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화해를 청하는 쪽은 늘 싹싹한 땅꼬였다.
사는 일에 다쳐 화와 우울감에 압도당할 때, 손가락 까딱할 힘이 없을 때, 땅꼬의 반복되는 말썽으로 짜증이 얹혀지면... 훈육의 해프닝은 꽤 심각하게 번져간다.
그런 날엔, 나는 작은 고양이의 서운한 마음과 상처를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없고 세상사의 절박함에 밀린 땅꼬의 존재감은 하찮아진다. 그런 내 마음의 변덕 앞에서 땅꼬는 무력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속의 어린아이가 발동한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응석을 피울 누군가, 강짜를 부릴 누군가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엄마한테 굴듯이... 하지만 어이 없게도 상대는 고양이가 아닌가.
문을 열어 격리 해제한 뒤에도 우울하게 자신에게 침잠해 있는 내 표정을 살피면서 땅꼬의 불안은 급상승한다. 어쩔 줄 몰라 주변을 맴도는 땅꼬와 그런 땅꼬를 굳이 외면하는 나.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다 밤이 깊어 가는 동안 땅꼬는 방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나를 지켜보며 생각에 빠져있다. 무겁고 냉랭하게 가라앉은 공기...
시간이 흘러 착석한 내 발치로 용기낸 땅꼬가 다가와 콩 머리를 박는다. "야옹~~~" 걱정 가득한 얼굴로 어여쁘게 말을 걸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화해를 청하는 보드랍고 따뜻한 몸짓. 텅 빈 눈빛으로 땅꼬의 걱정스런 눈빛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버리는 옹졸한 나. 어쩔줄 모르는 땅꼬. 무심하게 잠자리에 들면 잠시 후 침대 주변을 배회하는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 슬며시 발치에 웅크리고 자리를 잡는 땅꼬.
땅꼬에게 부당한 감정의 고문을 가하고 있다. 내가 세상의 전부인 저 어린 고양이에게 어른 사람이 이 무슨 응석인가... 치사하게 권력질인가. 하지만 세상에 다친 내 마음을 으쌰 돌려세우는 노력을 굳이 하고 싶진 않다.
할짝할짝...잠결에 볼을 핥는 혀의 감촉을 느낀다. 다시 용기를 낸 땅꼬가 정성껏 끝없이 내 볼을, 내 다친 마음의 상처를 핥는다. 스르르 눈물이 흐른다. 볼을 타고 흐르는 축축한 감촉에 당황한 땅꼬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더 정성껏 눈물을 핥는다. 그 즈음이면 땅꼬는 눈치챘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문제 아니었음을...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는 걸. 문제가 무엇이었든 아랑곳 않고 계속되는 위로... 화해는 끝났다. 아니 내 응석은 끝이 났다. 땅꼬를 끌어 안아 오래 쓰다듬는다. 끝나지 않는 그루밍. 그르렁, 그르렁.. 커져가는 골골송과 더불어 잠이 든다.
...
감정의 배설구를 찾아, 공감과 위로를 구하려고 사람의 숲을 헤메다 후회와 수치심으로 패퇴하면 뒤 이은 자책으로 잠 못 이루는 숱한 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해져야 한다고, 홀로 고통을 견디는 자족적 존재로 우뚝 서고 싶다는 닿을 수 없는 염원을 다짐하던 긴 밤들.다짐과 자책 사이에서 그네타기. 그 숙명을 훌쩍 초월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 사람 사이에서 사는 일이 자기 혐오를 더하는 일이 된다는 각성 앞에서 절망, 의기소침, 도망치고 싶고 작아져만 가는 나. 그런데... 자책으로 난도질 당한 자아를 내려 두어도 되는 밤이 있었다.
내 감정의 행로를 쫓는 CCTV. 셍상사에 지치고 다친 맘을, 본능적인 민감함으로 감지하는 너. 살포시 얹혀지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 외면하는 눈빛을 쫓아 응시하는 걱정스런 눈빛, 갸웃거리는 고개 짓, 나뭇잎 같이 작고 여린 혀로 이 큰 몸이 어쩌지 못하는 삶의 무게와 근심을 쓸어내리는 작지만 한 없이 관대하고 섬세한 존재가 있다.저 아이는 이 모든 관계 역량을 어디서 배우고 익힌 것일까? 반 백년의 인위로 닿을 수 없던 경지를 태생으로 쉬 넘어버리는 땅꼬. 자연이란 얼마나 신비로운가?
내가 땅꼬를 위로하는 날들도 간혹 있을 것이다. 다른 길냥이와 영토 다툼을 하다 상처투성이가 되서 돌아온 날, 땅꼬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르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 못다한 하악질을 해댄다.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다. 나는 그런 땅꼬를 안고 몸 구석구석 살피면서 상처를 확인한다. “땅꼬, 하악~~했구나. 아야아야 해?” 땅꼬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해준다. 포비든 요오드를 가져와 찢긴 상처에 바르고 호호 불어주면 서럽고 억울하고 분한 땅꼬의 표정도 녹아내린다.
길냥이의 삶에선 없을 위로... 아니, 만약 함께하는 친구 냥이가 있다면 할짝할짝 위로했을 혀를, 말로, 포비든 요오드로, 호호 부는 입김으로, 맛난 츄르로 대신하는 나. 그런 밤엔 땅꼬도 나처럼 덜 외로왔을까? 감사했울까? 집에 왔다는 안도감에 충만했을까?
작은 삼색이 고양이를 만나기 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경이.
침대 발치에 웅크려 땅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 온당치 못한 분노와 냉정함에 마음을 다치고 내가 원망스럽진 않았을까? 다친 맘을 어떻게 돌려 세울 수 있었을까? 또 내쳐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없었을까? 그럴 때, 나처럼 옹졸한 자존심 같은 게 고개를 쳐들지는 않았을까? 자아가 없으니 자존심 같은 건 없다는 혹자들의 말은 사실일까? 혹시 땅꼬는 수평선 같은 마음을 지닌 특별히 훌륭한 고양인걸까?
땅꼬는 말이 없다.
하지만 분명 '무아'의 경지, 어떤 피안이 네겐 있다. 인간에겐 상실된 낙원이... 인위로 닿으려 평생을 분투해도 쉬 닿지 못할 피안이... 사람들에게 동물 친구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