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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농장의 머슴들
진행메모- 나무, 농사꾼1, 씨오쟁이학교, 농사꾼2, 씨앗 휴면타파, 종자가 미쳐가고 있다. 감 씨의 귀향, 이야기하는 사금파리 둠벙, 나의 학교 농장 두렁농, 좌표와 주민등록증, 가족, 파문, 머슴과 주인, 몸. 학교, 뇌촬영 해마, 인문학 산으로 가다, 역사의 반환점. 호미의 시간이 인간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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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농장의 머슴들
<농사꾼1, 씨오쟁이학교>
벌써 춘분이 지났다. 들과 산에 봄이라도 내려와 앉은 듯 봄기운이 느껴진다. 대지에 내려앉은 햇살이 잠자고 있는 땅밑 생명들을 다정하게 부른다. 어제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논과 밭이 오늘은 “어서 씨앗을 뿌려 달라!”고 재촉을 하는 느낌이다. 오늘따라 숲은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다. 앞산의 오동나무에서는 딱따구리가 목탁을 두들기며 조용하게 생명들을 깨우려하지만 그 옆에선 직박구리란 놈이 찍찍 대며 시끄러운 소리로 심술을 놓는다. 늘 그렇듯 까마귀는 굵은 목소리로 뭘 그렇게들 서두를게 있느냐고 큰 소리로 골짜기를 향해 호령하면서 야단치기에 바쁘다.
사실 까마귀란 녀석의 말은 들을 것도 없다. 그 녀석은 늘 그렇다. 뭐든지 윽박지르고 제 주장만 하는 녀석이다. 어쨌든 이제 절기는 봄이다. 다들 마음이 바쁘다.
나는 마지못해 종묘상으로 향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반시간 좀 넘어 걷기만 해도 될 거리를 이제는 한 시간 가까운 먼 길이 되었다. 터벅터벅 걸어가자니 옛사람들의 씨오쟁이가 생각난다. 세월이 변해도 참으로 많이 변했다. 나는 지금 종자를 구하러 종묘상로 가고 있지만 옛사람들 같으면 부엌이나 대청이나 사랑방의 대들보에 매달아 놓았던 씨오쟁이를 내려서 종자를 꺼냈을 것이다. 옛사람들의 지혜가 부럽고 그리워진다.
“여보게! 동부 씨 남은 거 좀 있나”
그렇게 건네진 이웃집 아저씨의 질문에 “많진 않아도 좀 있을 거예요.”하고 부엌 대들보에 걸려있는 씨오쟁이 한 개를 떼어 내려서 “쓰실 만큼 쓰시고 가져오세요.”하고 씨오쟁이 채 건네주던 우리네 옛사람들의 봄이 그립다. 옛사람들은 봄이 되면 그렇게 씨오쟁이에 지혜와 덕과 인심을 담아서 주고받았다. 마을마다 사람들의 정이 꽃처럼 다투어 피어나는 계절이 봄이다. 그 건 사람과 마을과 종자의 근본이어서 저 해나 별이나 흙처럼 공기나 물처럼 누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옛님들은 그 모두의 재산을 그렇게 짊어지고 철을 따라 걸어갔던 것이다.
종묘상 가판대에는 온갖 종류의 씨앗이 진열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이름도 많고 뉴스를 통해 들었던 생소한 것들도 많았다. 이제 지구촌이 하나의 덤불숲이 되었다는 걸 종묘상 가판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얼치기 농사꾼이어서 그런지 생소한 것들 보다는 웬지 늘 보고 듣고 먹던 게 그냥 좋아서 생각하던 대로 그냥 상추씨와 열무 씨를 골라 놓고 시집간 딸들이 심어 달라는 시금치 씨 두 봉과 해마다 봄만 되면 아내가 채근하는 대파 씨와 양파모종 한 판을 보태서 계산을 하고 종묘상을 나왔다.
내가 한 해에 이래저래 구해서 뿌리는 씨앗은 대강 열대여섯 가지에서 스무 가지 쯤 되는 것 같다. 숫자가 꽤 많은 것 같지만 사실은 꽤 부실한 편이다. 좀처럼 시장 나들이를 하지 않는 우리 가족의 삶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 부실하다 못해 오히려 인색한 편에 가깝다. 옛날 우리 어른들의 텃밭살림은 집을 가운데 두고 이리저리 돌아가면서 온갖 것이 다 심어져 있어서 어머니나 할머니가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재료들이 창칼이나 호미나 괭이만 들고 나가면 별의 별 먹거리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는 요술창고 같은 것이었으니 하는 말이다.
어떤 생태학자의 말을 들으면 현대인의 먹거리 수가 쉰 가지쯤 되는데 우리 인간이 몸의 건강을 위해서 먹어야 하는 식물의 숫자는 적어도 150가지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인간의 오장육부를 돌리는데 필요한 필수 영양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150 가지쯤의 다양한 식물을 섭취해야 우리 몸이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면역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생태학자의 이 글을 읽으면서 번개같이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내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이 숲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며 내가 날마다 보고 있는 숲의 나무나 풀이나 동물이나 벌레 같은 자연의 가족들은 약도 없고 의사도 없고 병원도 없는데 어떻게 늘 그렇게 건강한 삶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숲의 세상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날은 나와 아내의 정기검진이 있던 날이었다. 늘 그랬지만 그날도 병원은 좀 미안한 표현으로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워낙 큰 병원이기도 했지만 나는 병원복도의 인파를 보면서 깊은 사념에 빠져들었다. 마치 시장을 방불케 하는 오고가는 사람의 인파는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여러 대의 승강기가 있는 앞이나 또는 화장실이나 혈액을 채취하는 대기실에는 여지없이 긴 줄이 서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한 것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작 환자일 것이라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람을 어쩌다가 수술대 같은 여러 가지 장치를 달고 가는 구루마가 보일뿐이었다. 나는 그 병원의 인파를 목격하는 나 자신이 지금 그 사람들 속의 하나로 병원을 방문한 환자임을 잊어버린 채 아내의 손을 잡고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거의 넋을 잃고 관객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농사를 지으며 날마다 보고 만나는 딱따구리, 노루, 멧돼지, 꿩, 멧새, 벌레 같은 숲의 친구들이나 그들을 품고 있는 숲의 나무나 풀들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늘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건강한 것 같다. 우리가 모두가 숲에서 늘 보고 만나면서 느끼듯이 그리로 알고 있듯이 그들은 우리처럼 사회를 구성하고 서로 돕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뜻과 방식대로 살아간다. 더구나 그들은 약도 병원도 의사도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어째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들은 이렇게 수 많은 사람이 수 많은 질병과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참으로 이상하고 특별한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나는 병원이라는 만물의 영장 인간이 만든 공간에서 이런 어린애들 같은 유치한 생각에 깊이 빠져들면서 근래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됐다는 콜버트의 주장을 떠 올렸다. 그리고 맛있고 보기 좋고 싼 것을 골라먹는 우리 먹거리 다양성부족으로 인한 면역력의 문제라는 어느 생태학자의 말이 병원의 인파와 나의 시야를 덮치고 꽉 채우며 나를 내가 겪었던 어떤 수술실 같은 캄캄한 어둠속으로 몰아갔다.
그렇다고 나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장사회의 공급능력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소비가 있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찾아가는 장사꾼의 신출귀몰은 이제 현실이다.
그 먹거리의 태부족을 세계의 곳곳에서 가져다가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시장에서 해결하는 것은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생태학은 이와 함께 그 고장에서 그 시기에 나오는 먹거리를 철에 맞춰서 먹어야한다는 말도 하고 있으니 나는 이 말을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우리의 옛사람들이 살아가던 것처럼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로만 들려서 나만이라도 그냥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그 생태학자의 말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다.
그런 시대에 나의 이런 촌뜨기 어설픈 얘기는 그야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공염불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어느 생태학자가 빼놓은 것인지 아니면 몰라서 그랬는지 말하지 않았던 핵심적인 두 가지 얘기만은 꼭 보태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나는 농사를 지으며 우리 인간의 몸 안에 인간의 마음이 있듯이 씨앗의 안에도 씨앗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씨앗의 마음은 씨앗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들어 준 것이다. 그리고 그 어버이의 어버이가 또 그 어버이의 어버이로 이어지는 영겁의 세월동안 에 걸쳐 그들의 뜻을 쌓아서 만든 마음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지구와 우주의 사이에서 지구라는 어머니와 우주라는 아버지의 뜻을 담아 놓은 아들이자 머슴이 태어났을 것이다. 우주와 지구의 자식이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자식들은 우주와 지구가 우주와 지구의 사이 지구의 표면에 뿌려진 씨앗들이다. 우주와 지구의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랐다. 그리고 이 자식들은 지상의 모든 곳에서 그 어버이의 사랑을 담아 쌓아 놓는 머슴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이 각각의 자식들은 각각의 주소에서 번식하면서 자신의 살아있는 몸과 번식을 다한 뒤의 몸들을 지구의 먹거리로 어버이이자 주인인 지구와 우주에 아낌없이 바쳤다. 지구의 표면에 지구와 우주의 훌륭한 농장이 개간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구의 표면에 건설된 지구와 우주의 농장 생태계인 것이다.
둘째, 이렇게 지상에 건설된 우주농장 생태계는 엄연히 주인이 있어서 그들의 목적을 위해 농사를 짓는 농장이기 때문에 이 농장에 뿌려지는 모든 씨앗들은 목적에 따른 좌표의 법칙이 있고 농작물처리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고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 농장의 주인 우주와 지구는 이 농장의 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우리 농사꾼이 농사를 짓는 것처럼 물을 주고 빛을 주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해 주며 농민이 쟁기질을 하는 것처럼 지각활동이나 기후변화를 통해 우주농장을 갈아주기도 하고 환경의 변화로 농작물의 건강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다. 또한 씨앗도 그냥 두지 않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진화라는 개량작업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형태는 이런 우주와 지구가 우리 인간을 자신들의 우주농장에 뿌려서 농사를 지으려는 목적과 씨앗의 품성에 전혀 맞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반대되는 방향으로 인간만의 진화를 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 인간이 창안한 문명이라는 것은 지구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근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지구촌에 큰 충격을 주고 있지만 이 역시 지구농장의 뜻을 거역한 징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발로 이동해야 한다. 이 발에 기계를 달아서 뛰고 날면 안 된다는 경고를 받은 것이다. 손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도구는 모르지만 온갖 전동장치와 컴퓨터로 제어되는 기계들은 모두 지구와 우주의 뜻과 정면으로 거스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 인간은 인류라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었다. 이를 해체하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마을국가로 돌아가서 농경사회를 복원시켜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지구는 기후변화를 멈추고 우리 인간은 자신의 자식과 머슴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본다.
나의 생각이 너무 멀리 나갔고 또 너무 깊은 데까지 이르렀다. 나는 산골짜기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농사꾼이다. 씨앗을 사기위해 종묘상에 다녀오는 길이다. 나는 춘분이 지난 오늘 텃밭에 심을 상추, 시금치, 아욱 씨를 사오고 있지만 이미 지난 가을에 구입해서 휴면타파를 위해 냉장고에 넣어 둔 취나물, 곤드레, 잔대, 더덕 씨를 합치면 가짓수가 적지 않게 된다. 게다가 곧 텃밭에다 배추와 열무씨앗도 뿌려야 하고 쪽파며 대파며 양파 모종도 한 판씩 사다가 심어놔야 하니 봄에 뿌리는 씨앗만 해도 벌써 열 가지가 넘는다. 종묘상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오면서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에서 나와 주변의 호수와 아직은 비어있는 논들과 밭들을 보면서 마음을 식히고 있는데 막내한테 문자가 도착했다. 열어 보니 막내가 감자 씨를 가지러 동네 이장네 집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감자는 개동백이 꽃을 떨어뜨리기 전 노란 꽃을 누렇게 만들기 전에는 심어야 한다. 앞 뒷산 개동백꽃이 누렇게 변하고 진달래가 온산을 빨갛게 물 드린다. 감자 씨를 지게에 얹으니 한 짐이다. 감자 씨를 밭가에 내려놓고 나는 밑거름을 뿌리고 막내는 트렉터로 로타리를 친 다음 이랑을 지으며 비닐로 멀칭을 한다. 막내의 하는 짓이 올해는 정말 감자를 먹어 볼 모양이다. 해마다 감자를 심어보지만 해마다 돌피 밭을 만들거나 멧돼지에게 다된 감자를 몽땅 바치는 얼치기 농사꾼의 허술한 처지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가족이다.
산길을 지나던 등산객 몇 사람이 멀리서 손짓을 한다. 내가 아는 척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등산객 한 사람이 의아하다는 듯이 큰 소리로 묻는다.
“아니 또 감자를 심어요?”
아무래도 저 분이 이 밭의 감자농사가 매년 돌피 밭이 되거나 멧돼지들의 잔칫상이 되곤하던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한 마디 던졌다. “감자 캐는 날 얼굴 한 번 봅시다. 감자 한 솥 쪄 놓으리다.”
두럭에 감자를 하나씩 묻으며 나간다. 줄을 맞춰 가며 기억 니은 흙에 글자를 새긴다. 호미는 농사꾼의 연필이다. 우리 가족의 호미질을 따라 멧새도 글을 읽고 딱따구리도 글을 읽는다. 떠들던 소리도 노래하던 소리도 가갸 거 겨 하늘 천 따지 글이 된다. 밭은 농사꾼의 책이다. 교과서다. 나는 글을 읽고 아내는 시를 쓰고 막내는 수필을 써 나간다. 하루가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우리는 부지런히 이랑을 따라가며 두럭에 감자를 심는다. 감자의 씨앗을 묻는다. 땅의 문을 열고 생명을 심는다. 하늘의 문을 열고 하늘 천 따지 공부를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마음 밭에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심는다.
삭달가지를 뚝뚝 꺾어서
군불을 때고
중방 밑이 다 타도록
잘 살아 보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어느새 산비둘기는 “일찍 자자 일찍 자자“ 재촉 하고 까마귀는 왜 교문을 닫지 않느냐고 호통이고 딱따구리는 오동나무 가지를 두드리며 ”얼릉 연필이며 공책이며 교과서며 다 챙겨서 가방 둘러메고 집으로 가서 밥 먹고 자라“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점잖게 얘기한다. 소나무와 참나무는 그냥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다가 조용히 손 흔들어 인사를 한다. 오늘 쓴 시도 그림도 노래도 다 좋으니 채점은 장마 전 하지에나 하자고 빙긋 웃으며 미룬다. 해는 서산마루에 올라앉아 내일보자고 붉은 깃발 흔들며 인사를 보낸다.
씨앗이라면 지구마을의 씨오쟁이를 빼놓을 수 없다. 알다시피 노르웨이의 스발바르제도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얼음의 땅 영구동토다. 그런데 이 제도에 있는 스피츠베르겐 섬에는 아주 특별한 시설이 있다. 사람들은 이 특별한 시설을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보다는 지구마을의 씨오쟁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찌 거기다 나 같은 농사꾼이 토를 달 수 있겠는가.
여튼 우리 지구마을에서 씨앗을 보관하기에 정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 섬에 스발바르국제종자저장고를 지어놓고 있으니 그 고마움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나는 이 국제종자저장고를 지어놓고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농작물 씨앗 약 80만개를 보관해 놓고 이를 종자들을 관리하면서 인간의 멸종을 걱정하는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의 처지가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종자보관을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 빗대어 말하지만 그런 상황을 가정해 보면 현재 80억을 넘는 인류의 숫자에서 많아야 몇 천 또는 몇 만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가정하면 그 숫자에 포함되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와 같이 것이니 이게 어찌 희망이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그런 멸종의 과정이 번쩍하는 촌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세기 또는 수 세기에 걸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면 그 시간에 우리 인류가 겪어내는 상황이야말로 바로 지옥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니 어찌 그 종자보관소가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겠는가 그건 절대로 희망도 절망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에 종자를 보관하고 그것을 희망의 씨앗으로 생각하는 과학자들의 갸륵하고 거룩한 생각을 그렇게 깎아내릴 것만은 아니다. 공룡의 멸종을 생각해보거나 현재 지구마을을 살아내는 수 많은 생명들 중에도 이미 멸종의 단계에 접어든 위기종이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는 그런 수 세기에 걸친 생지옥을 겪어내야 하는 인류의 어느 미래의 끝에서라도 인간의 종자를 보존시켜야겠다는 과학자들의 마음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엄숙하게 살펴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지구촌의 손꼽히는 강대국 러시아가 이웃나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핵무기를 만지작거리는 나라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정말 지구촌에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전쟁은 너 죽고 나죽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핵전쟁이라든가 또는 지금 우리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기온상승에 따른 지구의 기상이변이나 그 외에도 대재앙의 여런 변수들이 대기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도저히 인간의 미래에 저 주라기 시대의 멸종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지옥의 엄중한 상황에서 우리 인간이 과연 저 지구촌의 영구동토 스발바르제도에 이르러 보관중인 종자들을 꺼내어 씨앗을 뿌리고 그 것을 가꾸어 수확을 해서 먹거리를 장만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나는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과학자들이 그런 상황을 설정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존을 위해 어떤 그림을 그린다는 인문학적 상상에 고마움을 느끼면서 그 희망의 씨앗을 수용하고자 한다.
지구는 살아있는 행성이다. 우주공간이 지구의 생존환경이다. 스발바르 국제종자보관소는 우주공간을 살아가는 지구의 생존활동에서 인류의 생존을 고민하는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대 담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개인의 삶으로 돌아와서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가정과 마을 또는 기껏해야 사회의 수준에서 나의 생존활동을 전개한다. 나는 농사꾼이다. 나의 논과 밭이 있는 산골짜기로 들어가야 나는 나의 생존활동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이다. 스발바르를 떠나 다시 마을로 돌아가서 농사짓는 이야기를 하자.
우리 선조들은 스발바르의 국제종자보관소에서 오늘의 과학자들이 보여준 그런 종자보관이라는 아주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조상들이 선택한 것은 오늘 여기 있는 씨앗을 재앙 이후의 어느 미래로 전해주는 시간의 이동이 아니라 절기를 따라 씨앗과 인간이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더구나 그 씨앗과 인간이 함께 발을 맞춰 걸어가는 것은 그냥 단순한 시간의 걸음이 아니다.
씨앗과 함께 걸어가면서 우리의 선인들은 씨앗이 살아가는 씨앗의 삶과 생존에 많은 도움을 주면서 씨앗이 좋아하는 친구가 되었다. 그냥 좋은 친구가 아니라 믿을만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식물과 사람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농장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농작물과 농사꾼은 자연을 벗어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건설했던 것이다. 숲에서 살아가던 이 두 종류의 생명이 이렇게 함께 걸어가며 우정을 나누고 친구가 되고 마침내 서로 사랑을 함으로서 결혼하기 까지 걸린 시간은 1만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고 쌓였다. 이는 작물과 인간의 위대한 승리였다. 자연의 기적이었다.
나는 가끔 밭고랑에 앉아서 김을 매다가 그 기적의 역사가 남긴 흔적과 만나곤 했다. 십년 쯤 전이었다. 호미 날 끝에 어떤 아주 특별한 느낌이 전해왔었다. 그것은 어쩌면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순간 아주 그냥 수동적인 행동으로 호밋날에 전해오는 이상한 느낌을 찾아 흙속으로 왼손을 밀어넣고 바른 손으로 호미를 당겼다. 그러자 하나의 작은 돌조각이 흙속에 쌓여 나왔다.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내자 나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이제까지 내가 단 한 번도 보거나 경험해보지 못했던 작은 돌조각이었지만 나는 순간 이것이 석기시대를 살았던 우리의 조상들이 남긴 돌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진위여부는 모르겠다. 순간 나의 가슴이 쾅쾅 뛰었다. 나는 돌조각을 그 자리에 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얼마가 지나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돌조각에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돌조각을 가지고 나와서 맑은 물에 씻었다. 나는 이 돌조각에 대한 이야기를 가족과 나무며 함께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물론 나는 이 돌조각이 돌칼인지 아닌지 단언해서 말할 수 없다. 그 뒤 나는 이 산골짜기 곳곳에서 어망추로 보이는 돌조각과 청동기시대의 쇳조각으로 짐작되는 유물로 추정되는 여러 개의 도검조각과 도끼와 창 등을 발견했다. 그리고 깨어진 맷돌과 숫돌이며 실을 잣던 가락바퀴로 의심되는 토기조각도 발견되었다. 우리 가족은 그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보관하면서 가끔 화젯거리로 자랑하곤 한다. 순전히 나의 생각이지만 만약 그 돌칼이나 쇳조각이 정말 이 산골짜기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던 도구들이라면 나는 지금 그 분들과 함께 이 산골짜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크게 보면 동시대의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산골짜기에서 살아가는 모든 나무와 풀과 새들과 노루에 대해 그리고 이 산과 실개울과 바위들이며 이 골짜기의 모든 사물과 자연에 대하여 나는 가족이라는 마음을 깊이 느끼게 된다. 나는 나의 그 조상들이 살아가던 이 땅에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씨오쟁이학교’라는 장에서 나는 농작물의 씨앗에 대해 얘기했지만 이제 농사꾼이 자식처럼 키우는 이 농작물의 뿌리라고 할까 아니면 “너의 고향이 어디냐?”고 좀 케케묵은 문제를 따져볼 차례가 아닌가 싶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좌표의 문제다. 그리고 이 좌표는 앞으로 이 글 전체를 이해하는데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북극성과도 같다는 점에서 정말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음을 지적해 두고 싶다.
대략 1만 년 전 우리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먹거리로부터 해방되고 진짜 인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 인간이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해 ‘나는 인간이다,’라고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는 경천동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세계를 향하여
“내가 여기 있다.”
고 선언하는 것이니 어찌 하늘이 떨고 땅이 흔들리는 일이 아니라 하겠는가. 이것은 세계를 향하여
“너는 나의 것이다.”
라고 세계가 인간의 대상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인간이 하늘과 땅의 소유주가 됨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하느님의 선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인간은 하느님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씨오쟁이를 장만하고 먹거리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지구가 지상에 건설한 생태계에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이 이렇게 자연에서 나와 그 자연을 대상으로 독립하는 주체가 될 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연의 식물과 동물이 인간을 위해 머슴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도 그렇지만 생태계와 이 우주에서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일을 대신해 주는 머슴을 가질 수 있고 그래서 이 머슴이 일을 할 수 있는 농장을 경영하는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머슴을 고용하는 주인이 되려고 애를 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농장을 만들고 거기서 많은 머슴들이 나를 위해 일을 하도록 하는 꿈을 꾼다. 주인으로 있기보다 왕이 되고 신이 되고자 한다.
우리는 지난 1만년 동안 그렇게 만들어 놓은 세상의 한 가운데 서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모두가 인간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들려오는 소리는 무엇이었던가.
“너는 악마다.”
그러나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좋은 짓도 많이 하고 나쁜 짓도 많이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신을 빙자하기는 해도 신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왕을 주장했지만 모두 끌려 내려 왔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이 악마라는 데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나 역시 악마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왕은 되고 싶다. 신이 된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여하튼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는 아직까지 혼란스럽다. 오늘은 2023년 3월 30일 나는 경기도의 한 산골짜기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농사꾼이다.
나의 이 글은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풀어내기 못하고 있는 궁금증들을 가지고 이 우주의 농장과 거기서 일하는 나무와 풀과 멧돼지와 노루와 딱따구리와 벌레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위해 나의 농장에서 나의 머슴으로 일하다가 결국 나의 먹거리가 되어주는 나의 자식 같은 농작물과 떠들고 일하고 놀면서 정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제목, 우주농장의 머슴들
<농사꾼1, 씨오쟁이학교>
2023년 3월 30일 아침 인서점아저씨 심범섭
(17짜리, 29쪽짜리 이렇게 두 번이나 글을 날리고 새로 시작했다. 사흘이나 걸렸다. 핸드폰도 노트북도 너무나 서툴다. 차라리 호미를 들고 싶다.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는 날들이었다. 수정하다 보면 글은 다른 길로 새로운 가지를 치려고 한다. 우선 어수선한대로 올린다.)
첫댓글 오랫만에 들려
까폐의 죽음을 막기위해
글 올리고 갑니다.
우리 동창들이 이제
다 어디로 자꾸 떠나 가시는지ㅡ
마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