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3도에 걸쳐 넓이 440.5km. > >설악산보다 70km가 넓고 북한산 국립공원의 5.5 배. > >여의도(8.5평방km)의 52 배로 남한에서 가장 넓은 산. > >주 능선 상으로 이어진 공식 가지 등산로만도 100 여개. > >대원사에서 천왕봉 거쳐 화엄사까지 이어진 지리산 능선. > >그 좌우로 뻗은 가지능선과 계곡 섬진강 및 남원 진주 구례. > >2004. 6.18. 지리산 순환도로 개통된 후 새로운 변화의 조짐. > > > >'그곳에는 어떤 유래 및 전설이 담겨 있을까? ' >..................................................................... > >지리산. > > >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명산. > >1967년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 1호로 지정, > >경남 전북 전남 3개 도 걸친 한국 8경중 하나 > >금강산 한라산 더불어 신선 살던 삼신산 중 하나. >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 내려왔다고 하여 일명 두류산, > >이성계의 조선 창업을 반발했다 하여 반역 또는 불복산. > > > >대지문수사리보살의 지(智)와 이(利)자를 따와 > >지리산이었는데 문수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 >갖가지 형태로 나타나 지혜로운 이인(異人)이 많은 산 > >하여, 오늘날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이름 지리산(智異山). > > > >주 능선 : 화엄사 - 노고단 - 임걸령 - 노루목 - 삼도봉 - 화개재. > >토끼봉 - 총각샘 - 연하천 - 형제봉 - 벽소령 - 선비샘 - 영신봉 -세석 > >촛대봉 - 연하봉 - 장터목 - 제석봉 - 천왕봉 -중봉 -치밭목 산장 - 대원사. > > > > > >......................................백두대간 1 구간 (지리산) 개념도. > > > > >............................................................................. 하봉...........무재치기 폭포. > >...........................................↙..................................../.....치밭목 산장.. 대원사.조개골. > >............................국골.....↙.....................................중봉 > >.................................↖......................................./ > >....~~~선녀탕~~~~~칠선계곡..........................천왕봉..................청소년 수련장. > >........................................↖................↙............제석봉 > >.....................하동바위..........>백무동...............장터목 산장....산희샘.......중산리 계곡. > >...........................한신계곡↙..........................연하봉. > >.......................................↖.........................../ > >.....................,,,..................↖............. ........촛대봉 ........도장골..길상사. > >..................... ........................↖................세석 산장...음양샘~~.......거림 > >................................................................영신봉....한벗샘.......삼신봉..... .........청학동. > >.............................................................../................↘ > >.......................................................... ..선비샘~~.......대성골 > >..........................................↙..............벽소령 산장.........↘ > >.................... ..................↙............. 형제봉......................↘ > >..............................광대골.............. 삼각고지.........무당골~~~원대성....대성리 > >.................................................~~연하천 산장..............↗ > >..........................................↖...... 총각샘~~............빗점골 > >.............................................↖..화개재...~~.. > >.................................................토끼봉...........↘.....칠불암 > >..................~~~~~~.뱀사골....산장..................↘ > >.............반선..........................삼도봉.......불무장등....화개골(남난희)... 화개장터...섬진강 > >.....................달궁....반야봉...노루목..... ...........(무학대사)...불일폭포..쌍계사... > >...........................................임걸령 샘터..........피아골 산장....연곡사........... > >.........................................돼지령. > >...............심원계곡...........노고단 산장....왕시리봉.........문수골 > >......................................성삼재...... > >....................................차일봉...............화엄사 > > > > > > >대원사 > > > >경남 산청군 삼장면(三壯面)에 있는 사찰. >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고 > >1685년(숙종 11)에 지어 대원암이라 하였고, > >1890년(고종 27)에 중건하여 대원사라 하였다. > >1955년 중창한 뒤 비구니 선원(比丘尼禪院) 개설 > >석남사,·견성암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참선도량. > >백두대간의 끝 자락, 조개 골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 > >원래 지리산 종주 정석은 화엄사 들머리로부터 대원사. > > > >초입의 내원골은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 체포 현장. > >1933년 산청 출생, 50년 1월 결혼한 남편과 빨치산 유격대. > >그녀는 체포과정에서 대퇴부에 총을 맞아 한쪽 다리를 절단. >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간 복역 중 1985년 8월 가석방. > >출소 후 비전향 장기수 공동체 ‘만남의 집’에 정착후 2004년 운명. > >정순덕 여인의 비화는 생전처럼 사후에도 지리산의 전설로 남을 듯. > >18 남부군 새색시, 대성골 불바다 속 5일 사투 끝 기적 생존, 72세 타계. > > > >남부군은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유격부대. >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 정예부대. > >노고단에서 내원골까지 토벌군을 포함 사망자만 2 만명. > >지리산 반란의 역사도 사실上 이곳을 최후로 막을 내렸다. > > > > > >치밭목 산장. > > > >전기도 전화도.. 없이 버너 등불로 어둠을 밝힌 치밭목 산장. > >그곳에서 오랫동안 혼자서 수많은 목숨을 구해냈던 산장지기. > >산장에서 기르는 '치순이' '바우' 두 마리 개가 그에겐 친근한 벗. > >'단지 지리산이 좋다' 는 이유 만으로 지리산의 일부가 된 민 병태. > >동아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입영 영장을 움켜쥔 채, 토왕성 빙폭등반. > >87. 12. 14 에 산장 개장후 부인 정연숙씨와 지영 지현 두 아들은 진주. > >신혼 6개월 만에 부인과 떨어져 16년간 방치된 무인산장에 들어왔던 그. > >홀로, 지리산 제 2 의 폭포 '무재치기'를 보며 지리산 생활에 만족해 한다. > >그가 속한 마차푸차례 산악회에서 인도 히말라야의 케다르나스 원정 대장. > >아직도 산악인 활동을 꾸준히 하는 그의 소박한 바램은 가족들 경제적 안정. > >이젠 발전기에 의한 동력으로 전기불이 켜지고 2004년 보수로 달라진 산장. > >치밭목 산장 산장지기 그는, 무인고도 등대지기처럼, 소중한 지리산 지킴이. > > > >문명의 이기와 동떨어진 <치밭목 산장>에서의 낭만적인 밤. > >그곳을 들머리로 지리산 종주 하는 산악인들 즐겨 찾는 산장. > >치밭목은 '취 나물 밭 길목'이었던 예전 그곳의 줄임 말 이름. > > > > >중봉. > > > >지리산에서 두번째 높은 봉우리 해발 1875 m 중봉(中峯) > >대원사에서 치밭목 산장 지나 천왕봉 마주보이는 곳이 중봉. > >지리산의 10 경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지리산 제 1의 비경인 듯. > > >중봉은 천왕봉에서 2km, 북쪽 하봉 능선과 써리봉 능선을 형성 > >써리봉 능선은 국수봉에서 구곡산으로 이어지는 일명 '황금 능선' > >산세가 험하고 원시림과 울창한 산죽 때문에 등산로 찾기가 어렵다. > > >천왕봉에서 시작된 능선을 분기점으로 형성된 비경의 계곡이 중봉골 > >중봉골을 일컬어 '지리산 최후의 비경 또는 미답의 계곡' 등으로 부른다. > >현재 이 계곡에는 지리산에 그 흔한 등산로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고 > >아예 국립공원 관리공단은 계곡 입구에 <등산로 아님>이란 안내판을 내걸어 > >일부러 등산로를 찾으려 해도 잘 찾아 내기가 힘들도록 해 놓은 인적 드문 곳. > >'처녀의 순결'같은 태고의 신비가 자연 그대로 지켜졌으면 하는 바램 깃드는 곳. > > >중봉 일출을 감상하려면 <치밭목 산장> 일박 바람직. > >주변 환경이 많이 훼손된 천왕봉 일출보다 아름다운 듯.. > > > > > >중산리 ><br> > ><br> > ><br> >백두대간 끝 지점인 천왕봉을 오르는 , 여러 들머리 중 한 곳. ><br> >천왕봉 동쪽 웅석봉 고집스런 길 외에 대원사, 백무동, 중산리. ><br> >이 중 중산리 코스는 천왕봉까지 가장 빠르게 올라갈 수 있는 길. ><br> >천왕봉 한눈에 보이는 산 중턱의 중산리는 일명 '알프스의 샤모니' ><br> >하여,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천왕봉의 들머리로 가장 많이 이용한다. ><br> > ><br> >중산리 계곡은 칼바윗골, 법정골, 법천골 등으로도 불려진다. ><br> >법천골은 법계사 방향 물줄기가 법천폭포를 이루는 데에 근거 ><br> >법천골은 옛 선조들이 장터목에서 물물교환을 위한 길목에 있다. ><br> > ><br> >산청 덕산 사람들은 소금, 쌀자, 해산물을 등짐으로 법천골을 따라 ><br> >함양, 마천, 남원사람들은 밭곡식, 직물류을 메고 백무동 계곡을 따라 ><br> >장터목에 갖고 올라와 서로의 안부도 묻고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던 곳. ><br> >생존을 위해 물물교환하던 교역의 길로 활용된 이곳이 바로 법천골이다. ><br> > ><br> >2004. 6.18. 청학동과 중산리를 잇는 지리산 순환도로(2차로 4.4㎞) 개통. ><br> >청학동과 중산리 자동차 이동 시간이 1시간 30분( 80㎞ )에서 20분( 12㎞ ) ><br> >중산리는 지리산 순환도로 개통에 따라 노고단 못지 않게 급속한 개발 진행. ><br> >이 일대에 대단위 집단시설지구 조성, 2-3년 이내 관광명소로 탈바꿈할 조짐. ><br> >중산리에서 지리산 중턱까지 케이블카나 모노레일 가설하자는 지역단체 제안. ><br> >개발도 중요하지만 편리함 보다는 생태계 보전 문제가 가장 우려되고 있는 현실. ><br> > ><br> > ><br> > ><br> >천왕봉. ><br> > ><br> > ><br> >백두대간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출발 원산 낭림산 거쳐 금강산. ><br> >태백산까지 내려와 소백산, 속리산을 거치고, 남쪽으로 추풍령 ><br> >덕유연봉, 영취산, 백운산, 고남산, 정령치, 만복대, 삼도봉 지나 ><br> >지리산 천왕봉까지 남으로 1,621,5 km를 뻗은 백두대간의 종착점 ><br> >경남 함양군 ·하동군·산청군에 위치한 지리산의 최고봉 해발 1915m. ><br> > ><br> >그곳은 天主 즉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말에서 유래. ><br> >어느 날 <하늘을 받치는 기둥> ' 하나를 잃어버린 천왕성모. ><br> >하여, 슬픈 그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천주가 천왕이 된 듯......天主와 天王은 점 하나 차이. ><br> >예전에 그곳에는 성모숭상의 유적인 '천왕성모' 마야 부인상. ><br> >토속적 산신신앙의 대상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사라진 그 자취. ><br> >중산마을 뒤 천왕사 혜범스님이 천왕 성모석상을 천왕사에 안치. ><br> >천왕봉을 신성시하는 주민들과 법적 공방 끝에 원 위치 할 움직임. ><br> >정상 주변 등산로는 찾는 이들 많아 환경 훼손으로 몸살을 앓는 듯. ><br> >지리산 전설의 모태이자 산실인 그곳 소중히 지켜졌으면 하는 바램. ><br> > ><br> >천왕성모와 백무동에서 만난 스님과의 사랑이야기는 <백무동 전설>. ><br> >마야부인과 반야 도사가 결혼 후 헤어진 슬픈 이야기는 <반야봉 전설>. ><br> >두 전설을 분석하면 내용이 일부 다른 듯 해도...< 주인공들은 같은 인물>. ><br> > ><br> > ><br> > ><br> >백무동. ><br> > ><br> > ><br> >천왕봉 오르내리는 짧은 지름 길 들머리로 각광. ><br>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월마천 산자락의 백무동. ><br> >산마을 백무동은 늘 백 사람의 무당이 있다 하여 백무. ><br> >백무에는 '천왕성모의 사랑 이야기' 전설이 담겨져 있다. ><br> > ><br> >조선시대에 지리산의 신령인 천왕성모가 살고 있었다. ><br> >그녀는 백무동에 살면서 그 고장 사람들을 돌봐 주었고, ><br> >그 고장사람들은 늘 천왕성모를 하늘처럼 우러러 모셨다. ><br> >그 무렵 한 스님이 수도를 하기 위해 지리산에 입산하였다. ><br> >그 스님은 깊은 동굴 속에서 좌선과 수도를 몇 년간 계속했다. ><br> > ><br>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동굴을 나와 산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다. ><br> >스님은 바위에 털석 주저앉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br> >사람들 소원을 잘 들어주는 천왕성모에게 길을 찾아 달라고 빌었다. ><br> > ><br> >그러자 스님 앞에 나타난 복사꽃 뺨에 반달 눈썹의 처녀. ><br> >앵두같은 입술로 말을 걸어온 처녀와 놀란 스님과의 대화. ><br> > ><br> >"어떻게 하다 길을 잃으셨어요? 나를 따라 오십시요." ><br> >"누구십니까?" ><br> > ><br> >"천왕입니다." ><br> >"...???........." ><br> > ><br> >이제까지 천왕성모를 주름투성이 할머니로 알았던 스님. ><br> >막상 어여쁜 처녀가 천왕성모라기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br> >스님을 동굴까지 인도한 처녀 천왕성모는 스님에게 말했다. ><br> > ><br> >"여기가 스님이 거주하는 곳이 맞지요. ><br> >저는 여기서 멀지 않은 백무동에 살아요." ><br> > ><br> >그 처녀가 돌아간 후부터 스님은 다른 일에는 관심을 잃었다. ><br> >오직 그 처녀 만 보고 싶었고, 천왕성모와 결혼 하는 것이 소원. ><br> >하여 스님은 천왕성모에게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br> >스님의 간절한 청혼을 받은 천왕성모는 스님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br> >그 후 스님과 천왕성모는 백무동에 함께 살면서 딸만 여덟을 낳았다. ><br> >그 딸들은 모두 무당이 되어 조선팔도로 보내졌고, 각각 터전을 잡았다. ><br> >그 중 셋째 딸은 벽소령재를 넘어 청학동 삼신봉을 거쳐 하동에 정착했다. ><br> >그후 하동에서는 함양 마천 백무동까지 가지 않고 셋째 딸에게 영험을 빌었다. ><br> >그후로부터 하동에 하나 둘 무당이 늘어 무당이 백여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br> > ><br> > ><br> > ><br> >반야봉(般若峰). ><br> > ><br> > ><br> >주능선 상에서 도보로 30분 거리 쯤 벗어난 곳. ><br> >그 높이와 관계없이 지리산을 상징하는 제 2 봉. ><br> >주봉(1,732m)은 중봉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풍광. ><br> >노고단은 물론 멀리 천왕봉에서도 선명하게 조망돼 ><br> >그 독특한 모습을 배경으로 작품사진 촬영을 많이 한다. ><br> > ><br> >'여성 둔부처럼 부드러운 곡선 산마루에 붉꽃노을.' ><br> > ><br> >반야봉의 신비로운 낙조(落照)는 지리산 8경 중의 하나. ><br> >여름날 작열하던 태양이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기울어 가면 ><br> >수줍은 아가씨 두 뺨에 핀 홍조인 듯, 반야의 하늘은 온통 진홍빛. ><br> >활활 타오르는 저녁노을과 더불어, 반야봉 아침 운해는 감동적 비경. ><br> > ><br> >반야봉에는 지리산 女神인 천왕봉 마야부인에 관련된 전설이 있다. ><br> > 마야부인은 천왕성모(天王聖母) 또는 노고(老姑)라고도 불리우는데 ><br> > 천신의 딸 마야부인은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던 도사 반야를 만나 결혼 ><br> > 천왕봉에 살며 딸만 8명을 낳고 반야는 득도를 위해 반야봉으로 떠났다. ><br> > ><br> > 마야부인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 반야를 그리워하며 ><br> >나무껍질로 남편 옷을 짓고 딸들을 팔도로 보내고도 남편을 기다린다. ><br> >어느 날, 언제나 처럼 그녀가 남편 위해 만든 옷을 품에 안고 애태울 때 ><br> >꿈에 기다리던 남편이 손짓하며 다가오자 그옷을 들고 마주 달려간 그녀. ><br>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의 물결 속에 손에 잡히는 것은 달빛 아래 핀 쇠별꽃. ><br> >쇠별꽃 물결을 남편 모습으로 착각한 그녀는 너무 실망하여 한없이 울었다. ><br> >그리고, 품속 남편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숲 속 여기저기에 흩날려 버렸다. ><br>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춰보던 산상의 연못도 신통력을 발휘하여 메워 없앴다. ><br> > ><br> >그녀가 메워버린 연못은 천왕봉 밑 장터 목의 산희샘으로 남았고 ><br> >그 찢겨진 옷이 바람에 실려 날아가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 한다. ><br> >풍란은 소나무 가지에 붙어 자생하는 흰 실오라기 같은 다년생 식물. ><br> > ><br> >먼훗날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br> >그의 딸들은 전국 8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br> >그래서 인지, 반야봉 주변에는 짙은 운해와 안개 구름이 자주 끼는데 ><br> >하늘이 반야와 마야 부인이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br> >하여, <반야봉의 낙조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상징>... 지리산 10 경. ><br> > ><br> >반야봉을 오르는 길은 지리산 종주 도중 잠시 둘러보 듯 찾기보다 ><br> >반선 및 달궁에서 반야봉을 대상으로 올라야 숨은 비경을 볼 수 있다. ><br> > ><br> > ><br> > ><br> >심마니 능선. ><br> > ><br> > ><br> >반야봉 북사면 따라 반선 방향으로 뻗어내린 원시림 능선. ><br> >반야봉은 지리산 주능선에서 보면 여인의 둔부 곡선 같지만 ><br> >달궁을 지나 성삼재로 넘어가는 북쪽 도로에서 반야봉을 보면, ><br> >부드러움과 우아함 뒷면에 숨어있는 매서움과 깊숙한 자연의 멋. ><br> >그 멋을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몸 허락하 듯 다소곳 길을 열어준다. ><br> > ><br> >능선은 가까이 다가설수록 접근 거부하 듯 까탈스러운 오르막. ><br> >봉우리를 넘고 안부에 올라서면 다시 오르막 오르기 여러 차례. ><br> >4~5개 봉우리 헤아리다 포기하게 되는 숲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 ><br> > ><br> >숨벅차게.. 오르막. 그후 내리막... 다시 오르막. ><br> > ><br> >오솔길 우측에는 기와지붕 같은 만복대 및 아스라한 와운 마을. ><br> >적송 군락지 지나 오솔길 막아선 고목 군락들 놀랍도록 아름답다. ><br> >소나무 붉은 숲 헤집고 나면 점점 더 가깝게 다가서는 듯한.., 중봉. ><br> >산죽숲 헤집고 허겁지겁 올라서고 나서야, 처음으로 만나는 이정표. ><br> >비몽사몽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찾아 헤메다가 꿈결에 극적인 해후. ><br> >아직도 1.5km 남은 반야봉은 초암릉과 오솔길 빼곡히 들어찬 원시림. ><br> >반야봉 두 곡선 사이로 북쪽 음습한 골짜기 주름진 주변은 산삼 자생지. ><br> >심마니 삶의 터전인 그곳을 오고가기에 적당한 통로였기에..심마니 능선. ><br> > ><br> >노루목에서 반야봉 가는 길은 패이고 깍이고 상처받은 살점같다. ><br> >그렇다면 차라리 등산객에게 외면받는 반야봉은 다행인지 모른다. ><br> > ><br> > ><br> > ><br> >달궁마을. ><br> > ><br> > ><br> >달궁에서 심원마을 간 6km는 계곡이 지닐 수 있는 모든 매력을 지닌 별천지. ><br> >달궁 1km 지점에 넓은 반석 가운데 넓고 푸른 <쟁기소>는 신비한 여인의 비밀. ><br> >달궁 계곡에서 유일한 다리를 건너 500m 가지 개울에서 식수를 준비해야 한다. ><br> >선길을 지나 산죽밭을 통과하면 반야봉에서 달궁마을 쪽으로 뻗어내리는 주능선. ><br> ><노송, 암봉> <철쭉, 진달래 ,설경> 그림 같은 오솔길 지나면 <심원 반야봉 삼거리> ><br> > ><br> >달궁 - 심원마을 - 쟁기소 - 반야봉 - 노루목 - 임걸령 - 노고단 -성삼재. ><br> ><6 시간 8km 코스>로 쟁기소 쇠다리길 오르는 이정표 따라 오르는 등산로. ><br> > ><br> >2000년전 백제 가야 신라에 쫓긴 마한(馬韓)의 효왕. ><br>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궁전을 지었던 곳이 달궁이다......(남원 신내면 덕동리) ><br> >달궁은 문헌 기록上 지리산에서 사람이 처음 살았던 곳. ><br> > ><br> >달궁은 '달의 궁전'이란 뜻으로 지리산 개산(開山)의 역사적인 현장. ><br> >지형 특성상 달을 닮은 여인의 둔부 사이 은밀한 곳에 있어 '달의 궁전' ><br> >삼국시대 달궁계곡 일원은 삼한시대 마한의 왕조가 망명했던 곳으로 추정. ><br> >백제 온조왕 27년 (서기 9년)에 마한 왕조가 멸망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 ><br> >일본서기에는 3세기 후반 마한이 중국과 교류, 4세기 서해안에 진출했다는 기록 ><br> >부족국가 마한은 달궁마을에 숨어 궁전을 짓고 살았다는 마한의 부족국가로 추정. ><br> > ><br> >2004년 6월 지리산 순환도로 개통으로 달궁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 ><br> >달궁마을(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깊은 계곡을 이용 각종 식물채집 및 ><br> >옥수수 오이 수확, 계곡 야영, 다슬기 줍기 등등 다채로운 농촌체험 학습. ><br> >인근 귀농학교에서 친 환경 유기농 교육 실시 (주관 : 농협 전북지역본부) ><br> >여름 휴가철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1박2일 농촌체험 팜스테이(Farm Stay) ><br> > ><br> >달궁계곡은 반선에서 달궁까지 5㎞ 정도가 가장 좋고 실상사도 가깝다. ><br> >문의 처 : 지리산농협 산내지소(063)636-3072 & 김상중씨(063)626-3470 ><br> >가는 길 :전주-24번국도-남원-서무리-60번 지방도로-산내면-729번 지방도-달궁마을. ><br> > ><br> > ><br> > ><br> >제석봉 장터목 & 연하봉. ><br> > ><br> > ><br> >천왕봉에서 내려오면 주능선 상에서 연달아 만나는 세 곳. ><br>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능선 고갯마루가 <장터목>. ><br> >해발 1,750m로 천왕봉 남쪽 기슭의 사천주민과 북쪽의 마천주민 ><br>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 장을 열고 서로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장터 ><br> >지리산에 기대어 살던 옛사람들의 강렬한 삶의 의지를 엿보게 해 준다. ><br> >이곳은 남쪽의 중산리에서 9km, 북쪽의 백무동 마을에서 9km의 거리이다. ><br> >덕산이나 인월에서 등짐 지고 오른 사람들에게는 더욱 멀고 힘들었을 것이다. ><br> > ><br> >장터목 좌우에는 도보로 10분 거리에 경관이 빼어난 제석봉(1,806m) 과 연하봉. ><br> >제석봉을 넘어가면 천왕봉을 지키며 하늘과 통한다는 마지막 관문이 통천문이다. ><br> >이 문은 옛날부터 몸과 마음이 부정한 자는 출입을 하지 못한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br> > ><br> >제석봉 일대는 지리산 최대의 고사목 지대로 독특한 경관을 지니고 있고, ><br> ><연하 선경>은 오밀조밀한 바위 봉우리와 초원이 <지리산 팔경 중에 하나>. ><br> >산비탈 아름다운 연하봉 일원은 여름철 야생화의 원색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br> > ><br> ><장터목 산장>은 2003년 6월 250 명 수용규모로 새롭게 단장. ><br>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어 겨울에 얇은 침낭으로도 견딜 수 있다. ><br> >취사장이 같은 건물 내에 위치한 것이 장점, 화장실 먼 것이 단점. ><br> >산장 숙박료 5000원.. 침낭 대여료 2000원.. 담요 대여료 1000원. ><br> ><천왕봉 일출>맞이 하려는 등산객들 많이 이용해 사전 예약 바람직. ><br> > ><br> > ><br> > ><br> >산희((山姬)샘 ><br> > ><br> > ><br> >약초를 캐러가 돌아오지 않은 총각을 기다리다 찾아나선 처녀. ><br> >며칠 동안 산중을 헤메다가 갈증을 못 이겨 이곳에서 숨졌는데 ><br> >총각이 뒤늦게 오자 그 혼이 눈물로 반기 듯 솟았다는 전설의 샘. ><br> > ><br> >마야부인이 멀리 떠난 남편 기다리며 거울 삼아 몸 단장 했다던 샘. ><br> >결국 돌아오지 않는 남편 원망하며 메꿔버린 샘이...장터목의 산희샘. ><br> >산희샘은 '뫼山 아가씨 姬' 우리 말로 풀이하면 '산 아가씨' 라는 의미. ><br> >예나 지금이나 장터목 오가는 사람들에게 갈증을 풀어주는 반가운 존재. ><br> >산희샘은 옛날에는 그곳이 장터였고 지금은 산장이 들어서게 했던...산실. ><br> > ><br> > ><br> > ><br> >칠선계곡. ><br> > ><br> > ><br> >천왕봉에서 내려다보면 중산리 반대 방향으로 길게 뻗어내린 계곡. ><br>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 대 계곡. ><br>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은 7개 폭포수와 33개의 소. ><br> >천왕봉 정상에서 마천면 의탄까지 장장 18km에 걸쳐 길게 이어져 있는 계곡. ><br> >지리산 자락 가운데 유독 여성을 상징하는 지명 많을 만큼 골이 깊고 날카로움. ><br> >칠선계곡은 그 험준함으로 인해 숱한 생명을 앗아 가 '죽음의 골짜기'라 불릴 정도. ><br> > ><br> >전문 산악인들도 해외 원정등반에 앞서 겨울철 칠선계곡에서 빙폭훈련 거칠 정도. ><br> >그곳 산행할 경우, 여름철 계곡 아래서 천왕봉으로 향하는 험로는 피하는 것이 안전. ><br> >칠선계곡 등반코스는 추성동에서부터 천왕봉까지 14km (추성동-함양읍 간 운행 버스) ><br> >추성동에서 시작되는 칠선계곡 등반로는 위험성 때문에 상당 구간 계곡과 동떨어져 있다. ><br> > ><br> >추성동에서 등산로를 따라 곧장 가면 칠선계곡에서 처음 만나게되는 용소를 놓치기 쉽다. ><br> >등산로에 용소가는 길을 표기해 놓았으나 등산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 ><br> >계곡으로 거슬러 가면 5백여m 지점에 위치한 용소는 산신제 지낼 때 산 돼지를 집어 넣는 곳. ><br> > ><br> >계곡을 따라 2 km남짓 오르면 두지동(두지터라고도 함)이 나오는데 ><br> >마을 모양이 식량을 담는 두지 같다 하여 붙여진 지명의 화전민 마을. ><br> >지금은 담배건조장과 농막등만 남아 이 마을 등산객들의 휴게소로 각광. ><br> >담배 건조장은 찻집으로 변해있고 창암 능선 넘어 백무동으로 갈 수도 있다. ><br> > ><br> >계곡 물 소리는 아득한 발 아래서 들릴듯 말듯 전망좋은 쉼터 추성망 바위. ><br> >여기서부터는 계곡등반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의 험난한 산 길. ><br> >추성동에서 4km 지점인 선녀탕까지 계속되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br> > ><br> >일곱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의 선녀탕, ><br> >지금은 돌과 모래로 메워 져 선녀가 목욕했다기에는 초라하다. ><br> > ><br> > ><br> > ><br> > 선녀탕의 전설 ><br> > ><br> > ><br> >선녀에게 연정을 품은 곰 & 선녀를 도운 사향 노루 이야기. ><br> >일곱 선녀가 목욕하자 곰은 선녀들 옷을 훔쳐 바위 틈에 숨김. ><br> >목욕을 마친 선녀들이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옷을 찾아 헤맬 때 ><br> >사향 노루가 자기 뿔에 걸려 있었던 선녀들의 옷을 가져다 주었다. ><br> >곰이 바위 틈에 잠든 노루의 뿔을 나무가지로 착각 옷을 숨겼기 때문. ><br> >그 후 선녀들은 사향 노루를 그곳에서 살게 했고 곰은 국골로 추방했다. ><br> > ><br> >선녀탕 위에는 1백여평 남짓한 소와 매끈한 암반으로 둘러싸인 '옥녀탕'. ><br> >하늘을 뒤덮은 울창한 수림과 깎아지른 벼랑을 지나 비경의 극치 '비선담'. ><br> >그곳 지나 옛 목기막터가 있었다는 산죽밭을 지나 오른편 계곡 건너 바위굴. ><br> >과거 목기를 만들던 인부들이 지내던 곳으로 알려졌고 청춘홀이라 불리운다. ><br> > ><br> > ><br> > ><br> >세석평전. ><br> > ><br> > ><br>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넓고 경사 완만한 평원. ><br> >5~6월 철쭉 꽃 장관이 아름다운 남녘 최대의 고원. ><br> >이름 그대로 잔돌(細石) 많고 30리에 걸친 넓은 평전. ><br> >처녀의 핏빛 투명한 속살처럼, 분홍 色 고운 철쭉 바다. ><br> >절정기에는 산악인들의 물결로 발디딜 틈 없는 세석평전. ><br> >현재 주능선 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장이 들어서 있는 곳. ><br> > ><br> >시인 김석(金汐)의 표현을 인용하면.. ><br> > ><br> >.................................................... ><br> >.................................................... ><br> > ><br> >세석 계곡 가득히 피어있는 철쭉꽃, ><br> >그 사이사이로 울고 있는 뻐꾹새 소리, ><br> > ><br> >훈풍이 꽃 사이로 지날 때마다 ><br> >꽃들의 환상적이고 화사한 흔들림, ><br> > ><br> >그것은 남녘 나라 눈매 고운 ><br> >처녀들의 완숙한 꿈의 잔치. ><br> > ><br> > ....................................... ><br> >........................................ ><br> > ><br> > ><br> > ><br> >음양샘. ><br> > ><br> > ><br> >아득한 옛날 지리산의 인간은 호야와 영신이란 남녀 뿐. ><br> >세석평전에 초막을 짓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살고 있었다. ><br> >원앙처럼 금슬이 좋았던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br> > ><br> >하루는 호야가 다래를 따러간 사이에 반달곰이 영신에게 ><br> >음양수 샘물을 마시면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br> >영신은 곧바로 음양샘으로 달려가 음양수 물을 마셨다. ><br> > ><br> >그러나 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호랑이 ><br> >그 사실을 지리산 산신령께 고해 바쳤다. ><br> > ><br> >산신령은 천기를 발설한 곰을 토굴에 가두고, ><br>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이 되도록 했다. ><br> > ><br> >산신령은 샘물을 몰래 마신 영신에게도 무거운 벌을 내려 ><br> >철쭉이 빨갛게 물들 때까지 세석평전 철쭉을 가꾸도록 했다. ><br> >영신은 낮에는 철쭉을 가꾸고 밤에는 촛대봉 정상에 올라가 ><br> >촛불을 켜놓고 산신령께 자기의 죄를 빌다가 바위가 되었다. ><br> >촛대봉의 앉은 바위는 영신의 몸이 굳어진 모습이라 전해온다. ><br> > ><br> >한편, 영신이 바위가 되어버린 사실을 모른 호야는 ><br> >부인을 찾아 헤매다가 지쳐 안타깝게도 죽어버렸다. ><br> >호야가 죽은 자리에서 솟아오른 봉우리가 영신봉이다 ><br> >하여, 세석평전의 두 봉우리는 두 연인이 마주 보는 모습. ><br> > ><br> >............................................................. ><br> >............................................................. ><br> > ><br> ><음양샘>은 전설적 여성 빨치산 김점분이 생을 마감한 곳. ><br> >1953년 여름, 토벌대에 쫓긴 김점분 外 15명의 여성 빨치산. ><br> >토벌대에 쫓기다 음양샘 가에서 포위되자 모두 권총으로 자결. ><br> >'반란의 역사' 유적지이고 무형 문화제 가치가 있는 전설 품은 곳. ><br> > ><br> > ><br> > ><br> >대성골. ><br> > ><br> > ><br> >세석 남서쪽 덕평골, 큰세개골, 작은세개골, 수곡골이 모인 계곡. ><br> >현재 무당골이라고 불리울 만큼 무속인들이 많이 모여드는 골짜기. ><br> >과거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 부대'가 불바다 속에서 몰살 된 격전지. ><br> >당시 토벌군은 대성골 능선을 포위, 비행기로 기름 드럼통 투하 폭격. ><br> >4~5일 불바다 하얀 눈밭에서 18세 정순덕 여인 생쌀 한줌으로 버틴 곳. ><br> > ><br> >세석 음양수가 발원지인 대성골의 개울물은 여름 피서객들의 휴양지. ><br> >남향 따듯한 계곡인 용왕소 주변은 돌탑 제단 울긋불긋 천조각 흔적들. ><br> >득도하려는 구도자 및 무속인을 비롯 다양한 현실도피론자들의 은신처. ><br> >작은세개골은 원시림 상단부는 급경사 낙석 위험이 높아 초심자는 위험. ><br> > ><br> > ><br> > ><br> >거림 ><br> > ><br> > ><br> >세석을 오르기에 가장 쉽고 거리가 짧은 들머리는 거림. ><br> >세석산장에서 낭만적 밤을 지낸 뒤 천왕봉 오르기에 적당. ><br> >대부분 세석평전 자체가 목적지인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 ><br> >매표소를 출발, 마지막 민박집인 솔바구 산장을 지나면 거림골. ><br> >큰 지류인 도장골 초입 오른쪽엔 99년 완공된 거찰 길상사가 있다. ><br> > ><br> >도장골 하류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면 거림골이 시작된다. ><br> >도장골 초입에서 세석까지 가느다란 지류 두어 번 건너면 끝. ><br> >내대리 마을 버스종점에서 산행을 시작할 경우는 1시간쯤 추가. ><br> >수량 풍부해 여름철 피서 인파가 몰리는 이곳 역시 빨치산 격전지. ><br> > ><br> >거림은 지리산 주능선상에 위치한 연하봉과 촛대봉에서 비롯되는 도장골, ><br> >세석평원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진 능선 위에 한벗 샘에서 발원한 자빠진골 ><br> >그외 여러 지류가 모여 커다란 계곡을 이루고 60리에 이르는 거림골을 형성. ><br> >산꾼은 밋밋한 거림골 보다 자빠진골이나 촛대봉으로 오르는 도장골을 선호. ><br> >'자빠진 골' 혹은 '엎어진 뜰' 남부능선은 이름 대로 산이 자빠진 듯, 엎어진 듯. ><br> >골짜기가 자빠지고 엎어지며 엉겹결에 파인 듯 원시성이 돋보여 노약자는 위험. ><br> > ><br> >거대한 물살이 물보라 일으키며 내려 꽂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br> >폭포 위 용소는 용이 살았을 듯 넓고 깊으며 주변엔 수백 명 앉을 만한 반석. ><br> >윗용소로 올라가면 전설적인 빨치산으로 불리웠던.. 이현상의 남부군 지휘소. ><br> >그 만큼 도장골이 은밀하고 깊다는 증거...잡목사이로 토굴식 집과 돌담의 흔적. ><br> > ><br> > ><br> > ><br> >길상사. ><br> > ><br> > ><br> >세석으로 오르는 등산로.. 거림 도장골 초입 오른 편에 있는 사찰. ><br> >요정 정치의 산실인 대원각 전재산을 시주 받아 1999년 완공된 절. ><br> >대원각은 정재계를 뒤흔든 '제 2의 어우동' 정인숙 여인 배출한 요정. ><br> >김영한 보살은 가난한 환경때문에 기생이 되어 22살에 운명적인 사랑, ><br> >하지만, 사회적 신분 때문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움 겪었지만 ><br> >'인생사 공수레 공수거'를 몸소 실천하고서 빈손으로 자연의 품에 안긴 그녀. ><br> >1987년 대원각을 법정스님 통해 기증할 뜻을 밝혀 세인들을 놀라게 했던 그녀. ><br> >1997년 12월 개원법회에 김수환 추기경, 조계종 송월주 총무원장 外 4천명 참석. ><br> >1999년 석가모니불 봉안식을 거쳐 완공될 즈음하여 그녀는 1999년 11월 14일 별세. ><br> >길상사는 '반란의 역사' 현장이고 무학대사가 스승 청학거사를 만나 깨달음 얻은 고장. ><br> >길상사가 그곳에 들어선 배경은 그곳 역사 및 입지 특성이 그녀의 삶과 무관하지 않은 듯. ><br> > ><br> >이조 500 년 새 역사의 문을 열고 그 중심에 있던 무학대사. ><br> >23 나이에 진주 길상사에 있다가 원나라로 유학을 갔던 무학. ><br> >지리산은 '오백년 도읍지 한양' 존재하게 한 무학을 배출한 산실. ><br> >무학대사 청담스님 및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맥을 이어 온 고승들. ><br> > ><br> >근대 정치사를 치마 폭에 감싸고 그 흐름 속에서 살았던 그녀. ><br> >'자빠진 골' 혹은 '엎어진 뜰'. 도장골이 합쳐진 곳에 있는 거림. ><br> >동족상잔 반란의 역사 속에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 맴도는 곳. ><br> >사람이 어떻게 살다가..어떻게 죽어야 할지.. 깨닫게 하는 길상사. ><br> > ><br> > ><br> > ><br> >무학대사. ><br> > ><br> > ><br> >무학대사(無學大師) 박 무학(朴 舞鶴) 행장기(行狀記)를 살펴보면 ><br> >충청도 홍성과 서산 사이의 서해안 천수만(淺水灣)에 간월도(看月島). ><br> >6백년 전 관청의 돈을 빌어쓰고 갚지 못해 관가(官家)로 끌려가던 여인. ><br> >학돌재(鶴石峴, 현재 충남 서산군 인지면) 고개 마루에서 산고 끝에 출산. ><br> >포졸들은 아이를 버려둔 채 그 여인을 서산 관아로 끌고 가 사또 앞에 대령. ><br> > ><br> >"에끼, 인정머리 없는 포졸들아! 누가 애 낳는 여인을 끌고 오라더냐! ><br> >당장 저 여인에게 먹을 것과 아이에게 입힐 것을 주어 집으로 보내라. ><br> >산모와 신생아에 드는 돈은 모두 내 월급에서 탕감하라." -사또의 판결- ><br> > ><br> >무학의 어머니인 이 여인의 운명은 15 살 때에 도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br> >첫 아기를 가질 때까지 말을 하지 않으면 큰 인물을 잉태할 상이라는 말을 듣고, ><br> >그날부터 십년간 벙어리 시늉하다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굳게 닫았던 입을 연다. ><br> > ><br> >왜구들 출몰이 잦았고 임신을 했던 그해 현해탄 건너 일본으로 갔다. ><br> >그 배안에서 왜놈들이 여인을 능욕하려 하자 남편의 눈에서 불이 났다 ><br> > ><br> >"에라, 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들아! 애 밴 여자를 탐하다니...!" ><br> > ><br> >박안일은 난투 끝 어깨에 중상을 입으며 왜구들을 물 속에 처넣었다. ><br> >그 배가 바람따라 조류따라 정처 없이 흘러 표류한 곳이 간월도였다. ><br> > ><br> >그 아이의 골상(骨相)이 특이했다. 머릿 가운데 정수리가 산같이 솟았고, ><br> >양쪽 눈섭 꼬리가 유난히 치겨올라갔고, 콧머리는 세봉오리가 우뚝하고, ><br> >얼굴은 4각형으로 거북이 등판 같아 골상학에서 말하는 '학머리 거북얼굴' ><br> > ><br> >아비는 아이가 하늘을 나는 한 마리 학과 같이 할돌재에서 태어났다 하여 ><br> >무학이라 이름 짓고, 마음대로 세상을 살수 있도록 간섭말고 키우라는 유언. ><br> > ><br> >다섯에 글를 깨우치고, 여섯에 4서를 읽고. 열에 사기(史記) 열전(列傳)을 통독. ><br> >열 하나에 3경 춘추(春秋)와 주역(周易)을 통달, 열 다섯 홍안에 혼담이 오갔지만 ><br> >여자를 탐하지 않았고, 열 여덟에 입신양명(立身揚名) 위해 과거(科擧)길에 오른다. ><br> > ><br> >"자네가 여기에 올 줄을 알았지..나를 따라오게." ><br> > ><br> >과거를 보러 개경 가려고 화개(花開)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만난 도승. ><br> >그를 따라 쌍계사 뒤 불일폭포(佛日瀑布) 인근 조그마한 토굴에 당도. ><br> > ><br> >"인간사에는 두 가지 시험이 있다. 하나는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도가(道家) ><br> >과거는 속(俗)스러워 합격을 해도 10년 20년 후에 판서 참판이 되기가 힘드나, ><br> >도가의 과거에 입문(入門)하여 득도하면, 임금보다 높은 왕사(王師)가 되느니라. ><br> >나는 29년 전에 너의 어머니를 만났고, 그 때 이미 네가 태어날 것을 알았느니라." ><br> > ><br> >청오경 금낭결 옥룡자결 삼한산수비기 천문 지리 음양 5행 운기 금단 옥급 수리 ><br> >백련거사비기 책들을 내민 도승은 무학의 증조부 백련도사 제자 청학동 청학거사 ><br> >이리하여 무학은 풍수 도참(圖讖) 비기(秘記)를 공부하고 불가(佛家)에 입문(入門) ><br> >사미승과 비구승을 거쳐 국사(國師)에 이르고, 이성계의 건국공신인 국사가 되었다. ><br> > ><br> >우리나라 산수 풍경은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나온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골격 ><br> >그 대간 사이 산과 물에 맥과 혈을 기본으로 한 풍수지리설에 3년간 몰입했던 무학. ><br> >불도를 터득하려고 조계산 송광사 소지선사 앞에서 머리를 깎고 이름을 무학(無學) ><br> >그 후 경기도 용문사 혜명국사 지도로 선정(禪定) 닦는 법을 배우고나서 득도를 한다. ><br> > ><br> >스물 셋에 진주 길상사에 가서, 스물 넷에 모향산 금강굴에 들어갔다가 원나라 유학. ><br> >서른에 귀국하여 다시 지리산에 10년만에 돌아오자 청학도사는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br> > 다만 도사가 비고 자던 향나무 목침 하나가 무학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안에 유서 한통. ><br> >'네가 이 글을 볼 때는 고려의 왕운이 다하였으니 새 사람을 도와 500년 국조(國祚)를 열라' ><br> > ><br> >이 글을 본 무학은 큰 일을 앞 두고 고향을 찾는다. 삼기현에 들어가 어머님을 만나고, ><br> >비구니가 된 옛 애인 둘도 만났다. 다음 해 어머니와 두 여인이 안거할 고향 절이 무학사 ><br> >아버지가 타계한 간월도에 지은 절이 간월암, 500 년 후 한국 불교계 고승 경허(鏡虛) 배출. ><br> > ><br> >그후 세상을 순례하다가 원주 고달산에 암자를 짓고 정진 중 신돈이 왕정을 어지럽히자 ><br> >함경도 안변 설봉산에 토굴에서, 고려 멸망 즈음에 꿈 해몽을 부탁하는 이성계를 만난다. ><br> > ><br> >닭이 "꼬끼요"하고 우는 것은 '고귀위(高貴位)' 즉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 ><br> >서까래 세 개가 빠진 것을 모아 보면 임금 왕(王) 자가 되니, 왕이 될 징조라는 해몽. ><br> > ><br> >무학의 해몽대로 이성계는 최영과 맞서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고 개성에 와서 왕으로 등극. ><br> >새로운 도읍지를 떠오른 곳이 옛날부터 '한양 도읍지설'과 공주 계룡산 '신도안 도읍지설' ><br> >정감록 저자이자 개국공신 정도전은 신도안 도읍설,. 무학은 한반도 중심 한양 도읍을 주장. ><br> > ><br> >태조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들어 도읍지를 한양, 정도전의 말을 들어 궁궐터를 백악산. ><br> >그후 무학은 국사를 사직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태상왕이 된 이성계와 같이 한양에 온다. ><br> >당시, 권좌에서 물러난 이성계를 만나러 갔던 신하는 모두 그의 활에 맞아 죽어..함흥차사. ><br> >무학대사와 이 성계 두 인물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br> >훗날, 이성계는 무학의 영향으로 불교에 귀의하고, 무학은 나이 79, 법랍(法臘) 61에...열반. ><br> > ><br> >지리산은 '오백년 도읍지 한양' 존재하게 한 무학을 배출한 산실. ><br> >그가 스승 청학 거사를 만나 지리산 토굴에서 깨달음 얻었기 때문. ><br> >무학과 쌍벽 이룬 정도전 저서 정감록은 '계룡산 신도안 도읍지 설'. ><br> ><수도권 이전 논쟁>은 오백년 전 무학과 정도전 대립이 재연되는 듯. ><br> > ><br> > ><br> > ><br> >삼신봉 ><br> > ><br> > ><br> >지리산 주능선에서 남쪽으로 벗어나 청학동을 감싼듯한 삼신봉. ><br> >세석고원 서쪽 영신봉에서 정남향 10Km 산맥을 뻗어내린 삼신봉 ><br> >지리산에서 신(神)자 붙은 영신봉 내,외삼신봉 삼신봉은 10Km 간격. ><br> >청학동(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학동) 마을 입구에서 바라보면 세 봉우리 ><br> ><삼신봉> 등산 코스는 오른쪽 외삼신봉, 가운데 내삼신봉, 왼쪽 쇠통바위. ><br>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100 리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지리산의 전망대'. ><br> >청학동 마을에서 한바퀴 돌아오는 산행은 이 마을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 된다. ><br> > ><br> >2004년 7월 지리산 순환도로 개통에 따라 진주-대전 고속도로의 산청IC로부터 ><br> >하동 쌍계사, 청학동, 함양 백무동 지리산 주요 거점까지 걸리는 시간 1시간 이내. ><br> >삼신봉은 교통 불편해 접근 어려웠지만 청학동과 더불어 향후 찾는 이들 늘어날 듯. ><br> > ><br> > ><br> > ><br> >청학동. ><br> > ><br> > ><br> >청학(靑鶴)은 '태평시절과 태평한 땅에서만 나타나고 또 운다.'는 전설의 새. ><br> >하여, 우리 조상은 중국 문헌을 토대로, 태평성대 이상향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br> > ><br>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100리에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br> >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기록이 있고, 이를 본 고려시대의 이인로, ><br> >조선시대 김종직 . 김일손, 유성룡의 형인 유운용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바 있다. ><br> >신라가 패망할 무렵부터 천년 동안 청학동의 위치는 신비의 베일에 쌓여 있었다. ><br> > ><br> >현재 지리산 청학동 말고도 전설 속의 청학동으로 추정된 곳은 여러 군데. ><br> >불일폭포 부근, 세석고원,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위쪽), 선비샘 아래 등등. ><br> > 말하자면 지리산 곳곳이 전설 속의 그 청학동일 것으로 알려져 왔던 셈이다. ><br> > ><br> >그런 와중에 섬진강 지류인 횡천강을 약 50리 정도 거슬러 올라간 해발 약 800m ><br> >첩첩산중인 청암면 묵계리 학동마을이 전설의 청학동일 것으로 유력했던 이유는 ><br> >그 입지가 전설 속 깊은 골짜기와 유사했고 6.25를 모를 만큼 외부와 단절된 생활로 ><br> >독특한 생활방식을 고집하는 이곳 사람들이 매스컴을 타며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br> > ><br> >현재 전설 속 청학동 원조로 알려진 도인촌(道人村)이라고 불리우는 산골마을. ><br> >단군계 신흥종교 유불선갱정유도교(儒佛仙更定儒道敎) 교도들이 사는 마을. ><br> >6.25 이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현대문화의 부조리한 면을 배제하고, ><br> >인의예지의 인간본성을 수양하여 인간윤리를 실천한다.> 는 교리에 따라 ><br>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유교적인 전통 생활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왔다. ><br> > ><br> >이들은 머리를 땋거나 상투를 틀고 흰옷을 입고 생활하며 ><br> >서당에서 훈장 가르침을 받고,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여긴다. ><br> > ><br> >80년대 후 청학동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외부사람들의 출입이 잦아졌고, ><br> >어쩔 수 없이 변화의 물결에 휩싸여 도인촌이라기보다 관광촌으로 탈바꿈. ><br> >예전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 은둔지로서의 청학동 성격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br> >그러나 상투를 틀고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을 지리산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첫인상 ><br> >마치, 과거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세월을 여행하는 느낌. ><br> >비록 수백 년 뿌리 깊은 마을도 아니고, 대대로 전승해 온 역사가 있는것도 아니지만, ><br> >근대화 및 서구화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청학동 사람들이 지키려는 의식과 생활양식. ><br> > ><br>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소중히 여겨야 할 듯.' ><br> > ><br> >최근 들어 관광 수입에 의해 주민 소득이 높아진 청학동 주민들. ><br> >유교 교육만으로는 2세들이 현대 사회에서적응 어렵다는 생각에 ><br> >자녀가 성장하면 하동이나 진주 등 주변 도시로 유학을 보내고 있다. ><br> > ><br> >청학동 가는길은 하동읍 2 번국도를 타고 횡천면에서 1시간 20여분 산길. ><br> >지금은 청학동과 산청을 이어주는 삼신봉 터널이 뚫리고 주변도로가 포장. ><br> >새 도로를 이용해 청학동에 가려면 대전∼진주간 고속도로 단성I C에서 나와 ><br> >20번 국도로 중산리 관광지에 간후 시천면 내대리에서 삼신봉 터널쪽으로 진입. ><br> > ><br> > ><br> > ><br> >남 난희. ><br> > ><br> > ><br> >청학동 도인촌 댕기 총각을 만나 결혼 청학동에 둥지를 틀었던 산악인. ><br> >1984 년 1월 1일부터 76일 동안 국내 최초로 백두대간 단독종주에 성공. ><br> >그당시 27 세 처녀의 몸으로 전인미답 백두대간 도전은 불가사의한 모험. ><br> >1986 년 여성 세계 최초로 해발 7455 미터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봉 등정. ><br> >1989 년 '금녀의 벽'이라고 불리는 설악산 토왕성 빙벽 폭포를 두 차례 등반. ><br> ><하얀 능선에 서면> <낮은 산이 낫다> (학고재·2004)라는 세 권의 책을 펴냄. ><br> >1991년 강원도 정선으로 들어가 삼 년 간 '정선자연학교' 교장으로 지냈던 삶 ><br> > ><br> >'정선자연학교'는 임대한 폐교에서 도시 학생들에게 여름철의 자연 교육과정. ><br> >그녀는 학생들과 함께 산에 오르고, 들풀 뽑고, 돌탑 쌓고, 물놀이 함께 어울림. ><br> >자라나는 2세에게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천연식단으로 건강 지켜줄 목적. ><br> >하지만, 태풍 루사로 인해 그녀가 2년 반 쏟았던 정성은 물거품처럼 폐허로 변모. ><br> > ><br> >그 후 그녀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백두대간'이라는 전통 찻집을 하기도 했는데, ><br> >그녀는 그 찻집의 실내 장식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대동여지도 생각이 났고, ><br> >이우형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대동여지도 한 점을 그 찻집 천장에 온통 붙였었다. ><br> >그녀는 스님이 된 남편 도움으로 아들 기범이와 함께 지리산 화개 장터 위쪽에 둥지. ><br> >그 흙집에서 증제차, 녹차, 가죽나물, 남난희 표 된장 등등 천연음식을 제조하며 생활. ><br> >그곳 화개골에서 언제부터인가 남성용 사각팬티와 러닝을 즐겨 입게 되었다는 남난희. ><br> >남성같은 강인함보다 옷을 입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편안함 때문에 그렇게 입는 남난희. ><br> >그녀는 지리산 천왕성모처럼 만난 남편과 헤어져, 마야부인 전설처럼 사는 살아있는 전설. ><br> > ><br> > ><br> > ><br> >화개골. ><br> > ><br> > ><br> >섬진강 기슭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10리 벚꽃길’로 알려진 화개골. ><br> >실제 거리 6km쯤 되는 이 길은 50~60년이 넘은 아름드리 벚나무들. ><br> >구불구불한 계곡을 따라 활짝 피어있어 벚꽃 터널 길은 일명 '혼례길'. ><br> >사랑하기 시작한 젊은 남녀가 걸으면 백년가약 맺는다는 유래가 있다. ><br> >화개장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쌍계사까지 걸어서 다녀오는데 두어 시간. ><br> >승용차로 쌍계사를 가면 올라갈 땐 화개골 서쪽길, 내려올 땐 동쪽길 현명. ><br> > ><br> >매년 벚꽃이 만개할 때에 맞춰 화개골 일원에서 <화개장터 벚꽃축제.> ><br> >자세한 문의는 <www.hwagae.org> 하동군 문화관광과(055-880-2371). ><br> > ><br> >화개골 쌍계사 근처엔 산골 민박집이 많고, 요즘엔 여관도 여럿 들어섰다. ><br> >화개골에서는 지리산 자락에서 채취한 산나물 겻들인 산채정식이 알려졌다. ><br> > ><br> >교통 88고속도로 남원 IC-19번 국도-구례- 토지-화개장터. ><br> >호남고속도로 전주 IC-17번 국도-남원-19번 국도-구례-화개장터. ><br> >서울남부 고속터미널 하동(구례 경유) 직행버스 1일 6회(09:10~18:30) 운행. ><br> >기차편은 서울역에서 구례구 역 이용. 구례와 하동에서 화개장터 가는 군내버스. ><br> > ><br> >벚꽃 연분홍 터널이 잎사귀 연두빛으로 바뀌는 곡우(양력 4월 20일) ><br> >화개골엔 벚꽃 향기 대신에 햇차 우려낸 향내음이 온 마을에 가득하다. ><br> >차는 곡우 전 거두는 우전(雨前), 찻잎은 5월 초에서 6월초 사이에 딴다. ><br> > 차의 기원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농사의 신’ 신농씨(神農氏)로부터 시작. ><br> >신농씨가 모든 식물의 맛을 보다가 독초에 중독되었을 때 찻잎을 먹고 해독. ><br> > ><br> >우리나라는 신라 흥덕왕 때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 씨앗을 가져와 ><br> >지리산 기슭에 심은 후 널리 성행, 화개골에는 ‘차시배지(茶始培地)’ 비석. ><br> > ><br> >그곳 천년고찰 쌍계사에는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雙磎 石門’ ><br> >최치원 문장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인 진감선사 부도비 ( 국보 제47호 ) ><br> >화개골 끝 지점 칠불사에는 가야 김수로왕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전설. ><br> >한번 불을 때면 49일이나 간다는 신비의 온돌이 있는 ‘아자방’을 볼 수 있다. ><br> > ><br> > ><br> > ><br> >쌍계사와 불일폭포 가는 길. ><br> > ><br> > ><br> >고속도로를 벗어나 구례에서 하동으로 빠지는 '섬진강 길 팔십리'. ><br> >강바람 맞으며 달리면, 섬진강과 화개 천이 만나는 초입, '화개장터'. ><br> > 김동리 소설 ‘역마’ 의 무대이고 가수 조영남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br> > 예전엔 전국의 3대 장터로 꼽혔지만,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는 모양. ><br> > 번성했던 옛 모습은 사라졌고, 터미널 주변엔 식당만이 옛 영화를 간직. ><br> > ><br> >화개에서 쌍계사까지 길목마다 자리잡고 있는 찻집만 얼추 30여 개. ><br> >벚꽃이 눈보라처럼 흩날려 연인 가슴을 연분홍으로 물들이는 4월 초. ><br> >'화개천 야생차밭 다향'도 멋들어진 향내 뿜으면 몰려드는 전국 관광객. ><br> > ><br> >화개천 강바닥엔 여인의 살결 닮은 매끄러운 돌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br> >한껏 물 오른 연둣빛 실버들은 긴 가지 늘어뜨린 채 흐르는 물을 감상하듯. ><br> >수박 맛 나는 5월의 은어 및 화개천변 계단식 야생차밭이나 산허리의 보리밭. ><br> >이색적 풍경이 펼쳐 진 섬진강따라 국도를 달리면 지리산 남쪽 기슭의 쌍계사. ><br> >진주나 하동 오가는 버스가 있어 인근 대학생들 하루 나들이 코스로 즐겨 찾는다. ><br> >화개천 다리를 건너면 절로 가는 길 옆엔 산채비빔밥, 은어회, 재첩, 장어구이 식당 ><br> > ><br> >쌍계사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운치 있지만 입장료 3,400원은 비싸다는 생각. ><br> >오른쪽 계곡가 오솔길은 너도밤나무, 단풍나무, 전나무, 단백나무 숲이 울창. ><br> >100m 채 되지 않은 거리를 걷다보면 세속의 번뇌가 말끔히 씻겨져 버리는 듯. ><br>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 봉안한 천왕문 지나면 구층석탑과 팔영루 대웅전 경내. ><br> >두 계곡 개울이 감싸안 듯 흐르는 명당 위치에 있어 쌍계사라는 유래가 전해 짐. ><br> > ><br> >금당 옆으로 난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야영장과 불일폭포를 만날 수 있다. ><br>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국내 2대 폭포이자 지리산 10경 중 하나.. '불일폭포'. ><br> > 지리산 백학봉과 청학봉 사이의 계곡에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는 오색무지개. ><br> >쏟아지는 물이 많을 때에는 높이 60m에서 떨어지는 폭포 소리가 사방 1km를 울림. ><br> > ><br> >찾아가는 길은 서울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장수 IC에서 빠져나간다. ><br> >19번 국도를 타고 남원방향으로 가다가 구례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지름길이다. ><br> >구례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향 30분 달리면 화개입구. 화개장터에서 10 분거리. ><br> > ><br> > ><br> > ><br> >섬진강. ><br> > ><br> > ><br> >우리 말 뜻이 '뚝 나루' 섬진(蟾津)에는 <섬진강 전설>이 담겨 있다. ><br> >어느 해 여름 홍수로 범람한 강물에 떠내려가는 두꺼비를 구한 처녀. ><br> >불쌍히 여겨 그 두꺼비를 집으로 데려 와 아침 저녁 밥을 먹여 키웠다. ><br> >처녀는 두꺼비를 기르고 보살피면서 정이 들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br>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또 다시 홍수로 온 동네가 떠내려간 참변이 일어났다. ><br> >강북으로 건너야 살 수 있는데, 물결이 급해 처녀는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 ><br> >이 때에 두꺼비가 처녀를 등에 업고 거센 물결을 헤치고 건너가기 시작했다. ><br> >두꺼비는 처녀를 업어 건넌 후 기진맥진하여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 죽었다. ><br> >처녀는 슬픔에 젖어 그 나루를 '두꺼비 나루'라고 부른데서 유래된 이름...섬진. ><br> > ><br> >섬진강은 전남 곡성군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을 발견. ><br> >신석기시대에는 주변지역과 문화교류 생활한 것으로 추정. ><br> >섬진강 일대 청동기 시대 유물은 동서 해안지역 문화의 복합. ><br> >이 시기 주거 흔적을 보면 대가족에서 소가족 제도로 변한 듯. ><br> > ><br> >삼국시대 초기 섬진강 유역은 마한과 변한 영역에 속한 듯. ><br> >섬진강 유역이 언제 백제 영역에 편입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br> >한강유역의 백제가 4세기 근초고 왕 대에는 전남 남해안 지역. ><br> >무령 왕 거쳐 무왕 대에는 섬진강 유역 전체가 백제의 영향력. ><br> > ><br> >그 후 백제는 의자 왕 실정과 정쟁으로 당과 신라 연합군에게 멸망 ><br> >신라의 삼국통일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완산주에서 무진주에 소속 ><br> >신라 왕권이 무너지자 견훤이 무진주에서 전주로 옮겨 후백제를 건국 ><br> >무진주는 후백제 영역 전라도에 속했던, 삼국시대 격전지..섬진강 지역. ><br> > ><br> >'반만년 유구한 역사와 함께 소리없이 흘러 온 섬진강.' ><br> > ><br> >전북 진안군 백운면에서 발원 남해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강. ><br> >길이 212.3㎞. 유역 면적 4896.5㎢. 한국에서 아홉번 째 긴 강 ><br>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부터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경계선. ><br> >경상도와 전라도를 싫던 좋던 지리적으로 분활, 갈라 놓은 섬진강. ><br> >이젠 섬진청류처럼 하나 되어 남북통일 이루고 세계로 나가야 할 듯. ><br> > ><br> >전남 곡성군 오곡면 압록리부터 고운 모래사장 하천이 펼쳐진다. ><br> >65년 운암제 아래 섬진강 다목적댐이 건설되어 유역 변경식 발전. ><br> >계화도(界火島) 간척지에 농업용수 공급 및 광양만에 제철소 가동. ><br> >섬진강 하류 하동군 화개면 용강리에는 명산물로 은어와 참게 유명. ><br> > ><br> >섬진강 맑고 푸른 물.., 섬진청류는 지리산의 10경 중 하나. ><br> >지리산을 감싸 흐르는 섬진강은 후손에게 고이 물려 줄 보물. ><br> > ><br> > ><br> > ><br> >칠불암과 허황후. ><br> > ><br> > ><br> >줄거리로 보아 <불교의 남방 전래설>과 관련이 있는 흥미로운 전설. ><br> >가락국 김수로왕 허왕후는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br>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왕자들을 만나 보기 위해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br> >그러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 조차 여자라고 하여 선원에 들어갈 수 없었다. ><br> > ><br> >여러 날을 선원 밖에서 안타깝게 기다리던 허왕후는 ><br> >참다 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지만.. ><br> > ><br> >"우리는 이미 성불하여 속인을 만날 수 없으니 돌아가세요" ><br> > ><br> >허왕후는 아들들의 음성만 들어도 반가웠으나, ><br> >얼굴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는데.. ><br> > ><br> >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세요." ><br> > ><br> >허왕후는 연못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아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br> >실망한 허왕후가 발길을 돌리려다 연못속을 들여다보니 합장한 일곱 왕자. ><br>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잠깐, 다시 사라진 아들들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br> > ><br> >그후로부터 이 연못은 <영지>, 수로왕이 머물던 곳을 범왕촌으로 불렀는데, ><br> >현재는 범왕리로 변했고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으로 불렀는데, ><br> >지금은 쌍계사 아래 편에 있는 대비리로 지명이 바뀌어 불리우고 있다. ><br> > ><br> > ><br> > ><br> >선비 샘. ><br> > ><br> > ><br> >세석산장에서 벽소령 산장 2/3 지점에 있는 샘. ><br> >벽소령에서 세석 갈 경우 이곳은 피로회복 휴식처. ><br> >덕평봉을 등진 남쪽 상덕평 능선에 있는 샘터 이름. ><br> >샘이 마르지 않고 그 주위는 평탄해 야영하기에 적합. ><br> >그 샘터 위에 초라한 고분 하나 외로이 자리잡고 있으니 ><br> >이 무덤과 샘에 얽힌 한 화전민의 서글픈 사연이 서려있다. ><br> > ><br> >옛날 덕평골 아랫 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br> >노인은 조상 대대로 화전민이라 평생 가난했던 박복한 사람. ><br> >무식하고 얼굴도 못 생겨서 주위 사람들의 천대받으며 살았다. ><br> >노인은 평생 소원은 사람들에게 선비 대접을 받아 보는 것이었다. ><br> > ><br> >그가 늙어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형제에게 남겼던 유언. ><br> > ><br> >자신이 죽거든 그 시체를 상덕평 샘터위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고 ><br> >효성 지극한 아들들은 훗일 그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 위에 매장했다. ><br> >그후부터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은 이곳에서 샘물을 마시게 되었고 ><br> > 물을 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되어 ><br> >노인은 생전에 한이 되었던 선비 대접을 무덤 속에서 받게 되었다 한다. ><br> > ><br> >훗날 이 동네 사람들이 그 노인의 불우했던 생전을 위로하기 위해 ><br> >소박한 인정으로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전해져온다. ><br> > ><br> >그러나, 지금은 그 무덤도 사라졌고 샘물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br> >서서 받도록 고쳐졌기에 선비샘의 옛 모습은 전설로만 남아있다. ><br> >다소 이용 불편해도, 전설을 소중히 여겨, 원상회복 바램 깃드는 곳. ><br> > ><br> > ><br> > ><br> >빗점골. ><br> > ><br> > ><br> >세석에서 벽소령산장 2km 전, 능선 오른쪽 도로 따라 하산하면 빗점골. ><br> >의신마을 상단 계곡부터 빗점골.(삼정마을까지를 의신계곡이라고도 함.) ><br> >의신에서 삼정까지 3km 거리로 비포장도로 변으로 좁은 계곡이 이어진다. ><br> >수만평 초원지대를 염소 방목장으로 활용하며 3 가구가 살고있는 삼정 마을. ><br> >벽소령까지 연결된 이곳 산간 군사도로는 주민들에게는 채취한 고로쇠 수송로. ><br> >벽소령에서 삼정마을까지 7km지점에 주차장 인근 폐가들이 예전 빗점마을 흔적. ><br> >지리산 가장 높은 곳 마을이었지만 전란 중 당국이 삼정 또는 의신마을로 집단 이주. ><br> > ><br> >지리산의 수많은 골짜기 가운데 가장 깊고 깊은 곳에 숨어있는 계곡. ><br> >그 빗점골로 들어가면 절터골과 산태골, 온골이라는 더 깊은 골짜기들. ><br> >남부군 소설의 장면처럼 수 백명 남녀가 서로 몸 가릴 목욕 충분한 개울. ><br> >남부군 빨치산 행적이 가장 극적으로 묘사된 너덜지대 '합수내 흐른바위'. ><br>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전략회의를 주최한 아지트이자 최후를 맞이한 곳. ><br> >그곳 지구당 회의에서 이현상은 사령관에서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고도 함. ><br> >지리산 중심부에 있는 남부군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지금은 고로쇠 채취현장. ><br> > ><br> > ><br> > ><br> >벽소령 ><br> > ><br> > ><br>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지리산 종주 중간 지점에 위치. ><br> >고도 낮아 예전에는 화개골과 마천골 잇는 남북황단도로 ><br> >벽소령은 광대한 지리산 중심의 허리처럼 잘룩한 고개로서 ><br> >그 주위에 높고 푸른 산등성이가 겹겹이 쌓인 풍광 빼어난 곳. ><br> >벽소령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치 스스로 신선이 된 듯한 착각. ><br> >산이 낮고 구름이 발 아래에서 주위를 뒤덮기에 그런 느낌 드는 듯 ><br> >그곳 달빛이 희고 푸르다 하여 벽소령의 명월은 지리산 10경 중 하나. ><br> >지금은 그곳에 산장이 있어 지리산 종주 중에 하루 묵어가기 적당한 곳. ><br> > 산장의 편리함 좋은 만큼, 인적 없던 시절 벽소령 명월이 아쉽기도 한 곳. ><br> > ><br> > ><br> > ><br> >형제 봉. ><br> > ><br> > ><br> >옛날 성불수도 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유혹을 경계하여 ><br>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 ><br> >하여, 몸이 굳어져 돌로 변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 ><br> >그곳 달빛은 지리산 10경 중 하나인 벽소령의 명월보다 못지 않다. ><br> >태고의 정적과 고요 속에 구상나무 숲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빛 ><br>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고 시리도록 푸르고, 창백한 달빛과 은하수 ><br> > ><br> >신비함마저 흐르는 그곳 달빛에 취해 마시는 커피 한잔의 향기. ><br> >태양처럼 뜨겁고 사랑처럼 달콤하며 악마처럼 검다는 느낌의 맛. ><br> >신의 저주를 받은 늑대가 보름 굶고 보름은 달 뜯어 삼켜야 하는 벌. ><br> >늑대가 씹다 흘린 달 조각 밤하늘에 흩어져 별 되었다는 서양의 전설. ><br> >그곳에서 비박하며 마시는 커피 맛은 동 서양 전설 함께 어우러지는 듯. ><br> > ><br> > ><br> > ><br> >삼각고지. ><br> > ><br> > ><br> >형제봉에서 연하천 가는 길목에 행정구역 3 면이 만나는 곳. ><br> >3도가 만나는 삼도봉 또는 형제봉과 지리적으로 혼돈되는 곳. ><br>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에서 연하천 산장으로 이어진 직등 코스. ><br> >빨치산 남부군 사령관 이헌상이 신출귀몰하게 토벌군 괴롭히던 곳. ><br> >삼각고지 명선봉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일명 '남부군 피의 능선' ><br> > ><br> > ><br> > ><br> >연하천 ><br> > ><br> > ><br> >지리산 주능선 상의 연하봉(1,462) 바로 아래 위치한 연하천 산장. ><br> >연하천(烟霞泉)은 오묘한 자연(烟霞)속의 정취어린 샘(泉)이란 의미. ><br> >토끼봉과 명선봉 삼각고지, 벽소령 능선 한 가운데 명선봉 아래 위치. ><br> >토끼봉에서 6km거리며 벽소령에서도 6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br> >민간인이 위탁 관리하는 연하천 산장은 아담한 규모이지만 정취 있는 곳. ><br> >8km 거리에 있는 뱀사골 산장보다 연하천 산장을 즐겨 이용했던 등산객들. ><br> >그러나, 6km 떨어진 곳에 벽소령산장이 들어서자 연하천 산장은 한산한 듯. ><br> > ><br> >'첩첩산중의 고도'처럼 바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없는 듯 보이는 곳. ><br> >반선에서 이 산장까지 11km의 짧은 거리로 바로 오를 수 있는 지름길. ><br> >뱀사골 지류에 은밀하게 숨은 와운마을 거쳐 연하천 산장에 닿는 오솔길. ><br> >와운마을 개울은 동남쪽 삼각봉과 연하봉 사이에서 발원해 뱀사골로 합류. ><br> > ><br> >하동군 의신마을에서 빗점 골을 거쳐 오르는 등산로도 숨어 있다. ><br> >삼각봉을 거쳐 함양군 마천면 삼정마을로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다. ><br> >지금은 연하천산장에 물품 운반할 때 주로 이용하는 지름길 등산로. ><br> >삼각 고지를 거쳐 함양군 삼정으로 이어진 등산로는 8km 거리 지름길. ><br> >연하천 주변은 빼어난 산세 못지않게 아픈 전쟁의 상흔이 전해지고 있다. ><br> >형제봉 아래 연하굴은 길이 15m 가량, 20여m 20 여명 긴급 대피 가능한 곳. ><br> > ><br> >길이 없는 듯 보이는 곳에 숨어있는 접근 루트 많은 연하천 산장 주변. ><br> >이 일대 원시림은 여순반란 사건과 한국전쟁 당시 무장공비들의 은신처. ><br> > ><br> > ><br> > ><br> >토끼봉 ><br> > ><br> > ><br> >주능선 상에서 천왕봉이 멀리 바라보이는 1533m 봉우리. ><br> >반야봉 불무장등 노고단 촛대봉 삼신봉 연결하는 남부능선 ><br> >토끼봉이란 지명은 토끼와 관계없이 방위 개념에서 비롯됐다. ><br> >지리산의 상징적 봉우리 반야봉에서 정동쪽에 위치해 있다는 뜻. ><br> >24 방위의 정동에 해당하는 묘방(卯方)이라 해 토끼봉, 또는 묘봉. ><br> > ><br> > ><br> > ><br> >화개재. ><br> > ><br> > ><br> >주능선 상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 '운봉 무더미' 설화 알려진 곳. ><br> >조상 3 대가 소금장수인 운봉사람이 일흔 살에 화개에서 소금을 지고 ><br> >운봉으로 넘어가다 화개재에 이르러 지쳐 소금을 진채 쓰러져 죽었는데 ><br> >손자가 할아버지를 그 자리에 묻고 정성을 다해 큰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br> >화개재 언저리의 큰 무덤을 두고 그 소금장수의 무덤이라 해 운봉무더미 ><br> > ><br> >이 설화에서 보면 화개재는 해안지방의 소금 및 수산 특산물과 ><br> >내륙지방의 삼베를 비롯한 농산물을 서로 교환한 삶의 고갯마루. ><br> > ><br> >목통마을에서 출발해 연동골을 거쳐 화개재로 가는 길. ><br> >역시 오랜 도로 기능의 역사 덕분에 등산로가 잘 열린 듯. ><br> >수려한 경관 배경의 칠불사 아래의 첫 마을로 사하촌(寺下村). ><br> >목통마을은 10 여 가구 사는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개발의 조짐. ><br> >지금은 승용차가 쉽게 오를 수 있어서 물밀듯이 들어오는 관광객. ><br> >그런 가운데서도 마을앞 계곡에는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물레방아. ><br> >산 너머 직전마을로 넘어가는 좁다란 길 이어주는 돌다리가 이채롭다. ><br> > ><br> >여기서부터 연동골을 들머리로 화개재를 오르는 등산로 초입. ><br> >아직 덜 알려진 연동골은 아기자기한 경관과 조용한 것이 특징 ><br> >목통마을에서 30 여분 오르면 연동골의 으뜸 명소인 스님소(沼) ><br> >칠불사 스님들이 옥류에 세속을 씻듯 목욕한다 하여 붙여진 지명. ><br> >1967년 서해안 무장공비 9명 지리산 침투사건 후 연동마을을 폐쇄. ><br> > ><br> > ><br> > ><br> >뱀사골. ><br> > ><br> > ><br>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사이 울창한 원시림 지대에서 발원된 물줄기. ><br> >기암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절경을 일구어 놓아 뱀사골의 계곡미는 장관이다. ><br> >우리나라 계곡의 대명사로 손색 없지만 그 품이 넓고 깊어 쉽게 오염되지 않는다. ><br> > ><br> >1300년전 반선 고을 송림사라는 절은 해마다 불제자의 본보기 승려를 뽑았는데 ><br> >그 승려가 칠석날 정성껏 기도하면 구름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 극락으로 간다하여 ><br> >불도들은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고 승려를 뽑는 행사는 해가 갈수록 성대해져 갔는데, ><br> >서산대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사람은 불심이 돈독해도 신선이 될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br> >그해에 뽑힌 승려 에게 독 묻은 옷을 입혀 기도하게하고 몰래 숨어서 동정을 살펴보았다. ><br> > ><br> >자정이 넘어서자 신선대 밑 용소가 요동치더니 거대한 이무기가 나와 승려를 덮쳤다. ><br> >서산대사는 흉계를 꾸민 송림사가 승려를 이무기의 제물로 받친 비밀을 알게 되었다. ><br> >다음 날 신선대에 가니 승려와 이무기가 함께 죽어 있었고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은 후, ><br> >사람들은 이 골짜기 이름을 뱀이 죽었다 해서 뱀사골, 입구 마을을 <반선>이라 하는 것도 ><br> >신선이 되겠다는 승려가 이무기의 밥이 되어 반쪽 신선 밖에 되지 못했다하여 붙여진 이름. ><br> > ><br> > ><br> > ><br> >피아골. ><br> > ><br> > ><br> >노고단과 반야봉 사이 계곡 단풍으로 유명한 지리산의 10경. ><br> >봄에 피어나는 철쭉은 거울 같은 계곡 물에 그 고운 빛 비추고 ><br> >여름에는 햇살조차도 파고들지 못할 만큼 짙은 녹음이 우거진다. ><br> >가을 단풍이 아름답고, 겨울엔 인적 드문 호젓한 산길에 '눈의 나라'. ><br> >계곡 초입에 지리산 제일의 거찰이었다는 연곡사와 국보급 문화재. ><br> > ><br> >매표소부터 피아골 산장까지 6km는 계곡을 오르는 길이 즐겁다. ><br> >피아골 산장에서 임걸령까지 2km는 계곡에서 떨어진 능선 길이다. ><br> >피서철 물놀이 좋은 곳은 연곡사에서 직전마을거쳐 피아골 산장까지. ><br> > ><br> >계곡 입구부터 삼홍소까지가 특히 아름다운 가을이면 ><br> ><삼홍소>란 이름에 걸맞게 온통 <골짜기 붉게 물들인 단풍>. ><br> ><붉은 물감에 젖은 듯한 계곡물>과 <삼홍소 바닥 주변의 바위>. ><br> > ><br>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의 중턱에서 발원한 맑고 풍부한 물이 ><br> >임걸령 ·불무장등 피아골 ·연곡사 등을 지나 섬진강으로 빠진다. ><br> >옛날 이 일대에 피밭[稷田]이 많아 피밭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br> > ><br> >임진왜란 ·한말(韓末) 격동기 ·여순반란사건 ·6 ·25전쟁 등 ><br>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br> >10월 말 <피아골 단풍제>인 산신제는 1977년부터의 연례행사. ><br> > ><br> > ><br> > ><br> >종녀 촌. ><br> > ><br> > ><br> >피아골 깊은 골짜기에 씨받이 여인들 마을 ‘종녀촌.’ ><br> >씨받이 여인들과 시동들 거느리고 살던 ‘성신 어머니’. ><br> >인근 마을에 자식 없는 집 있으면 씨받이를 보낸 그녀. ><br> > ><br> >아들을 낳게 해주면 그 대가로 물품을 받았고 ><br> >딸을 낳았을 때에는 그 아이를 종녀로 키웠기에 ><br> >종녀의 운명은 어머니로부터 딸로 이어진 대물림. ><br> > ><br> >종녀촌 지배하는 성신굴에서 성의 축제를 펼친 그녀. ><br> >거대한 성신상과 남근을 새긴 제단이 있었던 성신 굴. ><br> >종녀들에게 인내와 체념 강요하며 불태운 그녀의 욕망. ><br> >종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시동들과 불태웠던 성의 축제. ><br> >무한한 생산능력을 빈다는 기원제 핑계 삼아 불태운 향락. ><br> >남근 새긴 제단에서 외우던 주문 춤으로 변할 즈음이 절정. ><br> >‘시동들과의 향락’ 씨받이 여인들에게 보이는 것이 축제의 막. ><br> >종녀들에게는 가혹한 성의 축제였다는 토속적 에로티시즘 전설. ><br> > ><br> > ><br> > ><br> >피아골 산장지기 함태식 옹. ><br> > ><br> > ><br> >1928년 구례에서 태어나 순천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수학. ><br> >1970년부터 노고단 산장지기 였고 현재는 피아골 산장지기. ><br> >1991년 왕시루봉 외국인 별장지기 자원, 두 곳 지리산 지킴이. ><br> > ><br> >그는 지리산을 찾기도 어려웠던 시절 홀몸으로 노고단에 올랐다. ><br> >전란 중에 불 탄 외국인 별장을 산장으로 개조하려던 노력은 실패. ><br> >혼자 힘으로는 재보수에 필요한 자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br> >71년, 노고단에 무인 산장이 지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내려갔다. ><br> >관리인이 없어 폐허가 된 무인산장을 보수해 노고단 산장지기로 정착. ><br> > ><br> >무인산장에서 새우잠 자며 겨울을 지내느라 폐 한 쪽을 잘라내는 수술. ><br> >대부분의 산장지기처럼 그 역시 엄해 노고단에 쓰레기 버리면 하산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