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의 무능한 대응
근무지를 무단이탈해 온천접대 후 술을 마시고 돌아오던 궁류지서장 허창순 일행은 10시 50분경 길에서 주민 신고를 받지만
무시하고 궁류지서로 들어온다. 그곳에서 우범곤이 무기를 탈취해 총격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총격현장에 자기가 없어
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도피했다. (....) 한편 의령서에서 신고를 받고 경무과장 신현기와 보안과장 김영석 휘하 전경 30명이
밤 12시경 도착했으나 우범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 커녕 피격을 두려워하여 마을초입 다리밑 등 곳곳에 숨어 있었다.
후에 경찰은 이를 매복이었다고 변명했으나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결과가 되었다. 주민살상이 진행중인데 경찰은 현장에 진입하
지 않고웅크려 있었던 것이며 더구나 매복을 다리밑에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관할 책임자인 의령서장 최재윤은 다음날 부산에서 서장회의가 있다는 핑계로 하루 일찍 부산으로 이동하여 근무지를 보
고없이 무단이탈한 상태였다. 보로를 받고 복귀하여 범행지역에 이르는 다리에 도착한 것은 익일 1시 20분이나 되어서였다. 현
장에도착한 의령서장은 경찰들을 규합하여 범인수색에 나서기는 커녕 곳곳의 사상자를 목격하고 두려움에 빠져 곧바로 궁류
지서로 도망쳤다.
지서에 도착한 의령서장은 우범곤이 많은 실탄을 가져갔다는 보고를 받자 더욱 두려움에 빠져 지서 안에만 틀어박혔다. 게다가
지서에서 마을스피커로 경보를 발하거나 사이렌을 울리거나 또는 예비군을 동원하거나 혹은 의령서 휘하 인근 지서에 경찰지
원을 지시하거나 하지도 않고 단지 내무부에 상황보고만 하였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이는 지서에 대기하고 있
던 경무과장과 보안과장도 마찬가지로서 만약 이들이 10시 34분 첫 신고를 접수한 즉시 경보 방송을 발령하였다면 희생자의
절반을 구했을 수도 있었다. (궁류 우체국 교환원이 숨지기 직전 마을 이장집의 행정전화와 의령 우체국 간의 코드를 연결했던
덕분에 주민에 의해 신고가 가능했다)
새벽 2시에는 주민 2명이 목숨을 걸고 산을 넘어와 출동을 채족하였으나 서장은 날이 어둡다며 이 마저도 거부하였다. 새벽 4
시가 다 되서야 마산.진주의 기동대가 궁류에 동착하였으나 결국 사건은 우범곤의 자폭으로 종료되었으니 경찰력의 개입이나
저지 없이 속수무책으로 끝까지 주민살상이 진행된 셈이다.
희생자
이 사건으로 주민 62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도 33명이 나왔다.
의령군 일대 4개 마을을 거의 쓸다시피 살을인 저지르다보니 조상대대로 친척 일가가 모여 사는 산골마을의 특성상 상당수의
집안이 줄초상이 났으며 일가족이 사망하거나 혼자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나머지 가족은 변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체국에서 숙직하다 참변을 당한 집배원의 경우에는 부인마저 집에서 우범곤에게 살해당하는 바람에 이 집의 세 남매는 하루
아침에 고아가 되는 비극이 생겼으며 가장 처음으로 살해당한 청년과 우체국에서 살해당한 교환원 아가씬느 미혼으로 사망한
것을 비통하게 여겨 유족들끼리 합의하에 영혼 결혼식을 올리는 안타까운 사연이 생기기도 했다. 범행이 일어났던 의령 지방에
는 아직도 4월 26~27일 즈음에 제사 지내는 집이 많다고 한다.
피해가 커진 이유
이날은 반상회를 하느라 마을 주민들이 곳곳에 모여 있었고 밤늦게까지 불을 켠 집이 많았다. 또 기강해이로 경찰의 근무지 무
단이탈이 만연했는데 궁류지서의 다른 경찰관 3명도 반상회에 참석하려고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상태였으며 이에 우범곤은 무
기고에서 다량의 화기를 용이하게 탈취할 수 있었다.
우범곤의 직업이 경찰이었으며 사건 당시에도 근무복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주민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우범곤을 맞이했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이는 노르웨이 연쇄테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당시는 무장공비가 심심치
않게 출몰하던 시대였으므로 주민들은 총소리를 무장공비가 나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사건 이후 |
국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전대미문의 흉악범죄를 저질렀다는 충격성과 사건 진행 당시 진압을 위해 출동한 결찰들이 진압에
미노적이어서 피해가 커졌다는 점 때문에 전국적으로 여론이 폭발했다.
전두환 정부는 내각 사퇴 압력에 직면했다. 내무부 장관이던 서정화가 경질되었고 경찰 쪽 높으신 분들도 줄사퇴했다. 이 사건
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내무부 장관에 오르게 된다.
혐한들이 한국인 얘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인간으로 어째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하다. 그 이유는 이 전까지는 일본에서 일
어난 츠야마 살인사건이 최악이었으나 우범곤이 더 많은 희생자를 냈기 때문.... 그래서 사법기관에 의해 기록된 최단시간 최다
살상의 살인마로 기네스북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허나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노르웨이 연쇄테러 사건으로 최
소 76명이 사망하면서 최악의 희생자수가 바뀌었으나 현재의 기네스북은 더 이상 살인사건 등 범죄에 관련된 기록은 기록 갱
신을 위한 흉악범죄가 발생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서 더 이상 수록하지 않으므로 기네스북에 올라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범곤 사건도 삭제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의령경찰서장 최재윤에 대한 대법원 공판에서 재판관이었던 대법관 중 한 명이 바로 이회창이었다. 한때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바로 그 사람...
-출처 Rig Veda Wiki-
----------------------------------------------------------------------------------------------------------------------------------------
----------------------------------------------------------------------------------------------------------------------------------------
<우범곤 총기 난사살인사건>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하였는가?
『프롤로그』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람을 많이 살해 한 살인마는 누구일까? 하면 문득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연쇄살인마 강호순, 정
남규 아니면 유영철 등이 떠오르겠지만 의외로 대한민국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관 우범곤이다. 2011년 7월 22일 노르웨이에서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크가 76명을 살해한 총기 난사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악의 연속 살인사건으로 남
아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영아부터 노인까지 총 8시간에 걸쳐 사망 62명 중경상 33명에 이르는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전대미
문의 연속 살인사건이 바로 우순경 총기 난사사건이다.
『사건 개요』
1982년 4월 26일 경남 의령군 궁유면에서 당시 27세 경찰 순경 우범곤이 오후 9시경 술에 만취한 상태로 예비군 탄약고에서
카비 소총 2정, 실탄 180발, 수류탄 7발을 들고 집배원과 전화 교환원을 살해한 후 외부의 연락망을 끊고 주변 마을 4곳을 돌
면서 마을 주민을 무차별 난사하여 사망 62명 중경상 33명의 사상자를 내고 2발의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한 대한민국 역사상
희대의 연속 살인사건이다.
<우순경 살인사건 장례식 장면 출처:경향신문>
『우순경 그는 누구인가?』
1955년생인 우범곤은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당시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를 동경하는 마음으로 경찰관
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던 아이였다. 중학교에 진학 한 우범곤은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성격에 학교 성적은 65명 중 63등으로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무단결석도 잦아 순탄한 학창 시절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우범곤은 이때부터 성격적 장애를 보이
는데 한번 화가 나면 분에 못 이겨 물건을 부수고 자해하는 등 난폭성을 보이고 특히 고3 어릴 적 동경하던 경찰관이었던 아버
지가 대장암으로 숨지자 그의 난폭성은 더욱 심하고 엇나가지 시작했다. 그 후 그는 해병대에 지원을 하고 군내에서 사격 솜씨
가 뛰어나 특급 사수로 나름 자신이 인정받는 기술 아닌 기술이 된다. 제대 후 그는 사격과 돌아가신 경찰관 아버지의 후광으
로 특채로 경찰관이 되어 부산 남부 경찰서 감만 파출소로 발령을 받는다. 당시 동료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유독 피의자를 심문
할 때 심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난폭성을 보이고 조용하다가도 술만 먹으면 누구도 말리기 힘들 정도로 난폭성이 극에 달했다
고 전한다. 하지만 뛰어난 사격 솜씨 덕분인지 경찰관들의 성지로 불리던 청와대 101경비단에 선발된다. 청와대 101경비단은
진급이 보장되는 엘리트 코스 중 한 곳이었지만 그는 그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8개월 만에 부적격 판명으로 전출 당하고 경남
의령군 궁류지서 깡촌으로 발령을 받는다. 부적격 판명에 불만이 많았던 그는 근무시간에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는 등 주위
동료나 동네 주민들은 그가 다가오면 '저 미친 호랑이 온다'라고 소곤대기 일쑤였다. 우범곤은 궁류지서로 발령받으면 동네 하
숙하던 중 이웃집 전양과 동거를 하는데 결혼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혼인신고만 하고 처갓집 신세를 지며 지냈다. 이를 본 동
네 주민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고 이를 느낀 우범곤도 동네 주민에 대한 분노가 쌓여가고 있었고 자신에 대한 자격지심
도 커져만 갔다.
▶1982년 4월 26일 오후 4시
우범곤은 파출소 당직 근무를 위해 점심을 먹고 드러누운 채 3시간째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바깥일을 마치고 돌아온 동거녀
정양은 그런 우범곤이 한심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다. 잠시 자고 있던 그를 응시하고 돌아선 그녀는 갑자기
날아든 파리를 한 팔로 내저으며 쫓아내고 그녀의 눈동자는 요리조리 날아다니는 파리를 따라다닌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
은 자고 우범곤의 가슴에 앉아 열심히 두 손을 비비고 있는 파리... 행여 도망이라도 갈까 봐 오른손을 조심히 치켜 올린 채 사
정거리를 좁히고 사정거리에 다다라는 순간 치켜 올린 손은 파리가 아닌 우범곤의 가슴을 내리쳤고 놀란 파리는 주위를 두어
번 맴돌다 밖으로 달아나버린다. 한참 단잠을 자고 있던 우범곤은 느닷없어 내리친 그녀의 손에 깜짝 놀라 욕과 함께 벌떡 일
어나 매서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본다. 조금은 민망한 그녀의 내리친 손은 어느새 뒷목를 긁적거리고 있었고 파리가 도망간 문
밖을 보며 "아~~저 놈의 파리 새끼가.."나지막한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그런 모습에 더욱 화가 우범곤은 벌떡 일어나며 "동네
사람도 무시하니까 너도 무시하냐?씨발년아" 하는 말과 동시에 그녀의 가슴 팍에 발길질을 해된다. 분이 치밀어 오른 우범곤은
지릿끼로 준비해 놓은 주전자를 집어던지고 가진 욕설과 함께 미친 호랑이처럼 미친 듯이 패기 시작했고 그녀는 아무런 저항
도 하지 못한 채 몸을 웅크려 얼굴을 감싸고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앞 마당에서 빨래를 널던 그녀의 친척 언니는 동생의 비명
소리와 우범곤의 욕설을 듣고 널고 있던 빨래를 내팽겨놓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작은방으로 달려가 우범곤을 쏘아보며 그녀
를 감싼다. 이미 이성을 잃은 우범곤은 그녀를 감싸며 째려보는 친척 언니도 못마땅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의 발길질은 그녀
들에게 향하고 요란한 소리에 결국 동네 사람들에 의해 이 사단은 마무리되었지만 그녀를 두둔하는 동네 사람들이 우범곤 눈
에는 곧게 보일 리는 없었다.
▶4월 26일 오후 5시
아직도 분이 식지 않은 우범곤은 평소 근무시간 간간이 같이 술을 마시던 방위병 녀석들이랑 한잔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근무하는 궁류지서 파출소로 향한다. 그날도 하는 일 없이 퇴근시간만을 기다리던 두 방위병은 멀리서 다가오는 우 순경을 보
고 낮은 한숨을 내쉰다. 우범곤은 탁자에 비닐봉지에 담긴 소주 3병을 내려놓으며 한 병은 이미 어금니로 병뚜껑을 따고 있었
다. 한숨에 3분의 1을 마신 그는 씹을 거리를 찾으며 한잔하라고 권한다. 못 이기는 척 앉은 방위병은 그가 따라준 소주를 마시
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좀 있으면 퇴근시간이었던 그들에게는 우범곤은 반가운 손님이 아니었다. 이렇게 그들에게 원
치 않은 술자리는 시작되었다.
▶4월 26일 오후 8시
벌써 3시간째... 이미 퇴근시간은 훨씬 지났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앉아 있는 두 방위병과 우범곤은 술자리를 끝낼 생각이 없
어 보인다. 술만 먹으면 미친 호랑이가 되는 우 순경임을 잘 알기에 두 방위병은 최대한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고 그의 말에 호
응하고 편을 들어준다. 반쯤 풀린 눈으로 두 방위병을 바라보며 횡설수선하던 우범곤은 갑자기 문이 열리며 자신에 욕을 해대
는 그녀의 친척 언니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야! 니가 경찰이면 다야 왜 사람을 때리고 지랄이야"라는 말을 시작으로 친
척 언니의 아들은 우범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놀란 두 방위병은 한 명은 우범곤에게 또 한 명은 친척
언니 아들에게 다다가 두 사이를 벌려 놓는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려는 우범곤을 조심스럽게 어깨를 눌러 안
으려는 방위병은 친척 언니 아들에게 다가간 방위병에게 고개를 치켜 올리며 내보라는 사인을 보낸다. 간신히 친척 언니 아들
을 내보낸 방위병은 우범곤을 진정시키려 하지만 그는 그의 분노는 극에 치닫고 있었다. 우범곤은 진정시키는 방위병을 박차
고 상기된 얼굴로 궁류지서의 무기고 키 보관함에 향해 가고 있었다. 경찰관이었던 그는 내부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기에 무기
고 키를 찾는데 큰 어려움 없이 키를 들고 무기고로 향한다. 집으로 간 것으로 생각하던 두 방위병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만류를 하지만 우범곤은 카빈총에 공포탄을 장전하여 위협사격을 한다. 이에
놀란 두 방위병은 혼비백산한다. 그는 카빈과 M1 총 2자루, 실탄 180발, 수류탄 7개를 탈취하고 고개 들어 긴 숨을 들어 마신
후 짧게 내뱉고 어깨에 두 자루의 총을 멘다.
▶4월 26일 오후 9시 40분
무기를 챙겨 지서에서 나온 우범곤은 주위를 둘러보니 예비군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26세 남자를 발견한다. 어깨에
멘 M1 소총을 다시금 고쳐 들로 어깨에 걸쳐 소총의 가늠자를 그 청년에게 겨눈다. 술에 취한 우범곤이지만 수없이 연습하던
사격은 이미 몸에 배어 있었다. 한방 총성과 함께 영문도 모른 채 남자를 쓰러졌고 그렇게 광란의 살인은 시작된다. 이미 피를
본 우범곤이는 곧바로 가까운 토곡리 재래시장으로 달려간다. 저녁 늦은 시간 장사를 마무리하려는 분주한 상인들을 바라보며
재장전한 그는 무차별 사격으로 마을 주민 3명을 살해한다.
▶4월 26일 오후 9시 45분
이렇게 4명을 살해 한 우범곤은 마을의 통신시설을 끊기 위해 궁류 우체국으로 간다.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의아한 눈
빛으로 쳐다보던 두 명의 전화교환원을 살해하고 총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뛰어나오던 숙직 중이었던 우체부를 살해한다. 그래
도 전화교환원 한 명이 죽기 직전 이장 집의 행정전화 코드를 우체국과 연결해 놓아 주민에 의해 신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바
깥세상과 통신을 끊어 버린 우범곤은 본격적인 살인이 시작된다
▶4월 26일 오후 10시
4명을 더 살해한 후 우체국을 나온 우범곤은 기지고 있던 총기류를 확인하고 자고 있던 자신을 때린 아내와 친척 언니 그리고
방위병에 앞에서 망신을 준 친척 언니 아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살고 있는 압곡리 매실 부락으로 향한다. 매실 부락에 도착한
그는 아내의 행방을 찾던 중 동네 주민 여성 1명을 살해하고 아이 1명을 중상을 입힌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반상회를 하고 있
던 전 모 씨의 집이었다. 자신의 아내를 포함한 10명이 모여 있는 곳에 왼쪽 가슴에 차고 있던 수류탄 한 발을 던진다. 하지만
수류탄은 불발 나고 이를 확인한 우범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카빈을 난사하기 시작한다. 아내를 포함한 6명을 살해한 그는
처참한 현장을 남겨 두고 담배를 입에 물고 담뱃불을 붙인다.
▶4월 26일 오후 10시 10분
이제 갈 때까지 간 우범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만한 근처 운계리 시장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살인을 강행한다. 운계리 시장에
서 그는 7명을 더 살해한다. 이 시간 두 방위병을 우 순경이 총기를 탈취해 달아난 사실을 통신이 끊어진지라 사방팔방 돌아다
니며 집 안의 불을 끄고 조심하라 전달하고 다녔다. 이 사실은 점점 근처 마을로 전해지고 있었다.
▶4월 26일 오후 10시 50분
오후 9시 40분에 시작한 그의 살인 행각은 1시간 정도 흐르게 되었고 마을 주민들의 경계도 높아지고 있었다. 우범곤은 정막
해진 마을을 배회하다가 근처 상갓집이 있다는 깨닫고 태연한 척 그곳을 찾아간다. 두 자루에 총을 멘 우범곤을 본 마을 주민
이 그 총에 대해 묻자 그는 공비가 나타났다는 거짓말로 둘러댄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우범곤은 부의금 3천 원을 내고 멍석
에 주저앉아 술상을 받으며 넋두리를 풀어 놓는다. 하지만 평소 평판 좋지 않았던 그의 말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되레 한
마을 주민이 카빈 총을 툭툭 건드리며 나가도 않은 총은 머 하러 들고 다니냐는 둥 깐족 되는 주민에게 총을 쏘는 것을 시작으
로 도륙을 시작한다. 그야말로 줄초상을 만드는 끔찍한 현장을 만들고 있었다. 이 자리에선 만 무려 24명을 살해한다. 그의 눈
앞에 있는 마을 주민들은 특급 사수였던 우범곤에게 너무나 무기력한 존재였다. 이후 우범곤은 불 켜진 상가나 가정집에 침입
하여 10여 명의 사상자를 더 발생시킨다.
▶4월 27일 새벽 1시 50분
우범곤은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족족 부녀자, 노인, 어린아이들 가릴 것 없이 무차별 살해를 저지르고 있었다. 4월의 새벽 공기
에 쌀쌀함을 느낀 그는 골목 담벼락에 기대어 자신이 탈취한 총과 수류탄, 탄약을 살펴본다. 반 이상 써 버린 탄약은 그의 만행
을 증명하고 있었고 아직 열이 식지 않은 총열은 그의 분노를 말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피곤함을 느낀 우범곤은 전에 밑에 있
던 방위병 집으로 발걸음 옮긴다. 잠이 덜 깬 방위병은 어깨에 두 자루의 소총을 보고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선다. 우범곤은 지금
무장공비가 침투해서 작전 중인데 너무 피곤해서 그러니 너희 집에서 잠깐 눈 좀 붙이겠다며 거짓말을 늘어놓고 작은방에 들
어가 자리를 잡는다. 입에 문 담배 재가 길게 늘어진 채 꾸벅꾸벅 졸던 그는 아내가 자고 있던 자신을 때렸을 때처럼 깜짝 놀라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깬 우범곤은 잠시 방 주위를 둘러보고 벽에 걸린 방위병 아버지 사진에 시선을 멈춘다. '아버지.. 저도 아
버지처럼 경찰이 됐어요' 그는 조용히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4월 27일 새벽 5시 35분
새벽시간 농촌마을을 조용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다. 간혹 적막을 깨뜨리는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 몇 시간 전 자신이 쏜 총
성은 적막함 속으로 사그라들고 있었다. 술이 깨려는지 머리가 아퍼오고 갈증을 느낀 그는 한 채의 민가를 발견한다. 무장공비
가 나타났다며 일가족을 깨워 안방에 몰아넣고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 채 경찰 복장을 한 우범곤의 말에 순순히 따른다.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켠 그는 왼쪽 가슴에 꽂은 수류탄 2발의 안전핀을 뽑아 바닥에 떨어뜨린다. 우범곤을 포함한 4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며 악몽 같았던 우범곤의 만행은 8시간 만에 3명의 희생자를 더 남기고 끝을 맺는다. 새벽닭 소리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
지만 그 소리에도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출처 경향신문
1982년 4월 26일부터 4월 27일까지 벌어진 이 사건은 대한민국은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전대미문의 연속 살인사
건이다. 당시 허술했던 경찰서의 지위체계와 안일함 그리고 사건 처리능력 등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며 개인의 자격지심과 히
스테리가 이렇게 큰 대참사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사건이다. 사망 62명 중경상 33명을 낸 우범곤 연속 살인사
건은 경찰이나 군에서 적극적인 대처가 있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근무시간에 온천 접대를 받으러 간 궁류지서 서장부
터 시작해 의령서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한 정무과장과 보안과장을 포함한 32명의 전투경찰들은 우범곤 사격 솜씨에 두려워서
그랬는지 마을 다리 밑에서 매복(?)하고 있었고 우범곤의 직업 특성상 경찰관은 주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주 업무를 행하다 보
니 가택 침입도 수월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원인들이 맞물리면서 한마을을 쑥대밭을 만든 사건은 당시 내무부 장관이
었던 서정화가 사퇴하고 후임으로 노태우가 임명되는 등 대대적인 인사발령이 일어났다. 아직도 4월 26일과 4월 27일이 되면
의령시는 제사 지내는 집이 많아 그날의 아픔을 자아낸다.
[출처] <우범곤 총기 난사살인사건>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하였는가?|작성자 살인의 추억
|
첫댓글 꼬리에꼬리를 무는 이야기 2021년11월25일 방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