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 글
국사찾기협의회 초대회원이신 고이유립 선생님에 대한 한배달 기고 글입니다
- 자료 : 한배달 2001년 7월호
(민족사학의 큰 스승 '한암당 이유립 선생')
< 편집부 >
지구상에 난무하는 사건 하나 하나가 모두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건의 미치는 파장과 영향력이 역사가들에 의해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어야 비로소 역사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역사가들의 임무는 바로 어떤 사건을 역사적인 것과 그 밖의 것으로 구분짓는 데서 그 위력이 잘 드러난다.
따라서 이 역사가가 어떤 사고방식(여기서는 사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사건의 취사선택과 평가는 전혀 달라지게 되는데 민족사관의 경우 역사발전의 주체를 '민족'이란 단위로 인식하고 모든 판단의 기준을 '민족'에 두고 있는 사관을 말한다.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을 민족사학자라고 말하는데, 이들의 생각은 개인보다는 '민족'이란 단위의 생존, 발전, 영광을 우선한다.
우리 겨레에게 있어 민족사관의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 문화와 민속이 이 민족을 단위로 형성 발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민족사학의 입장에서 우리 민족사의 가교역할을 해온 민족사학자들을 시대를 거슬러 재조명 해본다.
우리 사학, 즉 한국사학의 진로 설정에 참고가 될 것을 기대한다.
<편집자 주>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의 생애 >
한암당(寒闇堂) 이유립 선생은. 1907년 평북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독립운동가 단해(檀海) 이관집(李觀 ) 선생의 4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철성(鐵城)으로 이암의 후손. 자는 채영(采英) 또는 중정(中正) 호는 한암당(寒闇堂) 또는 정산초인(靜山樵人).
세 살부터 어머니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6세에《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읽다가「한무제토멸지(漢武帝討滅之)하시고」라는 구절에 이르러 '위만조선이 우리 나라면서 우리나라를 토멸한 한무제는 분명 우리나라 원수인데, '하시고'라는 토씨를 붙여 읽는 것은 나는 싫다'하여 끝내《동몽선습》을 읽지 않았다.
13세 때인 1919년 4월 7일 신안동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해 10월에 아버지를 따라 단학회(檀學會)가 주관하는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계연수(桂延壽), 최시흥(崔時興), 오동진 등의 강연을 듣는 한편 조선독립소년단 조직 활동에 참가, 단장이 되었다.
의민사(義民社)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뽑혀 전봉천과 함께 국내의 통신연락을 도왔다.
24세인 1930년
「삼육전재 국권회복(三育全材 國權 復)」이라는 해학 이기(李沂)선생의 신교육의 뜻을 발휘하기 위하여 삼육사(三育社)를 조직.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회람잡지《三育》을 발행하기도 하였는데.
《三育》7월호에「광개토성릉비문징실고廣開土聖陵碑文徵實考」등의 기사로 인하여 삼육사는 1931년 7월 31일 강제 해산되었다.
33세인 1939년 이상유의 5만원 희사에 선대로부터 경영해 오던 구성재(求誠齋) 재산을 합하여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종사하였으나,
1942년 '학생들의 신사참배 기피', '조선교육', '창씨개명불응', '무궁화 심기' 등 12항을 이유로 강제 폐쇄 당했다.
39세인 1945년 「단학회(檀學會)」기관지《태극(太極)》의 주간으로 취임하였다가 1946년 1월 1일 발행 신년호에「신탁통치반대론」기사 필화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금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57세때인 1963년 단학회의 3대강령인 '제천보본(祭天報本)', '경조홍방(敬祖興邦)'. '홍도익중(弘道益衆)'을 완전 계승하여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조직 확대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63세인 1969년 이석영씨의 재정 후원으로 강화도 마리산 단학동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신시개천의 창시자 한웅천왕을 비롯하여 치우천왕. 단군왕검을 봉안하고
매년 - 대영절(大迎節. 음 3월 18일). - 개천절(음 10월 3일) 두 차례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69세인 1975년 5월 8일 《세계문명동원론(世界文明東源論)》을 미국의 하버드. 워싱턴. 콜롬비아. 하와이. 캘리포니아 등 5개 대학교에서 주문해 갔다.
70세인 1976년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제씨와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고 잡지《자유》에 옥고를 기고하기 시작하였으며,
78세인 1985년 배달문화원 대상을 수상하신 이듬해
1986년 4월 19일 새벽 1시 자택에서 운명하셨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것이 1986년이니 이제 15년을 지나고 있다. 다행히 생존해 계실 때 교류하던 인사들이 상당수 있어 그분들로부터 한암당 선생에 대하여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다음은 박정학 한배달 치우학회장이 전하는 내용이다)
박정학씨는 한암당 선생을 만난 기억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일로 3가지를 꼽는다.
그 첫째는 빼어난 기억력이다.
한암당 선생과 교류하던 당시 '10여세 때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고 싶으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구해달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필요한가를 되물었더니 '옛날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40여종의 도서 80여 곳에 대한 복사를 요청받고 국립도서관을 방문. 상당수 책이 귀중본. 희귀본이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것임을 알게 되고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더니 도서를 찾던 담당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도대체 이런 책을 누가 보느냐?'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지하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런 책이 수북히 쌓여있다' 며 요청한 자료를 준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원하는 책의 복사부분을 상자에 담아 전해드렸다 (그러나 이 상자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선생님은 세상을 뜨셨다).
아마 한번 들었던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대한독립소년단 시절 전령으로 활약할 때는 편지대신 외워서 전달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두 번째는 속독에 의한 뛰어난 독서력이다.
한 번은 조선왕조실록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찬가지로 과거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 책을 구해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배달 창립 멤버인 모 회사 사장에게 부탁하여 사장이 직접 책을 전해드렸다.
책을 받아 본 선생님은 매우 기분 좋아하시며 책을 펼쳐 보시더니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겨 읽으면서도 필요한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내 쪽지를 끼워 표시해 놓고 원고를 완성하는데 사용하셨다. 순 한문으로 된 책을 그렇게 빠르게 읽는 것은 처음 보았으며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셋째는 빼어난 건강이다.
79세의 노인이 젊은 제자들과 함께 산을 오르는데 젊은 제자들이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산을 오르셨다. 몸이 아주 가벼워 보였다.
< 운초 계연수 선생과의 만남 >
계연수 선생은 호를 운초라고도 하고 일시당(一始堂)이라고도 하는데. 한암당 선생 아버지와는 광복운동을 함께한 관계로 어릴 때부터 가까이서 자주 접해온 사이였다.
그러던 1943년 어느날. 계연수 선생이 집으로 찾아와서 어린 이유립을 부르더니 '너는 머리가 좋고 하니 네가 우리 역사를 공부해라'고 부탁 겸 타이르셨다.
그러나 독립운동과 정치에 더 관심이 있던 이유립은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3일 후 목이 잘린 계연수 선생의 시신이 대동강변에서 발견되었다. 불과 몇일전에 자신에게 일렀던 말들이 선생의 유언처럼 들리고. 마침내 운명처럼 '우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틈틈이 계연수 선생에게 들었던 이야기에다 신채호. 이덕수 선생들과 교류하면서 전해 듣는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하였다.
<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 체계 >
'서로의 원수를 잊고 세나라(고구려. 백제. 신라)가 힘을 함쳐 당나라를 쳐 없애자는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장군의 제의는 무시되고. 한, 단, 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 고려로 이어지는 국통, 국학, 사관이 올바로 풀리지 못하고...'
이 말은 한암당 선생의 사관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암당 선생의 민족사에 대한 체계는, 물론 한암당 선생의 수많은 논저를 읽고 난 후에야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다음의 몇 가지 주장에서 그 맥락을 읽을 수가 있다.
(1) 우리 민족의 정통성은 한국에서 이주해온 한웅천왕의 배달 건국으로부터 비롯하여 단군조선-북부여(원시고구려)-고구려(본고구려)-대진(大震-중고구려)-고려(후고구려)-조선-임시정부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2) 세계문명은 서(西)에서 동(東)으로 온 것이 아니라 동(東)에서 서(西)로 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민족사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5898년 전에 있었던 한웅천왕의 태백산 천강과 함께 이룩된 신시개천에서 찾아야 한다.
(4) 단군조선은 엄연히 실존했던 역사이며, 아사달시대(1048년), 백악산 아사달시대(860년), 장당경시대(188년)를 통해 2096년의 역년을 셈할 수 있고,
통치방법으로 신한(진한), 말한(마한), 불한(변한)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본 뜬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가 적용되었다.
(5) 고구려 건국 연도는 북부여 원년(신시개천 3659년)으로부터 기산되며 보장제(帝)의 27년까지는 907년이 되지만(신시개천 4565년) 해모수 8년(신시개천 3666년)의 부여 고향 수복으로부터는 정확히 900년이 된다.
(6) 기자조선은 환작(幻作)된 것으로서 민족의 정통 역사로 볼 수 없다.
(7) 위만은 요예(遼濊)의 변경을 침략하여 지금의 창려(昌黎-하북성)를 점거해 조선이라고 잠칭하고 있던 떼도적의 두목에 불과하며, 의문 투성이의 '한사군'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8)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성제의 위업으로 이룩된 영락대통일은 따무르자주의(漢寇擊退完我舊彊)를 완전히 성취한 것인 동시에 민족사의 영원한 이상을 제시해 준다.
☞ 한구격퇴완아구강(漢寇擊退完我舊彊) : 한나라 도적들을 퇴거하고 온전한 우리의 옛 강토를 되찾자
(9) 신라 '삼국통일'이란 허구에 찬것이며, '발해삼인당일호(발해 사람 셋이 모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해낸다)'에서도 나타나는 대진의 웅혼한 기상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10) 한양 조선은 신시개천 5816년(1919년)에 종식된 것으로 보며 동년 4월부터 옛 고구려 송강현(지금의 상해)에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법통을 잇는다.
물론 이러한 주장외에도 광범위한 사론(史論)이 펼쳐져 있지만 더 요약한다면
'고구려 중심론'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 천부경, - 삼일신고, - 참전계경, - 신시개천경(단군고기), - 광개토지경(비문), - 훈민정음경(반포문)을
우리정신. 역사를 찾은 근본서적으로 중요시 하였다.
한암당 선생과【한단고기】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일생을 통털어 최대의 민족사적인 사건은 【한단고기(桓檀古記)】와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사를 논할 때 불가분『한단고기』와의 관련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럴 때마다 한암당선생은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되고 만다.
『한단고기』의 탄생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
- '삼성기전 상편'. '삼성기전 하편'. - '단군세기'. - '북부여기' 상. 하. - '태백일사'를 한데 묶어 『한단고기』라는 제목으로 30부를 발간한 데서 비롯된다.
그 가운데 1부가 한암당 선생에게 전해져 칠십년 대 초반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의정부에서 셋방을 얻어 있다가 너무나 어려워 군산으로 잠깐 내려가 있었다.
그 사이 주인은. 방세도 못내는 노인이 어디 갔는지 나타나지도 않자 책을 내다 팔아 버렸다. 이때 그『한단고기』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한암당 선생은【한단고기】1권 정도는 이병도씨 집에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음)
급기야 기억을 되살려【한단고기】를 다시 써야 했다. 워낙 공부를 많이 하고 어려서 전령으로 활동할 때 문건보다는 외워 전달했던 것이나 속독으로 훈련된 탓에 새로이 한단고기 내용을 기억하여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후 잘못된 부분이 몇 군데 제자들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거의 맞을 거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선생의 인품을 의심하는 사람은(식민사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문건은 1970년대 후반〈한단고기 정해〉라는 제목으로 서문까지 완성된 상태에서 출판사 선정을 위한 협의 도중 당시 월간《자유》의 발행인인 박창암으로부터 '출판에 도움이 될 재일교포가 있으니 원고를 달라'는 요청을 받고 건네졌으며. 불과 3일이 지나지 않아 박창암으로부터 아무런 말도 없이 원고를 돌려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에서『한단고기』초판이 나왔는데, 일부 내용의 해설이 임의로 바꾸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초판은 우리나라에 전해져 제일 먼저 김은수 선생의 번역판이 나왔고. 이유립 선생의 '한단고기정해'가 대배달 민족사에 실리게 되었으며 이어서 임승국선생의 한단고기. 강수원 선생의 한단고기. 85년 배달문화원에서 발행한 한단고기, 오정윤 선생의 한단고기(도서출판 창해 刊) 등이 연이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 이 외에도
-『배달의숙(倍達義塾)』에서 83년에 발행한 '한단고기' 필사본. - 1979년 조병윤씨가 오형기씨에게 부탁하여 필사한 '한단고기' (광오이해사 발행. 100부 한정판. 이 내용이 일본인 '녹도 승'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음). - 일본인 '녹도 승'이 쓴 '한반도의 우가야왕조사-한단고기'등이 한배달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다.
< 한암당 이유립과 (사)한배달 >
(역시 이유립 선생을 직접 만났고 (사)한배달의 설립에 결정적인 산파역할을 맡았던 박정학(치우학회장)씨의 증언이다)
1982년에 한미 연합 사령부 교양강좌 때 만났던, 한암당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985년이다.
8월 9일자 신문에「백운대 쇠말뚝 제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는 순간, 드디어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말로 우리 겨레의 얼을 찾는 일을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인 10일, 이전부터 알고있던 한암당 선생의 제자 전형배군(당시 고려대 대학원 재학중)을 찾아서 함께 김포읍 산자락에 거처하시는 선생을 찾아갔다.
새로 지은 집이었는데 조그만 별채로 방 하나, 부엌 하나였으며, 혼자서 연탄도 반찬도 없이, 그야말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고'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몇몇 제자들이 가져다주는 라면을 한꺼번에 3개를 삶아 놓고 소금이나 간장을 반찬 삼아 아침, 점심으로 조금씩 끼니를 들고 있던 때였다.
제자의 안내로 선생을 뵙자마자 '이제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나는 이제 안합니다. 끝났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재차 물으니, '상황이 쉽지 않습니다. 국사찾기는 이제는 안합니다. 책도 팔아버리고…왕조실록하나 구하려고 해도 돈이 없어 못구하고…나는 안 합니다'라며 완강히 거부하셨다.
나는 '이제는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선생님은 '이제 끝났다'고 말씀하시니 난감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어렵사리『조선왕조실록』을 구해 드렸다. 그리고 다시 댁을 찾아가 보니 책은 펼쳐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다.
3번째 방문할 때는 '두 아들'을 데리고 갔다. 절을 올리면서 '우리 이 아이들을 만주를 찾는 선봉장을 만들겠습니다.'라는 아내 전유선(한암당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서 현재 '한암당 이유립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있다)의 말을 듣고는 마침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우선 거처를 정하여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 살도록 하는 일이 시급하였다.
당시 한암당 선생은 김포에, 부인은 군산에, 시집 안간 막내 딸은 대전에 각각 흩어진 이산가족이 되어있었다. 이런 선생께 1200만원을 마련하여 화곡동에 전셋집을 마련해드리고 흩어진 가족들이 모여살도록 터전을 구해 드렸다.
이후 선생님은 집필에만 전념하여 도서출판 고려원에서【대배달민족사(전 5권)】을 발간하기에 이르렀고.
집을 마련하는데 재정을 지원했던 사람들이 모여 한암당 선생의 제자(현재 부부인 전형배 고성미)를 초청. 우리 역사에 대하여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4월 17일 저녁 7시 인사동 소재 당시 도서출판 고려원 사장(김낙천) 사무실에서 직접 한암당 선생을 모시고 질의응답 형식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9시 20분이 될 즈음)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 될 일이요'라고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셨다.
재빨리 선생을 의자에 앉혀드리고 청심환을 드렸는데, 15분이 지나서도 깨지 않아 인근 혜정병원으로 옮겼다.
뇌출혈이었다.
중구 필동의 성심병원 응급실로 급히 옮겨 하루를 지낸 다음날 아침 잠깐 의식이 돌아오는 듯 했으나 낮 12시쯤 재차 진행된 뇌출혈로 의식불명에 빠졌다. 그 상태로 자정을 넘기고 다음날 새벽 1시에 운명하셨다.
선생의 장례를 단단학회장으로, 강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재정을 부담하여 정성껏 치렀다.
장례를 마친 후 '이것은 정말 당신들이 해야될 일이요'라는 마지막 말씀을 유언으로 해석하여 '역사 찾기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재정지원에 참가하였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단체 설립을 준비하여 7월 1일 종로 인사동에서 사무실을 열었다.
그리고 그해 말 마침내 '사단법인 한배달'이란 이름으로 서울시 교육청에 등록되었다.
오늘날 15년의 역사를 가진 사단법인 한배달의 창립은 바로 민족사학자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뿌린 씨앗이 싹튼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한 시대의 위대한 역사가 이유립은 그의 호 '한암당(寒闇堂)'이 풍기는 '춥고 어두운' 분위기 만큼이나(대부분의 광복군과 그의 후예들이 그렇듯이) 어려운 삶을 살았다.
자생 신앙결사인 '태백교'의 부활을 꿈꾸기도 하였고. 또 한 때는 정치에 뜻을 두기도 하였으나 이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론만이 후세에 남아 '국사바로잡기'의 험한 길 위에 비치는 찬연한 등불이 되고 있다
< 참고 자료 >
한암당 선생이 남긴 논저들은『대배달 민족사』에 실려있습니다. 필요한 분은 한배달로 연락하시면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대배달 민족사(전5권)』(고려원 刊) - 구입문의 : 월간 한배달사 편집부 (02) 747-89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