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용진 1리(정장리) |
복수면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삼면이 산으로 가려있으나 마을 서쪽으로 넓은들이 조성된 기름진 농토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추부면과 접하고 남쪽으로 목소리를 바라보고 있으며,
마을주민들은 부지런하고 온순한 성격으로 살기 좋은 마을로서 가호수 75호에 190명 인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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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진 2리(자라전, 신촌) |
자라밭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며 삼면을 산으로 두루고 남쪽으로는 들이 트인곳에 깊숙이 마을이 자리해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전씨(全氏)들이 피난을 와서 차즘 이룩한 마을이라 처음에는 자래전(自來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자라전(自羅全), 그리고 자라밭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며, 그후 제주고씨(濟州高氏)들이 많이 정착하여 조선시대 말기에는 많이 세거했던 마을로서 가호수 67호에 141명 인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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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용진 3리(원용진) |
옛날부터 마을지형이 배터라고 하며 지금의 용진분교 자리가 배의 한 복판이 된다고 하며, 마을 어디를 파도 물이 잘 나오고 물이 흔한 것은 용이 나온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서 마을도 용나리, 용나루, 용진이라고 부르며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많이 살고있으며 가호수 67호에 164명 인구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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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복 1리(원다복, 냇가, 월곡 |
원다복 마을은 복수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오곡마을에서 들 건너 산골짜기에 자리한 마을 다복골 또는 다복동이라 부르며 남쪽으로는 진산면 만악리로 넘어가는 고개 동면재가 있으며 옛날부터 마을에 수난없이 복을 누리는 마을이라 해서 다복골, 다복동이라 부르며 가호수 70호에 169명 인구가 살고 있다.
월곡마을은 냇가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모양이 반달과 같다 해서 월곡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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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복 2리(머골) |
월곡마을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오곡(梧谷)아라 부르며, 또한 오동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오동나무가 많이 있다 해서 오동골, 오곡이라 부르는 마을로서 경주김씨의 집성부락이 있었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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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곡남 1리(웃말, 아랫말) |
웃말은 수심대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대전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길과 금산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길과 연흥리로 통하는 길이 합치는 네거리 북쪽에으로 곡남리에서는 가장 위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웃말 또는 상촌(上村)이라 부른다.
동쪽으로 산을 끼고 그 아래에 펼쳐진 마을로 송천 동북쪽에 위치해서 북쪽으로 굽이쳐 훌러가는 버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웃말 아래에 있다하여 아랫마을, 골내미라고 부르는 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골내미라고 부르며 마을에서 수영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골내미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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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곡남 2리(광산, 은하, 상보들) |
은하 자연부락은 상보들 서남쪽으로 대전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길가에 자리한 마을로 은천(隱川), 장터라고 부르며, 두 냇물이 합치는 곳에 마을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조세미를 쌓아놓는 사창이 있었던 마을로 전설이 서린 각시 바위가 남쪽에 있으며 건너편에는 신랑바위도 있는 마을 이다.
상보들 자연부락은 웃말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북쪽으로 산을 두고 마을 앞으로는 냇물이 흐르며 냇물 건너에 금산과 진산으로 통하는 국도 17호선이 통하며 마을 앞에 상보들이 있으므로 상보들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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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곡남 3리(송촌, 수심대, 연흥) |
송촌마을은 골내미에서 바라보면 버드내가 굽이쳐서 태극을 이루는 그 지형 중심부에 자리해 있는 마을로 주변에 소나무가 무성하였으며, 버드내 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송천(松川), 송현(松峴), 송촌(宋村)이라 부르는 마을이며 옛날부터 은진송씨(恩津宋氏)가 많이 사는 마을이다.
수심대마을은 웃말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버드내가 마을을 빙 돌아 흐르고 수심대라고 쓴 바위가 강변에 있으며 옛날에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이 지역 풍수에 감탄하고 잠시 머무를 때 이 바위에서 낚시질을 하였고, 바위 이름따라 수심대라고 부르며 옛날부터 백천조씨(白川趙氏)가 많이 세거한 마을 이다.
연흥마을은 골내미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연흥(燕興) 도는 연홍리 라고 부르며 버드내가 태극을 긋는 모양의 들판 가에서 냇물이 휘여지는 곳에 자리한 마을 이며 마을에 연소형(燕巢形)의 명당자리가 있다 해서 연흥, 연홍이라고 부르며 옛날에는 풍천노씨(豊川盧氏)의 집성부락이었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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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수영 1리(원수영, 중두문) |
수영골은 음지소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수영골, 후영골, 수영동(壽永洞)이라 부르며 마을 앞으로 유등천 물이 휘영청하게 흐르므로 후영골이라고 부르다가 유등천물이 흐르므로 수영골이라 부르며 옛날부터 경주정씨(慶州鄭氏)가 많이 정착해서 세거하는 마을이다.
중두문부락은 학벌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중두문, 중두문리(中杜門里)또는 중두무니라고 부르며 산기슭에 분지를 이룬 곳에 자리한 골짜기 마을로서 조선시대 중기부터 차츰 형성된 마을로 농사일에만 종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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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수영 2리(음효, 학평) |
음지소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을 학벌, 학평(鶴坪)이라 부르며 들판에 자리한 마을로 동쪽에 복수중학교가 있고, 옛날에는 학이 많이 날라와 앉은 들에 마을이 있으므로 학평, 학벌이라 부른다.
옛날부터 광산김씨(光山金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많이 세거하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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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영 3리(양효) |
양효마을은 학벌 동쪽에 있는 마을로 효골, 효동(孝洞)아라고 부르며 옛날에 효부가 이 마을에 살때 효골, 효부골, 효동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양지소골이라 부른다.
마을 앞에 가왕천과 버드내가 합쳐지는 지점 아래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앞으로 유등천이 흐르고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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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목소리(목소, 도랜말, 바탕골, 두만리, 가랭이) |
동북쪽으로는 산 높이 537m의 만인산 주위로 깊은 산중을 이루고 있으며 산악지대를 경계로 동쪽으로는 대전광역시 동구 하수동과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백암리,서쪽으로는 수영리, 남쪽으로는 용진리, 다복리와 경계를 나눈 산악지대에 목소리는 위치한다.
목소리 북쪽에서는 대전광역시 어남동으로 넘어가는 말구리재가 있으며 여러 고개가 산을 뚫고 인적을 실어 나르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라고 전하며 모두가 험한 고개로 이루어진 고개가 목소리의 고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진산군 북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목처럼 생기고 앞에 소(沼)가 있으므로 목소라 부르던 곳인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목소리, 하목소리와 일남면의 두만리, 도장동,가왕리를 병합하여 목소리라 하고 금산군 복수면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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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백암 1리(개티) |
분동에서 버드내 건너 남서쪽으로 자리한 마을을 개티(介티)라고 부으며 개티에서 진산면 지방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개티 고개라고 부르는데 그 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개티라고 부르고 마을 앞 들은 갱니평이라 부른다.
옛날에 성주배씨(星州裵氏),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많이 세거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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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백암 2리(분동) |
배미 남서쪽에 있는 마을을 분동 또는 분골이라 부르며 마을 앞으로 넓은 들과 버드내를 안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분토가 많이 나는 마을이므로 분골, 분동이라고 부르며 김제김씨(金堤金氏)와 금능김씨(金陵金氏), 거창유씨(居昌劉氏)가 많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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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백암 3리(배미) |
북쪽과 남쪽으로는 산을 끼고 야산과 들이 펼쳐지는 자리 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분동 동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지형이 뱀처럼 되어 있다 해서 비아미, 비애미, 배미 또는 백암(白岩)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경주최씨(慶州崔氏)가 많이 세거하는 마을로 배미와 분동 사이에는 운하산이 있으며 시암골이라고 부르는 골짜기에는 유명한 약수가 나오는 샘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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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구례 1리(원구례) |
구리봉 서쪽에 있는 마을을 구례라고 부르며 구리가 많이 나는 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구리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구레 또는 구례(九禮)라고 부르며.
구례마을의 원마을은 원구례라고 하며 원구례마을 서쪽에는 넓은 들이 있는데 이 들을 군바우들이라고 부른다.
선무동 서남쪽으로 대전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지방도 서쪽에 있는 큰 마을을 절골 또는 사동(寺洞)이라고 하며 동쪽으로는 들과 버드내가 있고 옛날에 절이있던 마을이라 절골, 사동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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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구례 2리(선무동, 저귀말) |
적귀말 남쪽에 있는 마을을 선무동(仙舞洞)이라고 부르며 버드내 동쪽으로 마을 앞에 들을 끼고 있으며 마을 지형이 마치 선녀가 춤을 추고 있는 형국이라 해서 선무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이며 옛날부터 진주하씨(晉州河氏)와 충주최씨(忠州崔氏)가 정착하여 세거하는 마을이다.
절골 동북쪽으로 자리한 구례리에서는 최북쪽에 자리한 마을이며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으로 넘어다니는 산막재라는 고개가 있으며 동남쪽으로는 백암리 배미로 넘어다니는 비애미재와 마을 뒤에는 꼭 자구와 같다는 저귀골이라는 골짜기도 있는 마을이다그 이름을 따서 저귀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적귀말 또는 적귀리(積貴里)라고 부르며 일찍부터 정착하였던 부안임씨(扶安林氏)의 집성부락이 있었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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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구례 3리(운곡) |
절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운곡(雲谷)이라고 부르며 운하산 아래 버드내를 건너서 대전광역시에서 복수면과 진산면을 가는 지방도(635호)를 마을 중심지에 두고 또한 남쪽 백암리 분골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는 마을 이며 삼한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는 마을의 역사가 오래된 마을로 동계소(銅界所)가 있었던 마을로 마을 뒤에 농성(農城)이 있으며 운하산 아래에 있다 해서 운곡이라고 하며 경주이씨(慶州李氏),백천조씨(白川趙氏)가 오랜 옛날부터 세거해 온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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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신대 1리(원신대, 발옥) |
발옥 서남쪽으로 버드내를 건너 서쪽 도로변에 있는 마을을 신대 또는 새말이라고 부으며, 마을에는 신대초등학교가 있고 마을 안쪽에는 암자가 있으며 이 지역에서는 마을이 새로 생겼으므로 새말, 신대(新垈)라고 부르며 현재 복수면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신대 동북쪽에 있는 마을을 바리골 또는 발옥동(發玉洞)이라고 부르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버드내 동쪽으로 넓은 들 앞에 지형이 절간의 바라처럼 생겼다 해서 라리골, 발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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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신대 2리(만산, 압재) |
문암 서북쪽으로 버드내 건너 대전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지방도 가에 있는 마을을 맨산이 또는 만산리(晩山里)라고 부르며 만인산 줄기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리 부른다 하며 마을이 생기기는 신대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일설로는 만인산쪽으로 해가 돋을 때 그 절경이 보이는 마을이라 만산리(晩山里)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맨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맨산이 서북쪽에 자리한 마을을 앞재라고 부르며 마을에서 대전광역시 서구장안동 용암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앞재라고 부르는데 그 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고개 이름을 따서 앞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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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대 3리(문암) |
바리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문암 또는 문바위 라고 부르며 버드내 동쪽으로 산 속 깊이 들어 앉아서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바리골에서 지량리 방향의 샛길로 한참 가다보면 오른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동구밖 산비탈에 문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문암(文岩),문바위라고 부르며 옛날부터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많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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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지량 1리(지량) |
구만리 남서쪽에 있는 마을을 지랑이, 지량이라고 부르며 산 높이 333m의 조중봉을 서남쪽에 두고 그 아래 버드내를 안고 있듯이 지렁이처럼 길게 뻗어 있는 마을로 연주현씨(延州玄氏)와 김제김씨(金堤金氏), 경주최씨(慶州崔氏)가 옛날부터 많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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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지량 2리(구만리, 샛고개) |
지랑이 동북쪽에 있는 큰 마을을 구만리(九萬里, 龜萬里)라고 부르며 대전으로 흘르는 안쪽에 자리한 마을로 마을 지형이 거북이가 물에 잠겨있는 형국이라 해서 그리 부르며 회덕황씨(懷德黃氏)들의 집성부락 이었던 마을이다.
구만리 서쪽으로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한우물, 대정리(大井里)라고 부르며 마을에 큰 우물이 있으므로 한우물 또는 대정리라고 하며 해주오씨(海州吳氏)들이 많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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