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전목제의학자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이다 권이진은 가학으로 증조부 만회 권득기, 조부 탄옹 권시의 학문을 계승하고, 외조부인 우암 송시열, 고모부인 명재 윤증에게 수학했다. 명재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했다. 169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당쟁 탓에 순탄하지 못했다. 172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궁중에서 민간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과 공물을 정해진 액수 이상으로 거두지 말 것 등을 건의할 만큼 성격이 곧고 강직했다. 이곳에는 유회당 권이진 선생이 아버지의 묘를 바라보며 절을하는 첨배소인 삼근정사(三近精舍)와 선생의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대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첨배소 건물이다. 삼근은 선친 권유의 묘, 석천 집이 가깝고, 지 인 용을 함께 하라는 뜻. 현판은 원래 2005년 도난당한 편액을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내는 재실인 기궁재는 ㄱ자형 건물로서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건넌방·부엌 등이 있다. 1920년대에 다시 지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아들 없이 딸만 둘 두었다. 권이진 선생의 부친 권유 (탄옹 권시의 차남)은 송시열의 큰 사위가 됐다. 우암이 쓴 계녀서(戒女書)가 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채 자란 맏딸을 권유(權惟)에게 시집보내면서 준 지침서다. 송시열이 유회당의 아버지 권유에게 시집가는 장녀에게 준 가르침은 이렇다고 한다. “일속에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사람이 되지는 마라.” 부녀자로서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야 할 도리가 20개 항목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딸에 대한 아버지의 정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글이다. 그 가운데 제사 받드는 도리를 적은 내용은 오늘 우리에게도 가르침이 될 만하다. ① 제사는 정성으로 정결하게 하며 조심하는 것이 으뜸이니, ② 제수 장만할 때 미리 괜한 걱정을 하지 말고, ③ 없는 것을 구구하게 얻지 마라. ④ 제수는 쓸 만큼만 장만하고, ⑤ 뒤에 올릴 제사에 부족할 것을 생각하여 풍족하고 박함이 너무 뚜렷하지 않게 하여라. | | | 대전 서구 탄방동 도산서원. 조선 숙종 19년 (1693) 유림이 뜻을 모아 만회 권득기 선생과 아들 탄옹 권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웠다. |
권이진의 할아버지 권시는 송시열과 애증의 관계
유회당 권이진의 할아버지는 권시(1604년~1672년). 호는 탄옹 炭翁이다. 광해군 때의 고절한 선비였던 만회 권득기의 다섯째 아들. 한성부 좌윤 등 여러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함부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주자(朱子)일변도의 성리학적 틀에서 벗어나 우주론(宇宙論), 예학(禮學), 경세론(經世論) 등에 조예가 깊었다. 차남 권유 덕분에 송시열과 사돈을 맺고, 명재 윤증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윤증이 권시의 사위가 된 것이다. 1660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예송논쟁)로 논쟁이 붙었다. 당시 치열한 당파싸움 시절이었다. 서인 송시열 왈, “전하, 부친인 효종은 차남이므로 1년 상이 맞습니다.” 남인 윤선도 왈, “전하, 효종이 차남인 건 맞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니 3년 상이 맞습니다.” 여론은 서인의 손을 들어줬다.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그러나 권시는 서인임에도 남인(윤선도)의 주장이 맞는다고 했다. 사돈인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에 대립하여 이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공격으로 파직되었다. 권시는 지금의 대전 서구 탄방동으로 낙향했다. 도산서원을 짓고 13년 동안 도학과 예학에 정진했다. 송시열과 붙었으니, 서인도 남인도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권시는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애증의 관계였던 명재 윤증과 곧잘 대비된다. 권시는 사후에 대전 서구 탄방동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배향됐다. 문집에 <탄옹집(炭翁集)>이 있다. 그의 호인 탄옹은 탄방동이라는 지명에서 따온 것이며, 도산서원도 그가 도학 연마에 힘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권시를 충청 오현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