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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선생은 1501년 6월 26일 합천 삼가에 태어나 성리학의 대가이며 사림의 영수로서 한평생 갈고 닦아 쌓아올린 학문(學文)과 도덕(道德) 인격(人格)과 사상(思想) 철학(哲學) 정신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많은 영재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여기에서 배운 학생들이 조선시대의 문(文)과 무(武)와 정치(政治) 와 학술계를 주도하는 중심인물이 되었고 남명 사후 20년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을 물리친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忘優當 郭再佑 함경감사, 조식 외손서) 래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영의정), 송암 김면(淞菴 金沔 합천군수), 대소헌 조종도(大笑軒 趙宗途 함양군수), 전치원(全治源) 외 50여명의 의지사들이 남명의 제자로서 임란을 승리로 이끌어 일본정부는 남명 조식을 의병의 아버지라 해서 두려움과 미움을 표했다. 또한 학계와 정계에 명망 높은 분은 덕계오건(德溪吳建), 옥계노진(玉溪盧鎭 이조판서), 각제 하항(覺濟 河降 설중매평), 수우당 최영경(守遇當 催永慶 희세의 인물 대사헌추증), 동강 김우옹(東崗 金宇翁 대사헌 조식의 외손서), 한강 정구 (寒岡 鄭逑 대사헌),약포 정탁(藥圃 鄭琢 좌의정), 신암 이준민(新庵 李俊民 좌참찬 조식생질), 김효민(金孝民) 등이 남명 문하에서 글을 배운 사람들이다. 남명의 죽마고우로는 일제 이항(一濟 李恒 사옹정), 동고 이준경(東皐 李俊慶 영의정), 숭덕제 이윤경(崇德濟 李潤慶 평안감사)등과 함께 자랐으며, 20살 때 생원진사 시험에 1~2등으로 합격했을때 사귄 평생지우 대곡 성운(大谷 成運 명종때 은사 승지추증),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명종때 은사 좌의정 추증 )과 더불어 영남의 3선배라 불리는 황강 이희안 (黃江 李希顔 고령현감 판관),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외 동주 성제원(東洲 成悌元 보은현감), 칠봉 김희삼(七奉 金希參)등 과 친하였다.
남명사상(南冥思想) : 수기치인(修己治人),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몸소 갈고 닦은 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긴다"는 실천유학(實踐孺學)을 강조했으며, 남명 철학(철학) :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한 경의 협지로 "경(敬)으로써 내면을 밝혀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행동을 결단하여 모든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生活哲學)을 견지하였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당시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로 임하였다.
남명 선생을 문인들이 평하기를
한강정구(寒岡鄭逑대사헌) : 선생의기질은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행동이 태산과 같이크며, 동강 김우옹(東崗 金宇翁대사헌);성정은 추상열일(秋霜烈日)로 가을의 서릿발이나 여름의 태양처럼 엄정하고 권위가 있었고, 미수 허목(眉受 許穆 우의정) : 선생의 처세를 불구종(不苟從) 불구묵(不苟默)으로 구차하게 따르지도않았고 구차하게 침묵 하지도 않았으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좌의정) :선생의 공덕은 입유렴완(立濡廉頑)으로 나약한 선비를 강하게 탐악한 관료를 청렴하게 만들었다 하였고, 율곡 이이(栗谷 李理 이조판서) :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지킨 이는 오직 이 세상 남명 뿐이라 하였으며,
택당 이식(澤堂 李植 이조판서) : 고고한 자세로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고 하였으니 진정한 처사야말로 나뿐이야 라는 말을 남겼을만큼 우리 역사에 유일한 처사요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 받고 있다. 남명 선생의 일대기를 정리해보면
아버지 조언형(曺彦亨), 어머니 인천 이씨, 국(菊)의 따님 사이에 3남 5녀 중 둘째로 태어나, 5살 때 부친이 문과급제로 서울 종로로 이사가 아버지에게 문자를 배웠으며, 9살 때 큰 병을 앓았는데 어머니가 이를 걱정하자, 하늘이 나를 생(生)함에 반드시 할 일이 있어서일 것이니 요절 할 일 없다고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 하였고 18살 때 아버지가 함경도 단청군수로 있을 때 유학 경전 외 천문, 지지, 의학, 수학, 궁마, 항진 등 다양한 재능을 익혔으며, 마음 은 있으되 몸이 따라 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면서 정신력과 지구력, 인내심과 담력을 키우느라 두 손에 물그릇 을 받혀 들고 밤을 꼬박 지새우기도 하였다. 20세 때 생원 진사 양과에 1~2등으로 합격을 했으나, 1519년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대사헌)가 죽고 숙부인 조언경(曺諺卿)이 멸망하자 이를 슬퍼하고 시국을 한탄한 선생은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엿으며, 22세 때 충순위(忠順衛) 조수의 따님 남평 조씨와 결혼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을 접하고 크게 깨달은것이 "벼슬에 나가서는 유익한 일을 하고 집이 있으면 지조를 지킨다. 대장부가 벼슬을 하면서 하는 일이 없고 집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가 없으면 배우고 익힌 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며 무엇을 공부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향을 잡았다. 그때까지 이것저것 공부하던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사서 (論語, 大學, 中庸, 孟子)와 육경(易經, 詩經, 書經, 春秋, 禮記, 樂記)에만 전념하였다 2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21년간 서울생활을 마감하고 고향 합천 삼가에서 장사를 지내고 3년동안 여묘생활을 하였고 가난과 싸우면서 맨생의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하였으며, 남명 사상 속에 항상 민생을 잊못하는 것은 이때 생민의 어려움을 실제로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사하여 산해정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가니 태산에 올라 사해를 바라보는 기상을 길렀고 학문과 인격을 닦았으며 여기에 대곡 성운(大谷 成運), 청향당 이원(淸香當 李源),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송계 신계성(松契 申李成) 등 명류들이 모여들어 기묘사화 이후 퇴상했던 사기를 응집 재기를 도모하는 중심인물이 되었고 44세 때 1544년 6월에 늦게서야 얻은 외아들 차산(次山)이 9살의 나이에 죽었는데, 남명은 9살 때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난 적이 있건만 아들은 9살 때 살아나지 못하고 죽고야 말았다. 45세 때 1545년 을사사화로 친구인 이림(李霖), 성우(成遇), 곽순(郭珣) 등이 죽고 모친도 사망 3년 동안 여묘 생활을 하였으며 김해생활 17년을 마감하고, 47세 때 고향 합천 삼가로 다시 돌아와 계부당과 뇌룡정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처사로서 언론을 발하여 국정을 비판하였으며, 이때 학문(學文)과 도덕(道德) 인격(人格)과 사상(思想)은 널리 알려져 오건 (吳建), 정인홍(鄭仁弘), 노진(盧鎭), 하항(河沆) 등 기성학자들이 남명문하에 들어와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52세 때 몇 년전 음식과 의복 손질할 손이 필요하여 삼가에 살던 선비 송린(宋璘)의 딸을 부실로 맞아 송씨(宋氏) 부인에게서 아들 차석(次石)을 얻었다. 55세 때 1555년 단성 현감에 제수 되었는데 현감직을 받는 대신 온 나라를 진동시킨 상소문 단성소(丹城疎)를 올리자 선생의 명망은 극치에 달했다. 다음에서는 단성소와 민암부의 내용을 알아볼까 한다. 을묘 사직소(丹城疎 단성소, 1555년) 나라의 기틀은 무너졌고 민심이 떠난지 오래입니다. 높은 벼슬아치는 오직 재물에만 탐하여 물고기의 배가 썩어들어 가는데도 이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왕대비는 세상물정 모르는 바깥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의 어린 아들에 불과할 뿐이니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라의 형편을 바로 잡는 길은 여러 가지 법령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께서 크게 한 번 마음 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라는 것이 상소문의 요지이다. 민암부(민암부)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 것. 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지론을 거침없이 갈파한 남명(南冥) 벼슬아치는 가죽 위에 돋은 털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는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질타한 내용이다. 남명 - 조식은 상소문 단성소와 민암부에서 대왕대비(문정왕후)를 세상물정 모르는 과부 또는 아녀자라 하고 22세의 전하 (명종)을 물위의 배에 비유하며 어린애(고아)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벼슬아치는 백성을 껍데기를 벗기는 탐관오리만 한다고 하였으니, 왕조시대인데도 온 나라를 진동시킬만큼 국정을 극렬하게 비판한 것은 조선조 500면 역사상 전무후무 (前無後無)한 것이다. 남명이 이렇게 직방강직한 상소문을 올렸어도 포도청에 한 번 안 끌려 간 것을 보면 정말 대단한 분이라 생각된다.
남명의 성격이 엄하고 강직한 성품은 아버지 조언형(曺彦亨)에게 물려받았다. 언형이 정삼품 벼슬인 승문원 판교(判校)로 있을 때 목계(木溪) 강혼(姜渾)이라는 소꿉친구가 있었는데, 강혼은 연산군 때 대문장가로서 연산군의 청에 따라 후궁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 쓰게 되자, 언형은 강혼과 절교를 선언한다. 그 후 언형이 단청군수로 있을 때 직송상관인 강혼이 감사(監査)가 되어 찾아오자, 언형은 감사를 맞을 생각도 않고 집으로 가버렸고 집으로 찾아온 강혼을 보자 언형은 하인에게 술독을 가져오라고 해 먼저 큰 잔으로 떠 마셨고 그러자 강혼도 혼자서 서너잔 떠 마셨다. 긴장된 순간이 흐르자 언형이 말하기를, "자네는 개, 돼지보다 더 못한 짓을 했네. 그런 자네가 먹다 남은 이 술을 내가 어떻게 마시겠나 조그마한 글재주로 부끄럽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어떻겠나" 이 말을 들은 강혼은 고개를 떨구고 말없이 눈물만 흘리다 떠났다고 하는 것이(연려기술)이란 책에 전해오는 내용이다. 57세 때 부인에게서 둘째 아들 차마(次磨 칠원군수)가 태어났으며 60세 때 송씨 부인에게서 셋째 아들 차정(次碇 정이품 가선대부)이 태어났다. 남명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회령포 만호(萬戶) 김행(金行 정사품 문관직)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다. 큰딸은 김희삼(金希三)의 아들 김우옹에게 시집 보내고 작은 딸은 곽월(郭越) 아들 곽재우에게 시집 보냈다. 61세 때 선생의 고향 합천 생활 22년을 마감하고 마지막 도장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의 시윤동에 산천제 (山川濟)를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 김면 곽재우, 최영경, 김웅 이때 배우러 온 사람들은 조종도, 정구 정탁 등이였으며, 66세 때 1566년 명종 임금이 5, 7, 8월 연이어 상서원 판관에 재수한다는 교지(敎旨)를 내리자 명종과 독대(獨對)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하여 임금과 신하는 깊은 정과 믿음이 있어야 하며 훌륭한 제왕은 신하를 친구처럼 허심탄회(虛心坦懷) 한 의견을 나누어야 하고 백성들이 가난에 시달려 시급한 대책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11일 만에 덕산으로 돌아왔다. 이 당시 시국은 중종이 죽고 12살에 왕이 된 명종 임금제위 기간 내내 문정왕후의 등쌀에 시달려야 했고, 섭정을 놓은 뒤에도 툭하면 왕을 불러 지시하고 심지어 임금의 뺨을 때렸다고 야사는 전한다. 누이를 등에 업고 설친 윤원형(尹元衡)의 세도는 차마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고 윤원형의 서울의 집만 해도 16채나 되었다고 하니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조정대신들은 배 채우기에 급급했으니 임꺽정(林巨正) 같은 군도가 설치고 왜구가 들끓는 것은 정한 이치였다. 72세 때 1572년 2월 8일 남명이 천수를 다하고 운명(運命)하자 조정에는 재물과 제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사간원 대사간의 벼슬 을 추증하고 다시 광해군때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문정(文政)의 시호가 내려졌다. 남명의 유적에는 합천(陜川) 회산서원, 뇌룡정, 김해(金海)신산서원과 산해정 산청(山淸), 덕천서원, 세심정 숭덕사, 산천제 묘소 신도비(1. 정인홍 2. 허목 3. 조경 철폐됨) 지금 우암 송시열이 지은 글이 있고, 묘소비문 (대곡성운이 지은 묘갈명)이 있으며, 선생의 부실인 숙부인 송씨(宋氏) 묘(墓)가 앞뒤로 쓰여 있고, 묘소(墓所) 앞에는 3개의 비문(碑文)이 허영을 싫어하는 남명의마음처럼 시류를 한탄하듯 지금도 정과 총에 맞았는지 구멍이 나 그 자리에 있다. 주요 저서로는 문집(文集)인 남명집과 학기유편이 있고 작품에는 남명가 권선지로가 등이 있다. 남명의 행장(행장 일대기)는 외손서 김우옹이 지었으며, 정인홍이 지은것도 있다.
학문 방법론에 있어서도 동년에 태어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지만 초 학자들에게 심경,태극도설 등을 먼저 가르치는 퇴계의 교육방법을 비판했고 소학, 대학 등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당시 이황과 기대승의 이기심성 사단(仁, 義, 禮, 知) 칠정(喜, 怒, 哀, 樂, 愛, 惡, 欲)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하학 인사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로 규정하고 하학 이상달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學文) 방법을 주장했다. 해방이후 우리나라의 최초로 조선 교육사를 정리한 이만규의 저서(조선 교육사)에는 남명의 교육방법에 대해 첫째 :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명하고 스스로 깨닳도록 하였고, 둘째 : 선생의 모범을 보여 학생들로 하여금 감흥이 일게 하였으며, 셋째 : 개인 자질에 따라 한껏 재능을 키웠고, 넷째 : 질문을 받으면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설명해 추호의 의심도 없게 하였으며, 다섯째 : 잘못을 교정할 때 간략하고 함축적인 말로 설명해야 싫증을 안 내고 의심을 안 받는다는 게 남명 조식 선생의 교육 방법 이다. 그런데 요즘은 암기식 교육으로 사물의 본질(本質) 파악과 비판의식을 키울 기회를 차단 당하고 대학에 가서는 또 다시 취업시험을 위해 단편적이고 기술적인 지식만 습득하는 오늘의 교육 현실은 남명의 교육 방법과 비교해볼 때 너무도 부끄럽고 후진 적이라 하겠다. 남명은 비판의식과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상실한 학자들은 정치의 모래배나 자본의 힘에 농락 당하기 쉽다고 지적하고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지조가 없으면 만변하는 상황에 대처 할 수 없으며 조그마한 위험이나 압력에도 굴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왕비(王妃)를 배출한 집안보다 재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 재학을 배출한 집안보다는 문묘 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나으며 문묘 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는 처사(處士)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하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퇴계(退溪) 이황이 죽을 때 영정에 벼슬 이름을 적지말고 처사라고 쓰라는 말을 듣고 남명은 할 벼슬 모두 다하고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處士)야 말로 나 뿐이야 라고 하였다. 지금까지 남명학 연구(硏究)와 행사는 경상대 덕천서원이 매년 8월 16~18일 3일간 도맡아 왔지만 남명 탄신 500주년 (2001년8월 13~18)에는 경남도에서 70억원을 들여 18개 분야 기념 사업을 펼쳤고 대학교수 유림학자 후손 등 주민 3~4천명이 모여 선비문화 축제를 성황리에 개최하였으며, 국제 학술대회(學術大會)를 8월 16일 삼성연구소에서 9월에는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에서 11월에는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를 열었고, 또한 경상대에서는 도비와 민간 후원금 42억원으로 대학 내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남명 기념관(記念館)을 건립하고 합천에서는 생가 복원과 희산서원을 건립하고 있으며, 2001년 출범한 남명학회는 서울대 철학과에 사무실을 두고 문(文)과 사(史) 철(哲))은 물론 한문학(漢文學) 예술학(藝術學) 전공자 100여명의 교수가 회원을 구성하였다. 서울대 철학과 이남영 교수가 회장을 맡고 서울대 금장태, 성균관대 송재소 교수가 부회장을 맡아 남명학회는 학회지를 내는한편 매년 8월 16~18일 남명제를 열어 남명학 붐을 조성하고 있으니 남명의 명성(名聲)이 용이 하늘을 승천(昇天) 하듯 더욱빛날 것이다. 南冥曺植선생의後裔13代孫 조헌섭(曺憲燮) 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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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옮겨운 글입니다. 사진은 오마이 뉴스 정근영 기자의 2005 기사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