는 파리만큼 호화롭고 사치스런 의상이 많지 않다.
3.배우들의 수와 다양함이 떨어진다.
4. 합창단의 수가 적으며 세련되지 못했다.
5.노래와 춤의 결합이 무시된다.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반대의 이유를 들으면 아마 “정말 더 좋군”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랑드는 오케스트라에 고용된 사람의 수가 더 많고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좋은 성악가의 수가 너무 적을 뿐만 아니라 음악와 낭독, 몸짓을 위한 장식 등에 의해 너무 많이 방해받고 있다고 비판을 한다.
이 마지막 비판은 절대로 공정한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의 많은 수가 낭송을 잘 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배우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프랑스 수도에 있는 것보다 두 배 정도로 큰 고급 극장에서 좋은 시와 음악이 있고 성악과 기악 파트가 잘 연주되는 그런 오페라를 보여줘 보라 그러면 그는 불만없이 나머지 것들을 모두 부인할 것이다. 비록 파리에서보다 합창단이 그의 귀를 놀라게 하지 않고 기계장치와 의상 춤 등이 그의 눈을 놀라게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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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수요일. 오늘 나는 산 카를로 오페라 극장의 수석 바이올린 주자인 파비오(Fabio)씨와 저녁을 먹을 기회를 가졌다. 나는 파비오씨에게서 오페라 오케스트라에 고용된 정확한 연주인의 수를 알 수 있었다. 18개의 제1바이올린과 같은 수의 제2바이올린, 5개의 더블베이스가 있고 바이올린 첼로는 단지 2개만 있다....나는 저녁시간 모두를 바벨라와 보냈는데, 그는 나폴리 콘서바토리의 역사와 관련된 정보 및 그곳 출신의 옛날 작곡가와 연주가들의 일화 등 그가 수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나폴리는 오랫동안 화성의 중심이자 천재들과 취향, 배움이 모든 유럽으로 퍼져나가는 근원으로 여겨져서, 분별력있는 사람조차도 그 사실을 무턱대고 믿어버려서 나폴리인들은 과거에는 어떤 명성을 얻었던지간에 현재에는 합당한 것보다 훨씬 많은 명성을 얻고 있다. 나폴리의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들이 취향, 미묘함, 표현 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작품은 대위법과 인벤션의 관점에서 뛰어나다는 것은 인정되어야 하며 그것들을 연주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열정과 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맺는말
버니는 음악의 역사를 음악자체에 대한 연구와 음악가에 대한 연구로 나누었으며 그는 기술적인 지식, 역사적 탐구, 문학적이고 주관적인 관점등을 종합적으로 기술하였고 직접체험을 통하여 얻은 것을 토대로 하여 쓴 것으로 그 당시의 음악계를 알 수 있기에 음악학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