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타자' 스즈키 이치로(30)가 시애틀 매리너스 사상 최초이자 일본인 타자로는 처음으로 연봉 120억원(1000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이치로는 19일(이하 한국시간) 소속팀 시애틀과 4년간 총액 552억 원(4600만 달러)에 다년 재계약에 합의해 빅리그 3년 만에 1000만달러의 연봉을 받는 최초의 선수가 됐다. 이는 뉴욕 양키스와 계약한 게리 셰필드(3년 3,900만달러)와 맞먹는 초특급 계약이다. 보통 '대형 슬러거'가 120억원을 넘어서는 경우는 비일비재 하지만 중단거리 타자 특히 '1번타자'에게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치로 대박은 거품(?)'
메이저리그에선 타자의 능력을 재는 척도로 장타력과 출루율을 더한 OPS(On- Base Plus Slugging Percentage)를 애용한다. OPS가 각광받는 가장 큰 이유는 야구의 기본 정신에 가장 충실한 지수이기 때문이다. 4개의 베이스를 밀어내기 방식으로 점수를 뽑는 야구에서 출루율과 장타율은 각각 출루와 전진을 뜻한다. 이를 적용한다면 가장 좋은 타자는 더 많은 출루와 더 많은 장타를 때려내는 타자 즉 OPS가 높은 타자이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1번 타자는 누구일까? 정답은 가장 좋은 타자에 가깝다. "최고의 1번타자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ESPN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션필드는 놀랍게도 90년대를 대표하는 슬러거 프랭크 토머스(시카고W)를 꼽았다. 덧붙여 토마스는 최고의 2번 타자이자 최고의 3번타자로 꼽혔다. OPS가 높기 때문이다.
'1번타자=빠른발, 2번타자=팀배팅' 이라는 고전적인 야구이론을 뒤엎는 흥미로운 발상이다. 진실 혹은 거짓 여부를 떠나 야구에서 득점이 나는 기본구조를 이해한다면 OPS가 타자를 평가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한 지표임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메이저리그에서 높은 출루율-홈런파워를 보유한 선수들이 대접받는 추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높은 타율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출루율과 컨택트 능력으로 먹고사는 이치로가 OPS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다. 이치로는 데뷔 첫해인 2001년 타격(0.350), 안타(242개), 도루(56개) 등 3관왕에 올랐지만 빈약한 파워 탓에 OPS가 0.838(전체 56위)에 불과해 MVP 자질 시비에 휘말렸다. CNNSI 의 칼럼니스트인 톰 베르두치는 "그 출루율에 MVP 는 어울리지 않는다" 며 제이슨 지암비(뉴욕Y)를 MVP로 내세웠고, ESPN 역시 지암비 특집을 준비해뒀다가 이치로로 바꾸는 촌극을 빚었다.
폭스스포츠는 '2003시즌 과대평가된 선수' 를 꼽으며 이치로의 이름을 1위에 올렸다. 이 웹사이트는 이치로에 대해 "MVP 후보로는 함량미달이며 파워도 없고, 볼넷도 얻지 못한다"고 평가절하했다.
이번시즌 이치로는 212안타를 때려내, 3년연속 200안타를 달성했다. 홈런은 자신의 역대최고인 13개를 기록했고, 타점도 작년시즌의 '51'에서 '62'로 끌어올렸다. 데뷔 첫해 2.63개의 땅볼 대 뜬공 비율을 기록한 이치로는 지난해 2.48개, 올시즌에는 1.77개로 중거리타자로 변신중이다. 미국진출 첫해 안타 한개당 평균 1.30루타에 불과한 파워를 2003시즌에는 평균 1.39루타까지 끌어올렸다. 장타율에서 타율을 뺀 수치로 타수당 장타비율을 뜻하는 ISO(Isolated Power)수치 역시 0.107(01년)에서 0.124(03년)로 향상됐다.
정작 눈여겨 볼만한 기록은 장타율이다. 홈런과 파워의 동반상승을 일궜지만 장타율은 오히려 0.457(01년)에서 0.436(03년)로 뒷걸음질 쳤다. 안타를 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진출 첫해 0.350에 달했던 이치로의 타율은 해마다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방망이에 힘이 붙었으나 전매특허였던 내야안타가 실종되면서 장타율이 감소하는 맥빠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부연하면 안타 한개를 쳤을 때 그 타구가 장타로 이어질 확률은 늘었지만, 1년동안 기록한 총루타수는 되려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01년 242개 보다 30개가 감소한 안타는 출루율의 하락(0.381->0.352)도 부채질했다.
수위타자 탈환과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사냥에 나선 이치로의 메이저리그 3년째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전반기 타율 0.352 OPS 0.866의 맹폭을 가하던 이치로는 후반기 타율 0.259 OPS 0.684에 그쳐 타율 0.312 OPS 0.788를 기록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OPS 역시 지난 3시즌간 쭉 미끄럼을 탔다. (0.838->0.813->0.788) 그러나 시애틀은 '똑딱타법'을 구사하는 '1번타자 이치로' 에게 연평균 11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안겼다. 왜?
'이치로이기에'
이치로는 의심할 여지없는 현역 최고의 1번타자다. 공과 머리가 수평을 유지하는 신기에 가까운 '저스트미팅'과 야수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빠른 발은 이치로를 3년 연속 3할대 타율, 200안타, 100득점, 30도루를 기록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3번째 선수로 만들었다. 이치로가 시애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단순히 그를 OPS가 저조한 안타제조기로 폄하할 수 없게 한다. 이치로가 '잘 나가는 날'이면 시애틀 역시 대부분 경기를 웃으며 마쳤다. 시애틀의 동료들은 이치로를 '위저드'(마술사)라 부른다. 마술같은 능력으로 팀에 공헌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 이치로 월별 타율 & 시애틀 성적
4월 0.243 17승 10패(17승 10패 서부지구 1위)
5월 0.389 19승 8패 (36승 18패 서부지구 1위)
6월 0.386 17승 10패(53승 28패 서부지구 1위)
7월 0.342 13승 14패(66승 42패 서부지구 1위)
8월 0.242 14승 15패(80승 57패 서부지구 2위)
9월 0.273 13승 12패(93승 69패 서부지구 2위)
1994년 이치로가 시즌 210안타를 때려내며 일본프로야구 신기록을 수립한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팬들은 더 이상 연간 200안타를 때리는 이치로를 두고 별다른 감흥에 젖지 않는다. 심지어 세계최고의 무대라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그러하다. 올시즌 이치로의 타율 0.312가 슬럼프로 비쳐지는 것도 이치로라면 잘 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특수한 잣대의 표출인 셈이다.
성이 아닌 이름이 유니폼에 새겨진 유일한 선수인 이치로는 메이저리그 올스타 투표에서 3년 연속 최다 득표의 기염을 토하며 시애틀을 상징하는 야구 아이콘으로 사랑 받고 있다. '축소지향' 의 이치로 야구는 메이저리그의 '선이 굵은 야구'와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오늘날 메이저리그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머니볼 바람을 쫒아 모든 선수들이 홈런을 펑펑 쳐대며 OPS에 기반한 플레이를 지향한다면 야구는 금세 식상해 질 것이다. 홈런홍수의 시대에 등장한 '발야구 선수' 이치로는 동양인 타자 뿐 아니라 발빠르고 정교한 소총수들의 메이저리그 성공시대를 확실히 열어젖혔다. 그는 리드오프가 받아낼 수 있는 최고수준의 몸값을 시애틀로부터 뜯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