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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12권을 차례로 요약 정리하여 올립니다. 고병권님의 글이 워낙 깔끔하고 읽기 쉬우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 시리즈를 요약한다는게 오히려 작가의 글을 더 어지럽게 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독서 후 정리라는 저의 작업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우려를 무릅쓰고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 10권 『자본의 재생산』
1. 자본의 생애는 반복된다
○ 재생산의 관점에서 본 자본의 정체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지출한 돈이 되돌아옴. 돈을 써서 돈을 버는 것. 자본이란 이처럼 더 많은 돈(잉여가치)을 벌기 위해 투자된 돈. 이 운동에는 반복의 계기가 들어 있음. 도달점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고 목적은 수단이 될 수 있음
증식운동을 반복함으로써 자본은 번성함. 이처럼 자본은 ‘가치를 증식해가는 가치’. 자본이 자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자본으로 생산한다는 뜻
『자본』 제1편에서는 자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적 준비를 했고(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부’에 대한 독특한 관념으로서 ‘가치’ 개념을 배움), 제2편에서는 자본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했고(가치를 증식시키는 가치, 잉여가치를 낳는 가치), 이렇게 정식화된 자본이 노동력이라는 독특한 상품 덕분에 현실화될 수 있다는 것도 봄. 제3편과 제4편에서는 잉여가치가 실제로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살폈고, 제5편에서는 노동력의 가치와 잉여가치의 상대적 크기를 변동시키는 다양한 경우를 검토했으며, 제6편에서는 노동력의 가치가 임금의 형태를 취할 때 생기는 문제들도 보았음
제7편에서 주목하는 것은 ‘생산’이 아니라 ‘생산의 반복’. 제6편까지 ‘자본은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자본은 어떻게 자신을 자본으로 생산하는가’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제7편에서는 이 물음에 ‘다시’라는 말을 넣어, 자본은 어떻게 ‘다시’ 자신을 자본으로 생산하는가 하는 자본의 ‘재생산’(Reproduktion)을 다룸. 그래서 제7편의 제목은 ‘자본의 증식과정’이 아니라 ‘자본의 축적과정’. ‘축적’(Akkumulation)은 ‘반복’과 관련됨. 증식이 반복되었을 때 축적이 일어남. 축적은 반복 즉 재생산(확대재생산)의 결과
○ 자본의 운동은 자본의 재생산을 위한 것
자본의 운동을 요약하면, “자본으로서 기능할 가치량의 첫번째 운동은 일정량의 화폐가 시장즉 유통영역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으로 전환되는것. 두 번째 단계인 생산과정은 생산수단이 상품으로 전환 즉시 끝남. 이 상품의 가치는 자신을 구성하는 부분들의 가치를 넘어섬. 즉 처음투하된 자본에 잉여가치를 더한 만큼을 담고 있음. 그다음에는 이 상품들이 다시 유통영역에 투입 판매되어 그 가치를 화폐로 실현하고, 화폐는 새로운 자본으로 전환되며, 이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어야[갱신되어야] 함. 언제나 동일한 순차적 단계들을 거치는 이러한 순환이 자본의 유통을 이룸.”
순환들로 이루어진 ‘자본의유통’은 생산과구분되는유통이 아니라 이들을 포괄하는 순환들로 이루어진 자본의 생애를 가리킴. 자본의 생산은 처음부터 재생산이었던 것
자본은 자본인 한에서 이런 순환을 반복. 자본의 운동은 크게 보면 세 과정의 통일. 생산수단 및 살아있는 노동력을 구매하는 과정 즉 화폐가 상품으로 전환되는 과정, 그리고 상품을 생산하면서 가치를 생산하는 과정(가치의 보존과 증식), 마지막으로 상품의 판매를 통해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 즉 상품이 다시 화폐로 전환되는 과정
첫 번째 과정에서 자본가는 구매자이고(유통영역), 두 번째 과정에서는 생산자이며(생산영역), 세 번째 과정에서는 판매자임(유통영역)
자본은 독립적으로 보이는 이 세 과정을 매끄럽게 연결할 수 있을 때, 즉 세 과정의 “통일성을 입증”할 수 있을 때만 자본으로서 재생산될 수 있으며, 이 입증에 실패하면 자본은 자본이기를 멈추고 공황이 닥침
자본가는 생산물을 판매해야 하며, 여기에 문제가 생기면 자본의 순환은 그걸로 끝임. 즉 유통과정은 자본이 다시 자본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단계. 따라서 재생산의 구체적 조건을 해명하려면 유통과정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필수적. 그러나 I권 제7편에서는 다만 자본이 “유통과정을 정상적 방식으로 통과한다는 것을 전제”로 재생산을 가치의 생산(증식)이 반복되는 것으로만 단순화해서 살핌
제7편에서는 재생산의 조건들을 상세히 분석하지 않고, 단지 자본이 재생산된다는 사실을 중요시. 즉 재생산을 분석하는 게 아니라 재생산의 관점에서 ‘생산’을 바라봄
재생산의 관점에서 ‘자본의 생산’을 본다면, 즉 자본의 생산이 자본의 유통·분배와 맞물려 있는 순환의 한 마디이며 무엇보다 이 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자본의 생산과정은 어떻게 보이는가. “사태는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개별성이나 우연성에 가려 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체가 폭로되기도 하고, 한 번만 보아서는 알 수 없었던 자본주의적 생산의 어떤 경향이 포착되기도 함. 재생산의 관점에서 자본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이번 책의 주제
2. 사라지는 가상들, 드러나는 자본의 정체
○ 생산과정은 재생산과정이기도 하다
“그저 생산과정이 동일한 규모로 반복된다”고, 즉 ‘단순재생산’만 고려해도 “생산과정에는 어떤 새로운 성격이 각인”되며, 이 과정의 “외견상의 성격이 해소”됨. 단순재생산만 고려해도 ‘보이는 대로 믿게 되는’ 오류에서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음. 그것이 외견상으로만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사태는 달라 보임
제7편 제21장의 첫 문장 “생산과정의 사회적 형태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연속적이어야 하며, 달리 말하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갱신되는] 동일한 단계들을 주기적으로 통과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연속적 연관과 끊임없는 갱신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다면 모든 사회적 생산과정은 동시에 재생산과정이기도 하다”
재생산은 자본주의에 한정하지 않고 모든 생산 형태에 적용되는 문제. 어떤 사회에서든 재생산을 위해서는 생산수단과 생산자인 인간의 충원이 필요. 재생산이 이루어지려면 이런 생산재를 ‘현물 형태’로 생산해두어야 함. ‘생산재’는 생산용 소비재
생산과정에는 생산하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이 필요. 이들의 생명력 또한 충전되어야 함. 이들이 생산물을 소비하는 것을 ‘생산적 소비’와 대비해 ‘개인적 소비’라고 함
한 사회의 연간생산물에는 한 해 동안 사회구성원들이 먹고 입을 만큼의 생산물 또한 현물로 존재해야 함. 즉 ‘소비용 소비재’가 있어야 함. 이를 보통 ‘소비재’라 부름
소비재의 양은 노동하는 인간집단의 규모보다 더 커야 함. 구성원들 중에는 노동할 수없는 사람들이 있고,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도 생산물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 독립성의 가상이 사라지다
자본주의에서도 ‘생산적소비’와 ‘개인적소비’를 위한 현물 충전이 이루어져야 함. 차이가있다면 자본주의에서는 현물의 생산이면서 또한 가치의 생산이라는점. 따라서 자본주의적 재생산과정은‘소재충전’(소재보충)만이 아니라‘가치충전’도 고찰되어야함
자본주의적 재생산 전체, 즉 개별자본이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을 표현하려면 유통과정까지 포함하는 정식이 필요
이 정식은 단순재생산을 표현한 것. 투입물(W′)과 산출물(W′)의 양이 같음. 이 정식에 따르면 연간 총생산물(W′) 중 일부는 생산수단으로서 자본의 생산과정에 투입되고 (G—W), 일부는 생활수단으로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g-w)에 사용됨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을 보여주는 이 정식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할 수 없었던 재생산의 조건 하나를 보여줌. 전체 생산물(W′)의 일정량은 반드시 생산수단(생산재)(G—W)이어야 하고 또 일정량은 반드시 소비수단(소비재)(g—w)이어야 한다는 것
생산수단 생산량과 소비수단 생산량의 비례관계가 깨질 때 공황이 발생. 재생산을 위해서는 둘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유지되어야만 하는 점 확인. 전혀 다른 산업부문의 생산이 일정한 비율로 서로 맞물려 있어야 함. 생산만이 아니라 소비도 그러함. 생산수단의소비는 생산과정에서 일어나지만 소비수단의소비는 유통과정에서 일어남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의 유통, 상품들의 생산, 노동자(임금)와 자본가(잉여가치)의 소비가 깊이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자본의 생산과정 그 하나를 다루더라도 유통과정까지 전체가 함께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함. 하나의 생산은 전체의 재생산 속에 있으며, 순차적으로 살핀 과정들은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들이었던 것. 재생산의 관점을 통해 처음부터 모든 것이 ‘사회적 생산의 앙상블’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됨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체 그림을 그리면서 이 점을 명시 “우리가 도달한 결과는 생산·분배·교환 및 소비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하나의 총체성의 기관들, 하나의 통일성(단일성)의 내적 구별들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을 고려하는 순간 바로 독립성의 가상이 제거됨
○ ‘자본가가 지불자’라는 가상이 사라지다
재생산의 관점에서 자본의 생산을 바라볼 때 또 하나의 중요한 가상, 바로 자본가가 노동력에 대한 지불자라는 가상이 사라짐
노동자는 자본가가 자신에게 지불한 가치를 생산물의 가치에 담기 때문에 생산물의 가치에는 노동력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기에 생산물을 판매하는 순간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불했던 임금을 돌려받음.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입하기 위해 들고 온 돈이 실제로는 노동자가 노동력의 값으로 생산해서 건네준 것이라는 말
“오늘 또는 다음 반년 동안 그의 노동에 대해 지불되는 것은 바로 지난주 또는 지난 반년 동안 수행된 그의 노동이다.”
외견상으로는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만 실제로는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임금을 자본가를 통해 받는 것. 즉 자기가 생산한 것을 자기가 지급받는 것. 계급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하게 보임.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지불자
이것이 자본주의. 일종의 시각적 기만. 물신주의가 그렇듯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유지되는 한 이런 기만과 전도가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 없음
노동자는 자신이 자기 몫으로 생산해낸 것을 돌려받으면서도, 게다가 자본가의 몫까지 생산해주었는데도, 자본가에게 “내 덕분에 먹고사는 줄 알”라는 말을 들어야함
○ 등가교환의 가상이 사라지다
재생산을 고려함으로써 가변자본만이 아니라 자본 전체가 다르게 보임. 자본의 재생산을 고려하면, 자본가가 손에 쥔 자본의 성격은 어느덧 새롭게 변해 있음
자본의 정체는 자본가가 처음 손에 들고 온 그 돈이 아니고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 자본의 증식분 즉 잉여가치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것. 새로 늘어난 부분, 새로 증식한 부분만이 아니라, 기존에 쥐고 있던 부분도 어느덧 성격이 변했다는 것. 전혀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단순재생산만 반복한다 해도, 자본의 성격은 변함. 설령 처음의 자본이 자본가의 피땀이라고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자신의 피땀은 사라진 지 오래고, 남은 것은 남의 피땀 즉 노동자의 피땀인 것
단순재생산이든 확대재생산이든, 재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가가 들고 있는 자본은 모두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 노동자로부터 짜낸 것. 그것도 아무런 지불 없이 취한 불불노동. 즉 “등가물 없이 취득한 가치 내지 지불하지 않은 타인의 노동”
‘증식하는가치’인 자본이 가능하려면 가치증식을 가능케하는 상품, 잉여가치를낳는 노동력이 필요. 이처럼 “노동생산물과 노동 자체의 분리, 객체적 노동조건들과 주체적노동력의 분리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실질적으로 주어진 토대이자 출발점”
자본의생산이 반복되면 언제부턴가 자본가가 들고 온 돈의 성격이 바뀌어 구매자로서 그가 들고있는 돈은 그동안 노동자로부터 ‘등가물 없이 취득한 가치’인 ‘불불노동’
재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력에 대한 등가교환은 단지 외관이고,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교환의 관계가 단지 유통과정에 속하는 가상이라는 것(외관에 불과하다는 것), 내용과는 거리가 먼, 단지 내용을 신비화할 뿐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등가로 지불한다 해도 기본적으로는 ‘착취’인 것
3. 드러나는 계급관계
○ 자본의 재생산은 노동자의 재생산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노동일의 길이를 늘이고 노동생산력을 높이려는 개별 자본가들의 노력은 자본 일반 즉 사회적 총자본의 증식에도 기여
자본의 재생산이란 자본을 가능케 하는 노동력의 재생산이기도 함. 이것은 자본의 인격적 담지자로서 자본가와 노동력의 인격적 담지자로서 노동자의 재생산을 의미
만약 자본의 재생산을 주체성의 재생산이라는 점에서 접근한다면 우리는 재생산의 조건들이 경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자유로운 교환의 가상이 사라지다
노동력(노동력의 사용권)을 판매한 순간부터, “과정[생산과정]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노동자의 노동은 노동자 자신으로부터 소외”됨. 노동력 사용권이 자본가에게 있는 한 생산과정이란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의 소비과정. 상품으로서 노동력이 있을 뿐. 인간이 일하고 있다 해도 실제로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노동자는 끊임없이 생산물을 만들어내나 이 생산물은 모두 자본가의 것
자본의 재생산은 노동자가 자신을 지배하고 착취할 자본을 계속 생산하고(소외된노동의 반복), 자본가는 그런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서 노동자를 계속 생산한다는 뜻
마르크스는 이것을 생산영역과 유통영역에서 함께 발견. 겉보기에 두 영역은 다름. 노동자에게 생산적 소비(노동)의 시간이 ‘자본가의 삶’을 생산하는 시간이라면 개인적 소비의시간은 ‘노동자 자신의삶’을 생산하는시간. 그렇지만 재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 시간은 부(자본)의 ‘주체적 원천’인 노동자를 생산하는 시간. 총자본의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매우 생산적인 소비
○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도 노동자는 생산한다
마르크스는 씁쓸한 진실을 일깨워줌 “일하는 짐승이 스스로 좋아서 먹이를 먹는다고 해서 그 소비가 생산과정의 한 필수적 계기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노동자는 자기 몸을 알아서 돌봄. 자본가는 노동자계급의 유지와 재생산을 “노동자의 자기유지 본능과 생식 본능에 안심하고 맡”김. 자본가는 한번의 지불로 잉여가치도얻고 노동력의 재생산을 노동자에게 맡겨놓음으로써 노동력도얻으니까‘일석이조’
마르크스는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의소비에 완전히 관심을끄지는 않는다고 지적. 자본가계급은 건강한 노동력의 생산과 관련해서는 노동자들의 개인적 소비에 일정하게 개입. 그람시는 “미국에서 작업의 합리화와 주류 양조 및 판매의 금지는 의심할 바 없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라고 지적. 그람시에 따르면 생산에서의 테일러주의와 생활에서의 청교도주의가 결합한 배경에는 “노동자들이 돈을 자신의 근육과 신경의 효율성을 유지하고 갱신하며,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증대시키는 데 사용해야지 그 효율성을 부식시키고 파괴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인식이 깔려 있음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력을 생산하는 것 말고도 자본가에게 유익한 점이 또 있음. 개인적 소비가 노동자를 가난하게 만들고, ‘가난’이 자본가의 하수인 역할을 하여 노동자를 다시 자본가에게 끌고 옴. 가난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출현하는 역사적 조건이기도 하고(생산수단을 상실한 인구의 집단적 출현) 노동력의 지속적 공급을 보장하는 현실적 조건이기도 함. 그래서 자본의 재생산에는 가난의 재생산이 필요
요컨대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면서 가난을 재생산. 노동자들은 소비를 통해 가난해지고 다시 맨 몸뚱이로 자본가 앞에 설 수밖에 없음
임금이란 말뚝에 매어놓은 줄과 같음. 일하는 짐승에게 여기저기 풀을 뜯을 수 있는 여유를 주지만 줄을 반경으로 하는 원 안의 풀을 다 뜯고 나면 별수 없이 또 일하러 가야 함. 그래야만 주인이 풀 있는 곳으로 말뚝을 옮겨줄 테니
재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력의 자유로운 판매자라는 말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알 수 있음. “로마의 노예는 쇠사슬로 자기 소유주에게 묶여 있었으나 임금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그 소유주에게 묶여 있다. 임금노동자의 자립성의 가상은 개인적인 고용주의 지속적 교체와 계약이라는 법적 허구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 최선의 세팅-노동자계급은 자본의 부속물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계급은 직접적 노동과정 외부에 있을 때도 죽은 노동도구들처럼 자본의 부속물(Zubehör)”
자유로운 이동은 근대 시민의 기본 권리. 자본가들은 이 권리를 옹호하며 농촌에서 노동력을 뽑아냄.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이동을 규제
맨체스터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에드먼드 포터가 1863년 『타임스』에 기고한 편지.
그는 노동자들이 이민의 희망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노동자들이 떠나감으로써 “면방직업이 축소되도록 압박한다면 노동자 바로 위 계급인 소상인은 어떻게 되겠는가. 지대는 어떻게 되고 집세는 어떻게 되겠는가. 소규모 차지농업가 그리고 그보다 조금 생활이 나은 주택소유자(주택임대업자)와 지주는 어떻게 되겠는가?”
강자에게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약자에게 좀 더 희생하라는 말
『타임스』는 논설을 통해 포터가 노동자계급을 ‘거대한 도덕적 구빈원’에 가두려 한다고 비난했지만, 실상은 자본주의사회 자체가 거대한 구빈원. 포터는 기고를 통해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주권을 확인했고 영국의 ‘위대한 여론’은 이를 추인
자본주의사회란 자본이 주권자인 사회이고 자본의 축적을 위해 최선의 방식으로 세팅된 사회. 노동자는 이 세팅의 한 요소, 한 부속물인 것에 불과
○ 자본의 재생산은 자본관계의 재생산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보면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정말로 효과적. “스스로의 진행을 통해” 재생산을 도움. “노동자에게는 살기 위해 계속해서 노동력을 팔 것을 강요하고, 자본가에게는 부유해지기 위해 노동력을 계속해서 구매할 수 있도록 만들어”줌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한 지불자가 아니며, 더 나아가 자본 자체가 지불 없이 취한 노동, 즉 등가교환 없이 취한 노동임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을 생각하면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판매하는 일이 노동자로서 벗어나기어려운 운명이며, 이 운명은 노동자 한 사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운명이고, 한 세대 노동자가 아니라 전 세대 노동자에 걸친 운명이라는것을 알수있음
노동자가 노동력을 팔기 위해 시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제 그가 공장에서 생산했기 때문. 오늘 노동자는 어제 노동자의 자식. 부모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로서 자식 노동자의 노동력을 생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노동자는 자신을 자본가에게 판매하기 전부터 이미 자본에 귀속되어 있었”으니까
이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관한 중요한 결론 하나가 도출됨. “[전체적] 연관 속에서, 즉 재생산과정으로서 고찰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상품이나 잉여가치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관계(Kapitalverhältnis) 자체를, 즉 한편에는 자본가를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임금노동자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4. 자본가는 축적을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 잉여가치는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부합하는 일반적 모델은 생산된 잉여가치가 투자한 자본과 결합하여 더 큰 규모의 자본이 되는 것. 즉 단순재생산이 아니라 확대재생산. 자본의 확대재생산 즉 자본축적은 잉여가치가 자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됨
그런데 잉여가치가 추가자본으로 변신하려면 추가분의 생산수단(면화와 방추)과 노동력이 필요, 확대재생산을 위해서는 마치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시장에 추가분의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나와 있어야 함. 신기하게도 사회의 전년도 연간 생산물에는 그가 필요로 하는 추가분의 생산물이 들어 있음
그러나 언제나 성립하는 건 아님. 이따금 공급과 수요가 어긋날 수 있으며, 그러면 문제가 생기고 그 갭의 규모가 클 경우 공황이 발발.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이 계속 유지되고 재생산되고 있다면, 그래서 자본축적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개별 자본가는 별 문제 없이 시장에서 추가분의 생산수단을 발견할 수 있음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작년 연간 생산물 속에 올해 생산에 필요한 추가 생산물이 들어 있다는 뜻. 재생산을 위해서는 총생산물의 구성(Zusammensetzung)이 중요. 각 생산부문에 필요한 만큼의 추가생산물이 생산되어 있어야 하니까
잉여생산물이 생겼다고 모두 자본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고, “노동과정에서 사용될 물건들인 생산수단과 장차 노동자의 생활유지에 사용될 물건들인 생활수단”만이 자본이 될 수 있음. 자본가계급이 먹는 것은 다음번 자본생산에 사용될 생산물은 아님
새로운 자본을 예비하는 생산물들이 실제로 자본이 되려면 노동과 결합해야 함
자본주의적 생산 메커니즘은 상품생산 메커니즘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생산 메커니즘. 임금만 지급하면 노동자는 스스로 알아서 자신에게 기름칠하고 아이들을 길러냄. 능력만 생산하는 게 아니라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인 가난도 재생산
자본가는 매년 공급되는 추가 노동력을 생산수단과 결합하기만 하면 됨. 여기까지 성공했을 때 잉여가치는 비로소 자본이 됨. 작년 연간 총생산물에 올해 새로운 자본을 얻는 데 필요한 추가 생산수단이 들어 있고 추가 노동력을 위한 추가 생활수단이 들어 있으며, 자본가가 기존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의 일부로 추가 노동력을 구입해 생산수단에 결합할 수 있을 때 잉여가치는 자본으로 변신
○ ‘타인의 노동력’ 소유를 통한 잉여가치의 사유화
잉여가치를 자본화하는 핵심은 추가노동력의 구입. 이전 해에 생산된 잉여가치(불불노동)로 현재의 노동에서 불불노동을 취할수있다면 자본의 확대재생산에 성공한 것
자본주의적 생산 메커니즘은 과거 타인의 불불노동을 소유한 자가 현재 타인의 불불노동을 획득하도록 도움. 즉 확대재생산은 타인의 불불노동에 대한 소유에서 출발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하면서 자기노동의 산물이 아닌 노동자가 생산한 것을 노동자에게 지불함. 더욱이 자본가가 소유한 자본 전체가 타인(노동자)의 불불노동임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취득(소유화) 방식이 본래의(처음의) 상품생산 법칙들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이 법칙의 위반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법칙의 적용에서 생겨난 것이다.”라는 주장. 이를 단계별로살펴보면,
첫 단계는 자본가가 사유재산 가운데 일정액의 가치를 노동력과 교환하는 단계로, 자본가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지키며 노동력의 가치를 제대로 지불. 자본가는 이 거래를 통해 노동력의 사용가치(노동)를 얻어 일정 기간 노동력의 사용권을 가짐
다음 단계는 자본가가 이 노동력을 이용해 상품을 생산하는 단계로, “자신의 것인 생산수단을, 역시 자신의 것이 된 노동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생산물로 변화”시킴. 여기가 중요한데, 생산의 주체가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라는 것
자본가는 자신이 구매한, 즉 자신이 소유권을 가진 노동력을 이용해서 상품을 생산. 이 생산물은 노동자의 생산물이 아니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공동생산물도 아닌 자본가가 자기 소유의 노동력을 이용해 생산한 것으로서, “법적으로 자본가의 것”임
한쪽(자본가)은 계속 자신을 소유자로 재생산하고, 다른 쪽(노동자)은 계속 자신을 노동하는 자로 재생산하지만, 이 과정에서 소유법칙을 어긴 것은 없음
자본의 재생산이란 이 합법적 과정, 즉 노동력의구매(등가교환)와 그 노동력을 이용한 생산물의 합법적 소유를 반복하는 것.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법칙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한 말. 우리에게 나타난 부당성은 합법성의 문제가 아닌 주권의 문제
결국 자본가의 잉여가치 취득(사유화)에서 결정적 기제는 ‘타인 노동력의 소유’. 요컨대 ‘노동력의 상품화’가 자본가의 잉여가치 취득을 정당화해준 핵심 기제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력이 노동자 자신에 의해 상품으로 자유롭게 판매되기 시작하면 이런 결과는 불가피하다.”고 말함
○ 자본축적에 대한 부르주아 경제학의 틀린 생각
마르크스는 자본축적에 대한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잘못된 견해가 현실에서 끼치는 해악을 밝힘. 제1장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가장 잘 부합하는 신앙형태라고, 초기 부르주아지의 신앙과 윤리는 ‘저축하다’(save)가 곧 ‘구원하다’(save). 즉 현세적 부의 축적이 내세적 구원의 표시. 부르주아 경제학은 프로테스탄트 구원론의 다른 판본일 뿐.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의 축적을 시민(부르주아)의 첫 번째 의무로 선포”. 그리고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전체 수입을 다 먹어치우면” 안되고, “비용보다 더 많은것을 가져다주는 생산적 노동자를 모으는데”쓰라고 외침
부르주아 경제학의 첫 번째 비난 대상이 낭비가였다면 다음 비난 대상은 수전노입니다. 수전노의 화폐축장은 자본가의 자본축적과 다릅
부르주아 경제학, 특히 고전파 경제학은 잉여가치를 금고로 빼돌릴 것이 아니라 다시 생산적 노동자에 써야 한다고 주장. 나아가 스미스는 잉여가치를 생산적 노동자의 고용(추가노동력의 가치)과 동일시. “잉여가치의 자본화를 단순히 잉여가치를 노동력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해한 것. 리카도도 ‘자본가가 수입을 절약해서 자본을 추가로 늘릴 때’ 그 추가로 늘어난 부분을 소비하는 것은 ‘생산적 노동자’라고 함. 자본축적은 잉여가치를 생산적 노동자에 투자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잉여가치는 결국 생산적 노동자가 소비하는 것이라는 말
생산수단도 노동생산물이라는 점에서 노동자가 생산한 것이고, 그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생산물로 생산하기 위해 사용한 생산수단도 그 이전 노동자가 생산한 것
그러나 이것은 말이 안 됨. 매년 생산된 잉여가치로 구매하는 것은 그해의 생산물. 연간 생산물의 가치에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음. 다시 말해 자본가가 어떤 생산물을 구매하면 그 생산물을 생산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를 모두 지불한 것. 올해 자본가가 불변자본에 투자한 돈을 작년, 재작년 노동자가 연금 타듯이 또 임금으로 받는 게 아님
황당한 논리를 교묘한 말로 치장해 사태를 모호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뒤바꿔놓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주장
마르크스는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고 보면’ 모든 추가자본(사실은 모든 자본)은 생산적 노동자에게 지급된 것, 바꾸어 말하면 생산적 노동자가 소비한 것이라고 조롱
○ 자본가 또한 자본축적 메커니즘의 톱니바퀴
자본축적은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개인적으로 모두 소비하지 않는다는 전제. 자본가들은 이를 두고 자신이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었다’고, 그렇게 절약하고 저축했다고 말함. 수전노와 달리 자본가는 그렇게 모은 돈을 자본으로 투자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인 한에서만 하나의 역사적 가치와 자신이 사는 때의 역사적 실존의 권리(Existenzrecht)를 갖는다” 자본가는 실제 그렇게 움직이도록 압력을 받는, 자본의 운동에 따라 움직이도록 자본의 운동에 맞게 기능하도록 강요받는존재
수전노의 화폐에 대한 탐욕, 축장에 대한 열망은 ‘개인적 광기’지만, 자본가의 탐욕, 자본가의 열망은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용’. 자본가의 탐욕, 열망, 충동은 자본의 가치증식 운동이 인간적 형태로 표현된 것.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고유한 것
자본가가 겉보기에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일지라도 실상은 개인적으로 어찌하기 힘든 집합적 운명 안에 놓여 있음. 이것이 바로 ‘사회적’이라는 말의 의미
개별 자본가들의 이런 노력 속에서 사회적 총자본의 축적 메커니즘이 작동. 자본주의를 기계시스템으로 본다면 개별 자본가는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셈
자본주의가 그렇듯 자본가의 실존도 역사적으로 생겨나고 역사적으로 사라질 것임. 자본축적을 향한 자본가의 열망이 ‘개인적 광기’가 아니라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용’인 한에서 자본가의 실존 역시 자본주의와 더불어 ‘이행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음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커지는 해체 요인을 찾아내는 것이 마르크스의 방법
“가치증식의 광신자로서 자본가는 가차 없이 인류를 생산을 위한 생산으로 내몰아, 모든 개인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발전을 근본원리로 하는 더 고차적인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일 수 있는 사회적생산력과 물질적생산조건들을 창출하도록 한다.”
자본가들은 자본축적을 위한 톱니바퀴이면서 또한 자본의 죽음 즉 새로운 사회형태로의 이행을 돕는 역사적 톱니바퀴이기도 하다는 것
○ 역사적 권리에는 날짜가 없지 않다
마르크스가 ‘날짜가 있다’라고 말한 것의 맥락은 자본가의 역사적 실존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 자본가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특정한 시기 동안만 존재하고 사라진다는 것. 자본가의 실존의 권리는 자본주의가 그렇듯 일시적인 것, 이행적인 것이라는 뜻
○ 축적의 길은 고행의 길, 자본가는 수도사?
마르크스가 자본가를 단순히 ‘인격화된 자본’이라고 부른 게 아니라, 그런 한에서만 ‘역사적 가치’와 ‘역사적 실존의 권리’를 갖는다고 말한 것은 ‘인격화된 자본’으로 행동하지 않다면 그 자본가는 실존할 수도 없고 역사적으로도 무가치하다는 말
역사적 실존의 권리를 가진 자로서 자본가는 하나의 기계, 하나의 톱니바퀴와 같음. “고전파 경제학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단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기계로 간주되었다면 자본가 또한 이 잉여가치를 추가자본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기계로서 간주될 뿐이다.”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발전하면 생산규모가 개인이 소비를 아껴서 투자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에 자본가 개인의 절욕은 자본축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음. 오히려 은행, 주식, 채권 등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각종 신용제도가 발전하여 자본의 사회적 동원이 가능해짐. 그리고 이러한 제도들 상당수는 투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벼락부자가 많이 나타남
축적 규모가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자본가에게는 사업의 확대를 위한 사교와 접대가 필요. 신용을 얻기 위해서도 적절한 부의 과시가 필요. 일종의 영업비용이 발생
존 에이킨은 이 시기를 ‘사치와 낭비의 시기’라고 부름
그러나 자본가들에게 ‘절약’의 시대는 끝난 것이 아님. 두 가지 의미에서 자본가는 여전히 ‘절약’을 높이 평가. 하나는 그 절약을 노동자에게 요구. 노동자를 더 열심히 일하게 하기 위해 임금을 최저 수준에 묶어두어야 한다고 주장
‘절약’의 또 다른 용법은 축적된 자본의 정당화. 일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잉여가치를 자본가의 ‘절욕’에 대한 보상이라고 주장함. ‘근대적 자본가’는 축적된 자본을 가리켜 자신의 절제에 대한 대가라고 말함. 자본투자 자체를 절욕이라며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 소위 이 ‘절제설’은 부르주아 속류 경제학자들이 급조해낸 계급투쟁의 무기. ‘노동자의 노동’이 아니라 ‘자본가의 절제’가 자본축적을 가능케 했다는 것. 자본축적은 노동자를 착취한 게 아니라 자본가 자신을 착취한 결과라는 말
자본가가 재산을 탕진하고 싶은 욕망을 참으면서, 자본을 축적하는 고행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사회의 재생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 단순재생산은 물론이고 확대재생산까지 가능. 자본가가 없어도, 자본축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한 사회의 성원들이 자신들을 유지하고 생산을 확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
5. 축적은 착취에 달려 있다
○ 착취가 늘어나면 축적이 늘어난다
잉여가치를 최대한 자본으로 전환할때 축적 규모가 커짐. 그러나 축적 규모를 결정하는 훨씬 중요한 요인은 잉여가치생산 자체를 늘리는것, 잉여가치의 절대적크기가 중요. 이는 잉여가치 생산량을 좌우하는 요인이 자본축적 규모에도 관여한다는 뜻
잉여가치 생산량을 좌우하는 첫번째요인은 노동력착취도. 착취도는 노동력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경우. 그래서‘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증대’로 인한 축적 속도의 증가와, ‘노동생산력의 증대’로 인한 축적 속도의 증가를 동일시. 노동생산력을 노동시간 대비 생산물의 양으로 재는게 아니라 노동자에게 지급한 임금 대비 수익으로 재는것. 동일 노동에 대해 적은 임금을 지급했다면 노동생산력이 증대한 것
자본가가 비용 없이 노동력을 구매할 수는 없지만, 그 비용을 낮출수록 큰 이익을 보게 되니 언제나 임금을 최대한 낮추려 함. 산업혁명으로 노동력 수요가 급증하자 영국정부는 정주법(거주지 제한법)을 철폐하면서 농촌 노동자와 빈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스핀햄랜드법을 제정(1795). 지주와 차지농업가가 지급한 임금으로 생계가 불가능하면 교구에서 보조비를 지급. 그러자 자본가들은 임금을 더욱 낮춤. 취지상으로는 빈민 노동자에 대한 생계 지원책이었지만 실제로는 공공재산으로 자본가의 임금 지급을 보조해주는 자본가 지원책. 위원회에서 정하는 최저임금 수준은 갈수록 낮아짐
자본축적이 이 시기에 무서운 속도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노동자들의 생존기금(“노동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소비기금”)을 약탈한 것과 관련. 자본축적만큼이나 빈곤축적, 빈민축적이 무서운 속도로 이루어진 시기
○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왜 빨리 죽는가
자본가는 고용을 늘리지 않고 노동일을 늘리거나, 약간의 할증 임금을 지급하고 ‘시간외노동’을 시키거나, 노동강도를 높이는 식으로 잉여가치 생산량을 늘림. 겉보기에는 임금이 올라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지불 임금에 비해 더 많은 노동을 뽑아 쓰는 방법들. 이용 효율이 높아지기 때문에 불변자본을 절약하는 효과. 특히 이런 효과는 인간(노동)과 자연(토지)이 직접 결합하는 산업들, 이를테면 채취산업(광업)이나 농업 등에서 크게 발휘됨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과 자연은 “부의 두 본원적 생산자”. 이때의 부는 ‘물질적(소재적) 부’. 자본주의에서 축적되는 ‘가치’와는 다른, 사용가치가 풍부한 것
마르크스가 인간과 자연을 부의 ‘본원적 생산자’ 내지 ‘원천’이라고 부른 것은 그 다산성을 지칭하기 위해서. 인간의 능력과 자연의 풍요(비옥함)가 만나면 많은생산물이 쏟아져 나옴.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산의 ‘탄력성’이 아주 큼. 노동력을 조금 더 투입하고 노동도구를 조금만 개량하면 잉여생산물의 양을 크게 늘릴수 있음
자본은 이들의 다산성, 이들이 지닌 능력을 축적에 활용. 마르크스는 자본이 이 둘을 결합해 “팽창력을 획득”한다고 썼음. 인간과 자연의 힘이 지닌 탄력성 덕분에 자본축적에도 탄력성이 붙는다는 것. 투자가 늘면 축적은 그보다 더 많이 늘어나는 식
이는 자본이 인간과 자연을 더욱 닦달하는 이유. 닦달할수록 이 거위들은 황금알을 더 많이 낳으니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바로 이 때문에 빨리 죽음. 인간과 자연의 생산 탄력성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부에 대한 탐욕이 팽창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음. 이런 식으로 닦달해대는 자본주의 아래서 인간과 자연은 머지않아 “더는 무언가를 품고 산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지는 않을까 우려됨
○ 노동생산력 증대는 축적을 가속화한다
잉여가치 생산량을 좌우하는 두번째요인은 ‘사회적노동생산력의 수준’. 전반적으로 노동생산력이 높아지면 (상대적) 잉여가치 생산량이 늘어남. 당연히 자본축적에 유리
사회적 노동생산력이 높아지면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잉여가치율이 높아지는 것이 일반적. 자본은 동일한 돈으로 더 많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고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음. 그건 그만큼 자본축적이 가속된다는 뜻
인간(노동력)과 자연(토지)이 지닌 생산의 탄력성 덕분에 착취도를 조금만 높여도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다고 했는데, 두 번째 요인의 경우에는 ‘과학’과 ‘기술’이 그런 역할을 함. 생산수단의 성능을 개량하고 이용 효율을 높임으로써 불변자본에 들어가는 비용을 크게 절약해 자본축적에 기여하는 것
“단지 노동력의 긴장도를 높이는 것만으로도 자연적 부의 이용이 증가하는 것처럼, 과학과 기술은 현재 기능하고 있는 자본의 크기와 무관한 팽창 능력을 만든다.”
사회 전반에서 노동생산력이 증대하면 이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라는 점에서도 자본축적에 기여하고 불변자본 절약이라는 점에서도 자본축적에 기여하게 됨
그 외에도 자본축적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는데, 동일한 노동이 투입되었다면 새로 생산된 가치 즉 가치생산물(v+m)은 똑같겠지만, 노동생산력 증대로 동일한 노동으로 더 많은 생산수단, 특히 더 많은 원료를 처리하므로, 노동자가 보존하고 이전하는 가치량은 달라짐. 새기계 발명으로 노동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추가 노동력을 추가 투입하지 않고도 과거의 가치를 새로운 생산물로 이전할 수 있었던 것
사물을 살려내고 가치를 보존하고 첨가하는 노동의 마법적 능력이, 노동생산력의 발전, 특히 과학과 기술의 도움으로 더 크게 발휘된 덕분.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이 모든 능력이 자본의 능력으로, 자본의 자기보존 능력, 자본의 힘으로 나타남
○ 규모가 커지면 축적은 탄력을 받는다
마르크스가 세 번째로 언급한 요인은 ‘사용되는’ 자본과 ‘소모되는’ 자본의 차이. 똑같은 생산수단이어도 생산과정에서 원료와 노동수단의 소비 양상이 다르다는 것
자본의규모가 커질수록 고정자본의크기가 커지는데,고정자본은 생산과정에서 몸뚱이 전체를 움직이지만 가치는 부분적으로만 넘김. 대공장의 ‘기계’는 매뉴팩처 작업장에의 ‘도구’보다 훨씬 비싸지만 생산량이 압도적으로 증대하기 때문에 개개 생산물에 이전되는 가치는 훨씬 작음. 이처럼 ‘사용되는’ 자본과 ‘소비되는’ 자본의 차이가 클수록 자본가에게는 햇빛이나 물, 공기 등과 같은 ‘자연력처럼’ 무상으로 느껴짐
이런 고정자본이 갖추어지려면 상당한 정도의 자본축적이 필요한데 일단 갖추어지면 대규모 자본축적을 도움. 물론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과거 노동의 축적임
“과거의 노동은 언제나 자본으로 분장(verkleidet)”한다. 실제로는 과거 노동자들에게 지불하지 않은 노동이 축적된 것인데 분장을 해서 비노동자인 자본가의 재산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 거대한 기계장치,도로,철도,항만, 통신 등등이 모두 그러함
마치 자연력처럼 자본축적에 거의 무상으로 봉사하는 거대 장치나 설비들이 사실은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은 과거 노동이 축적된 것이며,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자본으로서 기능할 이유가 없다는 점. 자본의 규모가 커지면 이런 거대 장치와 설비 등을 갖출 수 있고 이런 게 갖추어지면 축적의 규모는 더욱 증가
마지막, 네번째요인은 ‘투하 자본의 크기’. 투자 자본이 커지면 생산규모가 커지고, 그러면 마르크스의 비유처럼 “생산의 모든 용수철이 더 힘차게 작용”. 마치 제 안에 용수철이라도 있는 듯 자본이 팽창함
6. ‘노동자계급의 밥그릇’에 대한 엉터리 도그마
○ 자본은 용수철 신발을 신었다
노동력에 대한 착취도가 늘어나고 노동생산력이 증대함에 따라 동일 규모의 자본은 더 큰 추가자본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기존에 쌓여 있던 자본도 죽은 채로 그냥 있지 않고 계속 추가자본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변화함. 마르크스가 팽창력이니 탄력성이니 용수철이니 하는 말을 쓰는 것은 자본축적의 이런 면모
자본은 매우 ‘탄력적’. 크기가 일정할 때조차 곧 팽창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유. 용수철을 탑재한 덕분에 동일한 자본으로 생산규모를 훨씬 더 키울 수 있음
노동력, 토지(자연), 과학, 기술은 모두 생산력을 높이는 요소들. 자본의 회전속도를 높여주는 유통영역의 요인과, 대규모자본을 사회적으로 쉽게 동원할 수 있게 해주는 금융 및 신용제도(주식, 채권, 은행, 투자회사 등)도 그런 자본축적의 또 다른 용수철
자기 자본보다 몇 배나 큰 자본을 굴려 규모의 효과를 누림. 투하 자본이 커지면 “생산의 모든 용수철이 더욱 힘차게 작용”하기 때문에 축적에 유리
○ 노동자의 수프 접시 크기는 정해져 있다?
마르크스는 벤담이 사회적 자본의 크기가 고정된 것처럼 다루었다고 비판. 이런 논리로는 자본생산과정에서 흔히 볼수있는 생산의확대나 수축,축적을 설명할수없음. 생산증가는 일반적현상. 한마디로 사회적 자본을 고정된크기로 보는 주장은 엉터리
이엉터리‘도그마’는 자본가들의이익을 옹호할 목적으로 자본전체가 아니라 자본의 한부분인‘가변자본’(노동력에 투자되는 부분)에만 적용함으로써 악용함. 전체 생산물에서 전체 노동자가 소비할 수 있는 생활수단의 양(노동기금)에는 “자연의 사슬이 채워져 있어 [정해진 양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 맬서스, 밀, 맥컬럭 등이 이런 주장
이런 상황에서, 요즘에도 많이 나오는 이야기들로, 고용을 늘리려면 임금을 낮춰야 한다거나, 부모 세대 임금을 깎아야 자식 세대를 고용할 수 있다거나, 정규직 임금 인상을 막아야 비정규직 임금 인상이 가능하다거나 하는 식의 결론이 도출됨
사회전체 노동기금이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는 사회 전체 생산물 중 생산에 얼마를 투자해야 하는지(혹은 자본가가 얼마를 가져갈지)를 정하는데 끼어들 수 없고, 아주 예외적으로 노동기금 전체가 늘어나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고
○ 노동자들의 숟가락이 작은 것
케임브리지 경제학 교수 헨리 포셋(Henry Fawcett)에 따르면 “한 나라의 유동자본이 그 나라의 노동기금”. 개별 노동자의 임금을 더한 가변자본의 총액이 노동기금인 셈
개별 노동자들이 받은 임금을 더한 값에 불과한 총액이 역으로 노동자들 개인이 받아야 할 임금을 규제하는 원리인 것같이 ‘아주 교활한 수법’으로 포장. 전체 총액은 정해져 있으니 고용을 늘리려면 개별 노동자의 임금을 낮춰야 하고, 청년 세대의 취업을 위해서는 부모 세대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춰야 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추어야 한다는 주장
영국의 사회주의자 존 웨스턴(JohnWeston)은 노동자들이 받을 수 있는 임금 총액을 노동자들이 떠먹을 수 있는 수프 접시의 크기는 정해져 있다고 수프 접시에 비유
그러나 노동자는 노동자들끼리만 떠먹어야 하는 접시에서 수프를 떠먹는 게 아님. 노동자들이 떠먹는 수프는 전체 국민의 노동생산물 즉 사회 전체 부의 일부. 바로 이 접시에서 노동자들이 더 많이 떠내지 못하는 것은 접시가 작기 때문도 아니고 접시 속 내용물이 빈약해서도 아닌, 단지 노동자들이 떠내는 “숟가락이 작기 때문”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가치(노동자들이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생활수단의 가치)를 원리상으로는 계산할 수 있지만, 어떤 요소들을 얼마만큼 고려할 것인가에는 계급투쟁이 개입. 잉여가치(이윤)를 최대로 뽑아내기 위해 자본가는 노동력의 가치를 육체적 재생산만 고려한 최소 수준으로 낮추려 할 것이고 노동자는 그 반대 방향으로 최대한 올리려 할 테니까 현실적으로 노동력의 가치는 두 계급의 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결정됨
중요한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계산할 수 있다 해도 노동자가 꼭 그만큼만 받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 자본이 고정된 크기가 아니듯 노동자의 임금 총액도 고정되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 노동생산력 증대로 잉여가치 생산이 늘어난 경우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늘어난 잉여가치의 일부를 임금으로 요구할 수 있음. 노동생산력이 증대했다는 것은 노동자들이 그만큼 더 많은 능력을 발휘했다는 뜻
노동기금은 얼마든지 커질 수 있음. 그렇다고 노동기금이 한없이 커지는 것도 아님. 대개는 잉여가치의 증가를 크게 저해하지 않으면서 실질임금이 조금 올라가는 수준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생산력 증대로 일어난 노동력의 가치하락에 맞서 싸우는 것에 대해 “노동자가 이러한 상대적 임금의 하락에 저항하는 것은 그 자신의 노동생산력이 증대한 결과에 대한 일정한 몫을 요구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또 사회적 계층에서 자신의 기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고 하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
노동생산력 증대로 잉여가치가 늘어나면 부의 양극화가 심화 확대되는 경향. 게다가 이 투쟁의 기본 성격은 노동력을 파는 것 말고는 살길이 없는 노동자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의 가격을 제대로 받아보려는 것
마르크스는 노동조합에 대해 “노동조합은 자본의 침탈에 대한 저항의 중심”이지만, “그 조직된 힘을 노동자계급의 최종적 해방 즉 임금 체계의 궁극적 철폐에 사용하지 않”고, “현존 체계의 결과에 맞서는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 ‘정당한 노동일에 대한 정당한 임금을!’이라는 보수적 표어 대신 “자신들의 현수막에 ‘임금 체계의 폐지’라는 혁명적 구호를 써 넣어야” 한다고. 노예가 사슬은 그대로 둔채 조금느슨하게 만드는 데만 신경 써서는 해방이 될 수 없으니까
노동기금의 한계라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가계급이 허용하는 한계일 뿐. 우리가 자본주의에 살지 않는다면, 잉여생산물 중 얼마를 생산에 투자하고 생산자들(사회구성원들)이 소비할 것인지, 다음번에는 무엇을 얼마나 생산할지를 함께 결정할 수 있음
○ 드디어 찾아낸 범인, 심판의 법정이 곧 열린다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추적하는 범죄는 체제를 위협하는 개인의 범죄가 아닌 체제 자체가 저지르는 범죄.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으로서, ‘인간의탈을 쓴 자본’으로서 행동할 때 노동자를 착취하고 약탈. 자본의 범죄이고 자본주의의 범죄. 개별 자본가조차도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 거대한 착취와 예속의 기계가 정체를 드러냄
마르크스가 분노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포섭하고 있는 이런 운명, 이런 관계, 이런 배치, 이런 세팅. 그는 자본축적이 단순한 부의 축적이 아니라 권력의 축적이며, 자본주의는 경제구성체인 동시에 권력구성체라는 것, 하나의 주권 체제라는 것을 보여줌. 여기서 노동자는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결박시킨 것보다 더 단단하게 자본에 결박”됨. 자본의 신민으로서 철저하게 예속되는 것
자본축적과 더불어 자본가의 지배적 유형이 ‘고전적 자본가’에서 ‘근대적 자본가’로 넘어가는 대목인데, 축적이란 “사회적 부의 세계를 정복”하는 것인데 이것은 “착취당하는 인간재료의 양을 확대”하는 일이기도. 그런데 자본의 착취 대상인 인간재료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자본가(자본)의 권력, “자본가의 직접적·간접적 지배”가 확대된다는 뜻. 마르크스는 이를 ‘치부욕’이 ‘지배욕’을 한 요소로서 포함하고 있다고 함
부록노트
Ⅰ. ‘건축물’ 비유와 재생산의 관점
◯ ‘자본주의’라는 건축물
니체는 사회구조를 ‘토대/상부구조’라는 건축물로 표현. 여기서 토대에 해당하는 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이루어진 경제적 구조. 이 토대 위에 법적·정치적·종교적·예술적·철학적(이데올로기적) 영역인 상부구조가얹힘.
마르크스도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생활과정 일체를 조건 짓는다”고 봄. 상부구조의변화는(일정한자율성이허용된다고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토대에서 일어난 변화를 반영할뿐. 경제적 토대에서 일어난 변화가 상부구조를 변혁
그러나 이러한 ‘토대/상부구조’ 비유만으로는 법률·정치·종교·예술·이데올로기 등의 ‘상부구조’영역이 토대로부터 일정한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거나 토대에 대한 일정한 ‘반작용’을 가한다는 식의 소극적 언급을 할 수 있을 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는 알기 어려움
마르크스가 사회의 이미지로 더 많이 활용한 것은 유기체. 유기체는 생산과 소비 활동을 지속함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고, 가만히 있을 때조차 끊임없는 대사 작용
사회구성체를 이루는 요소들 사이의 위계를 보여주는 데는 ‘토대/상부구조’비유가 어떤 요소가 지배적영향력을행사하는지 한눈에 보여주니까 탁월한데, 유기체 관점에서 보면 설령 요소들 사이의 위계를 인정하더라도 중요한 것은‘요소’가 아니라‘관계’
유기체 비유에도 부분인 구성요소들을 전체 생명 유지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목적론이 개입할 수 있는 한계가 있음. 사회구성체의 요소들을 이런 식으로 신체의 기관처럼 파악하면 이 요소들이 지닌 탈기관화(탈조직화)의 잠재력을 읽어내기 어려움. 즉,이런사고는 편제내지배치의 미묘한변화만으로 동일한사물이 다른기능을수행할수도있고, 동일한기능이 갑자기 전체신체의 해체를 야기할수있다는걸 알기어려움
‘건축물’비유에서는 경제적토대가 무너질때 사회가 붕괴. 그런데 ‘신체’비유에서는 재생산에 실패할때, 즉 생산과정의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회는 죽음에 이름
사회구성체가 재생산되려면, 즉 생산이 반복되려면 생산수단이 계속 제공되어야 함. 즉 생산수단의 재생산이 필요. 이런 재생산은 개별자본가수준에서는 사고될수없음. 마르크스가 사회적 총자본과 총자본가를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
마르크스는 우리 신체에서 항상성을 유지하는 메커니즘과 같이 이것들을 조절해주는 전체 생산 메커니즘이 있는 것처럼 말함. 그러나 부문별 불일치 때문에 크고작은 공황이 생겨날 수 있다고 보았지, 메커니즘의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고 본 것은 아님.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이런저런 불일치 문제를 조절할 기구 내지 장치로 국가를 상정
관리자로서 국가의 역할이 더욱 요구되는 곳은 노동력 쪽. 노동력은 생산력의 원천. 노동력의 재생산은 자본 재생산에 필수불가결
마르크스는 노동자는‘본능’에 따라 자신을돌보고 자식을키울 거라며, 별수 없이 또 노동력을 팔러 나올거라며, 자본가가 임금만 지급하면 노동력의 재생산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함. 자본가가 신경쓰지 않아도 알아서 재생산되고 공급된다는 것
자본주의에서 직무와 직접 관련된 몇 가지 기술은 생산 현장에서 훈련시키지만, 대부분의 자질들은 생산현장 밖인 학교나 학원,직업훈련소등 다른기관에서 이루어짐. 이는 개별자본가의 직접적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들로, 국가의개입이 필요한영역
노동력의 공급과 관련해서는 실업자나 구직자들, 소위 ‘산업예비군’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관리도 중요. 이들은 실업수당이나 근로장려금, 고용보험 등 다양한 사회제도를 통해 관리되며, 역시 국가의 관리가 필요한 영역
재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력 관리자로서 국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토대에 해당한다고 하는 물질적 생산이 이루어질 수 없으니까, 국가의 외적 개입은 자본 재생산의 필수적인 내적 조건임. 국가는 다양한 법령과 제도로 ‘자본의 정신’이 관철되도록 도움. 물론 국가의 개입 양상과 범위는 계급투쟁과 정세에 따라 달라짐
◯ 이데올로기와 복종의 재생산
알튀세르는 복종을 강조. “노동력의 재생산은 그 자격의 재생산만이 아니라 기존질서의 규칙들에대한 복종의 재생산”을 필요. 노동자는 기술과 지식 외에도 복종을 배워야 함. 억압적 국가장치(경찰,군대,감옥등)는 상당한정도로 주체성의 생산에 관여
그러나 주체성의 생산과 관련해 억압적 방법을 쓰는 데는 한계. 알튀세르가 ‘억압적 국가장치’와 구분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부르는 교육(학교),종교(교회),가족, 미디어, 문화 등에서 작동하는, 폭력보다는 주로 이데올로기를 통해 기능하는 장치
이 중에서도 학교가 특히 중요.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도 [학교처럼]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어린이들 전체를 일주일에 5, 6일 그리고 매일 8시간씩, 여러 해 동안 의무적 청중으로 만들 수는 없”음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오는, 더욱이 다양한 사회적 장치와 제도 속에 살면서 형성된, 집단적이고 객관적인 가상. 이렇게 의식까지 사로잡혔을 때 노동자는 완전한 ‘자본의 부속물’이 될 수 있음. ‘자본의 노동자’로 재생산되는 것
◯ 저항의 재생산 혹은 주체 재생산의 위기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서는 노동자의 저항이나 이탈을 사고하기 어려움. 이데올로기를 통해 노동자가 노동자로 재생산되는 것이라면, 노동자가 노동자인 채로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움
알튀세르가 택할 길은 두 가지. 하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저항 이데올로기를 상정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를 상대화하는 것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존재론적 상이성 내지 불균등성을 강조. 두 계급은 상이한 형성과정, 상이한 역사를 가짐. 자본주의에서 두 계급은 함께 재생산되지만 애초 생산은 달랐다는 것. 생산과 재생산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의 결과가, 이 결과를 가능하게 했지만 이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낯선 한 과정 속에 기입되었다”라는 사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었지만 사건의 결과가 새로 생겨나고 있던 체계의 재생산 메커니즘 속에 ‘기입’(inscription)되면서 이 체계의 일부로서 계속 재생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
비록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편제되어 가변자본으로 기능하고 있지만 노동자계급에게는 어떤 이질성, 합체되었지만 용해되지 않는 요소들이 있으며, 이런 이질적 요소들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적 생산을 위한 기관들(가변자본)로 기능할 때조차 탈기관화의 잠재성, 즉 비자본주의 내지 탈자본주의적 기능을 수행할 잠재성을 가짐. 재생산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잠재성은 자본의 확대재생산과 더불어 확대재생산 됨. 어떤 경우에는 재생산의 과정에서, 마치 유전자의 복제과정에서 염색체의 일부분이 접히거나 잘리거나 뒤집히는 것만으로도 전체 신체의 변형이 초래되는 것처럼, 작은 충격, 작은 일탈, 작은 이동으로 예측할 수 없는 큰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음
재생산 중인 ‘신체’의 비유에서 이행은 붕괴보다는 변신의 형태가 되지 않을까. 생명체의 변이가 생명체의 재생산과정에서 일어나듯,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은 얼마든지 자본의 재생산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 역사적 이행을 위한 별도의 메커니즘은 필요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