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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열리라
■찬송: 441장(은혜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성경: 마가복음 7:31~37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36.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기도: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주시는 분 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아시는 분 인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져 주시는 분 입을 믿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을 만져 주시기를 원합니다.
직장과 사업과 사역을 만져 주시고 이 나라 이 민족을 만져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의 닫힌 귀가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귀를 열어주옵소서
상대의 말하는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마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하옵소서.
우리에 입 또한 열어주옵소서
기도하는 입, 찬양하는 입, 전도하는 입, 축복하는 입이 열려지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에게 에바다 의 은혜가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에바다, 열리라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고친 후에
여행 일정 중에 있었던 일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역뿐 아니라 시돈 지역을 여행하고 데가볼리 지역을 돌아서
갈릴리 호숫가까지 멀고 긴 여행을 하셨습니다.
그 이방 지역 여행 과정에서 예수님은 지중해의 일렁거리는 바다를 보면서
후일에 복음이 지중해를 건너 저 유럽을 향하여 전파되시는 것과
유대 지역 주변의 이방 사람들에게도 선포될 것을 마음에 그리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이방 여행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몰려와서
고침을 받은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만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 7장 31절 이하에서
기록된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치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유독 기록으로 남긴 것은 이 메시지 속에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복된 교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여러 교훈들 중에 다음 몇 가지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그 사람에게 안수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아마도 이 일이 벌어진 것은 데가볼리 지역으로 추측됩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 중에 행하시면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실 때
병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해서 고치시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예수님께 손을 얹어서 그 사람도 고쳐주시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요청을 받았으나 그 사람을 안수해서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고치실 때 손가락을 그 귀에 넣고 침을 뱉어
혀에 손을 대시는 특이한 방식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이러한 예는 몇 번 정도에 불과하고 거의 예수님은 안수함으로
고쳐주시기도 하시고, 말씀만으로 고쳐주시기도 하심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수해달라고 하시는데,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까지 뱉어서
침 묻은 손으로 혀에 대서 고치는 치유 방식을 취한 까닭은
예수님께서 사람을 고치실 때 사람마다 각기 다른 방식을 얼마든지
취하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고 이끄실 때에 다 똑같이 다루시지 않고
이런 사람은 이렇게, 저런 사람은 저렇게 다루시곤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실 때 전혀 예상치 아니한 방법으로 다루어서
깨닫지 못하여 고민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야곱을 다루실 때 사깃꾼 장인을 만나 혼줄을 나게 만들어서
거짓과 술수를 쓰는 그의 습성을 고치기도 하시고,
열한째 아들 요셉을 그의 편애의 품에서 데리고 가셔서 애굽에서
국무총리가 되게 하사 나중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뒤늦게 깨닫고 하나님께 경탄하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또한 아람 나라 나아만 장군의 문둔병을 고치실 때에도
그가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방식, 곧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가 나오면
고치는 방식을 그에게 주문하였으니, 나아만 장군은 이해가 안되니
벌컥 화를 내고 고국으로 돌아갈뻔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그의 교만과 아집을 깨뜨리고 그에게 겸손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었으니
사도 바울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세 번이나 하나님께 이 가시를 빼달라고
간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깨달음을 주신 가르침은
그가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다루실 때에 그의 연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계속 그에게 머물러 있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을 때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다루실 때 내 기준을 가지고
그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다루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다루어오신 하나님의 방식의 경험만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닥친 일,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섭리적인 손길로 인도해오신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교훈하시고 치유하시고 온전한 사람으로 양육하시는
교육 방식이 각각 다르므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방식,
다른 사람들의 생활의 모습들을 되도록 이해하려고 힘쓰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자신에게 닥치는 특이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가 하고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밖에는 사람에게 당하게 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또한 이런 시련과 저런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이 유별난 것 같지만
내게 꼭 필요한 과정이기에 주님께서 알고 허락하신 것이니,
왜 나만 겪는 시련이냐고 원망하지 말고 그 과정을 잘 인내하며 믿음 지켜갑시다. 그리할진대 고난의 사람 욥의 말년에 하나님께서 그를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해주시고 그의 삶을 더 복되게 하시고
그를 다시 더 높이 높여주신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더 아름답게 해주시는 날이 반드시 올 줄 믿습니다.
2.둘째로,
가장 창조적인 일은 은밀하고 조용한 환경에서 일어날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데리고 왔을 때에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서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셨을까요?
아마도 온통 귀가 어둡고 말도 못하는 그 사람을 치유하는 일에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마음과 정성을 집중하실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그 사람이 워낙 그 동안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에 안도감을 주고 또한 치료하시는 예수님과
인격 대 인격으로 친밀감을 형성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고치는 것이 필요해서였을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예수님께서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피하고 조용하고 차분한 중에
이적을 행하신 일은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칠 때에도
그 집에 소란스럽게 곡을 하던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또 제자들 중에서도 세 명만 따로 데리고 그 소녀의 방에 들어가
딸을 고쳐주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또 뱃새다 에서도 보지 못하는 맹인을 고치실 때에도 마을 밖으로
따로 데리고 나오셔서 고쳐주셨던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조용한 곳에서 사람을 고치신 것처럼,
우리 삶에서도 가장 영적이고 창조적이고 가장 유익한 일들은
조용하고 차분한 중에 일어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공장을 방문했는데,
그 공장의 모든 곳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모든 사무실과 공간들이
온통 큰 소리로 가득차 있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가득차 있더랍니다.
그런데 어떤 한 방에 가서 보니 거기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고 고요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를 인도하던 안내인에게 말하기를, “
이 방에서는 아무 일도 안하는 모양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랬더니 이 말을 들은 그 공장 안내인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이곳이 가장 중요한 방입니다.
이 온 공장의 일을 하게 하는 힘이 이 방에서 제조되어 나갑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숨가쁜 일상의 삶에서 멈춰서 잠시라도 자신의 생활을
차분히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매우 유익합니다.
바삐 흘러가는 시간을 멈추고 성경을 조용히 펼치고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차분히 듣고자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묵상의 시간이 내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시간입니다.
사람들과 하루 종일 말하면서 들떠 있는 우리 마음을 내려놓고
조용히 하나님께 돌아와 은밀하게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의 시간은
내 영혼을 다시 살리고 몸과 마음의 피곤함을 씻어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다시 점검하며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들을 다시 생각나게 해주는
귀중한 시간이 됩니다.
거기서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영원하고 복된 생명적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나를 향하여 계획하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간절히 원하시는
그 조용하고 은밀한 공간과 시간을 소란스러운 우리의 일상으로,
세상적인 근심과 염려로, 티브이 뉴스들로, 혹은 의미 없는 정보 검색의 시간으로, 사람들과의 의미 없는 잡담으로 다 허비하지 마십시오.
하루 중에 가장 창의적이고 가장 생산적이고 가장 영적인 시간이
주님과 조용히 함께하는 단 십분의 시간, 단 이십 분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자주 멈추어서 주님의 영과 함께 조용히 묵도하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여유와 평강과
내적인 활력과 세상이 줄 수 없는 지혜가 여러분의 삶에 임할 것입니다.
■찬송: 세상일에 실패했어도
3.셋째로,
주님께서 “에바다, 열리라”고 명령하실 때에 영육간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리를 떠나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신 후에 그의 손가락을 그의 양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 후에
하늘을 향하여 우러러 탄식하셨습니다.
이 ‘탄식하다’는 동사는 근심과 괴로움을 가지고 한숨을 담은 신음소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그 동안에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면서
겪었던 답답함과 외로움, 슬픔과 절망, 외부 세계와의 단절로 인한 고립감 등을
몸소 겪으면서 깊은 동정심에 마음이 사로잡혀 깊이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그 누이들과 사람들이 울 때
함께 우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깊은 탄식을 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괴로운 처지에 처한 이들과 깊이 공감하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남모를 괴로움과 외로움과 슬픔과 답답한 일을 겪을 때
사람들은 우리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예수님만은 우리 마음을 다 아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하늘 보좌에서 기도하시고
성령께서도 동일한 아픔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게 탄식으로 기도하신 예수님은 그 사람을 향하여 “에바다”라고 명하셨습니다. ‘에바다’는 당시 데가볼리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이 공용어로 쓰시는 아람 말인데, 그 뜻은 ‘열리다, 풀리다, 밝아지다’라는 뜻입니다. 이 ‘에바다’를 풀어 쓴 헬라어 ‘디아노이고’가 쓰인 성경의 예를 보면, ‘성경을 잘 풀다’라는 말로도 쓰이고,
‘무덤이나 문이 열린다’는 말로도 쓰이고, ‘하늘이나 입이 열린다’는 말로도
쓰였습니다. 또 ‘눈이 밝아지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묶인 것들이 풀어지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놀랍게 명령을 하신 그 즉시로 그의 귀가 열려 듣게 되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말을 제대로 못해서 괴롭고 어눌했던 그의 혀가 풀어져서
말이 분명하고 자유자재로 하게 되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한번도 제대로 듣지 못했고,
한번도 자기 마음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이 사람은
그 순간 완전히 달라져서 모든 말들을 잘 알아듣고
자기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하여 전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한 순간
그 사람은 이제 육체적으로 온전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삶과 영혼에 천지개벽하는 은혜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복이 임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육체적 치유의 사건은 벅차고 감동이 되는 큰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기록한 목적은 단지 육체적 치유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므로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는
우리의 영적인 귀와 영적인 눈과 영적인 입이
온전히 고침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고자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방인들은 다 영적으로 귀먹은 자요 입이 어눌한 자들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들이요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여러 가지 이적을 보여주시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입술은 아무리 진리의 가르침을 가르쳐주어도
그것을 말할 줄 모르고 늘 세상적이고 불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말만 쏟아내는 영적인 말더듬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도 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요
영적 귀머거리요 영적 벙어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조차 여전히 그와 같이 영적인 장애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8:17이하에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책망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 8:17~21)
그렇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영적인 눈이 어두운 소경인 채로
주님을 따르고 있고, 영적인 귀머거리인 채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영적인 벙어리인 채로 주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눈이 밝아져야 되고 더 귀가 밝히 열려져야 되고
더 우리 입술이 고침을 받아 주님의 백성다운 믿음의 말, 진실의 말,
사랑의 말, 소망의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답답하고 캄캄하고 어둡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는데, 우리도 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게 아직도 덜 자란 영적 장애자들인 우리들을 보실 때
주님께서 지금도 그 때와 동일하게 답답한 마음으로 탄식하시면서
우리 귀에 손을 집어넣고, 우리 눈에 침을 발라 손을 대시며,
우리 혀에도 침을 발라 손을 대시며 “에바다, 열리라”라고 말씀하시기를
갈망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밝아져 주님의 진리를 보고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가 귀가 열려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며,
또 우리의 입술이 열려 바른 진리를 증거하며 비뚤어진 말,
세상적인 말이 아니라 믿음, 소망, 사랑의 말,
천국의 언어들을 올바로 전하게 되시기를 갈망하실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삶이 캄캄하고 답답하고 막히고 결박되어
생활이 답답하고 일이 막히고 지혜가 없고 그래서 생활에 질서가 없고
혼돈하고 괴로운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에게 주님께서 답답한 것을 열어주고
어두운 생각의 창을 밝히 열어주고 말과 행동과 생활이
활달하고 지혜롭게 풀리는 에바다의 역사,
문이 열리고 결박이 풀리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이 간절히 원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귀먹고 말 더듬던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던 사람들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믿지 않는 이방인인 여러분의 가족들을
예수님께 기도로써 인도해오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고백을 하지만, 아직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진리의 말씀을 잘 안들리고 세상 말만 잘 듣는 사람들,
눈이 어두워서 예수님과 교회의 영광을 못 보고
세상일들은 환히 보는 사람들, 아직도 혀가 묶여서 틈만 나면 불신앙의 말,
세상적인 말, 부정적인 말을 입으로 쏟아내는 말더듬이들도
예수님께 기도로 데려오시기 바랍니다.
32절에 사람들이 이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고 했는데,
‘데리고 오다’는 이 ‘페로’라는 단어는 로마 군사들이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갔다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을 태운 배를 유라굴로 광풍에 의하여 가는대로 두고
‘쫓겨갔다’라고 할 때 ‘쫓겨가다’는 단어로도 씌였습니다.
그래서 이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은 사실 스스로 예수님께 온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이 사람을 그 가족과 친구들이
억지로 거의 반 강제로 예수님께 끌고 왔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사람이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을 우리들은 기도를 통하여
그 사람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 사람을 위하여 많이 기도합시다.
눈이 어둡고 귀가 어둡고 혀가 묶여서 그렇게 된 것은 본인 잘못이 아닙니다.
아직 깨달음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아직 영적으로 결박이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아직도 육신이 강하고 세상에 끌리는 힘이 강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못 고칩니다.
오직 주님께서 그의 귀와 눈과 입을 만지시며 탄식하며
에바다 명령하실 때 깨달아지고 열려지고 풀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생활의 어두움과 무질서와 혼돈도 주님께서 에바다 하실 때에 물러가고
밝은 새로운 세상이 그에게 열려질 것입니다.
에바다의 열리는 은혜가
우리와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이들과 생활에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4. 넷째로,
주님께서 우리 삶에 행하신 모든 일들은 다 아름답고 좋은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5장 29절 이하의 병렬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만 고친 것이 아니라
다리 저는 사람과 여러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여럿을 다 고쳐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쳐주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럴수록 더 널리 예수님의 병 치료 기적들을 전파하였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었던 사람들은 심히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많은 병을 고치고
귀한 말씀의 진리를 선포하였을 때
감동받고 열렬히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도리어 예수님을 비방하며 헐뜯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이방인 여행 중에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일들이 소문이 났는데,
그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이 심히 놀라며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라고 예수님 편을 전적으로 드는 말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떤 사람들이 비방해도 나는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들이
다 옳다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옹호하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이 말한 이 발언은 우리가 마음에 새겨둘 말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것은 다 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원문에 ‘잘하다’라는 단어는 ‘칼로스’인데 이 ‘칼로스’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빛을 비롯한 세상 만물을 만드실 때에
만족하고 기뻐서 말씀하신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이 단어는 ‘아름답다, 훌륭하다, 만족스럽다, 좋다’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다 아름답고 훌륭하고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것이라면
그것이 당시에는 우리에게 이해가 안되고 괴롭고 아프고 답답할지 몰라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며 가장 좋은 선이며 아름답고 선한 것임을
우리는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며 가장 사랑하시며
누구보다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갈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괴롭고 힘들어도 지금 내게 일어나는 그 일은
주님이 내게 가장 좋은 일을 행한 것임을 믿고 감사하며 인내하며
믿음으로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가 됩시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내게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야 했습니까?
왜 주님 내게 이렇게 가혹하게 대하셨습니까?
왜 주님 나를 홀로 그 답답한 가운데 오래동안 내버려두십니까?”라고
지금은 답답하고 속이 상하고 부르짖을 지 모르지만,
그 날에 가면 왜 그러한 일들을 허락하셨는지 그 날에는 밝히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린도전서 13:12) 말씀처럼,
우리 모두 지금은 다 알 수 없지만 주님 앞에 가는 그 날에는
우리가 밝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은 내게 언제나 선하신 분이요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주님이 내게 가장 아름답게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며 대적할 때,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전적으로 인정하며
예수님 편에 전적으로 섰던 이들의 이 고백은 참으로 눈부신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이 고백을 우리의 것으로 삼고
고난의 때나 형통의 때나 변함없이 “주님이 내게 행하신 모든 것은
다 아름답고 좋고 선한 것이다.”라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 마가복음 7장 31절 이하의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치유 사건의 기록에 담긴
교훈들을 몇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루시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가장 창조적인 일은 은밀하고 조용한 환경에서 일어날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누구든지 육신의 병이나 영혼의 문제나 삶의 문제가 있을 때
주님께 데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에바다, 열리라”고 명령하실 때에 문이 열리고
묶인 것이 풀리고 어두움이 밝아지는 기적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넷째로, 주님께서 우리 삶에 행하시는 모든 일들은
다 아름답고 좋은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네 가지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모두 우리 삶에 적용합시다.
“에바다, 열리라”는
주님의 기적의 은혜가 우리 각 사람과 가정과 중보 기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충만히 임하시기 간절히 기원합니다.
■찬송: 에바다
■기도:
주님께서 “에바다”라고 말씀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우리 주변의 있는 영적 귀머리거리 들과 벙어리 들을
우리 모두가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가정의 삶에서 막힌 것이 뚫려지기를 원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도, 고민은 하면서도 기도하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모든 문제를 주님께 내려놓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해결허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귀가 여리고, 눈이 열리고, 입이 열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베푸시는 에바다 의 은혜가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