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리·죽비소리·철부지소리(73)
그해 여름의 추억
어디서 자랐냐고 누가 물으면 “내가 어릴 적자란 곳은 우리나라 명산 중의 하나인 지리산 자락”이라 늘 자랑하지만 사실은 어릴 적엔 지리산을 의식 못하고 자랐다. 전형적인 농촌 고을인 함양의 읍 언저리인 한징기(고향마을 이름)라는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통학했으니 명산인 지리산을 처다 볼 수도 의식할 수도 없었고 가장 높아 보였던 산이 초등학교에서 올려다 보이는 필봉산 이었다.
우리나라는 동양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사상에 길들여져 전통적으로 산을 끼고 집을 짓되 마을 앞은 물이 흘러내려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내가 어릴 적에 자라던 마을도 이 사상에 충실하여 나직한 산을 등지고 집들이 지어졌으며 마을 앞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산이 높고 깊어야 물이 많이 흐르나 주위 산이 높지가 않아 우리 동리 앞을 흐르는 시냇물은 언제나 실개천형태로 물이 흘러 마을 사람들은 물을 소중히 다뤘다. 사실 물이 좀 넉넉히 흘러야 물놀이도 할 수 있고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어 풍요를 누릴 수 있는데 흐르는 물이 언제나 량이 적어 해마다 벼논에 물대기를 위한 보(洑) 도랑을 치고 물길을 내어 지하로 스며들거나 물의 소실을 막으려는 노력이 여름이면 하나의 행사처럼 이루어져 오고 있다. 그것도 들판에 농사를 함께 짓는 이웃마을주민들과 함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데 두레품앗이 행사의 하나다.
그리고 우리 마을 높다란 지점 마을 가운데에 우물이 있어 사시사철 바위틈에서 샘솟는 생수가 철철 넘친다. 그 가까운 양지바른 쪽에 내가 살던 집이 있었다. 우물 옆구리 바위틈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마시고 야채를 씻으며, 텃밭에 물을 뿌리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펑펑 샘솟아 마을의 공동 천연우물이었으며 우물 위에 우물바닥까지 뒤 덮을 정도로 늘어뜨려진 큰 향나무가 심겨져 있다. 이 향나무는 이 마을을 열 때 바위 결에 우물을 파고 심었다고 전하기만 하는데 아마도 6~700년 은 됨직한 수명을 자랑한다. 즉 마을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지켜온 향나무 아래 샘솟아 넘치는 물은 바로 밑 미나리 논으로 흘러내려 일년 내내 미나리가 자라고 있다.
그 우물은 맑고 이가 덜덜 떨리도록 시리고 차가워 한여름 낮 점심때만 되면 아낙네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날의 정보도 나누고 의사소통의 장이 된다. 그리고 물을 퍼 물동이에 이고 집에 가서 식은 보리밥을 그 찬물에 둘둘 말아 먹는 여름의 밥상진경은 이 마을의 어려웠던 여름의 식문화(食文化) 풍경중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기억한다.
무더운 여름밤 마을 아낙네들은 펑펑 샘솟는 우물가 샘 도랑에서 채소를 씻는가 하면 어둑하고 인적이 뜸한 밤이면 웃통을 벗어 제치고 차가운 샘물을 떠 서로에게 등물(등 목욕)을 끼얹는데 물을 맞은 아낙네는 “아~이! 차가워”하면서 자지러지는 소리를 지르기가 일쑤인데 그럴 때 호기심 많은 조무래기 어린이들이 생 울타리 너머에 숨어 그 광경을 훔쳐보며 솔방울이나 땅에 떨어진 작은 생감을 주어다 던지며 깔깔대며 웃는 장난 끼를 발동하면 등목을 치던 여인네들이 울타리 쪽으로 물을 잽싸게 퍼서 뿌리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곤 했다. 좀 짓궂고 심술구진 아이들의 행동이라 그것으로 너그럽게 그 제일장 막은 내린다.
당시 농경사회의 여인들은 뜨거운 여름 햇볕에 땀을 흘리며 밭일을 했기 때문에 밤이면 그 시원한 샘 도랑이나 보 도랑에서 목
욕하는 게 낙이었다. 남자들이야 일이 끝나자마자 물이 있는 곳 어디서나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씻어도 흉이 아니고 당연시 했었으나 여인들은 그러지 못한 시대였다. 왜냐하면 그 시절엔 여자들의 덕율(德律) 이 엄격히 지켜지고 있던 때라 여자들은 몸을 함부로 노출시킨다는 것은 무척 금기시 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농촌에선 가정에 목욕시설이나 샤워장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 앞을 지나는 실개천에서 조금 벗어난 상류 쪽에 보 도랑을 만들면서 군데군데 물을 모으는 보가 만들어져 있어 밤이면 이곳은 마을 여인네들의 목욕장이었다. 젊은 아낙네들의 틈에 처녀들도 끼어들어 밤의 목욕향연을 여는데 어느 날 우리 또래의 조무래기들 다섯이 밤 수박서리와 반딧불 이를 잡으려고 들녘에 나갔다.
그날의 달은 초생 달이어서 달빛이 희미해 시야가 짧아 멀리 내다볼 수 없었던 밤이라 낮에 봐 두었던 수박 밭에 다가가 둘이는 망을 보고 두 아이가 수박밭에 숨어들어 더듬어 두덩어리의 수박을 서리하여 어깨걸망에 담아 제일 등치가 큰 친구가 둘러메고, 나는 반딧불 이를 잡아 조그마한 유리병에 넣은 것을 들고 논두렁을 지나 물이 흐르는 보도랑 뚝 쪽으로 걸어오니 뚝 가장자리 풀밭에 흰 점들이 4~5개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목욕하러 온 젊은 아낙네들이 벗어 놓은 옷들이었다. 우리 친구들 중 누군가 ‘어이, 저 옷 들을 어디 숨기던지 멀리 가져다놓자.’ 고 속삭인다. 장난 끼가 많은 친구들이라 누구하나 반대하지 않고 일제히 ’그래’ 라며 숨을 죽이고 살금살금 벗어 놓은 옷 무더기 쪽으로 다가가 각자 한 무더기씩 훔쳐들고는 사방으로 뛰어 모두 20~30m 쯤 떨어진 곳 여기저기에 던져 놓고는 모두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우리 조무래기 친구들은 사전에 약속한 대로 친구 중 사랑방이 있는 아이의 집으로 숨을 헐떡이며 모여들었다. 그리고 수박을 쪼개 나눠먹으면서 그 옷가지들을 여기저기 흩어 놓은 무용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사실은 옷을 벗어놓은 것을 본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지막한 냇물 뚝 넘어 에서 엎드려 어둠 속에서도 아슴푸레하게 전개되는 여인들의 움직임과 곡선의 시야를 즐기기도 했다. 흰 구름 같은 여인의 비눗물은 마치 흰 새털구름과도 같다고나 할까. 하여튼 밤하늘의 신비로운 옅은 구름사이로 비치는 흐릿한 달빛에 여인들의 그 곡선의 나상을 훔쳐보았으니 어린사춘기 조무래기들의 호기심과 심미안 등이 어떠했으리라. 그래도 저만치 옅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았으니 자세히는 볼 수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도 약간의 아슴푸레한 곡선과 물 끼 얹는 소리와 시원해 하며 내 지르는 여인들의 목소리 등이 숫기 없는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는 기억만이 지금도 추억으로 떠오른다.
그해 여름의 추억을 이따금씩 반추해 보면서 혼자 마음속으로 웃는다. 지금도 그해 여름의 추억을 되새김질함은 그 순박한 어린시절이 그리워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2008. 8. 17
한여름 밤의 끝자락에
첫댓글 제가 태어난 곳.유년시절을 보낸곳도 백천리 본백(한징기) 임니다 향나무 아래에있는 우물물을 질통으로 길러다가 온가족이 식수로 사용했구요.동네를 가로지르는 개천에서 목욕도 무지많이 했담니다...기역으론 산쪽으론 밭.과 대나무숲이 선~합니다 제가54살이니까 떠나올때까지 전기도없고 호롱불로 모든 조명을 대신한줄로 암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도 그립고 가고싶은 한징기입니다 너무 감동있게 읽었읍니다. 형님;권영태(작고)63세 동생;영우
권영우씨 한번 연락주세요. 이메일이 cheong-amhanmail.net이고 전화가 019-9010-6122이며 언제든 이 란들을 통해도 되니 고향 같은 마을이라 정말 반가워서 기다립니다.
고맙음니다 꼭 연락드리겠읍니다.
정말 소박하고 순박하면서 잔잔한 기억을 살려 추억담으로 쓴 글 정말 좋습니다. 그 어린시절이 숙기없었던 시절의 감정과 친구들 생각과 고향우물의 풍경등 잔잔한 감동입니다. 그리고 한동리에 살았다는 권선생의 꼬ㅁ리말에서도 그리움을 토로하니 역시 글이라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끌어 들이는 힘이 있는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그리움의 고향이고 옛 살던 향리와 어릴적의 추억을 끄집어 내어 써 본 내용입니다. 사실적인 내용인데 인상이 깊은 내용으로 비치니 그리움이 더욱 더 납니다.
숱한 얼릴적의 추억. 그 감동으로 닥아 오는 것 같습니다. 개그쟁이 어린들의 행동이라 돔 심한 장난이 있었어도 옛날엔 그져 싱그시 웃고 말았던 옛이 그빕고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어릴때의 옛추억 세삼 세김질이 되네요~물좋고 인심좋고 공기좋은 지리산 밑 줄기인 함양에서 태어난 것이 행복이고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는 무던날도 션한 빗줄기와 더불어 가을이 성큼 다가옴을 느끼는 계절입니다~그간 건안하시죠~
네... 건강까지 염려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그저 젊은 세대와 호흡을 같이하고 젊게살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송파아지매도 바로 저와 같은 맥락의 정신으로 참여하고 열심히 살고 계시는 모습으로 비쳐 좋아보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컴맹이 얼마나 많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