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의 개척사 (1964년)>
1. 유래
욕지도는 최단 대륙의 18마일 남방에 위치한 섬으로 고려시대에서부터 이조 초기까지 남방해의 방위구역으로 천황봉에 봉화대를 설치하고 지명은 호주라 칭하고 판관이 군인 100여명을 거느리고 매기 24개월 마다 임기가 교체되어 섬을 통치한 것은 틀림없다.
천황봉에 봉수대 흔적이 있다.
본인이 다방면으로 문의하고 추측한 결과 아마 임진왜란에 본도는 일본으로 건너는 관문이 되고 또 좋은 항이라 왜적이 침입하여 근거지로 삼아 주민과 판관이 피해 육지로 이주하여 무인도가 되어 300여년의 세월이 흘러 수림이 울창하고 금수가 많은 중에 특히 사슴이 많아 국가에서 양록도로 지정한 것 같다.
내면 삼도수군 통제사 영문에서 군인을 동원하여 사슴사냥을 하여 녹용은 진상하고 그외 부산물은 영문에서 관리한 것 같다.
2. 개척의 경위
삼군통제사 시절에 진남 구진별장 김문언씨가 경성에 가서 지금의 다동(다방골) 송산림(직명)을 찾아가서 욕지도 개척 유민의 건을 의논하니 송씨 말씀이 오주부(직명)를 찾아가 상의하여 보라고 지시하기에 오주부를 찾아가 간곡히 절충한 결과 명례궁에 상소하여 개척허가를 받고 오주부 명의로 조세를 매년 납입하기로 하고 서기 1887년 정해년에 역사적인 유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해 정해년 오주부는 이러한 연고로 고성군수가 되고 00오학선이가 영문 00비장으로 온지라 당시 병선 비장 유선달을 시켜 풍하리 김월일씨 오비도 김0원 거제 김신지 등 4인이 욕지도에 입도하여 지금 장수나무 아래 제단을 만들어 소잡고 제사를 올려었다 합니다. 익년 서기1888년 무자년부터 각지에서 주민들이 유동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부락에 소임을 두고 도존위에 이문오씨가 되다(이억진씨 조부) 도존위 이후에는 집강(이것은 동학란 이후 각지에 지방관으로 임명한 동학계통의 책임자인 것 같습니다.) 에서는 서정일씨 - 진00 - 서호연 - 김00 - 신00 - 김00 - 황원일 - 김형일 이상은 집강이다.
면장으로는 김병규 - 서태민 - 일본인 후지 000 - 조용하 - 김한민 - 김재화(김임욱씨 부친) - 전재규 - 김재준 - 이부흥 - 박상기 - 정상종 이상으로 오는 도중 재임도 있고 민선도 있습니다.
3. 문화교육의 경우
1910년 광무합방 후 김병규씨가 면장이 되어 면소는 도동서당에 두다 1922년 사량도가 합면이 되어 김병규씨가 사임하고 서기로 계시던 서태민씨가 면장이 되어 1921년 대정 10년 신해년에 원양국민학교 학생을 모집하고 학교신축을 하기 위하여 목재등을 대마도에서 구입하여 최초로 신축교사를 마련하고 최초의 교사로는 일본인 사가 000이고 한인선생으로는 박영모(박약국 부친)씨가 되었음.
이 대목은 원양국민학교 설립 연역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박약국이 별세했을 때 욕지도 청년들이 상여를 매고 산양면 선영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원양학교 설립자로써 길이 그 유적을 보존하여야 합니다.
욕지 중학교는 1946년 병무년에 공민학교로 시발하여 2년후 사립재단으로 발전 인가하여 김형국씨가 교장이 되고 이사장에는 김태민씨 이사에는 조성준, 전재국씨 등이 차례로 이사장을 승계하면서 학교를 운영 하시다가 어려움이 많아 조용하씨등 욕지 유지분들이 도청으로 수차례 왕례 하면서 교섭하여 공립으로 인가하여 도민의 중등 교육발전에 이바지 하게 되었었다.
근화 유치원은 조성준, 조성근씨의 각별한 관심으로 유치원을 설립하여 20여년간을 유치원 교육사업을 훌륭하게 이바지 하였다.
고등공민학교를 김이묵씨가 설립하여 불우한 중학 미진학자를 모집하여 중등과정 교육을 10여년간을 읍동사무소와 제암부락에 가교사를 신축 운영한 공적은 훌륭한 문화교육사업이 아닐 수 없다.
기타 문화체육사업으로는 학예회, 시화전시회, 면민 큰 운동회, 씨름대회, 수영대회, 농악 연극 가요 등 온갖 문화 행사가 오래도록 계승되어 왔다. 주관단체는 원양국민학교, 중학교, 해외 유학생회, 공민학교 청년회, 갯벌회 등 유수한 단체들이 있었다.
<주> 고 조용하님은 욕지면 제5대와 제12대 면장을 지내신 분으로 욕지면 발전에 많은 공덕을 쌓으신분이다. 구체적 치적은 욕지면지에 수록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