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시칼럼 |
유공희柳孔熙의 「ILLUSION」|임 보(시인)
산야에 피었다 지는 이름 모를 수많은 들꽃들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기도 하다. 그들이 길가에 피었더라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어 얼마나 기림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산야의 들꽃들은 사람의 시선 같은 것은 별로 안중에 있는 것 같지 않다. 보는 이 하나 없어도 최선을 다하여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가꿀 뿐이다.
사람의 일도 들꽃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천상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이 지상에도 많은 사람들이 꽃을 피우며 살다 간다. 그런데 어떤 이의 꽃은 세상에 드러나 눈부시게 기억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꽃들은 계절이 바뀌면서 어둠속에 묻히고 만다. 아니, 처음부터 세상에 얼굴 내밀기를 좋아하지 않아 숨어서 피는 꽃도 있다. 누구의 간섭도 받고 싶지 않은 절대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비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상愉象 유공희柳孔熙 (1922~2003)란 분이 있었다. 메이지대明治大 문학부에서 수학하신 분인데, 평생 ‘그냥 선생’(그분의 표현)으로 몇 명문 고등학교에서 훌륭한 제자들을 길러냈다. 글쓰기를 즐긴 문학인이었지만 등단을 거부한 채 자유인의 몸으로 고고하게 살았다. 유머와 위트에 넘친 철학적인 담론들을 즐겨 썼다. 그분 생존 시 제자들이 여러 차례 찾아가 스승의 글을 문집으로 엮고자 청했지만 끝까지 고사固辭했다. 당신의 생전에 어찌 부끄럽게 문집을 갖느냐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다. 근래에 보기 드문 청빈한 선비정신의 소유자였다. 작품이 모이기가 무섭게 시집으로 묶어낼 생각부터 지녔던 나는 실로 부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스승이 세상을 뜬 지 몇 년이 지난 지금에야 유고를 정리하면서 나는 새로운 사실에 놀란다. 43편의 산문 이외에 76편의 시 작품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시의 경우 그분의 2, 30대의 것이므로 지금으로부터 5, 60년 전의 글이어서 오늘의 정서와는 거리가 다소 없지 않다. 그러나 당시의 젊은 지성인이 품었던 고뇌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편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 문학인의 작품을 발굴한다는 생각으로 우선 「ILLUSION」이란 작품을 여기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끼가 퍼렇게 낀 깨어진 기와 쪼각들이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는가?
그것은 멀리 거대한 뱀처럼 누운 양자강楊子江의,
물빛조차 조금도 엑조틱하지 않는 내 고향 같은 중국의 벌판―
따스한 사월의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언덕 위….
구구식 소총을 풀밭에 던져 둔 채
티 없이 푸른 하늘이 소나기처럼 향수를 쏟는 한낮
나는 문득 구슬프기 이를 데 없는 들새의 곡성을 들었다.
ku ku ku kwoo……… ku ku ku kwoo……
워드워즈의 로맨티시즘이 생각났다.
cuckoo의 원더링 보이스를 찾아 헤매는 그의 미스터리를….
나는 소리를 찾아서 엊그제 익힌 포복匍匐을 시험했다.
저 호반 시인처럼 머리털을 훈풍에 휘날리며 걸을 수는 없다.
푸른 하늘에 얼굴을 쪼이는 것도 내게는 하나의 반항이었으니까.
멀리서 경기관총이 연발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표적이니까 이 언덕 위에 엎드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소리를 향하여 포복하던 나는 이윽고 소리가 있었을 장소에
그 슬픈 들새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의외에도 이끼가 퍼렇게 낀 채 흩어져 있는 기와 쪼각들이었다!
아까 ku ku ku kwoo……하고 울던 소리는 분명히
이 기와 쪼각들의 곡성이었다!
몇 백 년 몇 천 년을 두고 이 기와 쪼각들은 인적 없는 이 언덕에서
그렇게 슬피 울어 왔으랴!
아, 사천 년의 차이나의 오열嗚咽…
갈가리 찢기우고 짓밟히는 차이나의……오리엔트의…….
그 소리는 죽지 않는다. 나의 가슴속―
벌판마다 언덕마다 ku ku ku kwoo…… ku ku ku kwoo…….
이끼가 퍼렇게 낀 깨어진 기와 쪼각들이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산다.
귀를 기울이려무나…
붉은 산들이 둘러 있는 네 고향의 언덕 위에 혼자 누워 있어 보려므나.
― 유공희 「ILLUSION」 전문
이 작품의 배경은 일제 말기 소위 대동아전쟁이라고 일컫는 전시戰時다. 학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간 주인공은 중국 대륙에 침투되어 양자강 주변의 들판에 매복해 있다. 4월의 따스한 봄 햇볕은 쏟아져 내리는데, 어디선가 ‘쿠 쿠 쿠우―’ 하는 들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화자는 구구식 소총을 던져두고 소리의 행방을 좇아 포복해 간다. 워드워즈의 시 「뻐꾸기에게(To Cuckoo)」가 떠오른다. 호반의 낭만시인 워드워즈는 뻐꾸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새의 행방을 찾아 헤맨다는 내용의 시다.
지금 화자는 워드워즈처럼 머리칼을 바람에 휘날리며 그런 낭만적인 배회를 즐길 수는 없다. 그러나 화자는 그 들새의 울음에 끌려 멀리서 울리는 적의 경기관총 소리를 들으며 포복해 간다. 드디어 울음의 근원지에 접근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들새가 아닌 깨어진 기와조각들이었다. 이끼가 퍼렇게 낀 깨진 기와 조각들― 역사의 파편들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그것은 역사를 유린당한 영혼들의 울음소리, 짓밟힌 중국대륙, 아시아의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니, 붉은 산들이 둘러 있는 헐벗은 조국에서도 그런 소리가 들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 작품에서의 환청幻聽, illusion인 ‘들새의 울음소리’는 하나의 상징이다. 역사의 비명일 수도 있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양심의 소리일 수도 있다. 일제 침략 전쟁을 비판한 반전적인 작품이지만 전쟁 자체를 직설적으로 규탄하는 언술은 하나도 없다. 전쟁의 참혹성을 감춘 채 오히려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배경을 설정하여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가히 수작이라 이를 만하다.
유상愉象 선생은 스스로 문학의 딜레탕트라고 겸손해 했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사랑했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좋아했다. 자존自尊과 개성을 소중히 여긴 자유인이었으며, 진정한 멋을 안 댄디dandy였다. 유머와 위트가 넘친 낭만주의자, 그러나 지조를 잃지 않은 선비였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내가 지금까지 이 지상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멋진 분이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내 생애의 큰 행운이며 기쁨이었다. 그분의 맑고 고운 문향文香을 세상과 더불어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