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다리(福多里)
용강(龍江), 보령(寶嶺), 신기(新基), 수평(水坪), 쌍산(雙山), 용촌(龍村), 행정(杏亭), 복다리 리(福多里)에,문길리(文吉里)
일부를통폐합하여 복다리라 통칭하였다 조계산 기슭 마을 이다.
용촌(龍村)
1594년에 충북에서 이인하가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셋돔,아랫돔, 웃돔으로 나누어 부르며 처음에는
‘용머리’라불렀는데 용촌으로 변경되었다.
마을의 산세가 용의 형국이란다. 그래서 용머리다. 이를 한자로 용두(龍頭)라 썼다 그런데 .용두, 용머리란 마을은 흔하다. 대체
로 산줄기가 뻗어 오다가 우뜩 선 듯 끝난다. 이런 산끝 .을두고 이르는지명이다.산세가 이름을상징하고 있다.그 산세를보고사람
들이 찾아낸 이름이다.그래서 용두라부르는곳이 많다
월평(月坪) .
1800년경에 쌍산에서 조광호가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조선 시대에 전정제도 (田井制度)에 천자문의 글자 순서에 의
하여 토지 등급을 맺었는데 이 곳을 月(월) 자로 등 급 표시를 하여 월평(月坪)이라 하였고 월자(月字) 마을이라불렀다고 한다.
들 이름이 마을 이름이 된 샘이다.또한 마미등(馬尾登), 청미등(靑尾登)이라부르기도 한다. ll
마을 입구에 600여 년이 되는 당산나무가 있다 거기에 당집(성황당)을 짓고 정월 보름에 당산제를 지냈다 1895년에 나무가 고사
하여 베어 버리고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당산 나무 주위에 바위가 듬성듬성 있다 이 바위에서 백일 기도를 하면 자식을 얻고 소
원을 성취하였 다고전한다. --
용미등에 1956년에 옹기막을 짓고 옹기를 구웠다. 그 때부터 마을에 불행이 생겼다. 어느 스님이 마미등에 불을 넣으면 화를 면
하지 못할것이다
라고 하여 1964년에 옹기막을 폐쇄하였다 그 뒤로 과연 불행한 일이 끊기고 마을이 평온해 졌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생생하게
살아 있는마을이다. 말꽁무니에 불을지폈으니 오죽 이나뜨거웠으리 ! 그 뜨거움에 놀란 말들이 미친 듯이 뜨거워 달렸을 것이니
마을에 화가 미칠 법도 하다.
복다(福多) -
옛날에는 卜多(복다)라고썼는데 1912년에 조선 총독부의 행정구 명칭 일람에 福多(복다) 로 적었다. 그러므로 ‘복다 란 우리말
이름이다. 한자의 音(음)을 따서 卜多(복다)로 표기하였다福多(복다)라로표기한것은 미화(美化)한것이다. l
그런데 마을에서 서남쪽 lkn쯤에 ‘칠개 토교’가 있고 보령사터가 있다. 마을사람들은 보조국사가 송광사에서 보령사로 다시 아
미산로 왕래하면서 도포 자락에 흙을 담아 일곱 곳 을 메워 통행에 편리하도록 했다 흙을 메운곳을 지금 칠개토교’라부른다. 이
전설이 마을 이름을 알아내는 실마리 같다. 토교(土橋)는 흙으로 놓은 다리다. ‘징검다리’도 다리다. 냇물에 띄엄띄엄 바위를
놓아사랍이 밟고 건너는 다리다. 우리 지방에서는 이것을 노디’ 라고 부른다 .
보조국사가 도포 자락에 흙을담아 계곡을메워 놓은 다리란 뜻으로 ‘복다리(卜橋) 라 불렀거나 ‘흙으로 메운다리(복토다리)’가
‘복다리’로줄어들고 이를 卜多(복다) 또는 福多(복다)로 한자의 옷을 입힌 것이 아닐까? 卜(복)’자는 이두(史讀)로 쓰일 때는
짐, 진,지’로 읽으므로 ‘복다리’는 ‘징검다리’로 읽을수도 있다. 이러한추정이 맞다면 고승의 보살행을 흠모하던 당시의 사
림들이 그 곳에 복다리란 이름을 붙였고 거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칠개토교’가 마을
에서 lkm나떨어져 있으므로 마을
이름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으나 마을 터도 시대에 따라 이동하는 것을 참작하고 처음에 마을이 생길 때는그곳에 마을이 있었다
고생각하면 기능한 추정이다.
1580년경에 연안 이씨(李民)가설촌하고조씨,강씨가 입주하였다고하나 이것은 현재 살고있는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뿐, 그 이전에
도사람이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용곡(龍谷)
1183년경에 터를 잡았고 그뒤에 김씨와 조씨가들어왔다고전한다 마을에 음각한 !부처바구’가 있다 비가 내리면 부처의 형상이
선명하게 나타나고 가물면 희미하다 이런 기이한현상때문에 !부처 마을’이라부르기도 한다.용녀총(龍女據)이 있다 옛날에 아름
다운처녀가살았다 그 처녀가냇물로 빨래를 하러 갔는데 해질녁에 이상하게 말방올 소리가들여오더니 홍안소년이 나타났다 처녀는
급히 집으로돌아와 버렸다. 그 밤에 말방울 소리가 또 들려 처녀는 문을 잠그고 누웠으나 소년이 방으로 들어왔다.그래서 처녀와
정을통했고 그 뒤로 밤마다 찾아와 새벽녘에 돌0}가곤 하였다 몇 해를그러하였다.처녀는 아들을 낳아소중히 길렀다 둘째 아들이
백일 되던 날저녁에 처녀가잠든사이에 두 이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그 뒤로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 처녀는시집을 가지 못하고
한 을 품고 살다가 죽었다.
마을사람들이 그 여인을불상히 여겨 묻어 주었고 그 무텀을 용녀총(龍女塚)이라불었다. 지금도수통산 한가운데 그무텀이 뚜렷이
남아 있다보통무텀과는 달리 네모꼴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는 처녀가빨래를 하다가 더워서 목욕을 하는데 큰자라가
몸에붙어 남근을몸속으로 넣었다고들었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강남악부의 용왕댁 조에는 다음과같이 기술하였다.
주암면에 용지방 들이 있다 .들 가운데 한줄기 개울이 흐른다. 물이 모인 곳에 숲이 우거져 하늘을 가렸다 사람들이 더러 그 가
운데서 목욕을 하는데 요괴가 있지 않을가 해서 가히 홀로가지 못한다.
마침 어느 날 달 밝은 밤에 한여자가 이웃 할머니와 그 딸과함께 그곳에서 목욕을 하였다.목욕을 마치고 치마저고리을 입으려 하
니 그여자의 단속곳만 없었다.그래서 애써 찾았지만찾지 못하고집으로돌아왔다.
그날 밤에 여자가 사는 집 문밖에서 은연히 말방울 소리가 있었을 뿐인데 한 아름다운 장부가 문을 열고들어와 여자를 범하였다.
그 뒤로 밤마다다녔다. 비록 자물쇠로채워 놓았지만 열쇠가 없는데도 문이 저절로 열렸다 남은 그 행적이 보이지 않지만 그 여자
에게만 보였다 이때문에 끝내 시집을 가지 못하였다 그 때 그녀를 사람들이 용왕댁이라고 하였다
두 이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태어나면 곧 안아 갔으나 어느 곳으로 갔는지몰랐다. 그 여자는그대로 늙어 집에서 죽었다 괴상하고
괴상하다 지금은 물이 얄고숲도 없다
이 설화를 근거로 생각하여 보면 용지는 용왕댁이 살던 마을이고 용곡은 용왕댁의 무덤이있는 마을이다 또 마을이름도 용왕댁(龍
王宅) 설화에서 연유하였으며 용이 승천했다는 용지(龍池)도 용왕댁이 죽은 마을에 있는 못이다이라는뜻이다
나무꾼 과 선녀는 목욕하는 선녀의 옷을 나무꾼이 숨겼다가 두 아이를 낳은 뒤에 그 뒤에 그 옷을주었더니 두아들을 옆구리에 끼
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설화와 대비된다. 목욕을 하고 옷을감춘 점은 같으나 여기서는 남자가 인간이 아니고 신선이다. 두 아들을
낳은 즉시 안아 가버리고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아 여인이 한을 안고 살다가 죽었고 그 무덤이 현재까지 남아있으니 남성신성(神
性)과 여성 신성이 대비 되는 생명 탄생의 설화다. 백제 시대 둔지현(週支廳) 지배층 자제와 한 미한 집안 사이에서 생긴 사랑
이야기가 변하였을 것 같다 같이 백제 시대의 사평군 치소이고 후백제 견훤의 토성이라고 전하는 해룡산 기슭에 통샘(補泉) 마을
이 지금도 있는데, 그 마을에도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한다. 성주의 공주와 어느 총각이 사랑을 하다가 공주의 아버지가 거절하
자 공주가 통샘에 빠져 자살을 하여 버렸다 성주도 화병에 죽고 그샘을 메워 버렸다.그래서 마을 이름이 통천이다.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지만 백제의 이야기가 셜화로 표백되어 구전되는지라신라의 정치권에 반박하는 백제인들의 피해 의식이 용
왕댁 셜화를 만들어 냈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날에는지명으로 남아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고나할까?
신기(新基)
1730년경에 김녕 김유창이 터를 잡아 셜촌하고 오씨 최씨, 조씨(趙民)가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설촌할 때 돌이
많아 ‘돌정자라고 하였다. 언제 어떻게 신기로 바꾸였는지 모른다 새터’로 뜻옮김할 수 있는 이름이다
말 그대로는 마을의 역사가 짧아서 새로 생긴 마을이란뜻의 이름이다.1912년 조선 총독부의 기록에는 장동(壯洞), 신기(新基),
쌍산(雙山)의 순으로 신기(新己)가 보이고 호곡(虎谷),문길(文吉), 신촌(新村), 요곡(寥谷)의 순으로 신촌이 기록 되어 있다 그
리고 1914년의 기록에 복다리에 딸린 마을로 신기가 보인다. 신기(新己)가 신기(新基)로 표기하는 문자가 변하였다고본다.
명당으로 구대(九代)홍문(弘門)과섭이대(十二)만석지(萬石址)가있다고전한다. 구대홍문은 마금맹이’, !퉁배기고개’, 덕님고개
’, ‘옷거치’, ‘용머리 고개 서남쟁이’의 어디쯤에 있다는것이다.
수평(水坪)
1660년경에 강씨가터를잡고다른 성씨가들어 왔다고전한다. 화재가자주발생하여수평으로 이름을바꾸었다는것이다. 불과 물은상극
이다.불을진압하는것이 물이다.때문에 화재를없애 보려는소원으로수평이라하였을것이니 지명에 주술적 사고가들어 있다고 할수있
다. 지금은수평(水平)으로한자가바뀌었다.
승월(昇月)
승월은1964년에 창촌에서 이주하여 마을이 생겼다.강씨와 이씨가화재를당하고 새터를잡은것인데 마을뒤에서 달이떠오른다고 승월
(昇月)이라이름불였다.인위적으로지은 마을이름이다.
용강(龍江)
1815년경에 정씨(鄭民)가 처음터를잡고 조씨,박씨가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고마을사림들은 말한다.구대(九代)홍문(弘門)과 십
이대(十二代) 만석지(萬石址)에 터를잡으러하였다는 이야기가전한다. 이 명당에 양댁(陽宅)을지어 살며 부귀영화를누리고자하는
생각에서 사람들이모여 살았으리라.마을에서1km쯤에 높이9자정도의 석물(石物)이 있다. 신라말에 만든것이라고전하고그모습이 우
둔한사람 형상이었다는것이다. 지금은 그 터만남아있다.1970년대에 없어져 버렸다고전한다.
쌍산(雙山)
우리말 이름이 ‘쌀가메’, 살가메’ 다. 이를 쌍산으로한자의 옷을 입혔다. ‘쌀가 살가를 雙(쌍)으로 소리 옮김하고 메’를山(
산)으로뜻옮김한것이다.마을사람들은마을에두산이있다고 쌍산이라하였다고하나 이는한자에매인풀이이다.
1686년경에 조씨가터를잡고 그뒤에죽산박씨가들어왔따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