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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중생,重生)
요한복음 3:1~8
서론
우리는 구원의 순서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구원의 순서는 예정, 부르심, 거듭남, 믿음, 회개, 칭의, 양자됨, 성화, 견인, 영화 순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복음 증거를 통한 부르심을 통하여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고 그 사람이 그 제시된 복음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되며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한 변화된 자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을 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지 않고 당당하게 나아감을 얻습니다. 또한 그는 성도답게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를 쓰게 되고 주님을 닮아가려고 합니다. 그러한 성도는 결코 이 세상의 시험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끝내 구원의 반렬에 들게 됩니다. 마침내 주님 앞에 서게 되고 주님의 재림의 그 날에 완전히 영광스러운 존재로 변화되어 신천 신지에서 영원히 왕노릇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구원의 다양한 국면이고 우리가 받는 구원의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것은 시간적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요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우리가 받는 구원의 다양한 은혜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부르심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복음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초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한 복음 전도는 모든 영혼에 대한 간절한 사랑,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라는 초대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보았습니다. 영원히 멸망받기로 작정된 자, 곧 가룟 유다일망정 우리 주님은 결코 미워하는 마음이 없이 그의 배신과 멸망을 가슴아파하면서 마지막까지 ‘친구여’하고 부르면서 그의 잘못된 선택을 돌이키기를 호소했음을 기억해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돌아오도록 끝까지 호소하는 사랑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진지하고 끈질긴 복음의 초대를 받았으나 모두가 이 복음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이렇게 청함 곧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응답한 자는 곧 유효적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신학적으로 표현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다는 뜻입니다. 가장 적절한 예로서 자주 장사 루디아의 회심 장면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바울의 말을 따른다, 순종하여 받아들인다,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건은 곧 효력있는 부르심이 루디아에게 임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다른 여인들도 많이 있었지만 오직 루디아만이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문자적 의미
그런데 이러한 효과적인 부르심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이 오늘 주제인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은 한자 말로, ‘중생(重生)’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생, 거듭남을 문자적으로 쓴 문장은 디도서 3:5 말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 말씀에서 ‘중생’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다시 태어남’, ‘새롭게 태어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사용할 때는 넓은 의미에서 구원받은 자의 새로워진 삶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신학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거듭남이란 의미는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주어져 그 사람이 구원의 씨앗을 얻은 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가 얻은 최초의 근본적 변화입니다.
거듭남의 중대성
거듭남, 중생의 사건은 마치 씨앗이 밭에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그 씨앗이 심겨지지 않았다면 결코 꽃도 없고 가지도 없고 열매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씨앗으로부터 생명이 시작하듯이, 하늘나라 생명이 그에게 주어진 근본적 사건이 중생,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이 없으면, 아무리 종교적 업적을 많이 쌓고 종교적 형식에 익숙하고 성경을 줄줄 알고 남을 가르친다 해도, 기도가 말쑥하고 잘한다 해도, 과거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 서기관이 그러했듯이 그는 여전히 영생에 이르지 못한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왔던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처럼, 그는 아직 종교인일 따름이지 결코 구원받은 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인 것입니다.
거듭남과 하나님의 생명
거듭남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갖는 생명에는 육체적 생명인 Bios가 있습니다. 이것은 생물학적 생명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숨쉬고 활동하는 생명입니다. 음식을 먹고 보양해주면 그것은 점점 자라고 건강해지고 활동력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이 육체적 생명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병들고 늙고 쇠하고 사망의 세력 앞에 무력하게 넘어져 나중에 흙에 되돌아가버립니다. 100년 남짓 살면 잘 사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 생명은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가 갖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조에 Zoe’라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부터 나온 생명이 ‘조에’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은 ‘영생’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4,26)
말씀하신 그 때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느니라”
이 때의 생명도 ‘조에’입니다. 이 조에는 영원한 생명, 결코 없어지지 않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은 단지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도 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다고 했는데, 둘째 사망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조에의 생명은 인간 자체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이요 이 생명은 진정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은혜로 충만한 생명입니다. 영원히 충만해지고 또 충만해지는 생명이 생명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온 거듭남
그러므로 거듭남은 결코 인간 자체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한복음 3:3,7 말씀에 ‘거듭난다’라는 말은 원문을 보면,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 문장은 ‘위에서 태어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말로 표현할 때 의역 번역을 해서 거듭난다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도 born again 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문장은 위로부터 태어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남’ 즉 born above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외계적 생명입니다. 우리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조차도 이 생명이 아직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시험을 통과할 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직 죽을 수 있는 존재요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유동적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참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거듭남의 수동성
그래서 ‘거듭난다’는 단어는 동사 구조상 수동태입니다. 우리는 거듭 태어나는 것이지, 스스로 자기가 탄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아기들도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나 그를 잉태함으로써 생겨나듯이, 영혼의 거듭남도 스스로 이 생명 있는 자가 된 자는 없습니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일에는 결코 인간의 협조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성화라든지, 견인이라든지, 구원의 다른 국면에서는 인간의 책임적 행위도 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행동과 더불어 전적인 인간의 책임도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에는 오직 성 삼위 일체 하나님의 단독적 행위만 있습니다.
은혜로만 되는 거듭남
거듭남은 육신적 노력으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결코 거듭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철저히 부패하고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르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6,7)
고 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개과천선을 위하여 애쓰고 종교적 수행과 고행과 덕을 쌓고 배워도 인간 스스로는 안됩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에 의해서만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토록 오랫동안 종교적 의를 갈고 닦았던 니고데모조차 거듭나지 않아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거듭남은 성령으로 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이나 결심으로 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3 말씀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는 말씀이 그러한 것입니다.
거듭남의 신비성
또한, 거듭남은 신비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과 판단으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 과정이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습니다. 그렇기에 이르시기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고 하였습니다. 바람은 자유롭습니다. 바람은 주권적입니다. 바람은 그 발생, 경로, 강도를 사람이 제지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모든 과정은 신비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그 사역을 알 수 없습니다. 바람이 그 소리만 들릴 뿐인 것처럼, 성령의 사역도 짐작만 할 뿐이지 다 알 수 없습니다. 누구를 거듭나게 할 것인지,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 거듭남으로 인도할 지 오직 성령만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바람의 신비함처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은 그 사람의 무의식 세계 속에서 이뤄집니다. 본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듭납니다. 스스로는 아직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벌써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늘의 씨앗이 심겨져 그 심령 속에 조용히 작은 실뿌리가 내리고 있습니다. 조용히 작은 싹이 나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본인은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후일에야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일회성
거듭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3:3 말씀에, ‘거듭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시제로서 부정과거(아오리스트)입니다. 부정시제란 ‘단 한번에 이루어진 사건’을 지칭할 때 이르는 시제입니다. 점시상이라고 말합니다. 연속적이지 않고 점(點 ) 동작처럼 한번에 이루어진 행동입니다. 두 번 세 번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났다가 또 다시 희미해졌다가 또 다시 타락했다가 또 다시 변화되어 거듭났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성화와 비교됩니다. 성화는 지속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거듭남은 단 한번 벌어진 사건이요 그것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영원성
한번 거듭나면, 즉 한번 생명이 주어지면 이 생명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무엇도 이 생명을 취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0:28~30 말씀에,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렇듯이 한번 들어온 하나님의 생명은 결코 잃어버려지지 않습니다.
거듭난 자의 삶의 증거들
그리고 거듭난 자는 이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그는 새 생명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게 된다.
이 새 생명의 원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어둠의 삶에서 빛의 삶으로 달라진 삶을 영위합니다. 이러한 거듭난 생명을 가진 자의 삶은 변화됩니다. 그 변화된 삶은 거듭난 생명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1)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합니다.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합니다. 머리로만 아니라 가슴으로 진심으로 인정합니다.
2)죄를 지속적으로 짓지 않습니다.
요일 3:9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동사 시제는 헬라어 시제로 ‘현재 시제’입니다. 이는 반복적이고 지속적 동작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것’은 더 이상 계속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한두 번은 죄를 거듭 지을 수 있습니다. 여러번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하여 지속적으로 같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입니다.
3)형제를 사랑합니다.
요일 4:7,8,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거듭난 사람은 같은 피 값으로 산 하나님의 백성, 곧 영적 형제 자매들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백성의 소중함을 알지 못합니다.
4)위엣 것을 찾습니다.
골 3:1,2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5 말씀에 이르기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은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애쓰며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썩어질 세상 일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일하지 않습니다. 더욱 주님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드리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 일을 기쁨과 감격함으로 행하며 원망 불평이 없이 자원함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5)거룩한 갈등이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완벽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영화롭게 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기에 부패한 옛 사람의 본성과 투쟁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거듭났으나 자기 속에 거룩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
이 고백은 그가 초창기 신앙 생활을 할 때, 성화되기 전의 고백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에 이러한 갈등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놀랄 필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러한 내적 투쟁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힘입어 이러한 갈등에서 점점 승리하여 갈 뿐입니다. 심령 속에 거룩한 갈등과 영적 투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투쟁이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악을 거리낌과 양심의 갈등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거듭난 사건은 우리 인간의 존재 속에 일어난 최고의 사건입니다. 거듭남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최고의 능력의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죄로 인한 부패, 타락으로 인하여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그를 살릴 수 없이 죽은 존재였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신적 존재였습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입시켜주셨고 전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주셨으니, 이것처럼 큰 기적이 없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영원히 죽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 생명을 받은 우리는 이제 이 귀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자각하고 이 생명을 잘 가꾸어나갑시다. 거듭남은 단회적 사건이요 선물로 주어진 신적인 사건이요 또 이 생명이 자라나는 것도 성령의 역사지만, 동시에 이 소중한 생명을 감사하며 잘 가꿔가도 애쓸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 육체적 생명인 몸도 좋은 물, 좋은 공기, 좋은 음식을 공급하며 운동도 적절히 하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면 더욱 건강해지듯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생명도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성령의 생수를 마시며, 기도의 호흡을 늘 힘쓰며, 봉사의 운동을 힘써서 영적인 근력을 기르고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서로 은사가 불일듯 서로 일게 하면 우리의 영적 생명은 나날이 건강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과 충돌하고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갑시다. 우리 안의 타락한 본성과 악한 세상과 마귀의 시험 앞에서 때로 약해지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성 삼위 일체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넉다운(Knock down)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위로부터 부어지는 강한 새 생명을 힘입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거룩한 용사로 쓰임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