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거짓말> 96년 영국, 드라마, 마이크 리 감독
여성의 삶을 생각하며, 나는 이 영화와 <안토니아스 라인>을 대비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하지만, 우선 이 영화를 가지고 먼저 생각해 본다.
우린 모두 여성에 빚이 있다. 가장 큰 빚은 어머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어쩔 수 없이 '나'와 분리 불가능하다. 하지만 엄마와 아내라는 것을 제외하고, 여성은 사회에서 참으로 설 곳이 없어 보인다. 사회 자체가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이며, 가족이라는 울타리조차 여성에게 어떤 고정된 성역할을 계속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학 강요는 남성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권력이 없는 여성이 더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성으로서 용기 있게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어렵다. 항상 누구의 엄마, 혹은 누구의 아내로 불린다.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삶이다. 자신의 삶보다 '누구'에 의존해 있다. 이점이 여성이 지닌 헌신과 사랑의 위대함일 수 있지만, 여성의 정체성 상실일 수도 있다.
아무튼 '잃어버린 여성 자신'은 사춘기 여성이 꿈꾸는 낭만적 사랑이나, 칼싸움 대신 인형 놀이에 집착하는 아이문화, 가정 내 역할 분담을 통해 꾸준히 교육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주변적이게 되다. 그래서 엄마나 아내 같은 전통적 가족에 편입하거나, 현대적 직업여성이 되는 길을 간다. 문제는 전통적인 길이든 현대적 길이든 여성 고유의 정체성을 찾고 발휘되는 게 아니라 남성중심사회에 편입되는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 직업도 세 가지 양식을 보이게 된다. 하나는 여성을 상품화하는 직업이다. 여성의 성적 매력을 이용한 각종 직업이 있고, 이런 것은 많은 여성들에게 비록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매력 있게 보이기도 한다. 미스 코리아를 필두로, 각종 모델, 호텔리어, 스튜어디스 등 고상해 보이는 여성의 직업도 여성을 성적 대상화시키고 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두번째, 저임금 업종이다. 여성 노동은 남성보다 값이 싸게 책정된다. 남성중심 사회일수록 그것은 심하게 나타난다. 생산과 관련된 단순 노동직이나 청소, 판매 종업원 등의 서비스업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일에 비해 임금이 적게 책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은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없이 가정에서 남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세 번째는 남자 같은 여성들의 직업, 소위 전문직을 들 수 있다. 군인, 경찰, 정치인, 의사, 재판관 등 소위 전통적 남성 직종에 과감히 뛰어드는 여성과 새로운 전문여성들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 종사하는 여성은 아직 남자 같은 여성의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남성의 권력을 보장하는 직업에 여성이 참여한다는 측면 때문에 여성의 위상이 높아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차라리 남성 중심의 권력문화에 편입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남성중심 문화가 가지고 있는 권위주의와 경쟁주의, 결과주의, 효율성 제일주의, 발전사관, 빈부격차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여성 고유의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진정 여성다운 직업이 이 사회에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물론 그런 변화의 조짐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불투명하다. 여성의 참여로 인한 사회조정기능은 아직 요원하다. 분명 사회 내 여성의 역할은 발휘되고 있지 않으며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이 영화는 입양된 흑인 여성이 양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자 자신의 친부모를 찾고, 백인인 친부모를 만나는 과정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백인 어머니는 이미 또 하나의 딸이 있고, 심한 정서불안을 느끼며 산다. 딸은 딸대로 불만과 좌절을 겪고 있으며, 어머니의 남동생은 이들을 사랑하지만 히스테리가 심한 아내를 돌보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다 아내의 제의로 누이 딸의 생일 파티를 열면서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여기서 어머니는 발작적으로 같이 온 흑인 여자가 실은 친구가 아닌 자신의 딸임을 고백한다. 근 이십년 간의 비밀과 거짓말 속에 서로가 상처를 받아온 여자들은 서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인내력 강한 남동생이 폭발하면서 서로의 진실을 호소한다. 진실이 말해지자 너무나 홀가분해지면서 오해는 눈 녹 듯 풀려버린다. 영화의 제목처럼 비밀과 거짓말은 우릴 고통스럽게 하지만 두려움을 버린 진실은 이해와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처음 이 영화가 미국 영화인 줄 알았다. 흑백의 편견과 입양아 문제 등 때문이다. 하지만 300년 이상의 식민지 경험이 있는 영국도 미국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비단, 이 영화가 여성의 삶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성의 일상은 남성적인 것에 의해서 참으로 많이 비밀과 거짓말을 강요받아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을 깨지 못하면 끝내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남성의 주변인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모두의 의식 변화를 기다리기 전에 여성 스스로가 뿌리깊게 박힌 고정관념과 편견을 제거해야 한다. 때론 자신의 뿌리를 들어내는 고통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여성은 진실을 자신의 힘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거짓을 부인하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 양귀비든 클레오파트라든 춘향이든 이들은 남성을 전제로 한 여성이었을 뿐이다. 남성의 문화는 폭력과 지배의 연속이었다. 여성이 그것의 주변이 되고 종속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인류 역사의 비극이었다. 여성이 자신 안에 있는 진실과 사랑을 힘으로 사용할 줄 알 때 삶과 세상은 놀랍게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과 차별의 역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여성만을 말하지 않는다 남성의 여성성을 말하기도 한다.
그 예를 마린 고리스라는 여성 감독이 만든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안토니아스 라인> 97년 네델란드, 드라마, 마린 고리스 감독
대표적인 페미니즘 영화감독이다. 앞의 <비밀과 거짓말>이 가부장적 남성중심 사회에서 받는 여성의 고통을 말한다면, 이 영화는 그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 안토니아의 4대에 걸친 삶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동화 같은 환상과 경쾌함이 공존한다. 이 영화의 장점은 남성중심의 문화를 비판한다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훌쩍 뛰어넘어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여성은 더 이상 남성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 얼마나 용감하고 멋진 일인다. 통쾌하다. 자식을 가지고 싶어도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갖기 위한 동침을 선택할 뿐이다. 하지만 결혼으로부터 자유로운 안토니아의 딸과 딸의 딸, 또 딸의 딸 총 4대는 결코 외롭지 않다. 오히려 마을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같이 보듬고 쾌활하게 살아간다. 이 영화는 여성의 힘이 가득 넘실거린다. 어떤 영화가 이렇게 남성에 구속되지 않고 여성 그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 있었을까? 여성의 자신감은 편견에 매달리지 안고 자신의 진실과 감각을 믿고 산다는 데 있지 않을까? 나는 아직 그런 영화를 보지 못했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여성영화 중 단연 최고이다.
그렇다고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릇된 문화에 종속되기보다 오히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용기 있게 해나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와 공인도 우리의 편견이라는 걸 인식하고 때론 정면 부인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서류 같은 것이 오히려 우리의 양심과 사랑을 질식시킨다. 우리는 사람 자체를 보아야 한다. 그 외 모든 편견과 싸워야 한다. 당신은 내 아내니까, 당신은 내 남편이니까 등의 구속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필요하다. 진실이 필요하다. 그것이 진정 부부일 것이다. 그런 관계라면 부부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야기가 살짝 빗나갔다.
아무튼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회에는 '상품화된 여성'과 '남자 같은 여성'과 '전통에 안주하는 여성'이 그득할 뿐이다. 그들은 분명 때로 성공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때론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나아가 사회의 행복은 여성이 스스로를 발견하고 그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때 가능할 것이다.
참고로 남성은 여성에게 한가지 콤플렉스가 있다. 그건 바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점이다. 유아기 엄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우릴 근원적으로 행복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존재는 엄마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남성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콤플렉스를 갖는다. 그것을 여성들이 알 필요도 있다. 이 영화처럼 남성에게 성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선택하고 옹호하는 근거로 성을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인류가 모계중심 사회단계를 거친 것처럼 또 그때가 공동소유와 나눔의 문화를 지녔던 것처럼 나는 새로운 여성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꿈꾼다. 분열과 지배의 남성문화가 아닌 화합과 사랑의 여성문화가 제 위치를 찾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