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스승님께 따로 배운 것은 이 걸음걸이뿐이었다.
"자네 그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아, 요즘 소문 하면 그거밖에 더 있어?"
"그게 뭔데?"
"아, 약선 말이야. 약선."
"약선?"
"자네 모르나? 약선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지금 아주 파다한데 말이야."
객잔에서 얘기하는 두 사내 근처에 자리를 잡은 남궁명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를 끝까지 들었다.
최근 사람이 모이는 곳을 지나기만 해도 들을 수 있는 소문이었다. 게다가 소문의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남궁명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한자리에 앉아 있는 맹표와 강일수의 어깨가 살짝 처졌다.
두 사람은 한껏 주눅이 들었다. 남궁명과 함께 다니며 그의 분위기가 변해가는 모습을 계속 지켜봤기 때문이다. 남궁명은 점점 광기에 젖어가는 듯했다.
"어떻게 생각하지?"
남궁명의 질문에 흠칫 놀란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뭘 말이오?"
"저 소문 말이야. 과연 진실을 얼마나 담고 있을까?"
남궁명의 말에 맹표와 강일수는 그저 머뭇거리기만 했다. 어느새 남궁명은 자신들을 종 부리듯 부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말도 좀 높여주고 말투도 조심했찌만 이젠 아예 대놓고 하대를 하며 무슨 일을 시킬 때도 명령조로 말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야 다 그게 그거 아니겠소? 더구나 의선이니 약선이니 하는 소문은 예전부터 많았으니......"
남궁명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래서 이번 소문도 그럴 거라 생각하나?"
맹표와 강일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하기 싫어다는 게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굳이 그런 소문에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들을 막 대하는 남궁명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훗, 멍청한 놈들."
남궁명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게졌다. 대놓고 비웃으니 그 모멸감을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남궁명이었으니까.
"하면, 남궁 형은 그 소문에 뭔가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시는 거요?"
"의미? 글쎄. 큭큭."
남궁명의 성의 없는 대답에 맹표와 강일수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이렇게 구체적인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나?"
"소문이야 이렇게 날 수도 저렇게 날 수도 있는 법 아니오?"
"그 소문을 한번 정리해 보지. 약선인지 의선인지가 나타났다.
한데 그 실력이 대단해서 무당의 자소단이나 화산의 자하신단 정도 되는 영약을 자유롭게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는 지금 사천 성도에 있는 당가에 머물고 있다.
한데 곧 떠날 예정이면 그 목적지는 운남이다. 게다가 그는 다수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동행을 하고 있다."
남궁명은 그렇게 말한 후, 두 사람을 쳐다봤다. 물론 눈에는 비웃음과 조롱이 가득했다.
"이런 걸 소문이라고 할 수 있나? 이건 정보야. 진실이 담겼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남궁명의 말에 맹표와 강일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남궁명은 그런 두 사람의 표정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그놈을 곤경에 처하게 만들려는 수작이라고."
"하면 대체 누가 그런 일을 벌인단 말이오?"
"나도 모르지. 뭐, 누가 원한이라도 있나 보지."
맹표와 강일수는 더 이상 소문을 그저 소문으로 넘길 수 없었다. 소문이 가리키는 사람은 꽤 명백했다.
무영이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함께 있는 여인들은 바로 모용혜와 서하린일 것이다. 자신들을 바보로 만든 바로 그 여인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소문 따위 금세 잠잠해지지 않겠소? 고작 떠돌리 약장수에 불과한 놈이 영단을 만들어낸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문 정도야......."
남궁명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말을 해줄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저런 놈들을 데리고 가려니 속이 터지는군. 그림자는 그때 이후로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고. 쯧'
남궁명은 그림자가 너무 아쉬웠다. 그림자의 가치는 굉장하다. 특히 이번 그림자는 훨씬 대단했다.
그가 조금만 도와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짐덩이에 불과한 맹표와 강일수를 굳이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림자가 부탁했기 때문이다.
'대체 그놈들 정체가 뭔지 모르겠군. 어떤 단체가 그런 대단한 그림자를 키워낼 수 있단 말인가.'
남궁명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미 앞으로 무엇을 할지는 정했다.
한동안은 무영의 뒤만 따를 생각이었다. 아마 수많은 무림인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것도 꽤 큰 세력을 갖춘 무림인들이 모여들 가능성이 컸다.
'영단의 제조법만 얻어내도 문파의 위상이 몇 배는 올라갈테니.'
생각에 잠겨들던 남궁명의 눈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갔다. 맹표와 강일수는 그것을 확인하고 기겁을 했다. 그리고 최대한 기척을 흘리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이놈이 점점 심하게 미쳐가는구나.'
맹표는 속으로 탄식했다. 어쩌다 이런 놈과 엮어서 이 고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큭큭큭. 기분이 아주 좋아졌어. 나가자."
남궁명이 핏빛으로 물든 눈으로 맹표와 강일수를 노려봤다.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 그, 그렇게 합시다."
맹표와 강일수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남궁명은 잠시 그들을 섬뜩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뒤를 따랐다.
소문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퍼졌다. 무림맹 수뇌부가 은밀히 움직였으니 당연했다. 소문은 중간에 사라지지도 않고 적절한 과장까지 섞여 순식간에 사천을 집어삼켰다.
그 소문에 가장 곤란을 겪는 사람은 당연히 소문의 당사자인 무영이었다.
"후우, 이거 함부로 나가기도 쉽지 않겠군."
무영에 대한 소문 때문에 사천 성도는 무림인들로 들끓었다.
특히 당가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한 객잔은 방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들의 목적은 대부분 소문의 진실을 확인하는 거였다.
"대체 어떻게 이런 소문이 났을까요?"
모용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영이 비록 특별히 능력을 감추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껏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소문이 퍼질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날 가능성은 없었다.
"우리만 아니면 사람들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텐데......"
서하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약선이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함께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니, 네 명이나 되는 여인이 무영과 함께 움직이면 대번에 주목을 받게 될 터였다.
"그래도 확신은 못할 거요? 나갈 때만 몰래 나가면요."
당비연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확신이 결여된 긍정이었다. 당가 주변에 있는 모든 객잔이 꽉 찼고, 어떤 자들은 길거리에서 노숙을 한다.
당가의 눈치를 살피느라 당가와 지나치게 가까운 곳은 피하지만, 그래도 사방에 감시의 눈이 번득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몰래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무영 혼자라면 모를까 네 명이나 되는, 그것도 무공이 뒤떨어지는 여인들까지 데리고서 들키지 않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일단 한 명씩 나가는 게 어떨까요? 밤을 틈타서 하루에 한 명씩 몰래 나가고, 성도를 벗어나서 합류하면 어떨까요?"
하미령이 낸 의견에, 모두가 서로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성도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고작 소문만으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다니, 이해할 수가 없네요."
모용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그나마 오라버니에 대한 사실이 명확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설마 약선이 이렇게 젊은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지 않을까?"
서하린의 말이 일행의 긴장이 살짝 풀었다. 그건 정말로 다행이었다.
사실 처음 소문에는 그것도 있었다. 무영에 대한 인상착의로부터 해서 젊은 사내라는 것까지 자세히 있었다.
소문의 근원이 무림맹 수뇌부인데 그렇게 허투루 일을 처리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소문이 입에서 입을 따라 퍼지면서 그 사실이 와전되고 누락되었다. 소문의 주인공이 약선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약선쯤 되는 사람이 결코 젋은 사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건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진 소문은,
하얀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신선풍의 노인이 경국지색의 미녀 여럿을 이끌고 다니며 민초를 위해 절세의 영약을 뿌리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 영약은 무림인에게는 훨씬 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해 수십 년 동안 수련해야 얻을 수 있는 공력을 단숨에 얻게 해준다는 소문까지 곁가지로 떠돌았다.
그러니 꽤 힘이 있는 무가라면 적어도 확인만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만일 무영이 그 장본인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들 앞에 나선다면 쟁탈전으로 인해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무영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많은 피가 흐르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그나마 뇌룡장주에 관한 소문은 섞이지 않아서 다행인가.'
만일 약선이 뇌룡장주라는 소문까지 함께 돌면 그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뇌룡장은 단번에 온 무림인의 시선을 받을 것이고, 그 위상이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상당한 위험에 휘말려들지도 모른다.
무림맹 수뇌부도 당연히 그런 것은 예상했다. 그들은 그저 무영의 죽음을 원할 뿐이었다. 뇌룡장이 솟아오르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강악의 합류로 인해 뇌룡장이 점점 유명해지고 있는데, 거기에 뇌룡장주가 약선이라는 소문까지 돌면 그야말로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소문에서 뇌룡장주에 대한 것은 쏙 빠졌다.
어쩌면 일이 복잡해지는 와중에 그것이 밝혀질지 모르지만, 무림맹 수뇌부는 그렇게 되기 전에 무영을 제거할 자신이 있었다. 이번 작전에는 그 정도로 막대한 힘을 퍼부었다.
무영은 이 소문이 언제쯤 가라앉을지 고민하며 고개를 저었다.
구름에 달이 가려졌다.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그 어둠을 틈타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무영은 등에 커다란 짐까지 진 채로 은밀히 움직였다. 기척을 감추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당가의 적극적인 협조까지 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처음 계획을 세운 날부터 정확히 하루에 한 명씩 당가를 빠져나갔다.
당가 무사들의 도움을 받아 은밀히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 움직였기에 지금까지 들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닷새째인 오늘 무영이 담을 넘을 차례였다.
무영은 당가 무사들이 미리 봐둔 곳으로 담을 넘었다. 일체의 소리도 나지 않는 훌륭한 움직임이었다. 담을 넘은 무영은 더욱 은밀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무영은 최대한 서둘렀다. 처음 당가를 빠져나간 하미령의 경우 벌써 나흘 동안 밖에서 머물렀다.
한가하게 객잔을 찾아갈 입장도 아니었으니 당연히 노숙을 해야 했다. 그것도 인적이 드문 산 속에서.
하루 이틀 차이가 나긴 하지만 다른 여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쯤 모두 한곳에 모여 있을 테니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말도 못하게 불편할 것이다.
사실 처음 계획을 세울 때는 무영이 가장 먼저 나가려 했다. 하지만 하미령이 그것을 반대했다.
워낙 강경했고, 지나칠 정도로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결국 하미령의 의견대로 순서를 정했다.
하미령의 의견은 단순했다. 자신이 가장 먼저 나가서 자리를 잡고, 무공이 약한 순서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비밀리에 나가고 당가에서 전폭적인 협조를 한다고 해도 꼬리가 길면 밟히게 되어 있다.
그러니 먼저 들킬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나가서 숨어 있는 게 훨씬 성공 확률이 높다는 주장이었다.
당비연이 가장 먼저 설득당했고,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서하린과 모용혜도 하미령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무영은 여인들이 먼저 나가서 고생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결국은 그녀들의 고집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무영이 일행과 합류하기로 한 장소는 성도 근처의 작은 산이었다. 일단 산에 있기만 하면 어디에 있건 무영이 찾아갈 수 있었다.
산에서는 무영의 감각이 극대화된다. 산에 들고 나는 사람들의 기척까지 감지할 수 있다. 그런 무영이 익숙한 네 개의 기운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무영은 달이 다시 구름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성도를 빠져나가려 마음먹었다. 어둠에 휩싸인 무영의 몸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약속했던 산에 도착한 무영은 일단 기감을 확장하며 정상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는 속도는 평지를 달리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 높은 산이 아니었기에 순식간에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도착하고 나니, 기감이 확장하는 것이 더욱 편해졌다. 밤이건 낮이건 무영에게는 산의 기운이 가장 익숙했다.
"이왕 온 김에 신선주의 재료도 좀 구하는 게 좋겠군."
야밤을 틈타 몰래 나와야 했기에 신선주를 챙겨올 수가 없었다.
등에 진 짐은 대부분 당가에서 만들었던 신선단과 신선고였다. 신선주 세 병을 간신히 챙겨오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턱업시 부족했다.
"다섯 명이 몇 잔씩만 마셔도 금방이니까."
일행이 무려 다섯이나 된다. 게다가 그들 모두 신선주의 맛을 알고 있다.
신선주에 빠진 사람들에게 술이 남았는데도 불구하고 한두 잔으로 참으라고 할 수는 없다.
무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우선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행을 찾는 것이다.
무영의 감각이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산정(山頂)에서 펼쳐진 감각은 그대로 산을 타고 마치 산 전체를 커다란 이불로 덮듯 감싸 안았다.
"저쪽이군."
무영은 어렵지 않게 일행이 있는 곳을 찾았다. 익숙한 네 개의 기운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날이 밝기 전에 최대한 멀리 이동을 해야 한다. 그래야 소문을 듣고 쫓아온 무림인들을 따돌릴 수 있다.
일행을 향해 가는 길에 무영은 커다란 자루 하나를 꺼내 잡초를 캐 담았다.
정성이 가득 담긴 잡초에는 밤의 음기(陰氣)가 가득했다. 무영은 손끝을 타고 오르는 음기를 느끼며 자루에 그것을 담았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동안 자루는 꽉 찼고, 밤의 어둠은 절정에 달했다.
"오라버니!"
서하린의 나직한 음성이 조용히 울렸다. 무영이 기척을 감추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꽤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는 것을 알아챘다.
다만 그것이 무영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확신을 할 수 없었기에 움직이지 않았을 뿐이다.
"가자."
무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 여인이 눈을 빛냈다. 드디어 떠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산에 도착해 숨어 있던 하미령은 떠난다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당비연 역시 하미령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팔뚝에 묶어놓은 작은 막대를 쓰다듬었다.
'설마 이걸 내게 주실 줄이야.'
그 막대는 섬뢰였다. 무영은 굳이 그런 암기가 필요치 않았다. 섬뢰보다 훨씬 대단한 벼락을 가지고 있는데 아쉬울 게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일행 중 무공이 가장 떨어지는 당비연이 그것을 가지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산을 내려가는 데 걸린 시간은 반 각 정도였다. 마음이 급한 네 여인이 지나칠 정도로 서두르는 바람에 은밀함을 포기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무영은 그에 대한 대비도 어느 정도 했다. 산에 있는 동안만큼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현재 무영의 감각은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니까.
산을 거의 내렸갔을 무렵 무영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 손을 들어올렸다.
무영이 일행의 가장 뒤에서 움직였지만 그 움직임을 네 여인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결국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이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무영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죠?"
"기척을 감춰. 누군가 다가온다."
무영의 말에 네 여인이 깜짝 놀라 기척을 죽였다. 기척을 죽이기 위해선 기운을 깊숙이 갈무리하고 움직임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호흡도 가늘고 길게 조절해야 한다.
서하린과 모용혜는 순식간에 기척을 지웠다. 둘의 실력은 이제 상당한 수준이었다.
정협맹 내에서도 이제 모용혜나 서하린보다 강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두 여인 다음으로 기척을 죽인 것은 하미령이었다. 하미령은 다양한 경험을 쌓았기에 비교적 기척을 감추고 은밀히 움직이는 것에 능숙했다.
문제는 당비연이었다. 당비연은 아직 그 수준이 일천하다. 정협맹의 봉황단과 비교해도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정도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처럼 능숙하게 기척을 죽이거나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 더 서툴렀다.
당비연의 기척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주변에 퍼져 나갔다. 당비연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 당황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기척이 크게 흔들린 것이다.
무영은 급히 당비연에게 다가갔다. 이미 무영의 기척은 산과 동화된 상태였다. 무영의 몸에서 은밀한 기운이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기의 안개가 당비연을 부드럽게 감쌌다.
당비연은 갑자기 자신을 휘감는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정신이 맑아지고, 흔들리던 기운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기척이 천천히 지워졌다.
"그렇게 서두르면 들킬 수도 있소."
가장 뒤에서 움직이는 복면인이 말했지만 아무도 그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복면인의 수는 총 이백 명. 하나하나의 수준을 고려할 때, 정말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쯧쯧, 이러다 일을 그르치면 대체 누가 책임을 지려고......."
"이미 독 안에 든 쥐다. 실패의 여지는 없어."
가장 앞서서 무리를 이끌던 복면인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뒤따르는 복면인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똑같이 그 말을 하던 놈들 스물이 황천으로 간 것 같은데......"
순간 앞장서던 복면인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를 그따위 놈들과 같다고 판단하는 건가?"
어느새 일행의 움직임은 멈춘 상태였다. 앞선 복면인은 결국 뒤돌아 자신을 도발한 사내를 노려봤다.
복면으로 가려져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기세 역시 만만치 않은 걸로 봐서 다른 무리의 수장임이 분명했다.
"아아, 그렇게 흥분할 건 없소. 화산파의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 다만 조금만 조심하자는 것뿐이오. 아무리 독 안에 든 쥐라지만, 미리 놀라게 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그제야 복면인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는 다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겠지. 바늘구멍만 한 틈이라도 보일 필요가 없으니까."
이백 명의 복면인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은밀했다.
그들은 그렇게 은밀히 산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산 근처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무영은 심각한 얼굴로 일행을 둘러봤다. 일행 역시 무영의 심각한 표정에 긴장했는지 굳은 얼굴로 무영의 눈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일이 꼬였는데?"
무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 산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어."
네 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한두 명이 아니야. 수백 명이 넘어."
수백 명이라는 얘기에 네 여인은 더 놀랐다. 그 말은 이렇게 은밀히 준비한 모든 것이 소용없었단 뜻 아닌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모용혜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네 여인이 나흘 동안이나 고생을 했다.
하루에 한 명씩 은밀히 산으로 이동해 숨었다. 사람이 그리 자주 다니지 않는 산이었기에 들킬 염려도 없었다.
한데 마지막에 무영이 도착하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무영이 실수로 이들을 이끌고 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네 여인 중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무영의 실력을 믿었다. 무영은 수백 명이 감시하더라도 몰래 몸을 뺴낼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다.
"어쨌든 일이 어렵게 됐어. 일단 조심해서 몸을 피하는 수밖에."
다행이 지금은 늦은 밤이었다. 은밀히 움직이기에도 좋고, 설사 중간에 사람들과 마주친다 하더라도 쉽게 얼굴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모용혜와 서하린은 일단 면사를 썼다. 아무리 밤이지만 얼굴을 드러내서 좋을 게 없었다. 두 여인이 면사를 쓰자, 당비연과 하미령도 둘을 따라 면사를 썼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네 여인이 무영을 바라봤다. 복면이라도 써야 하지 않나 생각할 때, 무영의 얼굴이 약간 흐릿해졌다.
얼굴을 똑바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것이 어둠과 어우러져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네 여인의 눈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무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뇌기를 조금 이용한 거야."
무영의 말에 네 여인은 일단 수긍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체 뇌기를 어떻게 이용하면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는지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이쪽으로."
무영은 일행을 이끌고 이동을 시작했다. 산 전체를 뒤덮은 감각 덕분에 인적이 없는 방향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산으로 몰려온 인원이 너무 많아서 빈틈을 찾기가 어려웠다.
"여기 흔적이 있다!"
"이쪽이야! 이쪽!"
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네 여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조금 빨리 움직여야겠어."
무영은 그렇게 말하고 걷기 시작했다. 네 여인은 무영이 빨리 가겠다고 하고선 그저 걷기만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넋 놓고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들은 무영에게 바짝 다가가 뒤를 따랐다.
"절대 걸음을 멈춰선 안 돼."
무영의 단호한 말에 네 여인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은 계속 걷기만 했다. 특별히 경공을 전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보법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네 여인의 마음이 타들어갔다.
서하린과 모용혜, 당비연은 비교적 잘 참았다. 무영을 철썩 같이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미령은 그렇지 못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걸어갈 건가요?"
하미령이 못 마땅한 눈으로 무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영은 슬쩍 고개를 돌려 하미령을 쳐다보며 대답해 주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걸음을 멈추지 마세요."
무영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하미령은 결국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더 얘기해 봐야 분위기만 나빠질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일행은 어느새 산을 벗어났다.
네 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들의 눈에는 놀람이 어려 있었다. 꽤 깊은 산속에 있었는데, 벌써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저 걸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오면서 다른 사람들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마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산에서 나온 후에도 무영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두 시진을 더 그렇게 걷고 나서야 무영은 걸음을 멈췄다.
"후우. 쉽지 않군."
무영의 얼굴에 솟아오른 땀방울을 보면서 네 여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걸었다고 땀을 흘린단 말인가. 일행 중 가장 약한 당비연도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땀을 무영이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이제 쉽게 쫓아오지 못할 거야."
무영의 말에 일행은 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수백이나 되는 무림인들이 산을 샅샅이 뒤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더구나 산도 그리 크지 않다. 그들 중 절반만 다시 움직여도 이렇게 두 시진쯤 걸어온 정도로 따돌린다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오늘따라 화 소협을 정말 이해할 수 없군요. 아까 사람을 몰고 온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하미령의 말에 서하린과 모용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을 몰고 온 것은 절대 무영이 아니었다.
무영은 그 많은 사람들이 산을 포위한 와중에도 일행을 이끌고 몰래 빠져나왔다. 그런 능력을 가졌는데도 사람들에게 움직임을 들켰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예요. 오라버니를 무시하지 마세요."
서하린의 말에 하미령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불만에 차 있었다.
"자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움직입시다."
무영의 말에 서하린은 하미령을 살짝 흩겨본 후 걸음을 옮겼다. 하미령도 더 이상 티격태격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걷기 시작했다.
무영은 일행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일행을 뒤따라 움직였다.
"오라버니, 너무 여유를 부리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공자님. 언제 사람들이 또 쫓아올지 모르는데......"
서하린과 모용혜의 말에 당비연과 하미령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영은 계속 느긋하게 걷기만 했다. 네 여인은 무영이 대체 왜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영은 네 여인이 그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그저 옷기만 했다.
"일단 마을에 들러서 하루쯤 푹 쉬자고. 산에 숨어 있는 거 쉽지 않았을 텐데."
바라던 바였다. 특히 하미령은 나흘이나 산에 틀어박혀서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하지만 섣불리 좋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 얼마 오지도 못했다. 근처 마을에서 몇 시진이라도 쉬면, 금세 소문을 뒤쫓아 온 무림인들과 마주하게 될 것 같았다.
네 여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머뭇거렸다. 무영은 그 모습에 빙긋 웃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일단 마을로 가자."
무영의 말에 네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서둘러 관도를 따라 움직였다.
"정말 번화한 곳이네요. 사람도 많고."
도시에 들어서면서 서하린이 꺼낸 말이었다. 일행은 느긋하게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각보다 큰 도시에 도착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번화한 곳이었다.
'성도 근처에 이런 도시가 있었나? 어디지? 분명 남쪽으로 온 것 같은데......'
밤을 틈타 이동했기 때문에 지금은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 객잔부터 잡는 게 어때?"
무영의 말에 서하린과 모용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일행은 가장 가까운 곳에 보이는 객잔으로 향했다. 그냥 아무 객잔이나 고른 것이었는데도 상당히 규모가 컸다.
"우선 씻고 잠을 좀 자고 싶은데......요."
당비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이렇게 사람들을 피해 도망친 와중에 아침부터 잠을 자긴 좀 미안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무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어차피 하루쯤 자고 움직일 생각이었으니까. 저도 기력을 좀 보충해야 하고."
무영은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일행은 멍한 얼굴로 무영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잔데다가 오늘은 꼴딱 날을 새웠다.
"나도 이제 모르겠다. 그럼 저도 씻고 잘래요."
모용혜와 서하린은 그렇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일행이 객잔으로 들어서자, 객잔에서 일하는 점소이로 보이는 소년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힘차게 인사했다.
"어서 옵쇼! 서창 최고 객잔인 저희 풍월객잔에 잘 오셨습니다!"
점소이의 말에 네 여인은 들어가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서...... 서창?"
"여기가 서창이라고?"
여인들의 반응에 점소이가 당황했다.
"그, 그렇습니다. 여기는 서창이고, 이곳은 서창 제일 객잔인 풍월......"
"서창이라고?"
네 여인의 눈이 동시에 무영에게로 향했다. 무영은 그녀들의 시선을 받으며 빙긋 웃었다.
"일단 쉽시다."
무영의 말에 네 여인은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모두 세 개를 잡았다. 무영이 혼자서 하나를 쓰고, 서하린과 모용혜가 함께, 그리고 당비연과 하미령이 한방을 쓰기로 했다.
네 여인은 각자의 방이 정해지자마자 무영의 방으로 몰려왔다. 원래 계획은 일단 좀 씻은 후, 푹 잠을 자는 거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오라버니,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우리는 고작 두 시진을 그냥 걸었을 뿐인데 성도에서 서창까지 왔어요. 무려 천 리라고요!"
하미령은 너무 놀라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무영은 한껏 흥분한 여인들을 향해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며 미소 지었다.
"자자, 좀 진정들 하세요."
무영의 말에 여인들은 조금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녀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무영을 바라봤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스승님께 배운 걸음걸이일 뿐입니다."
무영의 대답은 너무 단순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그 말을 이리저리 머릿속에서 굴러댔다.
처음 산에서 내려올 때도 조금 빠르다는 느낌은 받았다. 하지만 크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뭔가 빨리 내려오는 지름길을 탔다고만 생각했다. 한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올 때 걸린 시간으로 계산을 해도 서창은 너무 심해.'
무영과 함께 걸어온 시간은 총 두 시진 반쯤 된다. 처음 두 시진을 걷고 나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반 시진쯤 걸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여기 서창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땀......'
아까 두 시진을 걸은 후, 무영의 몸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무영의 경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땀이 천 리를 이동한 대가라면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게다가 혼자서 온 것도 아니고 우리 넷을 데리고......'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당비연과 하미령은 특히나 더 그랬다. 반면 서하린과 모용혜는 좀 덜했다.
그녀들은 이와 비슷한 일을 예전에 한 번 겪은 적이 있다. 물론 당시는 이번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렸지만, 그래도 비슷하긴 했다.
'대체 얼마나 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걸까?"
모용혜와 서하린은 존경이 물씬 묻어나는 눈으로 무영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네 여인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자, 무영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쓸적 돌렸다.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사람이 네 명이나 있으니 꽤 쑥쓰러웠다.
"흠흠. 이제 슬슬 잠을 자야 할 것 같은데......"
무영의 말에 네 여인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아주 기본적인 호기심은 충족했으니, 쌓인 피로를 풀어야 했다.
무영은 집에서 신선주를 한번 꺼내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인들에게 건넸다. 신선주를 한 잔 마시고 자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무영은 밖으로 나가는 여인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일쯤이면 운남으로 들어설 수 있겠군.'
사천에서는 약을 하나도 팔지 못했으니, 운남에서는 좀 많이 팔아볼 생각이었다. 무영이 운남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열대우림 지역이었다.
그곳에 가면 산과는 또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긍정적으로 그 느낌은 무영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내일은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무조건 운남 깊은 곳까지 가야겠어.'
지난밤에도 꽤 힘을 썼다. 하지만 무리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그저 조금 지쳤을 따름이다.
하지만 내일은 훨씬 더 강했군을 할 생각이었다. 함께 가는 여인들은 힘들 일이 없을 것이다. 그저 따라만 가면 될 테니까.
무영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신선단에 관계되지 않은 것 중 스승님께 따로 배운 것은 이 걸음걸이뿐이었다.
그 어떤 신법이나 보법과도 궤를 달리 하는 것. 스승님께서도 그저 걸음걸이라고만 했기에 이름도 모르지만, 얼마나 대단한지는 안다.
이 걸음걸이를 쓰며 하룻밤에 수천 리 길을 이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점이 있으니, 함께 이동하는 사람이 한 명 늘어날 때마다 힘이 두 배로 더 든다는점이었다.
즉, 한 명의 동행을 두며 혼자 걷는 것보다 두 배가 힘들고, 동행이 둘이라면 네 배가 힘들고, 셋이라면 여덟 배가 더 힘들다.
현재는 일행이 넷이니 열여섯 배의 힘이 필요하다. 어젯밤에 고작 두 시진 움직이고 땀을 뻘뻘 흘린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후우.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해야지."
일단 어젯밤에 단숨에 천 리를 이동해 왔으니 더 이상 사람들에게 쫓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느 누가 이렇게 멀리 왔다고 생각하겠는가.
무영은 침상에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조용히 잠을 청했다. 조금이라도 자둬야 내일 온 힘을 다해 운남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옥청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장로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서찰 하나를 슬쩍 던졌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안균이 그 서찰을 받아 읽었다. 안균의 얼굴이 옥청학과 똑같이 변했다.
서찰은 안균 옆의 지경복에게로 향했고, 그 역시 안균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장로들이 모두 서찰을 확인하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옥청학이 입을 열었다.
"지금 그 서찰에 적힌 내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장로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창이라니. 성도에서 무려 천 리나 떨어진 곳이다. 그곳을 단 하룻밤 만에 이동하는 건 아무리 빠른 자라도 불가능하다.
"서찰과 서찰 사이의 간격이 닷새나 되니 뭔가 착오가 있다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소?"
"그건 그렇소."
옥청학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뭔가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꽤 괜찮은 계획이었는데, 너무나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일단 소문을 유지하면서 다시 운남 쪽으로 힘을 집중하면 되지 않겠소?"
"소문을 유지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요. 쉽게 달아오른 만큼 식는 것도 금방일 테니까."
옥청학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그게 최선이다.
운남으로 힘을 집중하고 되도록 소문을 유지시켜야 한다. 그 수백에 이르는 무림인들이 함께 해야 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대책을 세워야겠군.'
옥청학이 걱정하는 것은 무영이 하미령을 내치는 일이었다. 하미령이 주기적으로 자신에게 연락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아채면 분명히 떼 놓고 움직일 거라 판단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선 일단 들키지 말아야 하고, 또 들키더라도 어떻게든 무영을 따라가야 한다.
'아니면 기회를 봐서 그 아이가 처리하면 더 좋고.'
사실 무영이 방심하고 있을 때, 하미령이 뒤에서 심장을 찌르는 게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하다. 하지만 만일 실패하면 거기서 끝이다. 무영과 연결된 가느다란 끈이 그대로 끊어지고 만다.
'하긴 들켜서 그냥 내쳐지나, 암습하다 실패하나 결과는 같지.'
옥청학은 그렇게 생각하며 앞에 앉은 장로들을 둘러봤다. 저들에게 머리를 짜내라고 해봐야 속만 터질 것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낫다.
'문제는 지금 하미령의 실력으로 그게 과연 가능할까 하는 거로군.'
정확한 무영의 실력은 모른다. 하지만 사천에서 그가 벌인 일로 미루어 상당한 실력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뭔가 특이한 능력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실력의 격차를 메우려면 영단을 내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하지만 은환을 쓸 수는 없었다.
어떤 방법을 쓰는지 모르지만 무영은 자신이나 다른 장로가 은환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집어냈다.
만일 다른 정보 없이 그저 한눈에 그것을 알아차렸다면 하미령에게 은환을 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무영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 알아차릴 수는 없다. 조금 신중하게 단전의 기를 살펴야 그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옥청학은 그런 것까지는 몰랐다.
"맹주, 이제 어쩌실 생각이시오?"
장로 중 하나가 묻자, 옥청학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장로들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기회를 봐서 암습을 하는 게 어떻겠소?"
"암습? 그게 가능하오?"
"지금이라면 힘들지만, 힘을 얻으면 가능하지 않겠소?"
"누구 말이오? 그자 옆에 붙어있다는 하미령 조장을 말하는 거요?"
"그렇소."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각자 가능성을 점치는 중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들의 표정이 모두 그렇게 변했을 때, 옥청학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힘을 좀 주면 되지 않겠소?"
"힘이라 하면....... 은환을 말하는 거요?"
아직 장로들에겐 은환의 여분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쓸 만한 수하들을 키우려 준비 중이었다. 그것을 내놓으려니 자연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말한는 건 은환이 아니오. 그 아이가 누굴 상대해야 하는지 잊은 거요?"
"크흠."
장로들은 헛기침을 했다. 순식간에 치부를 드러낸 꼴이 되어 심기가 불편해졌다. 무영에게 은환을 복용한 사실을 들켰기에 지금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은환이 아닌 다른 힘을 줘야 하오."
장로들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다른 힘이라면 설마......!"
"그렇소. 내 생각에는 태산파의 공령단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떻소?"
태산파 출신 장로 얀균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뭐라 대꾸는 하지 않았다.
태산파의 공령단이 다른 문파의 영단에 비해 비교적 많이 남았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너무나 아까웠다.
"나와 다른 장로들이 안 장로에게 따로 사례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옥청학의 말에 모든 장로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결국 안균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그렇게 하지요."
결국 그렇게 결정이 났다. 옥청학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옥청학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점점 음흉하게 변해갔다.
무림맹의 수뇌부의 예상대로, 소문은 점차 잦아들었다. 그렇게 뜨겁게 달아올랐던 소문이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사라져갔다.
몇몇 명망 있는 무림인들이 당가에 찾아가 진위를 캐물었지만, 당가에서는 무영에 대한 사실은 딱 잡아뗐다.
사실상 소문이 너무 허황된 면이 많아 대부분 당가의 말을 그래도 믿었다.
그렇게 소문은 거의 잦아들었고, 몇몇 사람들만이 소문을 따라 움직였다.
사천 성도를 뒤덮었던 소문은 이제 그 흔적만 남아 서창 쪽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 소문과 함께 복면을 뒤딥어 쓴 이백 명의 무사들도 움직였다
첫댓글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즐독...감사...꾸벅
감사감사^^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