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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33) 2023. 7. 26
드고아 여인의 연극
삼하 14:1-17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다윗>
압살롬은 암논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후, 다윗이 암논에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다가 2년이 지난 후에 양털 깎는 잔치에 암논을 초대한 후 그가 취한 틈을 이용해 죽이고 외할아버지 나라인 그술로 도망갑니다. 다윗은 암논의 죽음 소식을 듣고 애도합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듯이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였습니다”(13:39).
<요압의 인간적인 충성>
이러한 다윗 왕의 심기의 변화를 눈치챈 사람이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다윗 왕의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이었습니다.
1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요압은 다윗 왕의 조카이면서(대상 2:16,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 그의 추종자요, 신복이요, 군대 지휘관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 왕과 평생 함께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다윗 왕의 눈만 보아도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심중을 눈치챈 요압은 압살롬이 돌아오게 할 모종의 계략을 세웁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요압이 이런 계략을 세우는 동기를 알아야 합니다. 압살롬은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에 대한 생각이 연민의 정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당시 다윗에게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남이었던 암논은 다말을 욕보인 것으로 인하여 압살롬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길르앗은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윗의 보위를 이을 가장 강력한 인물은 셋째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고 도주한 상태이기는 하나 다윗의 마음은 자연히 그에게로 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25~27절에 의하면, 압살롬은 그 외모로 볼 때 왕이 되기에 흠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25~27절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는 인물은 없었습니다. 그는 머리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그 무게가 ‘이백 세겔’(2kg)이나 나갔습니다. 머리카락이 많은 것은 미남과 젊음의 상징입니다. 아버지인 다윗이 보기에도 내심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만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반역을 일으킨 압살롬은 결국 자신이 자랑하는 머리카락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한편 압살롬에게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들 셋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삼하18:18 - 압살롬이 자신의 비석을 미리 세움). 그 딸의 이름은 자신의 여동생 이름을 따라 ‘다말’이라 지었는데 그만큼 자기 누이를 사랑했다는 증거입니다. 딸도 고모를 닮아 아주 예뻤습니다. |
요압은 바로 이러한 다윗의 심정을 눈치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귀환을 추진함으로써 다윗 사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한 것입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귀환시켜 다윗과의 사이를 회복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은 다윗과 압살롬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실로 요압은 자신의 영달만을 생각하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오른팔일 정도로 능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권모술수(살인)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삼하 2장에 보면, 요압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에게 복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이 죽은 후, 다윗 진영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 진영이 싸울 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뒤를 쫓아가다가 죽고 맙니다. 이후 종전 협상이 이루어지고 아브넬은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넘겨줄 것을 약속하며 서로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돌아온 요압이 이 사실을 전해 듣자마자 당장 다윗을 찾아가 화를 내며 항의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아브넬을 뒤쫓아 가 그를 죽여 버립니다. 이 장면만 보면,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단순히 복수심 때문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압은 훗날 압살롬의 반역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아마사를 죽입니다.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는데, 그는 스루야의 동생인 아비갈의 아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요압과 아마사는 서로 사촌지간인 셈입니다. 그런데 반란군이 진압될 무렵 다윗은 아마사에게 요압을 대신할 군대 장관직을 제안하면서 그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러자 요압은 아마사를 찾아가 그에게 인사하는 체하면서 그의 배를 칼로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삼하 19:13~14, 20:4~13). 즉 요압은 자신의 위치에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라면 혈육도 가리지 않고 제거하는 잔인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그가 아브넬을 죽인 것이 단순한 복수심에서가 아니라 다윗과 아브넬과의 동맹 이후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계산이 깔려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야심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드러납니다. 다윗은 요압에게 압살롬을 죽이지 말고 포로로 잡아 오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압살롬을 죽이고 맙니다. 다윗 왕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판단했을 때, 또 압살롬과 연합이 불가능해지자 그를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합하다고 생각했을 것).
우리는 이미,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라는 비밀 서한을 보냈을 때, 그대로 행하는 모습을 통해 그의 정치적인 야심을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우리아는 자신의 직속 부하).
성경은 이러한 사람의 최후가 어떠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요압의 정치적인 야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에게 요압을 죽이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결국, 요압은 다윗이 죽은 뒤 아도니야를 지지했고 결국 왕권을 잡은 솔로몬에 의해 죽고 말았습니다. 정치적 계산에 빨랐던 요압은 결국 자신의 계산에 의해 죽고 마는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압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은 이익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간사함은 없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공로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부분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 말을 우리의 동기의 한결같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 믿음은 때로는 모험이며 결단이며 또한 선택이어야 하지만 그 동기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야심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기 위한 결단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드고아 여인의 연극>
그러면 압살롬을 데려오기 위한 요압의 계략은 무엇일까요?
2~3절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너는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3 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
드고아에 있는 ‘지혜로운 여인’ 한 사람을 데려옵니다. 드고아는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유대 산지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선지자 아모스의 고향). 아마도 그녀의 말(연기) 재주가 뛰어남이 소문이 났던 것 같습니다. 요압은 그녀에게 초상 당한 여인처럼 몸에는 상복을 입고, 머리에는 기름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여인처럼 꾸미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 왕에게 가서 할 말을 일러주었습니다.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었다”는 것은 잘 준비된 대사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연습을 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압은 감독, 연출, 각본, 진행, 무대 설정에서부터 의상 담당까지 다 하고, 드고아의 여인은 배우로서 연기한 것입니다. 한 편의 잘 준비된 연극을 준비한 것입니다.
드디어 연극 공연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요압은 드고아 여인의 억울함을 다윗 왕에게 알리고, 만나게 주선을 합니다. 요압의 부탁이니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왕 앞에 나온 드고아 여인은 실수하지 않고, 제대로 연극을 합니다. 그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4~7절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뢸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5 왕이 그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라 대답하되 나는 진정으로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 6 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인지라 / 7 온 족속이 일어나서 당신의 여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우리가 그의 동생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그들이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드고아에서 온 그 여인은 상(喪)을 당한 사람으로 변장하고, 얼굴이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절을 한 뒤에 하소연합니다. 요약하면, 세 가지로 추릴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을 ‘진정한 과부’라고 말합니다(그럼 ‘가짜 과부도 있나?’). ‘남편이 죽었다’(‘그럼 남편이 살아있는 과부도 있나?’)는 말로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 그녀를 향한 동정심을 자아내고 있습니다(5).
둘째, 자신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둘이 들에서 싸우다가 형이 아우를 쳐 죽였다는 것입니다(암논과 압살롬의 경우와 비슷).
셋째, 친족들이 일어나 그녀를 핍박하며 동생을 죽인 아들을 내놓으라고 압박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죽여 상속자의 권리까지 끊어 버리겠다고 협박한다는 것입니다(상속자가 죽으면 자신들의 몫).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 남는 것은 아무도 없고, 남편의 이름과 씨가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호소합니다. 드고아 여인은 지금 남아 있는 자식을 자신에게 남아 있는 ‘숯불’에 비유합니다. ‘숯불’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한 상황을 상징하며 다윗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숯불’ 같은 자식을 보호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다윗의 맹세 언약>
요압이 이런 극본을 짜고, 연기를 시킨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 다윗의 감정을 자극하여 엉뚱한 판결을 내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압의 계략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8~11절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는지라/ 9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10 왕이 이르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 하니라/ 11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사실 재판은 잠깐의 감정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결과가 공의와 정의에 합당해야 하고, 율법의 가르침에도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살인자를 처벌하는 것은 율법이 정한 것입니다(민 35:11~12, 19~21). 만일 실수로 죽인 자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지만, 그 살인이 고의인지, 실수인지는 재판을 통해 밝혀야 합니다. 또 증인이 있어야 합니다. 드고아 여인은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6)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의 말만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른 친족의 말도 들어봐야 합니다.
가족의 후손을 지키는 것 또한 율법의 정신이기도 합니다(예 : 신 25:5~10). 대를 이을 유일한 자식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 또한 율법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계명 사이에서 왕의 지혜로운 판단이 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의 재판은 너무 급했습니다. 너무 쉽게 결론을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의 아들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이 여인의 고통에 동병상련으로 몰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집요하게 다윗의 결정을 반복하게 하고, 나아가 맹세까지 하게 합니다(11).
요압은 다윗이 이렇게 결정할 줄을 알고 각본을 짰던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맹세까지 했으니 자신의 말이 올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드고아 여인의 준비된 대사>
드고아 여인은 드디어 자기가 해야 할 중요한 대사를 합니다.
12~17절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의 여종을 용납하여 한 말씀을 내 주 왕께 여쭙게 하옵소서 하니 그가 이르되 말하라 하니라/ 13 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4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15 이제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말씀을 여쭙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당신의 여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여쭈오면 혹시 종이 청하는 것을 왕께서 시행하실 것이라/ 16 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주의 종을 구원하시리라 함이니이다/ 17 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
드고아 여인은 ‘백성들에게는 피의 복수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왕은 왜 내쫓긴 자 압살롬에 대해서는 죄인으로 여기고 그를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느냐’고 묻습니다(13). 이 질문을 통해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을 꼼짝 못 하게 만듭니다. 왜 다른 사람들의 죄는 용서하고 피의 복수를 못 하게 막으면서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의 죄는 용서하지 않느냐며 다윗의 모순을 지적한 것입니다.
또 여인은 말하기를 우리 인생은 땅에 쏟은 물을 다시 담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비록 사람을 죽여서 내어쫓긴 자라 하더라도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14).
<거짓 가르침을 분별해야>
여러분은 이 드고아 여인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맞는 말처럼 들립니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정의는 맞습니다. 사랑, 자비, 용서, 분명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죽어야 할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무작정 모든 죄를 덮어 버리는 식으로, 사랑과 자비하심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용서는 무작정 봐주기 식이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의 아들을 대신 우리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을 내 보내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통한 사죄는 죄의 고백과 회개 없이는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갚으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을 그냥 봐주고 넘어가는 식의 사랑이나 용서는 아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인의 말에서 한 가지 큰 오류가 있습니다. 죄와 회개의 문제가 빠져있다는 사실입니다. 압살롬은 계획적으로 암논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에게는 살인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 없이 모든 것을 용납하고 넘어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드고아의 여인은 이 부분을 고의로 빠뜨리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강조하면서 다윗의 고민에 면죄부를 준 것입니다.
참 종교와 미신의 차이점 – 진정한 종교는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미신은 그런 것 따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데만 집중합니다.
예수님은 ‘회개’를 강조하셨습니다. 녹 5:31~32(예수님의 오신 목적)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15:7(잃은 양 비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베드로로 주님의 재림이 늦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기독교의 가르침은 ‘참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 말씀은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말씀이 동시에, 이 땅에서 우리는 바른 삶, 변화된 삶, 성화의 삶을 살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타깝게도 다윗을 유혹했던 거짓 논리가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에도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용서하실 의무밖에 없다는 식으로 전하는 거짓 복음이 누룩처럼 성행하고 있습니다. 거짓된 교리가 성도들의 생각을 누룩처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참된 회개 없이 죄에서 돌이키지 않은 채 교회에 머무르는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죄와 탐욕 속에 마음대로 살면서도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으며, 내세를 보상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셔서 무조건 용납하신다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그 의는 우리의 죄악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을 믿는 사람은 죄와 싸우며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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