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타 장르와의 상호 텍스트
- 문학적 특성의 영화를 중심으로
정 익 진 (시인)
회화가 형상과 색채라면 문학은 오로지 언어이다. 언어예술이다. 말은 말이되 실용성이 없는 말이다. 미학적(예술적) 언어다. 우리의 일상은 실용성을 요구한다. 실용성이 가득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문학적 언어는 불편하다.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간접적인 언어이므로 소통이 잘 안된다. 예술성이 높은 작품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문학에 비해 영화는 소통에 덜 불편한 장르이다. (여기서 잠시 양해의 말씀)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하기 이전에 필자는 영화를 편집하는 사람이 아니고 개별적으로 영화를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영화를 남들보다 좀 더 많이 본 사람일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영화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문학과 관련짓고자 하는 나름의 시도로 봐주시길 바란다.
영화는 장면이다. 시나 소설이 문장의 연속이라면 영화는 장면의 연속이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 장면들이 지나간다. 빠르고 느리게 완급을 조절하며 흘러간다. 구름이 몸을 바꾸며 지나가듯 순간의 장면들이 버스의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간다. 우리의 삶은 셀 수 없는 장면들과 무한대의 문장들로 짜깁기되어 있다. 다만 영화에서의 장면은 편집을 할 수 있고 또한 책(문학)이 출판되기 이전의 원고도 수정 가능하다지만, 인간의 삶은 편집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정도 불가능하다. 시계방향대로 돌아가는 후회를 어찌 되돌릴 수가 있겠는가.
문학적(예술적) 성향의 영화들이란 반드시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를 다룬 영화만은 아니다. 문학인을 다루지 않아도 그 영화의 시나리오(각본/각색)가 좋은, 아니 좋다기보다는 각본/각색이 시적이고 철학적인 함량이 풍부한 영화를 의미한다. 이런 류의 영화는 대사가 별로 없는 대신에 영상미를 매우 강조한다. 침묵이 가득한 영화이다. 그러나 너무 침묵(예술성/영상미)을 고집하는 영화는 영화적 재미가 떨어질 수 있으니 그 영화를 볼 때는 약간의 지루함을 각오하고 영화를 봐야 한다. 고도의 미적 감각과 집중력을 가지고 영화에 몰입하지 않으면 그 영화가 지닌 의미나 미학적 효과를 놓칠 수 있다는 말이다.
침묵하는 영화의 대가, 러시아(소련)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행과 행 사이 행간이 숨 쉬듯이 그의 영화는 장면과 장면 사이의 행간이 깊다. 심연처럼 깊다. 그들 행간 사이, 시간의 무늬를 감각 해야만 하는 영화들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인간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자욱한 안개, 그 속에서 들려오는 낯선 음악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가 시적인 이유는 모방 불가능한 은유적인 영상 언어와 신성에 근접하는 초월적 눈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네포엠’이란 영화의 장르도 이러한 영화사의 맥락 속에서 생겨난 나뭇가지이다. 말 그대로 시네포엠(CinePoem/ 영상시)은 영화(Cinema)로 쓰는 시(Poem)를 말함이다. 가령, 잉마르 베리만 감독(스웨덴)의 영화 ‘제7봉인’에서는 죽음을 대변하는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그 죽음은 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주인공(기사)과 체스를 둔다. 죽음과 인간이 대화를 나누며 체스를 둔다는 그 장면은 분명 시적(詩的)이다. 시의 기본 요소인 상징과 비유(의인법)를 한 장면으로 보여주었기에 시네포엠 장르에 포함할 수 있겠다. 베리만의 또 한 작품, 영화 ‘페르소나’에서는 ‘말을 거부하는 여배우와 말을 찾아주려는 간호사가 주인공’이다. 이 두 인물의 대립적인 구도 자체만 해도 시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연극무대에서 연기를 하며 대사를 뱉어야 하는 여배우가 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반어법(反語法/Irony)적 표현이다. 반어법과 엇비슷하게 보이는 시의 요소들이 있다. 역설(逆說/Paradox)과 모순어법(矛盾語法/Oxymoron)이다.
한용운 시인의 시 ‘님의 침묵’의 유명한 시구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는 역설이다.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의 주요 문장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는 반어법적이다. 이순신 장군의 어록 “죽으려고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모순어법으로 구국의 정신을 극대화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적 비유를 모두 충족시켜 주는 영화가 있을까. 영화의 대사 자체가 시문(詩文)으로 되어 있는 영화, 바로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영화화한 영화들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햄릿, 멕베스, 오델로, 리어왕) 을 포함하여 ‘로미오와 줄리엣’(내용은 비극적이나 몬테규와 케플릿, 이 두 가문이 화해하여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하여 4대 비극에서 제외) ‘한여름 밤의 꿈,’ ‘말괄량이 길들이기’ 등등 그야말로 한 국가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그의 위대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들이 위대한 이유 중에 또 하나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16세기에 탄생된 작품들이지만 지금 2023년을 배경으로 영화가 만들어진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겠다. 말하자면 20세기나 21세기를 배경으로 하되 영화의 대사/내용은 그대로 사용함을 말함이다. 원본(Originality: 독창성)을 전혀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새로운 버전이 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햄릿’과 ‘로미오 줄리엣,’ 이 두 작품을 재해석한 경우가 가장 빈번하지 않을까.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의 시들이 인용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 삼은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 2017년)’의 실제 주인공인 영국수상 윈스턴 처칠과 시민들이 지하철 안에서 셰익스피어의 시구절을 주고받는 (연출된)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2020년 개봉한 영화 ‘노매드랜드(Nomadland: 방랑자의 나라)‘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시를 두 번 인용한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하루하루가 슬금슬금 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어들어 온다.
우리의 모든 어제라는 날들은
어리석은 자들이 티끌로 돌아가는 죽음의 길을 비춰왔구나.
꺼져라, 꺼져. 이 키 작은 촛불이여."
- 셰익스피어, 『맥배스』 5막 5장(Act 5, Scene 5) 맥배스의 독백 중.
어떠한 미인도 언젠가는 그 아름다움이 쇠하리니,
우연히 또는 자연의 변화하는 순리에 따라 아름다움은 그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바래지 않고
그대의 아름다움을 잃는 일 또한 없으며
죽음도 그대가 죽음의 그늘 속을 배회한다고 자랑할 수 없으리라.
이 불멸의 노래 속에서 그대가 자라난다면,
- 셰익스피어 소네트(소곡, 14행시) 18번 부분
이뿐만 아니라 뮤지컬이나 패러디한 연극공연들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즉, ‘내용과 그 내용에 부합하는 형식’일 때의 그 새로운 형식, 그 자체가 그 작가의 또 다른 스타일이나 개성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형식 자체가 바로 작품이다. “형식과 내용은 사랑싸움이다.” 표현이 있듯이 쌍방은 유기적 관계(상호 텍스트)에 놓여있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느라 적막과 마주할 때까지 머물 수 없는 존재들이 되어간다. 한 자리에 머물면서 몰려오는 운명의 그림자들을 바라본다거나 다채로운 시간의 역류 현상을 생각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 불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소비하는 것에 길들여져 손가락 하나, 둘씩 잃어간다. 지문을 잃어간다. 재독철학자 한병철 씨가 말한 ‘소비의 가축(길들여 짐)’화(化)와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지식과 정보는 작가의 독창성과는 하등의 관련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유용성을 제외하고는 작가의 창조성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결국 상호텍스트성(모든 타 예술 장르 포함)은 혼종(混種/Hybrid)과 연결되고 이러한 혼종에서 ‘차이’를 축출해 내는 예술적 방식이다.
상호텍스트성이 작품 발전을 위한 최선의 방식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작가들은 자신들만의 예술을 위하여 상호텍스트성을 창조적으로 수용, ‘차이’를 생산하고 울타리를 확장하는 동시에 내 마음속의 물결들을 총동원하여 끊임없이 출렁거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정익진
1997년 《시와사상》으로 등단했으며 부산작가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구멍의 크기』, 『윗몸일으키기』,『낙타 코끼리 얼룩말』,『스캣』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