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막리
(東幕里) |
건넘마-양지뜸-동막(洞幕)
약300년전 김상진이라는 선비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음, 동쪽에 있는 산이 장막처럼 가로막고 있다 하여 동막(洞幕)이라고 함 |
구마이-구만리(九萬~)
약400년전 황씨(黃氏)성을 가진 이가 속칭 한들이라는 땅을 경작하여 쌀 구만 석을 수확하였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구만리라고 함. 발음이 변하여 구마이로 불리게 됨 |
싸근바우-사근바우-쌍바우
임진왜란 이후 밀양박씨(密陽朴~)가 들어와 개척함, 마을 남서쪽에서 북동으로 길게 낮은 산줄기가 뻗어 있고 그 곁에 사근바우라 불리는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이 됨 |
섬밭[島田(도전)]
공갈못이 있을 때 주위 일대는 모두 물 속에 잠기었으나, 이 마을 지형이 마치 섬처럼 보여서 <섬밭>이라고 함 |
절터-큰마
방울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여 절터라고 불리게 됨 |
병암리
(屛岩- ) |
북천마-북천
550년전 경주김씨(慶州金~)가 분가를 하여 마을을 개척함, 마을이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천마>라고 함 |
샛마-새엠마-간촌(間村)
조선초기 제주고씨(濟州高~)가 들어와 마을을 이룩함, 마을이 병암리 전체의 중간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샛마>로 불림 |
원병암(云~)
마을 뒷산에 병풍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병암>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고장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라<원병암>이라고도 함 |
이숫골
300년전 제주 고씨가 개척한 마을이며,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 하여 <이숫골>이라 불림 |
큰마-늘밤[판야(板夜)]-병암
약600년전 안씨가 개척한 마을, <큰마>는 인근 고을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는 뜻, 조선시대에는 판야(板夜)로 불리워졌는데 인재가 많이 나는 것을 우려한 일본인이 <병암>으로 개칭하였다고 함 |
부곡리
(釜谷- ) |
가마실[부곡(釜~)]
고려시대 제주고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됨, 마을의 앞뒷산에 솥과 같은 기암이 있다하여 <가마실>이라고 칭함 |
못가-지포(池浦)
공갈못 물이 이곳까지 차 있었다고 하며, 못가 어귀에 팽나무가 있는 뱃나루터였다고 함. 인천채씨(仁天蔡~)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못가> 혹은 <지포(池浦)>라고 불리게 됨 |
골마-비석골[碑石谷(~곡)]
조선초에 마을 주변에 비석이 많았다고 하여 <비석골>이라 함, 경주김씨 3가구가 살다가 <못가>로 이주하여 지금은 농토가 됨 |
오리실(梧里室),오리동(~洞)
400년전 이몽룡이라는 선비가 피난와서 개척하였음, 마을 뒤에 있는 둥근 봉우리에 오리들이 많이 놀고 있어서 그 봉우리를 <오리봉>, 그 골짜기를 <오리실>이라고 함 |
양정리
(楊亭- ) |
대밭마-양정
조선 효종때 이 곳에 살았던 양정공(~公)이라는 큰선비의 이름을 따서 <양정>이라고 부르게 됨 |
소정(素亭)
양정공 후손에 의해 새로 형성된 마을, 양정공이 은거하던 곳이라 하여 <양정>으로 부름, 250여년전 선비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던 정자가 있었으나 6.25때 불타 없어짐 |
무지미
350여 년 전에 최씨가 정착하여 개척한 마을, <무지미>라는 산의 아래쪽에 마을이 위치하였다고 하여 <무지미>라고 부름, 조선 효종때 양정공이라는 선비가 이 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음 |
새마[신촌(新村)]
200여년전 안동권씨가 양정에서 분가하여 새로운 생활근거지를 찾아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새마>로 부르게 됨 |
뒷무리-봉정(鳳亭)
약 500년 전 김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함, 공갈못 뒤편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뒷무리>로 부르기도 하고, 마을 앞의 큰 느티나무에 鳳(봉)이 앉았다고 하여 봉정(鳳亭)으로 부르게 되었다고도 함 |
시장(市場)
옛 공갈못이 농경지로 변하고, 오태저수지가 준공되어 농지가 비옥하게 되자 마을이 형성되고 공검의 관문이 되어 시장이 형성되고 면단위 기관이 집중되어 면의 중심지가 됨 |
역곡리
(力谷- ) |
봉우재[烽火山(봉화산)]
조선시대 봉화를 올리던 봉화산이 있던 마을로 조선시대 말까지는 100여가구의 큰 마을이었다고 함 |
심실-역곡(力谷)
조선시대에 힘이 센 장사가 살았다고 하여 심실, 심곡, 역곡 등으로 불리게 됨 |
벌미-벌매
옛날 마을 사람들이 매사냥을 할 때 매가 제 멋대로 벌로 날아 갔다고 하여 <벌매>라 부르던 것이 <벌미>라고도 부르게 됨 |
새터
지금부터 약70년 전에 큰 동네(역곡)에서 한집 두집 이사하여 생긴 마을, 마을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붙여진 이름 |
예주리
(曳舟- ) |
예주리(~)
이안천이 마을 앞을 흐르고 있는데, 옛날에는 강물이 많아서 예천군 풍양면까지 소금배가 왕래하였다고해서 붙여진 이름 |
새마-검사(儉沙)
임진왜란 뒤 마을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
안검사-내검사(來~)-홍촌(洪村)-안마
새마 북쪽에 쑥들어가 있는 마을, 450년 전부터 홍씨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홍촌>이라고도 불림 |
아랫터
새마의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아랫터>라고 함 |
예주목(~木)
이안천을 따라 이 마을까지 들어온 배들이 정박할 때 매에 두던 큰 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을 <예주목>이라고 부름 |
별실-빛실-벽실-광곡리(光谷~)
임진왜란 때 김동원이라는 사람이 정착하여 마을을 열었다고 함, 사방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햇빛이 잘 드는 마을이라 <빛실>이라고 함 |
청암(靑岩)
1650년경 청암서원(~書院)이 있던 마을이라하여 청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함, 지금은 서원이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 있음 |
오태리
(五台- ) |
개골
약 200년전 외서면 곡실에서 김씨가 분가하여 생긴 이라 고 <개골>이라 부르게 됨 1960년에 오태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지구가 되면서 거의 사라짐 |
용머리[龍頭(용두)]
마을에 접해 있는 산의 모양이 용머리 모습이라고 하여 마을이름을 용머리라고 하였음 1960년에 오태 저수지가 만들어짐에 따라 수몰지구가 되어 3가구가 거주(1984년 기준) |
무리까-龍湖(용호)
마을이 못가에 위치하였다 하여 '무리까'라고 불려지게 됨, 조선 초기 전주이씨가 오태에서 분가 개척, |
샛터
고려시대 번성했던 남면 장터가 없어지고 170여년 전에 새로 형성되었다 하여 '새터'로 불리게 됨 |
오태(五台)-원오태(元五台)
마을 뒷산이 다섯봉우리로 되어 있고 다섯 정승이 태어났다고 하여 '오태(五台)'라고 함 조선 초기 전주 이씨가 개척한 마을 |
왕대골
마을에 왕대가 많이 생장하였다 하여 왕대골이라 함 약 200년 전에 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함( |
율곡리
(栗谷- ) |
벅구지-법구지[法九里(법구리)]
마을 자치법(自治法) 9개 조항(條項)이 씌어 있는 비석이 있었다고 하여 '법구지'로 불려지게 되었음 |
능골-능곡(陵谷)
삼국시대 왕릉이 있었다고 하여 능골이라 불렀다고 함 |
발기미
이곳을 지나다 주위 산수가 마음에 들어서 시를 짓기 위애 움막을 짓고 살았던 '발기미'라는 시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함 |
새마
안마에서 살던 사람들이 약 300년 전에 남편 산밑 아늑한 곳에 옮겨 살기 시작하면서 새마로 불리게 됨 |
진지미
장마철에 나막신을 벗어 들고 다녀야 할 정도로 질어서 '진지미'로 불렀다고 함 |
웃마
인근 여러 마을 중에서 가장 위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웃마'라고 함 마을의 뒤쪽과 양 옆으로 마을을 둘러싼 산의 모습이 삼태기 같다고 하여 이 마을에 살면 부자가 된다고 전해짐 |
안마
인근 여러 마을 중에서 아랫목처럼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안마로 불리어 짐 |
중소리
(中所- ) |
그름마
본 마을(아랫등거매)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름마'라고 했다 함 |
염소목
마을의 지형이 염소의 목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
아랫등거매-아랫등검-기산(箕山) 마을 개척 당시 산등 밑으로 굴이 생겨서 앞 냇물이 굴 속으로 나갔다고 하여 '등구멍'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하여 '등거매'로 부른다고 함 함창 현감이 중국의 기산(箕山)과 비슷하다고 하여 기산으로 부른 이후 그렇게도 부름 |
웃등거매-웃등검 염소목 북쪽에 있는 마을 5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음 |
중소(中所) 나그네들이 길을 가다가 중간에 쉬는 곳이라는 뜻으로 '중소'라고 하였음 |
탈막 아랫등거매 남쪽에 있는 마을 |
새마을 1980년 수해를 입은 20여 가구가 모여 마을을 형성함 |
지평리
(支坪- ) |
경들(經~) 마을의 앞에 동서로 큰 들이 펼쳐져 있는데, 마을의 위치가 이들을 지탱하고 있는 형상이라 '경들'이라고 부르게 되었음 |
골마 진모래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이 깊숙한 골짜기웨 위치하였다고 하여 골마라고 부르게 되었음 |
양달막-양달마 진모래의 동쪽에 있는 마을로 햇빛이 잘 들고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양달마라고 부름 |
옛고개 진모래 남쪽에 있는 마을로 광산노씨(光山盧氏) 집성촌 |
진모래-장계(長溪)-장사(長沙) 갈모봉의 서쪽에 있는 마을, 마을 앞의 하천이 길게 펼쳐져 사장을 이룬 곳이 많다고 하여 '진모래'라고 부르게 됨 |
화동리
(華洞- ) |
숙골
서울로 가거 보러 가는 선비들과 공갈못에 고기 잡으러 왔던 사람들이 며칠씩 묵어가던 곳이라 <숙골>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근년에 화동리로 개칭 |
하흘리와 연봉리는 공검면이 아니나, 하흘리는 1986년까지 공검면이었으며, 연봉리는 공검중학교에 학구에 속하므로 소개합니다. |
하흘리
(下屹- ) |
범우리[虎鳴(호명)] 옛날 사벌국 왕이 이지방을 순시할 때 우연히 범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고 해서 <범우리>로 불리게 됨 |
건너마을 사방이 하천으로 둘러 싸인 마을로 하천을 건너야 갈 수 있는 마을이라 <건너마을>로 불리게 됨 |
아랫마을-뱃마
하흘리에서 가장 아래 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아래마을>이라고 불림
들 한가운데 주택이 장방형으로 들어서 있어 배같은 모양이라 하여 <뱃마>로도 불림 |
새마을
도둑이 자주 침범하여 살 수가 없어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폐허가 된 마을(500년전)이었으나 1980년대 대홍수로 유실된 아랫마을 주민들이 옮겨와서 형성된 마을 |
안마을
아랫마을 후미진 곳에 자리 잡은 마을 |
양지편(陽地便) 별마라는 마을이 유실되고 옥녀봉 아패 양지쪽으로 이주하여 새로 형성된 마을 |
흘골, 하흘 조선시대 고을 원님이 행차할 때 진흙이 너무 많아서 산을 돌아갔다는 것에서 흘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함 |
연봉리
(蓮鳳- ) |
주막뜸[酒幕(주막)] 고지골[古支谷(~곡)], 작은고지골[小--谷(소~)], 느티나무골, 모티마을,가는골[細谷(세곡)],골매기, 신기동(新機洞), 막실[幕谷(막~),양지뜸,샛골] |
첫댓글 엣날에는 두매산 골짝이라 하늘만 보이는 ㅎㅎㅎ
그래두 지금은 산좋고 물좋은 우리의 고향이 최고야 최고
마을 이름들이 다 깊은 뜻과 사연들이 있고 재미있네.. 별 생각없이 부르던 이름들이었는데 몇번의 변천사를 거쳐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됬군요... 동네마다 참 갖가지 사연이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