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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드디어 머리를 깎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연이 설악산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는 어느덧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한창 단풍잎이 물든 설악산은 불이 붙은 듯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마치 한폭의 그림 같았다.
"아!"
일연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일연은 한동안 설악산을 바라보며 곱게 물든 아름다움에 빠졌다. 설악산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어머니 같기도 하고, 저녁 놀 같기도 했다.
일연은 계곡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풍잎이 계곡물에 실려 어디로인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설악산의 풍경을 마주하고 보니 몇 달 동안 오랜 여행으로 쌓였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었다. 일연은 설악산의 맑은 계곡물에 얼굴을 씻었다. 물에 떠 있는 단풍잎을 건져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참 곱다."
일연은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단풍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단풍잎이 더 큰가 자기 손이 더 큰가 대보던 기억이 났다. 일연은 일찍이 금강산과 더불어 이 설악산이 하늘이 만든 명산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가슴이 벅찰 정도로 아름다울 줄은 몰랐다. 설악산은 부처님의 뜻과 같이 드넓은 산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아름다운 산이 오랑캐들에게 짓밟히고,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사는 백성들의 고생이 너무도 크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 붉게 물든 산자락에는 백성들의 피가 흠뻑 묻어 있을 것 같았다.
일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진전사를 찾아 끝없이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진전사는 설악산 대청봉이 바라다 보이는 아주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절이었지만, 신라의 도의스님 같은 유명한 스님들이 숨어 지내던 곳으로 아주 역사가 깊은 절이었다. 지금은 '대웅선사'라고 하는 이름난 스님이 주지로 있다고 하였다.
일연은 진전사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절 안이 조용했다.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 낭랑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일연은 반가운 마음이 들어 한 달음에 법당으로 달려가 불상 앞에 서서 합장하였다.
"뉘신지요?"
일연이 불상 앞에서 깊이 숙였던 고개를 들자 등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자승(나이 어린 스님)이었다. 일연보다 두세 살 어려 보였다. 일연은 동자승에게 합장을 하고 나서 말했다.
"대웅선사님의 고귀한 가르침을 받으러 온 일연입니다."
동자승은 대답 대신 합장을 하고 일연을 대웅선사에게 안내하였다. 대웅선사는 일연이 가지고 온 편지를 받아 읽었다. 일연은 그런 대웅선사의 맑은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한동안 말이 없던 대웅선사가 입을 열었다.
"너의 스승이 네 칭찬을 많이 하더구나."
일연은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고?"
대웅선사는 일연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일연은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승이 되고 싶습니다."
대웅선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에서 바람이 살포시 들어와 늙은 선사의 하얀 수염이 날렸다. 그것은 일연을 거두어들인다는 뜻이었다. 일연은 그 앞에서 머리를 깊이 숙였다.
일연이 진전사에 온 이듬해. 봄 날이었다. 몇 명 안 되는 진전사의 식구들은 새벽부터 바삐 움직였다. 마침내 일연이 승려가 되는 날이었다. 여러가지 의식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여 절 식구들은 대청봉 꼭대기 부근의 작은 암자로 올라갔다. 대청봉 꼭대기에 가까이 다다르자 동쪽으로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바다는 막 떠오르는 햇빛에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일연은 벌건 물결로 출렁대는 바다를 벅찬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암자는 큰 바위 옆에 붙어 있었다. 암자 옆 바위의 벽면에는 큰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앞에서 일연은 동쪽을 향하여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웅선사는 목탁을 두드리며 오랫동안 염불을 하였다. 그 사이 일연의 머리카락은 한 웅큼씩 잘려 나갔다. 머리카락이 한 줌씩 무릎 위에 떨어지자 온갖 기억들이 떠올랐다. 자상한 어머니와 근엄한 아버지의 얼굴, 무량사 주지스님 밑에서 글을 배울 때의 기억도 되살아났다. 또한 무량사를 떠나 설악산으로 오면서 만났던 많은 백성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일연의 눈에서는 드디어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연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일연은 승려로 다시 태어났다. 마음 한 구석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올랐다. 일연은 동해 바다의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 햇덩어리를 가슴으로 안고 싶었다.
의식을 치루면서 일연은 '회연'이라는 법명(중에게 지어주는 이름)도 받았다. 솟아오르는 해를 보며 일연은 드디어 스님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그 날부터 일연은 대웅선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차가운 계곡물에 들어가 몸을 청결히 하고 가부좌(다리를 꼬아서 앉는 것)를 하고 앉아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겼다. 그리고 오후에는 대웅선사 앞에서 불경을 펼쳐놓고 부처님의 말씀을 배웠다. 또한 일연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머리가 무거울 때는 밖으로 나와서 널바위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일, 전쟁,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것들이 다 무슨 뜻이 있는가 생각했다. 그런 한편 일연은 오대산 산적 두목에게서 얻은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을 틈틈이 읽었다. <삼국사기>는 50여년 전, 인종의 명령을 받아 김부식이라는 사람이 쓴 역사책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주로 신라를 중심으로 씌어져 있을 뿐 아니라 중국에 아부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김부식이 신라 왕족의 후손이기 때문에 신라에 비중을 두어 쓴 것은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중국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를 썼다는 것이 일연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삼국사기> 안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이 언제 세워졌으며 언제 멸망했는지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일연이 산적 두목에게 받은 <삼국사기>는 고작 두 권이었다. 나머지 여덟 권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일연은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일연은 불경 대신 잠시 <삼국사기>를 꺼내 읽고 있었다. 그 때 대웅선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웅선사는 긴 승복을 앞으로 여미며 앉아 일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책을 그렇게 재미있게 읽고 있었느냐?"
대웅선사가 그윽한 눈빛으로 일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저 <삼국사기>를 읽고 있었사옵니다."
일연은 읽던 책이 불경이 아니라서 조금 주춤거렸다.
"호, 그래 어떻더냐?"
대웅선사는 여전히 인자한 눈빛으로 물었다.
"재미는 있사오나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옵니다."
"허전해? 무엇이 그리 허전하단 말이냐?"
"소승도 그것을 잘 모르겠사옵니다.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일연은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대웅선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아마도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책임일 것이다."
"...?"
일연은 스승의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승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웅선사는 말을 이었다.
"김부식은 중국을 어버이 나라로 섬기다 보니까 우리 라를 아주 작은 나라로 썼다. 그래서 우리 백성들은 중국 임금을 황제로 모시게 된 거야. 네가 허전함을 느낀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일연은 확실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연이 알고 있는 중국은 고려보다 훨씬 크고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옛날에는 우리 민족이 저 너른 중국땅을 호령하던 시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중국에 비해 너무도 조그만 나라이지 않은가? 의아해 하는 일연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대웅선사는 다음 말을 이었다.
"물론 중국은 큰 나라다. 불경도 중국을 거쳐서 들어올 만큼. 그렇지만 우리나라도 중국에 못지 않은 훌륭한 역사가 있다. 중국에 뒤지지 않을 만큼 우리 선조들의 슬기도 뛰어났고. 그런데 굳이 중국을 어버이 나라로 모실 필요가 있었겠느냐?"
일연은 이제야 스승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대웅선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맞는 불교가 있을 게다. 중국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중국의 불교를 굳이 우리가 좇을 필요가 있겠느냐?"
우리나라에 맞는 불교라는 말이 일연의 마음에 남았다. 일연은 단 한번도 우리나라에 맞는 불교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맞는 불교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요?"
일연의 질문을 받은 대웅선사는 그윽하지만 힘 있는 눈으로 일연을 바라보았다.
"그것이야말로 네가 이루어야 할 숙제이다. 열심히 불경을 읽어 그 뜻을 새기다 보면 자연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불교가 단지 중국에서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찾아보면 우리나라 곳곳에는 중국에서 불교가 전해지기 훨씬 전의 발자취들이 있다. 그것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 일을 우리 승려들이 맡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이렇게 어려운 때를 살아가는 고려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마친 대웅선사는 방을 나섰다. 일연은 가슴 속에 큰 불덩이가 날아든 것 같은 충격을 감출 수가 없어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우리에게 맞는 불교... 그것을 내가 이루어야 한다?'
일연으로서는 도무지 모를 말이었다. 우리에게 맞는 불교란 도대체 무엇일까? 일연은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삼국사기>의 나머지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었다. 일연은 비로소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고려 땅에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먼 나라에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오래 전부터 계셨음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삼국사기>에서 빠져 있는 알맹이를 찾아내는 길이기도 하였다.
일연은 언제가는 이 땅에 숨쉬고 있는 민족의 역사와 불교의 역사를 밝혀내고 불심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겠다 다짐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엉 부엉...'
깊은 산골짜기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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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일연이의 마음은 점점 불타오르는 정의감에 타오르는군요..
"우리에게 맞는 불교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요?" 고려 땅에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찾아내는 것. 부처님이 먼 나라에 오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땅에 오래 전부터 계셨음을 밝혀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