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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요한복음(35) /
"예수님의 시간표와 인간의 시간표.”
☞ 말 씀 : 요 한 복 음 11장 5절 - 16절 (신약성경 p.164)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아멘!
수학에는 반드시 정확한 답을 유출하는 공식이 있고, 자연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원리를 다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든 공식대로 하면 해결된다는 것은 압니다.
그래서 수학 공식과 자연 법칙을 암기해 그대로 적용해 문제를 풀면 정답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공식에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실제 맞지 않는 것이 아니고,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시험에 들기도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자포자기 해버립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금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지만 응답은 없고 상황만 더욱 나빠질 때 혼돈을 느낍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그러나 구하고,
찾고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고 오해만 쌓이며, 일은 꼬이고 상황은 나빠지기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말씀은 정말로 맞는 말씀일까? 하나님은 정말로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기도응답은 있는 것이 맞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의문에서 시작되는 것이, 믿음의 사람에게 찾아오는 시험입니다.
이런 것들로 심각하게 고민했던 사람이 바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 요셉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항상 최선을 다했고,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최선은 언제나 최악의 결론을 만들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들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에 순종해 도시락을 싸들고 형들을 찾아갔다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깊은 구덩이에 던져지고, 애굽이라는 이방 나라로 팔려갑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하지 않았고,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 가정 총무로,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그러나 여주인이 유혹하자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정직했기 때문에 유혹을 물리쳤지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던 요셉은 ‘왜 내가 이 감옥에 들어왔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며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모든 일이 공식처럼 일어나지 않는가?’
당시 많은 이방 사람들의 이런 비아냥거림 속에, 요셉은 외로움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더라도 믿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정직과 진실이 하나님께 통함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30세라는 젊은 나이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나라를 치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자신은 물론 자신의 모든 가문을 살려냈습니다.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다스리던 시대에,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모든 특권과 왕의 신뢰를 잃어버린 채,
사자굴 속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막으시므로 다니엘은 살았습니다.
이렇듯 믿음의 공식대로 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믿음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던 다니엘은 ‘왜 내가 이 사자굴에 있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며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모든 일이 공식처럼 일어나지 않는가?’
당시 많은 이방 사람들의 이런 비아냥거림 속에, 다니엘은 외로움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더라도 믿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정직과 진실이 하나님께 통함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은 바벨론 왕국에서 외국인으로서 서열 3위까지 오르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자신은 물론 자신의 모든 민족을 살려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공식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다 들으시고,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이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를 많이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사랑하시더니.” -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가정과 친근한 관계임을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가정들을 사랑하시지만, 나사로의 가정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정말로 사랑하셨다면,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가셔서 고쳐줬어야 했을까요?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라비 나사로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예수님께 전갈을 보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지금 죽을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급한 전갈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이해하기가 힘든 반응이었습니다.
6절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시고, 베다니로 가시지 않고 이틀 동안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과연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우리를 돌보시는 방법일까요?
오늘 본문 5절 말씀과 6절 말씀 사이의 갈등은,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시간표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시간과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생각하는 시간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주님께서 오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당장 기도도 응답 받았으면 합니다. 그것은 ‘나의 시간표’ 에 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표에는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 인간의 시간표 -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항상 나의 시간표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나의 시간표에,
맞춰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하시길 강요합니다. 내가 지금 급하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오셔서 내가 원하는 이런 이런 방법으로 응답해 달라고 일방적으로 요청합니다.
다행히 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일치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것과 다르고 차이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혼돈에 빠집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말합니다.
“예수여!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 그때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인간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인간의 때가 아닌, 당신의 때에 움직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늦게 오시는 법도 없고, 그렇다고 일찍 오시는 법도 없이 언제나 정확합니다.
지금 나의 기도 응답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아직도 하나님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진 않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신앙의 공식이 맞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때에 오시지 않는가?” 라는 이 질문에,
중요한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 이라는 비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기다림’ 은 다른 말로 ‘인내’ 입니다. 믿음은 곧 ‘기다림’ 입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과 그 말씀을 믿는다면,
현재 외양간에 소도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으며, 밭에 소출이 전혀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을 통과하지 않는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믿음도, 사랑도 기다림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멘토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기다립니다.
부모는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희망’ 이란 궁극적으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곧 앞으로 곧 올 것을 말합니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반드시 내가 기대하는 것이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희망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성취와 응답만큼 중요한 축복은 기다림의 축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응답이 없기 때문에 조급하게 믿음을 버려 버립니다.
그리고 사랑을 깨부스며, 희망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기다림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 ~ 4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에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련과 고통이란 곧 기다림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몇 천 년 동안 인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려고 2천년을 기다리셨습니다. 기다림은 믿음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웠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이었지만, 해가 빛을 잃고 지진이 일어나며 창에 허리를 상해 죽게 되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흔들렸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사야서 30장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참 사랑은 무조건 기다릴 줄 아는 것이고, 희망은 그 기다림의 기술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때에 오시지 않는가?” 라는 이 질문에,
중요한 영적 원리 - 세 번째 이유는, 참된 사랑과 구원과 기쁨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기쁨은 피상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나사로를 살리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키려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원과 사랑과 기쁨 등을 경험시키시려고,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여유를 가지십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하시니.” -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영적 교훈을 주십니다. 9절, 1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낮과 밤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난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낮이니 일 할 때다. 밤이 오면 일 못한다. 인생에서 일할 날이 그리 많지 않다.
곧 당신도 늙어 죽게 된다. 그때는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일하라.
낮이고 해가 있으니 일할 때다. 고민하고 방황할 시간이 없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라 일 할 때입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께서 기가 막힌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을 다함께 큰 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결코 사랑하는 나사로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더 유하시고 유대로 가셨으니, 나사로를 포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버리지 않습니다. 단지 응답의 시간이 우리와 맞지 않을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독, 눈물, 고통 안에서 더욱 괴로워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가리켜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시고 높이 생각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은, 예수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겐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은 잠시 잠자는 것입니다.
잠이 들었다는 것은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을 의미합니다.
죽음에는 희망과 미래가 없고, 생명과 부활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곧 심판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눈을 감았어도 잠자는 것과 죽음은 아주 다릅니다. 잠은 휴식시간입니다.
낮에 일한 후 밤에 잠을 자면, 모든 피곤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모든 긴장도 풀어집니다.
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또 잠은 회복입니다. 잠을 잘 자고 나면 아픈 것이 사라집니다.
잠에는 깨어남이 있습니다. 잠을 충분히 자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정신이 맑습니다.
잠을 잘 잔 사람은 일하고 싶은 의욕으로 넘쳐납니다. 삶의 활력소가 충만해집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것을, 바로 잠을 자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 깊은 영적 의미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아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는 것 같았지만, 전혀 딴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은 것입니다. 13절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셨지만, 나사로의 경우는,
죽음에서 살려주셨습니다. 복의 깊이가 다릅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하시니.” - 이 말씀은 ‘왜 내가 거기에 가지 않은지,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 응답하시지 않은지 알겠느냐?’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계산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은 이등품, 삼등품이 아니라, 최상의 특상품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사로에게 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정리해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시간을 세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처럼 멈춘 게 아니라, 계속 흐르며 계산되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 사람이 끝냈다고 하나님께서도 끝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죽었다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판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반드시 생명과 부활로 다시 오십니다. 마지막으로 16절 말씀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잠꼬대 같은 헛 소리입니다. 언뜻 들어 보면, 굉장히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열정은 믿음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할 말은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나사로가,
부활하는 현장을 보러 가자.’ - 지금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는 현장을 보러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말로 하면, 지금 우리 교회에서 부활의 현장을 목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삶의 자리, 내가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을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모든 나의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그 기적의 현장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참된 믿음의 소리를 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는 물론 내 주변에 죽어 있는 나사로는,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 살 것이고,
날마다 내 모든 삶이 부활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우리 삶에 기적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인간의 시간표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인다는 믿음과 은혜로 예수님의 생명, 부활,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살아가는 은혜기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