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에 실린 김광석과 김동식의 인연> - (3)편에 기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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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서울 대광고 시절의 학생증. 본적란에는 '경북 대구시 동구 범어동 268번지' 자신의 고향 주소가 적혀 있다.◇사진=싸이월드 김광석 팬카페 '김광석 그 이름 꽃씨되어'의 박현철씨 제공. |
| | 김광석!
'1964년 1월22~96년 1월6일.'
그는 현재'해피바이러스'로 우리 곁에 살아있다. 노래로 '실존'하는 것이다. '사는 게 이런 게 아닌데…'란 비애스러운 생각이 들 때 상당한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링거액'처럼 체내로 밀어넣어서 생기를 되찾는다. 아직도 방송가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가운데 한 명인 김광석. 그의 브랜드 가격은 해가 갈수록 치솟고 있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실버세대를 감동시키고, '이등병의 편지'는 군에 가는 신세대들에겐 복음서, '서른 즈음에'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몰아주는 등대 같은 곡으로,'일어나'는 생활전선에서 고전하고 시무룩하게 고개 숙이는 사람들에게 제2의 '새마을 노래'처럼 다가섰다.
어떤 사람은 그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꼭 '운석(隕石)'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를 가장 먼저 가요계로 끌고 들어 온 서울 극단 학전의 대표 김민기는 그를 위해 추모사업회를 끌어가고 있다. 평소 사탕을 좋아했고, 장터의 국밥에 만족했고, 여관 구석방을 마다않던 김광석, 부족한 개런티를 내색하지 않고 그것까지도 스태프 쫑파티 비용으로 쾌척하는 가슴 짠한 사내였다.
가수 강산에는 '그가 앞에 똥차처럼 가로막고 있어 자기 음악이 덜 떴다'고 투덜될 만큼 그는 파워 뮤지션이었다. 80년대 나이트클럽과 성인회관의 얇다랗고 음습한 음악이 득세할 때 그는 오직 소극장만 파고 들어 성공을 했다. 누구는 '언더 가수의 승리'로 평가하기도 했다.
아득하면서도 카랑카랑했고, 허무적이면서도 지축을 박차고 일어나게 하는 '겨울철 외진 새벽바람' 같은 음색의 소유자. 95년 대한민국 공연사상 처음으로 1천회 소극장 전국투어를 끝냈다. 언제나 음악만 생각했고, 자기 음악의 수심이 얕아지는 걸 경계하면서 늘 철학서를 탐독했다. 그가 한때 단골로 다녔던 대구 시내 삼덕동의 한 카페 벽에 그는 이런 문구를 남겼다.
"슬픈 날은 술퍼, 술펀 날은 슬퍼!"
김광석 평전이 나왔지만 아직 김광석의 대구시절 얘기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번주엔 가객(歌客) 김광석의 대구 스토리를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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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버지는 1960년 교원노조 활동하다 해직…이후 대봉동서 전업사 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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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 유년시절 6년…옆집에 가수 박학기 살고 있었지만 모르고 지내 1964년 대봉동서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서울 이사 갔다 다시 대구 동도초등 전학 아버지도 음악적인 감수성 뛰어났지만 '딴따라 짓'이라며 처음엔 강력하게 반대 뮤지션으로 성공후에는 전폭적으로 지지. 김승근씨 만나면서 대구에서 '공연 시작' 88년 무명시절 효성여대서 첫 단독무대. 공연 수익 적어 개런티 약속대로 못줘도 "친구 사이에"라며 싫은 내색 전혀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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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대봉동시절 찍은 것으로 보이는 가족사진. 아래줄 맨오른쪽이 김광석. 사진=친형 광복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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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직전 연습실에서 기타 튜닝을 하고 있는 김광석. 그는 공연장 뒤에서도 좀처럼 농담없이 연습에만 몰입했다. 사진=네이버 팬카페 회원'블루베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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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생가가 있었던 중구 대봉동 남도극장 옆 네거리. 아버지는 번개전업사를 꾸려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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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의 놀이터 중 한 곳인 남도극장. 현재는 책방으로 바뀌었다. |
| | ◇ 대구에서의 유년시절
김광석은 1964년 1월22일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서 태어난다.
서울 대광고 학생증에 따르면 본적은 대구시 동구 범어동 268번지로 기재돼 있다. 집 앞에 개천이 흘렀고, 범어교회가 있었다. 광석은 5남매(광나·광동·광복·광득·광석) 가운데 막내였다. 둘째 광동은 군에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광석은 훗날 대구에서 6개월 방위하던 시절 군혜택을 보게 된다. 그가 태어날 때 아버지 김수영씨(2004년 작고)는 대봉동에서 허름한 번개전업사를 꾸려가고 있었다.
그의 외가는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였다. 아버지는 8남매 가운데 장남이어서 늘 집안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반정부적 기질이 강한 듯 60년 5월7일 지역 초·중·고교 교원노조를 결성하는데 동참했다. 전교조 전신이었다. 당연히 정부에서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간부로 있었고 그 때문에 민주당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된다.
지역 교원 400여명이 전근 및 해고 통보를 받는다. 아버지는 이때 해직을 당한다.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게 전업사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걸 기반으로 전기공사 사업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선비의 기질을 타고난 아버지는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전업사를 차리기 전에 친척이 운영하던 금은방 가게에서 일을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 가게에 있던 회중시계가 말썽을 일으킨다. 회중시계 박스에서 북한찬양유인물이 발견됐고, 아버지는 공안당국에 의해 간첩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오명을 씻기 위해 자진해서 입대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광석은 자기 옆집에 가수 박학기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지낸다. 김광석의 어머니 이달지씨(82·현재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 살고 있다)는 모란 양장점 집 여주인과 친한 사이였다. 박학기는 그 양장점에서 살았던 것이다.
김광석의 대구에서의 유년시절은 6년 남짓하다. 어린 시절 남도극장 근처와 지금은 복개된 범어천이 놀이터였다. 가끔 아버지 공사 현장 근처로 가서 어머니와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현재 인천의 한 세무서에서 일하고 있는 친형 광복씨는 영화광인 아버지를 따라 남도극장에 자주 들락거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 출신의 엘리트였고 아코디언 등 악기를 잘 다뤘다. 하지만 광석은 서울 경희중 악대부에 들어가기 전 음악 관련 이렇다 할 만한 교육을 받은 게 전혀 없다. 그냥 남다른 끼가 있어서 TV에 등장하는 트위스트 흉내를 낼 정도였다. 광석이 집안 사람들을 가장 시원하게 웃긴 건 남진이 부른 '님과 함께' 노래에 맞춰 남진 흉내를 낼 때였다.
◇ 다시 서울로…그리고 다시 대구로…
아버지의 가업은 그리 번창하지 않았다.
서울로 가야 더 사업이 탄탄해질 거라고 믿고 광석이 5살 나던 해 서울로 올라간다. 잠시 장충단공원 근처에 살다가 현재 모친이 살고 있는 창신동으로 옮겨간다. 그때까지 김광석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범어동 본가에 살고 계셨다. 아버지는 전업사 사장에서 관급 전기공사 사업가로 변신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자 직접 돌봐주기 위해 대구로 내려온다. 식구가 모두 내려온 건 아니다. 광석과 누나 한 명만 데리고 내려온다. '김광석 평전'(세창미디어 간)에 따르면 72년 겨울 광석이 대구 범어동 동도초등 4학년에 입학한 것으로 돼 있다. 하여튼 김광석은 동도초등에서 1년 남짓 지내다가 다시 서울로 간다.
광석의 예술적 끼는 어디서 왔을까.
어머니는 아주 살림을 야무지게 사는 현모양처였고, 아버지는 전교조 결성을 주도할 정도로 뭔가 지식인적인 품성을 갖고 있었다. 음악적 감수성도 있었지만, 가문을 지켜야 하는 장남이란 굴레 때문에 생활에 전념한 책임감이 강한 가장이었다. 광석에게 음악적 기운을 불어넣어주지는 않았다.
대신 작은 할아버지가 한 풍류를 했다. 유명 악극인을 불러 동네잔치를 벌일 정도였다. 아버지는 광석이 명지대 시절 통기타 아르바이트 하는 걸 '딴따라 짓'이라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그가 뮤지션으로 크게 성공하면서 그의 길을 인정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 대구에서의 첫 공연 스토리
대구에서 김광석 공연을 가장 활발하게 유치한 기획자는 예술기획 성우의 대표인 배성혁씨와 현재 지역의 모 언론사 사회부 기자로 활동 중인 김승근씨다.
김씨는 광석을 대구에 가장 먼저 소개했고, 배 대표는 광석의 대구 콘서트를 활성화 시켰다. 김씨는 89년 11월, 배 대표는 90년 11월, 그의 첫 콘서트를 유치한다.
김씨는 언론사에 들어오기 전 지역 공연기획문화를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87년 여름, 서울 홍대 앞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동물원 시절 '거리에서' 정도로 이름을 내고 있던, 무명이나 마찬가지인 그를 만나 대구에서의 공연을 타진하고 내려온다. 광석은 이때 자신과 성향이 별로 맞지 않은 동물원과 섞여 나름대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자기 기질을 완전하게 뽑아내지는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88년 10월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가을 축제 때 김씨가 그를 초대가수로 부른다. 그때 광석은 김씨한테 "이런저런 일로 대구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단독으로 초대돼 내려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을 한다. 광석은 하얀색 프라이드를 직접 몰고 축제장으로 내려왔다. 사회자도 광석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않아 그냥 소개하면 반응이 별로 일 것 같아 "'거리에서'를 부른 김광석" 정도로 덧칠을 했다.
원래 세곡만 부르게 돼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광석은 자기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객석의 반응이 달아오르자 그도 무척 고무돼 무려 40분 동안 끼를 분출시킨다. 광석의 1집 음반은 88년에 나온다. 가요계에 나온 건 84년 김민기의 '개똥이' 음반에 참석하면서부터다. 87년 군 제대 직후인 광석. 대구에서 그 누구도 언더 가수였던 그를 몰랐으며, 알아도 그가 대구 출신임을 아는 이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다음해 6월쯤 다시 내려온다. 대구대 대명동 캠퍼스에서 '사랑이 떠나간다네'를 부른 김종찬을 메인으로 하고 그 옆에 댄스가수 박남정을 끼우고 그 분위기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데도 그가 게스트로 무대에 오른다.
김씨는 당시 가수 김종국씨(현 중구 문화원 사무국장)와 함께 공연기획사 '초화'의 대표로 있었다. 김씨는 그날 인간적이고 대범한 광석의 기질을 발견하게 된다. 도시락을 시켰는데 자기가 먹어보니 살짝 상해서 광석에게 먹지 말라고 하니, 광석이 빙그레 웃으며 "먹고 안 죽으면 되죠"라면서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묵묵히 다 먹는 것에 반해 그를 좋아하게 된다.
더 짠한 에피소드 하나. 금호호텔 크리스탈 볼룸에서 이틀 동안 4회 공연을 했다. 1회 공연료로 100만원을 주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홍보 부족인지 객석이 별로 차지 못했다. 친구나 다름없는 김씨가 그에게 아주 미안해 하며 "공연수익이 별로여서 100만원밖에 주지 못할 것 같다"고 하니, 그는 "친구사이인데…"라면서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면서 그 돈을 받는다.
그 다음 광석의 처신이 아주 '대인'스러웠다. 그는 수고한 스태프를 위해 그 돈을 쾌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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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살 열흘전 '대구 마지막 공연' 후 염매시장서 술자리 가졌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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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새 음반 얘기만 하고 평소와 달리 시종일관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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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이 무명시절 즐겨 찾았던 봉산동 학사주점 골목안에 있는 한미여관.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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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이 대구에 오면 폭음했던 중구 삼덕동 삼덕성당 뒤편 술집 '깡통차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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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열흘전쯤 대구공연 직후 쫑파티를 벌인 동아쇼핑 옆 염매시장 전경. 그때는 좌판과 포장마차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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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이 지인들과 자주 오갔던 봉산동 학사주점골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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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기획 '성우' 배성혁 대표와 인연
90년 대구 동아쇼핑서 첫 공식 콘서트
대구 공연오면 단골 술집서 밤새 노래
◇ 예술기획 성우와 김광석
대구의 대표적 공연기획사인 성우는 90년에 탄생한다.
이때 성우와 광석이 의기투합을 한다. 배 대표는 89년 광석을 경북대 축제장에서 처음 만난다. 이듬해 11월 성우가 광석의 대구 콘서트를 동아쇼핑 스타홀에서 연다. 입장료는 8천원, 200석의 공연장에 무려 360명이 밀어닥쳤다. 대박이었다. 그는 베이스 기타 한 대만 뒤에 세우고 2시간 이상 공연을 했다. 이날 계명대 미대 출신으로 외국에서 미술 공부하다가 블루스 기타리스트가 돼 귀국한 김목경씨가 게스트로 출연했다.
쫑파티는 염매시장 돼지고기집에서 했다. 이날 광석의 4회 공연 개런티는 350만원. 성우는 이후 모두 10번 가량 광석의 콘서트를 기획했고 그때마다 성공을 했다. 성우의 성공 뒤에 광석이 있었다.
◇ 김광석의 대구 아지트-삼덕동 심야 몰래 술집 '깡통차기'
광석이 죽기 3년전쯤 중구 삼덕동 삼덕성당 뒤편 골목에 게릴라 술집 같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전용 술집이 생긴다.
바로 '깡통차기'였다. 주인은 광석을 대구로 끌어내린 김승근씨. 현재 그 건물은 재건축됐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들어와 있다. 김씨와 함께 그곳으로 가봤다. 90년대말 그 건물은 온데간데 없고 다만 하얀 대문이 그 시절을 유일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깡통차기는 긴 복도처럼 생긴 좁은 골목을 들어가 오른 쪽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테이블이 6개 정도 놓인 빈티지 라이브 빈티지 카페였다.
언더뮤직이 고팠던 이들의 아지트였다. 당시에는 심야영업단속이 있던 시절이었다. 다른 술집이 문을 닫아도 그곳은 배짱좋게 심야영업을 했다. 일반 술은 팔지 않았다. 봉덕시장 등에서 구해 온 버드와이저만 팔았다. 광석은 그곳을 너무 좋아했다. 대구 공연차 내려 오면 쫑파티를 겸해 거르지 않고 거기로 왔다. 광석의 음유시인과 방랑가적 성정을 엿볼 수 있는 낙서가 벽에 적혀져 있었다.
"슬픈 날은 술퍼, 술펀 날은 슬퍼!"
무릎을 치게하는 촌철살인의 한 줄 시(詩)였다. 그 집에는 무려 3천여장의 LP음반이 있었다. 술이 거나해지면 광석은 기타를 쳤고, 그것에 맞춰 주인 김씨는 '거리에서', 비틀스의 'Let it be' 등을 불렀다. 광석은 그 집에 10번가량 들렀다고 한다. 광석은 깡통에서 1차를 하고 2차로 봉산동 학사주점 골목, 염매시장 포장마차, 효목동 동구시장 등으로 갔다.
◇ 대구에서 마지막 공연과 추모공연
95년 12월24~25일. 광석이 자살하기 불과 열흘 전이었다.
소극장 공연 1천회를 돌파한 직후 인기절정이었던 광석의 대구공연이 경북대 강당에서 열렸다. 만원사례였다. 모두 세차례 공연이 있었는데 마지막 공연 때 1차 스태프와 경북대 북문 앞 식당에서 식사후 DJ 이대희 등과 어울려 그가 가장 맘에 그렸던 염매시장 내 포장마차로 가서 2차 쫑파티를 한다. 그날 광석은 곧 나올 새 음반에 대한 얘기를 한 것 말고는 시종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게 대구에서 마지막 그림이었다.
추모공연은 2006년 1월6일 중구 삼덕동 클럽 '꼬뮨'에서 '문화신문 안' 주최로 처음 열였다. 10주기 추모공연 형식이었다. 지역의 록 밴드인 '아프리카'와 '제임스'가 공연했다.
광석이 호주머니는 항상 볼록했어요
왜냐고 물으면 사탕을 꺼내주곤 했죠
무명시절에는 출연료가 너무 적어서
술 마시고 숙박비 내면 남는 게 없었죠
# 내가 만난 김광석은
취재 해보니 광석과 절친한 이들이 지역에 적지 않았다.
대구MBC 전국 최장수급 인기 DJ인 이대희씨와 대구KBS의 간판 DJ로 활동했던 김병규씨는 무명의 광석과 가장 살가운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지역 통기타 가수로서는 김동식씨가 있다. 그는 현재 개그맨 김샘 김홍식과 함께 대명동 앞산 빨래터 근처에서 라이브 카페 '스폰서'를 꾸려가는데 김광석이 대구에서 가장 인정한 통기타가수 중 한 명이다.
또한 대구 MBC에서 노래자랑 코너 장수 심사위원을 역임했던 가수 이상래씨는 광석과 음악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씨는 "내가 알기로 광석은 일반 뮤지션이 아니라 사상가 같았다. 공연 전에는 절대 잡담이 없다. 그는 연습벌레였다. 늘 새로운 음악을 갈구했고, 자기 순서를 기다리면서 오직 스케일 등을 연습해 자기 노래에 몰입한 게 인상적이었다"고 그를 추억했다.
▶ 낭만 DJ 김병규
그가 광석을 처음 만난 것은 방송국이었다. 85~86년 방송에서 한 코너를 맡고 있었는데 광석을 초대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나이트클럽과 회관 문화가 판을 치고 있어서 광석 같은 버전은 설 자리가 별로 없었지만 김병규는 언더에게도 문호를 활짝 연 것이다.
"초창기라서 별로 이름은 없었지만 정통 포크가수 기운이 느껴져 속으로 '이 친구 노래 상당하네, 언젠가 자기 시절이 올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다."
"선배님, 저도 대구 출신이고 동도초등 출신입니다"라며 그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김병규도 고향 후배라서 좀 더 관심을 줬다. 첫날 방송국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 이후 광석이 선뜻 그를 형으로 모셨다. 대구 근처에 공연만 오면 늘 방송국 스튜디오를 찾는다. 늘 피곤한 광석이었다. 그가 생방송 중이면 스튜디오 안 카펫 바닥에 기타 하드케이스를 베고 토막잠을 자기도 했다. 심지어 코까지 골았다.
김병규와의 관계를 모르는 방송국 사람들은 버릇없는 광석을 보면서 눈총을 마구 쏘아댔다. "저 친구 누구야"라고 직원들이 뭐라면 김병규는 "고향 후배"라면서 감싸줬다. 방송을 마치면 둘은 신천동 근처 포장마차, 족발집 등에 가서 주로 소주를 마셨다. 기분 좋으면 술로 밤을 새기도 했다. 광석은 의리있는 인물이었다. 대개 자기만 유명해지려고 측근들을 잘 밀지않는데 그는 달랐다. 신인이지만 박학기, 한동준 등도 소개해주었다.
광석한테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을 김병규는 회상했다.
"항상 호주머니가 불룩했다. 왜 그러냐고 하면 안에서 사탕을 꺼내 내게 주었다. 아마 허기도 지고, 목에 좋으니 목관리, 간식 겸해서 즐겨 빨아 먹은 것 같다. 숙소는 MBC 근처 여관 등이었다."
▶ 대구 MBC DJ 이대희
3년간 지속된 동아쇼핑 스타홀에서 진행된 '금성판타지아음악회'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광석이 동물원을 나와 여행스케치를 따라다닐 때였다. 대구에서 3년간 의미있는 공연을 하러 내려온다. 금성(LG의 전신)에서 후원하고 매월 한 차례 동아쇼핑 스타홀에서 지역 포크음악 마니아를 위한 공연을 했는데, 이때 이 음악 사회자 겸 행사 총괄자가 바로 현재 대구 MBC FM 오전 11시 골든 디스크의 진행자 이대희씨(53)다. 이씨의 기억이다.
"그는 아직 전국적 유명세를 띠기 전이었고 메인 가수도 아니었다. 여행스케치 공연에서 오프닝 무대를 맡은 출연료 싼 서울에서 활동하는 무명가수나 마찬가지였다. 머리도 짧았다. 군을 제대 한 지 얼마 안된 것 같았다."
이씨는 그 공연 때문에 광석과 인연이 됐고 자주 염매시장 좌판전 찌짐집 등에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출연료가 너무 적어 술을 마시고 여관 숙박비를 내면 남는 게 없을 정도였다. 그때 광석은 봉산동 학사주점 골목 안 한미여관을 자주 애용했다.
(4) 15주기 김광석 콘서트…내일 경북대 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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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기·장필순·윤종신·동물원 등 출연 15일 15주기 김광석 콘서트는 경북대강당에서 열리는데 기존 공연과 조금 구별이 된다.
일단 대구의 (주)예술기획 성우에서 전체 흐름을 조율하고 연출한다는 것이다. 행사를 준비하는 스태프만 30여명이며, 두달가량 준비를 했다. 가수들은 서울에서 리허설을 했다. 공연장 로비에서는 사진 전시회가 열린다. 김광석 사진집을 펴낸 임종진씨가 저작권료를 받지 않은 채 22점의 사진을 내놨다. 다양한 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400인치 대형 전광판을 건다. 광석의 방송물도 뒤져서 발굴했다.
출연가수들이 대구에서 대형으로 한 건 대구에서 두 번째다. 이 정도로 큰 규모의 콘서트는 서울에서 총연출이 이뤄지는데, 이번에는 대구에서 주도했다. 대개 지방 투어를 도는데 이번에는 대구와 서울에서만 한다. 서울은 2월12일 이화여대 대강당. 주최측과 출연가수들은 공연수익금과 개런티를 추모사업회 기금으로 전달할 계획이다. 공연은 오후 3시, 7시30분. 입장료는 R석 7만7,000원, S석 6만6,000원, A석 5만5,000원이며 예매는 1599-1980
▶공연 큐시트 공개
1분간 오프닝 영상이 나간다. 대박나라가 출연 '그날들' '사랑이라는 이유로'를 들려주고 들어가면 영화 JSA 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신세대 대표 입영곡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등병의 편지'를 박학기와 이동은이 듀엣으로 부른다. 김광석과 친구사이인 박학기가 그와 얽힌 추억담을 얘기하면서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부른다. 영상이 나가고 난 뒤 유리상자와 나무자전거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였음을'과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이어 장필순이 '서른 즈음에', 노래그룹 팀이 '거리에서', 올해 처음 출연하는 윤종신이 그의 밴드와 함께 나오고, 동물원은 '널 사랑하겠어'와 '변해가네', 엔딩 싱어롱 곡은 '나의 노래' '일어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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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거리에서
02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03 기다려줘
04 사랑했지만
05 사랑이라는 이유로
06 슬픈노래
07 그날들
08 나무
09 나의 노래
10 잊어야한다는마음으로
11 서른즈음에
12 일어나
13 바람이 불어오는 곳
14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15 그녀가 처음 울던 날
16 이등병의 편지
17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18 새장속의 친구
19 내사람이여
20 변해가네
21 불행아
22 바람과 나
23 너에게
24 잊혀지는 것
25 먼지가되어
26 그대의 웃음소리
27 광야에서
28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29 말하지 못한 내사랑
30 그루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