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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성과 현실성
- 형이상학(상식),
-- 관념론과 경험론(양식, 각자의 방향),
--- 실재성의 분출(다양체)
우리가 학문들을 분류하기로 하는 것은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하며, 다른 한편 타인들과 터전에 삶에 즐거움을 더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 철학은 인간의 행동에서 훌륭함을 밝혀내고, 규정하고, 다음에도 또한 실행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오랜 옛날에 어떤 이의 훌륭함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어떻게 이어지느냐를 설명하기 어렵기에 학문들의 종류에 빗대어(유비)로 설명하는 방식을 고안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과 행위에 훌륭함을 이루기 위해서, 물론 ‘잘 먹고, 짤 싸고, 잘 학습하고, 잘 자고’를 잘 순환해야 한다. 이런 실재적 삶은 누구나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재적이다. 누구나 어디서나 한다는 보편성이, 그럼에도, 인간은 가고, 하늘의 별들은 옛날 현자들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보편성을 하늘로 올렸다고 생각한다.
삶의 보편성이 먼저이고, 삶의 보편성을 편안하고 안락하게하기 위해 보편성의 기준을 찾았을 진데, 잘 학습하는 기본은 오래전부터 물건을 세는 방식을 아는 것이었을 것이고, 이 물건 중에 물(술)과 곡식(고기)을 잘 계산하는데, 오랜 경험상 산수를 잘해야 하고, 그 계산을 위해 계산기(주판)가 있었다. 그 계산을 일 년의 농사에 맞추어 하는 계산은 산술학으로 잘 안되기에 하늘의 운행에 따른 기하학이 등장했다고 본다. 산술의 실재성은 손가락 발가락으로 대상과 대응해서 계산하는 것인데, 보다 정확성을 위해 자와 되(말)로 세려고 했을 것이고, 토지와 연관하여 자의 길이 측정에서 측지학, 하루, 달, 해, 60갑자를 세는 것은 자가 아니라 콤파스로 행할 수 있다고 여기면서 기하학이 발달했으리라.
우리가 보기에 산술학과 기하학은 실재성이 아니다. 계산과 측지는 실재성이라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두 학문을 구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재성이라고 하고 싶어 하는데, 이 학문과 삶의 적용은 별개의 문제이다. 삶의 적용은 현실성이지 실재성도 아니다.
먼저 그리스 학문 이래로 수학과 논리학은 ‘있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다’의 학문이라 생각한다. ‘있음’, 구체적 현실과 삶의 오래 과정의 실재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 두 학문은 성립된 결과에서 원리와 공리를 찾아내고 이를 통하여, 있음과 관계없이 ‘이다’로서 정립되었다. 물론 토대에서 실재성과 현실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실재성 또는 현실성과 분리되어, ‘이다’의 긴 이야기를 서술해나간 것이, 정말 놀랍게도 기원전 300년경이다. 논리학에 256개의 형식들이 있듯이, 기하학에는 점에서 도형까지 13권으로 되어 있다.
신학은 이런 학문적 구별이 있고 나서야 도래한 것이지, 그 이전에는 영웅의 이야기를 신들의 이야기로 전승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오래 전승되기 위해, 이야기 속에 지혜와 지식을 보존하고 기억하게 하는 효과를 심었다. 그래서 어린애들에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달달 외우게 하고, 성년이 되는 시기에 그 이야기 속의 용어들이 현실에서 어떤 대상과 연관이 있고, 나아가 오랜 삶의 과정의 실재성을 표현하는 방식을 깨닫게 되면서 출세간(出世間)하여 세상사에 나서는 것이었다. 기하학과 논리학의 성립 이후에야, 철학사에서 신의 용어가 개념화하는 데는 거의 600여년이 걸렸다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하게도 또는 황홀하게도 그리스가 흥미로운 것은, 실재성과 가상성이라는 이런 구체적 구별을 분류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학문의 달발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수 계산과 산술학, 토지측정과 기하학, 하늘의 운행과 천문학, 논쟁술과 논리학, 지식의 축적을 위한 논변술과 변증론 등으로 학문이 제 자리를 잡는 것은 언어 표현방식의 정확성과 기호의 다양한 표현방식의 간략하게 체계화함에 있다. 적은 양으로 많은 정보를 후세에 전달하는 경제성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일반화와 추상화의 길을 찾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먹고, 일하고, 싸고, 자는 삶의 과정의 일반화는 학문의 일반화와 추상화의 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전자의 일반화와 추상화가 삶의 편리, 유용, 편안에 주는 이익과 잉여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탐만치에 빠지지 말자고 하는 구호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시기였다.
그런데 거의 완전한 체계를 가진 기하학과 논리학의 도형들과 문장들이 현실에서 적용과 이용가능하다고 해서 문장과 도형이 현실성도 실재성도 아니라고 여기는 정확한 논증은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이루어진다. 그래서 고대 철학자들은 논리의 용어(항목)들이나 수학의 점, 선들이라는 것이 실재성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적용하는 현실의 터전과 평면은 가상이라고 했다. 고대에서는 철학적으로서 실재성이란 완전과 불변을 토대로 하는 항목 또는 용어들이었다. 이것들을 실재성이라고 하기 이전에, 이미 항상 있었고 있고 있을 것이라고 ‘존재’라고 하는 부정형의 동사를 썼다고 한다. - 서양어의 철학적 난점을 일으킨 것 중의 하나는 동사, “에이나이(그리스), 에세(라틴), 에뜨르(불어), 비(영), 자인(독어)”이 정해지지 않은 형태로 있고, 그 동사들이 문장의 주어들에 따라 다르고(이건 별로이지만), 시간에 따라서(과거, 현재, 미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수동과 능동), 게다가 인간의 의도와 감정에 따라(조건문과 접속법) 달리 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쓰는 경우에 ‘있다’와 ‘이다’가 혼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이것은 책상이다’와 ‘사람이 있다’는 전혀 다른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이다(에뜨르)’의 용법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이다’는 지시이고 후자의 ‘있다’. 사물의 현존을 표현한다고 한다. 그러데 이런 두 문장의 각각 내적 표현이 서로 다르다고 하면, 언어학적으로 하나는 지시표현이고 다른 하는 발언자의 표명일 뿐이다. 대상에 대한 것과 연관 없이 발언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간단히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라고 하거나 그리스사람이라고 하는 발언은 소크라테스가 “현존”하고 있지 않는 경우이다. 그러면 이 발언에서 소크라테스라는 대상이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라는 입말을 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연관 또는 이미 기억적 관련이 있어야만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발언자의 의미 또는 의도를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논리적 ‘이다’와 존재론적이라는 문장의 ‘있다’는 현실적인 실재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철학사적 고민이 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 사이에서 이미 있었다. 그러나 상식(다섯 감관, 5관)을 통한 지식에서서 우기는 사람 또는 신을 믿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다. 있다는 있는 거야.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만난 것은 우기는 인간이, 신과 신화를 믿는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인식을 찾을 수 있는 인간이 되자고 한 것이다. 상식은 신학이 성립시기에도, 그리고 종교의 탈을 쓰고 계속되었으나, 11세기에 그리스 문헌을 읽던 수도사들이 항목과 용어가 실재하는 대상이 없는 것에 대해 보편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 이의제기를 하였다. 보편자논쟁이다. 그 시대도 상식의 지배여서 항목과 용어가 아니라하더라도, 일반화의 “개념”은 대상이 있을 수 있다로 마무리된다.
코페르니코스의 지동설과 갈릴레이의 상대성으로 지구상에서 현실에 대한 실재적인 자연을 다루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 노력을 철학으로 전개한 것이 데카르트인데, 그는 상식에서 벗어났지만 양식(일방향)으로 사유전개가 무한하게 전개한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즉 무한이 실재하는 것처럼 사유했다. 그 사유는 실재성을 사유한다고 양식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 무한이 실재성인지 관념성인지에 대한 성찰은 다음 시대로 미루어졌다. 그래서 영혼(정신)이 무한히 사유한다는 것에 대해, 그 무한의 무한이라는 무한의 한계를 넘어가지 않았다. 19세기말에 한계를 넘어선 무한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이 나와야 무한은 실재성이 아닐지도 모르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고대에서 관념(이데아든 에이도스든)의 실재성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현실에서 실재성을 찾는 노력을 데카르트 이래로 200여년을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현실의 생성과 창조는 다른 몫이었다. 현실적인 것이 실재적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은 이는 아마도 헤겔일 것이고, 그것을 생물학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보았다. 그의 역사에서는 신석기, 구석기 등에 이르지 못했다. 그럼에도 역사의 실재성은 과거의 중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변증법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로부터 현재로 또 미래로 지양하여 올라간다. 현실성은 지양에서 부정되었던 것을 포함하여 올라간다. 그 부정되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역사적 사실에서 보다 의식의 발전에서 찾았면서, 부정(알려지지 않았지만)이 중첩되고 이어져서 생물학적이고 심리학적으로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다루는 시기는 헤겔의 사후의 일이다.
현실성에서 실재성이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말하면, 과거의 일이 아직도 현재 속에 영향을 계속해서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거가 어디까지인가? 철학하는 이들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역사)를 과거로 삼을 것인가? 아담과 이브를, 신석기 인간을, 구석기 인간을, 크로마뇽인 인간을 등등으로 거의 무한 소급 할 수 있을까? 실재성의 근거가 무엇인가? 과거를 현재에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실재로 무엇을 말하는가? 역사처럼 현재에 미치는 영향일까?
여기서 다시 질료의 이야기가 제기된다. 질료는 무엇으로 되어있는가? 시간적으로 무한소급해서 올라가서 질료는 고정인가 운동인가? 고정이라는 것을 찾는 19세기후반 과학자들은 원자론에 기대를 걸고, 무한정하게 긴 과정들에서 언제인지 잘 모르지만 긴 시간의 흐름에서 찾는 이들은 질료가 흐름이라 본다. 이 양자의 견해는, 간단한 대상으로 빛을 문제 삼아 논쟁하고 있었다. 한쪽은 입자라고, 다른 쪽은 파동이라 한다. 둘 다를 겹쳐서 설명하는 쪽이 광양자인 셈이다. 어째거나 이런 설명은 상식(5관)을 넘어섰고, 그리고 데카르트 이래로 양식(일방향)도 넘어서서 양방향을 인정하는 거 같지만, 다방향 또는 솟아남(창발)이라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실재성이란, 역사처럼 과거를 포함하는 중첩성도 문제이지만, 생물학과 유전학이래로 생명의 역사는 35억년이라고 하는데, 그 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한 생명체 속에 과거의 총체가 들어있다고 하면, 35년을 따라갈 수 없음에도 35억년을 말하는 것이 부조리 또는 파라독사에 빠진 것처럼 험담한다. 지구가 45억년 역사라는 것은 우라늄의 반감기를 통해서 안다. 우리 몸속의 세포 속에는 미토콘드리아 있다는 것은 적어도 식물세포와 동물세포가 공동의 현존으로서 공생하며 살고 있는 것은 20억년 전쯤에서부터 지금까지 현존하는 척추동물에서 실재성이 있다.
인간과학에서 역사학의 중첩과 달리, 생명체 역사는 지구 45억년 역사만큼은 아니지만 35억년의 실재성을 내장하고 있다. 심리학에서 실재성이라고 할 때, 이런 과거의 긴 과정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기억의 총체성을 실재성이라 부른다. 현실적으로 신체의 활동,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실재성이라고 하지 않고 현실성이라 부른다. 현실성은 긴 과정의 가장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은 현실성이다.
이제 실재성이란, 철학의 통시적 관점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실재성은 상층의 이데아, 에이도스, 신, 천국이 실재성이라 불렀다. 그 여파는 철학사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요즘의 신실재론의 이야기도 여기에 영향을 입고 있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래로 이런 실재성은 이상성(관념성)으로 밀려나고 경험하는 사물들 속에서 실재성을 찾았다. 이 때 존재론이나 형이상학이라 것은 논리와 원리의 추구였다(상식의 시대). 근대 과학의 발달은 현실 속에서 동일반복을 하는 법칙을 찾았다(양식의 시대). 근대 철학은 두 방향에서 진리의 불변을 다룬다고 하는 관념론 방향과 현실의 실재성을 다룬다고 하는 경험론으로 구분한다. 그 중에서 경험론은 귀납적 법칙을 발견하고, 여러 물체들을 인간에게 편리하고 이롭게 하는 법칙을 발견했지만, 경험론이 법칙을 발견하고 수식화는 찰나에 이미 관념론의 밥이 되었다. 현대의 신실재론이 누구의 침을 발라서 글을 쓰고 있는지를 잘 들여다보면 그 현실성이 실재성인지, 실재성의 단면인지를 알 수 있다. 단면을 실재성으로 파악하여 신실재론이라 부른다면, 또다시 관념론의 실재성의 밥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의 또는 휠레의 실재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물어 들어가는 것이 1830년대 이후이다. 이 시기에도 과거의 상식과 양식에 벗어나지 못한 과학론자들은 물질이 흐름이 아니라 입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사고의 끝에는 영혼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해보라고 하면 잘 드러날 것이다. 영혼도 원자들로 되어있다고 할 것이다. 그것들이 움직이는 허공은 무엇인가? 물질인가 관념으로서 공간인가? 그들은 여기까지가지 가지 않고, 물체들을 설명하는데 실제로(실재성이 아니라 현실로) 편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유의 기원으로 가면, 움직이지 않은 어떤 것을 설정할 수 밖에 없는 전제들의 전제를 선가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그 물질도 기원에는 정지가 있다는 것이고, 그 탐구를 계속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질이 입자로 보는 입장은 고대철학의 상층의 정지 사고에서 매여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실재성을 파악하는 것이 아리나, 실재성에서 재현된 또는 표상된 것을 다룬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물체이지 물질(휠레)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면 흐름으로 다른 쪽은 무엇인가? 자연은 끊임없이 흐르고 물질도 흐르는데, 그 흐름의 불연속적 과정에서, 끊어진 단면에서 또는 잘라내는(분석하는) 의식에서, 물체(corps)의 형성 또는 재현도 있다. 끊어진 것을 다루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다룬다는 것은 생명체는 그 과정을 생명체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혼을 생각해보라, 영혼은 바깥에서 오거나 아톰의 조립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나긴 과정의 끊어짐 없이 연속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상식과 양식이 영혼은 바깥에서 안으로 불러들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바깥의 완전하고 영원한 신과 동격으로 놓고자 하는 인간 지식의 오만이다.
물체의 재현 속에서도 오랜 과정의 이어짐이 있고, 그 과정의 총체를 의식 또는 영혼이라 부른다(정신은 관념을 다루는 기능인 셈이다). 이런 의식(프쉬케)이 자연 총체에서 나왔다. 이점에서 외부의 신이 아니라 자연의 자기 과정이 신이다. 그 신은 아직도 자기 모습을 만들지 못했거나 아직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 자연 총체가 흐름이며 실재성이고, 그 흐름에서 물체 또는 우리 신체로 구분된 것을 다루는 것, 그것은 현실성의 표상 또는 겉보기라 한다. 현실성에는 이중성 또는 다양성이 있다. 또는 다양체이다.
이중성으로 보면 하나는 심층에서 생성하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형상을 닮은 표상을 재현하는 것이 있다. 재현에서 형상보다 작은 이데아보다 작지만 보이지 않은 원자들 같은 것들이 재현하다고 하는 가정이 있는데, 그 가정의 선전제가 부동이며, 이 부동의 사고는 기나긴 소급에서 결국 부동의 원동자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런 부동의 원동자에 의한 자연의 설명이, 인간들 사이의 역사, 사회, 정치, 언어학(논리학이 아니라) 등에서 자기 불합리(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 악순환)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생성은 무엇인가? 표상처럼 습관적 동일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이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 모든 일들은 거의 새로운 것을 변형된 것을 만들어내는 노력들로 이어져 있다. 잘 만드는 노력이 훌륭한 것이다. 인민 속에서 이루지는 노력이다.
왜, 인간관계에서 인민이 최종심급이며 모든 최고권은 인민에서 나온다고 하느냐? 인민은 고정된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 자체에서 생성 변화한다. 인간은 훌륭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 삶의 지혜는 고정된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인간의 지위를 찾는 것이다. 최종심급 뿐만이 아니라 토대의 주도권도 인민에게 있다.
철학사 속에서 실재성의 개념 정립에 대해 크게 보아 거의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그때 마다 다시 상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 때문일 것이다. 고대에서 부동의 원리로 돌아가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신이나 황제에 대한 믿음과 탐만치에 빠진 것이라 보았다. 근대에서 양식을 통한 정신(영혼이 아니다)이 주도하는 것으로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오만과 파라노이아(광기)에 가깝다. 두 번의 대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양식의 일방향(파랭이)가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기심을 통한 잉여 착취의 놀음(투기)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울나라 현재 판검사와 언론 등의 윤정부도 탐만치에 빠져 있는 것은 같은 길위에 있다. 과거 역사에서 청백리를 말하는 듯이 탐만치에 빠진 자들을 사악하다고 하지 않고, 그저 잉여를 못먹는 놈이 바보라고 떠들고 있다. 이들이 사고에는 다른 방향 또는 여러 방향이라 것이 악의 축이라고 한다. 거꾸로 그 광기에 빠진 것이 사악하고, 다양체를 만드는 것이 훌륭한 일이다.
신들과 신앙을 믿는 자들에게 질료의 실재성이 흐름이란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간단히 시골에서만 살아온 농부에게 지구가 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거의 같다. 다섯 살 아이 산타클로스 할배를 믿는 것은 당연하다. 청소년기에 신을 믿는 것도 당연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꼬마가 산타가 아니라 부모라는 것을 알게 되고,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나긴 흐름에서 누구나 자기 영혼(자아)을 만드는 노력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열여덟이라 한다. 루소가 자연(본성)을 찾는 시기를 말하였듯이, 열여덟에는 세상을 달리 사유하는데 그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이 인민의 성장을 이끌고 세계를 변혁시키는 혁명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4:23 56SLHI, 5:30S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