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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35) 2025. 3. 19
온전하지 못한 아비얌
열왕기상 15:1~8
<지난 시간 요약 –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르호보암과 유다>
남유다의 왕으로 즉위한 르호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르호보암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그 결과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그들도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아래마다,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습니다(23).
2) 그 땅에는, 신전 남창들도 있었습니다(24).
가나안의 대표적인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아스다롯)를 섬기는 예배 행위 속에는 성행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음란한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그 일을 ‘가증한 일’로 여기셨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은 애굽 왕 시삭이 보내어 예루살렘 왕궁과 성전의 보물들, 그리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까지 다 털어가게 하셨습니다. 결국, 르호보암은 금 방패 대신에 놋 방패를 만들어서, 경호 책임자에게 주어 자신을 방어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금 방패로 대표되는 황금기의 종식과 놋 방패로 대표되는 쇠퇴기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7년을 다스리고, 르호보암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아비얌의 즉위>
그의 아들 아비야가 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습니다.
1~2절“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2 예루살렘에서 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르호보암(17년 동안 즉위)은 여로보암(22년 동안 즉위)보다 일찍 죽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의 왕위에 오릅니다(B.C. 912년경). 그런데 유다나 이스라엘 왕의 즉위 연대를 이렇게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의 연대에 비교해서 밝히는 상관 방법은 열왕기의 특징입니다(9, 25, 28, 33절). 당시에는 이외에 달리 객관적 연대 표시 방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서력’이 사용된 때는 거의 8세기 돼서야 - 예수님 탄생을 기준).
앞장을 강해하면서, 여로보암의 아들과 르호보암의 아들 이름이 ‘아비야’로 같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대하13:1 - ‘아비야’라고 기록). 그런데 여기에는 ‘아비야’가 아니라 ‘아비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름의 뜻은 ‘나의 아버지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좋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두 사람의 행동은 정반대였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비록 병이 들어 일찍 죽기는 하였지만, 아비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던 것입니다(14:13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 그의 애석한 죽음조차 사실상 ‘복된 죽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로보암 가문이 받아야 할 심판을 받지 않고 죽은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백성들의 애통, 묘실에 묻힘).
그러나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행동하였기에, 신명기 역사가가 그렇게 이름을 슬쩍 바꾼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비얌’은 ‘나의 아버지는 얌이다’라는 뜻입니다. ‘얌’은 바다를 뜻하는 것으로, 바다에는 괴물, 용, 악어(리워야단) 등이 사는 곳입니다. 열왕기는 그의 이름에 의도적으로 ‘얌’을 넣어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매주 좋지 않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한편, 대하11:21~22에 의하면 아비얌은 원래 장자(長子)가 아닌, 단지 르호보암이 장자로 '삼은'(후계자 지명을 의미) 아들로 나타납니다. 이는 아비얌의 모친 ‘마아가’가 르호보암이 총애하는 왕비였기 때문입니다(르호보암에게는 18명의 왕비와 60명의 첩이 있었음). 그러므로 이러한 르호보암의 행위는 조부 다윗의 행위와 흡사합니다. 왜냐하면, 과거 다윗도 장자를 제쳐 놓고 총애하는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입니다(1:5-40). 그러나 다윗의 경우와 달리 르호보암은 일찌감치 아비얌을 왕위 계승자로 선포함으로써 사전에 왕비를 둘러싼 경쟁 가능성을 봉쇄하였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하11:21 “르호보암은 아내 열여덟 명과 첩 예순 명을 거느려 아들 스물여덟 명과 딸 예순 명을 낳았으나 압살롬의 딸 마아가를 모든 처첩보다 더 사랑하여/ 22 르호보암은 마아가의 아들 아비야를 후계자로 세웠으니 이는 그의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로 삼아 왕으로 세우고자 함이었더라.” 또, ‘마아가’는 아비살롬(Abishalom), 즉 압살롬(Absalom)의 딸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의 딸은 다말 하나뿐입니다(삼하 14:27, 압살롬의 누이 다말과 동명이인). 문제는 역대기를 보면 풀립니다. 역대기에서는 ‘우리엘의 딸 미가야’로 소개합니다(역대하 13:2). 그러므로 아비얌의 어머니 미가야는 압살롬의 딸 다말과 기브아 사람 우리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고, 압살롬의 손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압살롬의 딸이라고 한 것은, 성경에서 아들이나 딸이 자손의 의미로 종종 사용되므로 이런 혼란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르호보암은 자기 조카와 결혼한 셈입니다. 이러한 근친결혼은 고대 사회에서 흔한 것이지만(창20:12, 24:48, 29:15-30), 왕가 내의 근친결혼에는 특히 정치적 목적이 강했습니다. |
<온전하지 못한 아비얌>
아비야는 아버지 르호보암의 죄를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3~5절 “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4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아비얌은 그의 아버지가 지은 모든 죄를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아버지인 르호보암의 모든 죄는 14:23-24절에서 요약되어 있습니다.
14:23~24 “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24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1) 그들도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아래마다,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습니다.
2) 그리고 아세라 신전이 있는 곳에 남창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민족의 가증한 일을 이스라엘이 본받아 행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악이 되었고, 아비얌이 부친의 악함을 그대로 본받아 행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비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였음에도,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열왕기 기자는 다윗과의 관계에서 해석합니다. ‘다윗을 위하여’(4), 혹은 ‘다윗을 생각하여’ 이런 말이 열왕기서에서는 아주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뻐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등불을 주시고’(4절)에서 ‘등불’은 등잔이나 빛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자손’을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11:36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
우상숭배를 허용한 아비얌(3절)이 자기 아들에게 대를 물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북왕국의 우상 숭배자들이 자주 대(代)가 끊기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은 것에 비해 남왕국 왕들은 비교적 무사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14:10, 16:2, 왕하 10:11). 한편, 북왕국은 약 250년 동안의 존속 기간 동안 무려 아홉 왕조의 교체를 겪었으나 반면 남왕국은 약 400년 동안 다윗 왕조의 통치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왕국 사이의 전쟁>
여로보암과 르호보암 사이에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늘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었습니다.
6~8절“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7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8 아비얌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니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이때 있었던 전쟁 이야기가 역대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대하13:1-20).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각각 40만 명과 80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로 맞섰습니다. 숫자로만 보면 북이스라엘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마도 그동안 꾸준하게 군사 조직을 갖추고 있었던 여로보암이 먼저 무력행사에 나섰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뜻밖에도 남유다의 대승으로 끝납니다.
대하13:15-18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르매 유다 사람이 소리 지를 때에 하나님이 여로보암과 온 이스라엘을 아비야와 유다 앞에서 치시니/ 16 이스라엘 자손이 유다 앞에서 도망하는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므로/ 17 아비야와 그의 백성이 크게 무찌르니 이스라엘이 택한 병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엎드러진 자들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18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항복하고 유다 자손이 이겼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음이라.”
여기에서 ‘하나님이 그들의 손에 넘기셨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승리를 주셨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아비야와 여로보암 사이의 전쟁에서 하나님은 아비야(남유다)에게 승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남유다 백성이 북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선하고 의로웠기 때문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비야와 남유다 백성을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도구라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비켜 갈 수는 없습니다. 그 전쟁 후에 아비야는 죽고 맙니다. 여로보암보다 2년 먼저 죽은 것입니다. 그가 왕이 된 지 겨우 3년 만의 일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은 기록하지 않지만, 아마도 전쟁의 후유증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여로보암과 아비야를 동시에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전쟁에 이겼다고 해서 정말 이긴 것이 아닙니다. 전쟁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두 왕국으로 갈라져 싸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사실 이렇게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두 나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은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면 그렇게 서로 싸우다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완전히 다른 두 나라로 갈라서는 게 아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모습에 자극받아서 남유다가 본래의 자리를 회복함으로써 조만간 다시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계획은 여로보암의 잘못된 선택으로 어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르호보암도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두 왕국은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하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한 나라로 만드는 일을 포기하신 것일까요? 인간의 불순종에도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시간이 늦어졌을 뿐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역설적으로 두 왕국이 다 망한 후에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겔37:15-22(유다와 이스라엘의 통일)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6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가지고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18 네 민족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뜻인지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하거든/ 19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20 너는 그 글 쓴 막대기들을 무리의 눈앞에서 손에 잡고/ 21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 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에스겔 선지자는 주전 597년에 바벨론의 2차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당시 에스겔을 비롯한 유다 백성은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된 수치와 치욕으로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암담한 현실에 탄식하는 백성에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말씀을 주십니다.
두 개의 ‘막대기들’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이름이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16절). 그것을 손으로 잡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두 나라가 모두 망해서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하나님은 장차 그들을 다시 모아서 ‘한 나라’로 만드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단지 그들이 다시 ‘한 나라’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겔37:23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더 이상 자신들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하게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두 나라로 갈라서게 이유가 드러납니다.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둘 다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왕국을 모두 망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망함을 통해 그들을 회개하게 하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예언대로,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동안 철저히 회개하는 시간을 보냈고, 다시 귀환하게 되었고, 에스라의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신앙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사십시오.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는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행동하였기에, 신명기 역사가가 그렇게 이름을 슬쩍 바꾸었습니다.
우리 성도에게는 두 개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부모님들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자신의 이름 뜻에 걸맞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름의 뜻에 합당하게 사신 분 중에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에피소드)
다른 하나는 신앙 때문에 주어진 이름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안디옥교회에서 처음 불림)이라는 이름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그 이름으로 불릴 수밖에 없습니다(주변 사람들이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다 앎).
예수님의 산상 수훈 –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바울은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2:15)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향기를 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언약을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아비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였음에도,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아비얌 자신도 다윗의 은혜를 입은 자 – 아버지 르호보암의 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름)
그것을 열왕기 기자는 다윗과의 관계에서 해석합니다. ‘다윗을 위하여’(4), 혹은 ‘다윗을 생각하여’, ‘등불’(후손)을 끄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하신 언약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 ‘영생’의 축복(약속)을 받았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3. ‘징계’도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둘로 나누시고, 심지어 훗날 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미워하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죄악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모습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사랑의 매를 들어 엄중하게 견책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조건 칭찬하고 잘해 주는 것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잘못되었을 징계하여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히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도 한결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잘못 갈 때, 징계를 주시는 것도 감사히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기회로 삼으로 좋겠습니다.
4. 하나님은 남북이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나뉘었지만, 하나님은 전쟁을 그치고 속히 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원은 단순한 통일이 아닙니다.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통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녘의 동포들에게 복음이 전해져 함께 구원받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남한의 교회와 성도들이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 다 망한 후에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북녘의 동포를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북한은 결국 무너질 것). 그날과 그때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통일시켜 주실 때 우리가 능히 그들을 품을 수 있을 만한 영적, 경제적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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