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메주의 기운을 주세요"… 한식 고수 찾아오는 스타 셰프들
[우리가 몰랐던 K]
<9> 세계서 K푸드 '배움의 발길'
담양=박진성 기자
입력 2026.05.07.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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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은 시간이 만드는 마법” 지난달 29일 전남 담양 ‘기순도 발효학교’에서 미국에서 온 셰프들이 삶은 콩을 직접 찧고 메주를 만들며 ‘장 만들기’를 배우고 있다. 한식에 대해 이미 많이 알고 있는 이들은 더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해 곳곳의 한식 장인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김영근 기자
“콩, 소금, 물만으로 이런 아름다운 ‘블랙 소스’가 만들어지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시간이 만드는 마법이네요.”
지난달 29일 전남 담양군 창평면 시골 마을 ‘기순도 발효학교’. 대한민국 식품명인 35호 기순도(77)씨가 간장 장독을 열자 영어로 탄성이 울려 퍼졌다. 심도 깊은 K푸드 학습을 위해 이곳을 찾은 미국 셰프들은 구체적이고 수준 높은 질문을 이어갔다. “이 간장에는 질소가 얼마나 들었나요?” “장에서 감칠맛을 만드는 요소는 콩단백질인가요?” 한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만 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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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진영
K푸드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며 해외 셰프들이 지역 곳곳의 장인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단순 쿠킹 클래스가 아닌 ‘고급 과정’을 배우기 위해서다. 이날 발효학교를 찾은 미국 셰프들은 뉴욕의 마켓컬리라고 불리는 ‘김씨마켓’ 주최로 왔다. LA, 위스콘신 등 미국 각지에서 온 네 사람은 일주일간 기순도 명인뿐만 아니라 김치 전문가 이하연 식품 명인, 사찰 음식 대가 정관 스님 등을 찾아 K푸드를 배웠다. 항공료·숙박비 포함 1만달러 수준 고가의 여정이었지만 순식간에 마감됐다. 발효 학교에서 장을 배우는 셰프들의 수업 현장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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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PPT를 띄워놓고 장 수업을 하는 기순도 발효학교 /박진성 기자
한옥으로 된 시골 학교라 한글만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외국인이 몰리다 보니 영어로 된 시간표뿐만 아니라 장 이론 수업 PPT도 영어였다. ‘Jang making : a year-long journey through four seasons’(장 만들기 : 사계절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 등의 수업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그간 세계 미식 올림픽으로 불리는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1위를 받은 레스토랑 ‘노마’(덴마크), ‘센트럴’(페루), ‘디스푸르타르’(스페인) 등 유수의 해외 셰프들이 이곳에서 장을 배웠다. 지난 5일에도 영국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 ‘뮤즈’의 셰프들이 왔다. 이곳에 있는 외국인 셰프들의 장독만 25개국 40여 개. 기 명인은 “내가 항아리와 산 지 55년인데 한국의 장을 배우러 이렇게 멀리서들 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며 “내가 대단한 게 전혀 아니고 한국 음식 문화가 대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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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전남 담양 '기순도 발효학교'에서 장 담그기를 배우고 있는 레스토랑 '에빗' 조셉 리저우드 셰프와 영국 미쉐린가이드 1스타 레스토랑 '뮤즈'의 셰프들. 기순도 명인과 함께 메주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이번 배움을 바탕으로 7일 저녁 서울 강남구 '에빗'에서 협업 만찬을 연다./기순도 발효학교
장인을 찾아 나서는 해외 셰프의 발걸음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지난 3월에는 프랑스 셰프 200여 명이 정관 스님이 있는 전남 장성 백양사 천진암을 찾아 사찰 음식을 배웠다. 이하연 명인도 매년 국내외 약 1000명에게 김치 수업을 하고 있다. 전북 남원의 고은정 음식 연구가의 마당에도 미국·프랑스·네덜란드·일본 등 셰프들의 장독 15개가 있다. 셰프들이 한국에 직접 와서 장을 떠가기도 하고 해외로 보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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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1위에 꼽힌 페루 ‘센트럴’ 셰프의 간장 장독. 기순도 발효학교엔 25개 국 셰프들이 직접 담근 장독 40여 개가 있다. /기순도 발효학교
이날도 직접 장을 담갔다. 각자 “Give me good meju energy!”(제게 좋은 메주 에너지를 주세요, 리투 칸나·54) 같은 주문을 외우며 삶은 콩을 절구에 찧고, 마른 메주를 장독에 넣었다. 기 명인이 “장갑을 끼지 않고 깨끗이 씻은 손으로 장을 담가야 손맛이 난다”고 말하자 셰프들은 이미 안다는 듯 “K푸드는 손맛이 중요하죠”라고 답했다. 전통식품 명인 고민견 전수자가 “레스토랑 ‘에빗’의 조셉 리저우드 셰프가 여기서 담근 장에는 치즈 향이 난다고 해 셰프들 사이에서 한창 화제였다”고 하자 셰프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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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전남 담양군 창평면 기순도 발효학교에서 기순도 명인, 정관스님이 메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김영근 기자
에드워드 리 셰프의 레스토랑 ‘시아’에서 근무했던 엘렌 리(33) 셰프는 최근 워싱턴DC에서 자신의 김치 브랜드 ‘AJM 김치’를 론칭했다. ‘아줌마 김치’라는 뜻이다. 그는 “교포뿐만 아니라 미국의 수많은 식당에서 김치를 사고 있다”며 “오늘 배운 대로 젓갈 대신 간장을 넣어 김치를 만들어 볼 것”이라고 말했다. ‘메주에는 콩 3.6㎏’ 등 가장 열심히 필기한 미국 저널리스트 출신 제니 리(45) 셰프는 “장에 대해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며 “미국에서 딸기 고추장을 만들었을 때 왜 되직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이날 셰프들은 “미국에서는 한식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곳이 없다. 한국에서도 어딜 가야 제대로 배울 수 있는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날 수업도 김씨마켓의 개인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유명 셰프들 위주로 장인들의 수업을 듣고 가는 것은 아직 국가 차원의 K푸드 종합 교육기관이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국에 채널이 없는 초년 셰프, 지망생 등은 K푸드를 배우러 오고 싶어도 배울 곳이 없다는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한식 교육 기관 ‘수라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학위를 포함한 장기 과정, 실무자를 위한 중·단기 과정 등 다양한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지는 현재까지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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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전남 담양군 창평면 기순도 발효학교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모습 /김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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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기자
문화부에서 출판과 음식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읽는 일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제423회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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