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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덴마크'라 불렸던 '못안마을' 지내동 | ||||||||||||||||||||||||||||||||||||||||||
(23) 지내동 ~ 경전철 ~ 내외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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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서도 역시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저 혼자 바쁘게 종종 걸음질치다 지나쳤던 곳이 있다. 안동 육거리 남쪽 모서리에 위치한 안동문화의 집이다. 김해시가 설립 운영하는 5개 '문화의 집'의 하나로, 삼안동은 물론 동김해에서도 유일한 지역 문화 활동의 본거지다. 2002년 3월, 541.2㎡짜리 아담한 2층 건물로 오픈했던 안동문화의 집은 파란색 지붕을 머리에 얹고 흰색 단장을 했다. 팍팍한 삶에 글 배울 겨를도 없었던 어르신들을 위한 한글강좌도 열고, 인터넷과 영상매체를 이용하는 청소년들이 드나들며, '가야'나 '앙상블' 등 클래식기타 동호회를 비롯한 각종 모임들이 대관신청을 통해 연습도 하고 공연도 선사하는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이다. 이제 10월부터 다시 여러 강좌가 열릴 예정이라는데, 담당하는 이미정 선생에게 물었더니, 스포츠댄스와 노래교실 등이 인기란다. 요즘 한류의 흥행이나 노래경연의 방송이 인기몰이 하는 것처럼, 역시 가무(歌舞)에는 특별한 흥미와 재주를 가진 민족인 모양이다. 하루 300여명 이상의 시민들이 쉬며 즐기고 공부하는 사랑스런 공간이다. 썬 고기가 아니라 간 고기를 쓰는 유니짜장의 맛이 특별한 북경짜장을 지나면, 얼마 전에 새로 지어 연한 핑크빛으로 말끔하게 단장한 못안경로당에 이른다. 마을경로당이 새로울 것은 없겠으나, '못안'이란 이름 때문에 눈길이 머무는데, 옆에 서 있는 '못안마을유래비'를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맞은 편에 안동공단이 들어서면서 마을과의 경계에 연못 같은 도랑이 생겼는데, 그 안이라 못안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1947년 6월부터 못 지(池), 안 내(內)의 지내동이 되었단다. 유래비의 설명에 따르면 공단입주 이전에는 논농사와 비닐하우스 재배로 풍족하고 한가로운 농촌이었단다. 신어천 좌우에 펼쳐진 전국 최초의 비닐하우스 재배는 이 언저리를 '한국의 덴마크'로 불리게 했을 정도였고, 지내동도 그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50여년이 지났을 뿐인데, 공장과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들이 난립해 있는 지금 그런 추억은 어느새 아득한 옛일이 되었다.
경로당과 유래비 사이로 난 아스팔트 언덕길을 올라가면 2009년 3월에 개교한 활천중학교가 높은 자리에 올라있다. 아직 졸업생이 없는 새내기 학교라 모든 것이 깨끗하고 새롭기만 한데, 비록 인공이긴 하지만 밝은 초록색 잔디마당이 새싹처럼 청소년들의 밝은 미래를 상징하는 듯하다. 양수만 초대교장 이하 47명의 교직원들이 24학급 731명(남 391명·여 340명)의 학동들을 키워내고 있는데, 방과후학교에 제과제빵의 강좌가 들어 있고, 전교생에게 한자 6급의 자격증을 따게 하려는 가르침이 눈에 띤다. 이에 비해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만, 아래쪽에 있는 활천초등학교는 이미 66회 1만1천404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5월 20일에 안동에서 개교해, 1974년 4월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왔다. 어느새 우후죽순처럼 세워진 공장들이 사방을 에워싸게 되었지만, 교문 안쪽에 서 있는 공적비와 명패는 학교의 전통을 말해준다. 오른 쪽의 공적비는 광복직후 가난한 나라 때문에 사재를 털어 땅을 사들이고 교실을 지어 올렸던 박선일(朴先日) 선생의 공적을 기념한 것이고, 왼쪽 '활천국민학교'의 명패는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는 1996년까지 사용되었던 옛 교문의 것이란다. 오늘도 18대 이종칠 교장 이하 85명의 교직원들이 39학급 1천112명(남 563명·여 513명·유치원생 36명) 학동들의 꿈을 위해 씨름하고 있다.
활천초등학교 정문을 나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눈 앞에 거대한 아파트 장벽이 펼쳐지는데, 신어산 남쪽 끝자락에 의지한 지내동원아파트다. 2000년 4월에 입주를 시작해 2004년 1월의 4차까지 총 1천606세대가 모여 사는 동네가 되었다. 아파트 아래 상가 골목을 관통해 남쪽으로 나가다 보면 끄트머리 왼쪽에 서 있는 큼지막한 표지석 하나를 만나게 된다. 밝은 색 화강암 원석에 '배중개'라 쓰고, 그 밑에 유래를 적었다. 배중개란 '경상도속찬지리지(1469년)'에 활천리의 이수개원(梨樹介院)으로 기록되어, 활천고개 너머 지금의 신성미소지움 앞의 청석사거리를 지나, 여기서 대동으로 넘어가는 길의 역원(驛院)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또 남해바다가 여기까지 들어와 풍랑 때 배를 정박시키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배중개의 '개'는 바다 또는 포구에서 비롯되었고, 배나무의 이수(梨樹)로도 기록되었으니, '배나무가 있는 포구의 역원'이 이곳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있었던 주천(舟川)이란 옛 지명이 타는 배(舟)와 먹는 배(梨)의 양쪽 모두를 나타낼 수 있는 지명임이 흥미롭다. 여기가 포구로 이용되었던 역사를 훨씬 더 올려볼 수 있게 하는 증거가 윗쪽으로 100m 정도 올라간 곳에서 출토되었다. 1980년 7월 예비군진지 구축 중에 발견되어 동아대박물관이 조사했던 독무덤(옹관묘)에서 2천 년 전에 일본열도의 왜인들이 사용하던 야요이토기가 김해의 토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지내동옹관묘(지내동 산 43번지)로 명명되었던 이 유적은 2천년 전의 가락국 초기 일본열도 왜인들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증거가 되었다.
여기서 동김해의 이야기를 접고 내외동으로 걸음을 옮기기 위해 이제 막 개통된 경전철을 타려면 바로 아래 지내역도 있다. 하지만 부산~김해경전철 김해 구간의 시작이고 부산시와의 경계를 이루며 김해시의 관문이 되는 불암역까지 걷기로 한다. 지내역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오래된 팽나무 그늘 아래 유효자정려비가 서 있다. 정려란 표식의 깃발 정(旌)에 마을 문 려(閭)로 나라에서 효자나 열녀를 기리기 위해 내리는 깃발이나 홍살문 같은 것인데 이 동네의 효자 유치선(劉致善)이 정려를 받았던 기념으로 1902년(광무 6년) 여름에 세워진 비석이다. 한 겨울에 유효자의 편모가 병이 들어 회를 먹고 싶다고 하자, 효성을 듣고 지나던 어부가 고기를 주고, 약재상이 산삼을 주고 가 병을 고쳤다는 사연이 비의 뒷면에 새겨져 있다. 조금 더 가면 '양장골삼거리'라 쓴 도로표지판 대로 왼쪽 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양장골이다. 좋은 장수의 양장(良將), 또는 좋은 동네의 양동(良洞)이라고도 한다. 백학이 춤추는 숲의 명당이 있어 자손이 많고 아주 부귀하게 되는 땅이라 이런 이름이 남았다 하는데, 무덤을 쓰는 음택(陰宅)으로는 그런지 몰라도, 양택(陽宅)의 마을은 김해대로와 남해고속도로에 깎여 나가고, 경전철의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이 앞을 가리게 되었다. 김해대로를 개설하면서 불암(佛岩)의 유래가 되었던 부처바위 미륵불을 깨내면서 이 동네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미륵불은 다음 유토피아 세상에 올 미래부처니까. 점심시간이 되어 시장기에 회가 동하지만, 바쁜 걸음에 장어골목도 모른 체 하고 불암역에 오른다. 아, 그 전에 김해교를 부산 쪽에서 건너오다 보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경전철의 교각을 지금같이 단순한 시멘트덩어리로 놔둬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적어둬야겠다. 반대로 김해교를 건너가면 부산 쪽에는 같은 위치의 교각 앞에 부산시 강서구를 알리는 표지석과 갈매기 같은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이에 비해 김해 쪽에는 김해를 알리는 표식이나 상징이 전혀 없다. 김해교 위에 걸쳐져 금동관을 본떴다는 황금색과 청동색의 사각형 교각은 그 상징의 의미를 알기 어렵고, 예전에 있었던 '가락고도(駕洛古都)'비는 부산 쪽을 등진 채 세워져 김해에서 부산으로 나갈 때나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김해교를 건너 올 때 제일 먼저 보이게 되는 교각은 절대 김해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활용되어야 한다. 봉황대의 황세장군을 지구를 떠받치는 아틀라스 같이 표현하든지, 단순하게 '가야의 옛 서울'이라 쓰든지, 아무튼 이 교각과 주변을 활용한 인상적 랜드마크의 조성이 필요하다.
드디어 불암역에서 지난 9월 16일에 개통한 경전철에 오른다. 오랫동안 경전철이냐 지하철이냐의 시비가 있었고, 재원 확보의 어려움과 건설 과정의 갈등을 거쳐, 민간투자사업으로 2006년 4월 착공해 총사업비 1조 3천억 원이 투입되어 완성된 부산김해경전철이다. 앞으로 예상되는 적자보전의 문제로 걱정도 되고 시끄럽기도 하지만, 1천300원짜리 표를 끊고 개찰구를 지나 플랫홈에 올라선 필자는 우선 "우리 동네에 이런 훌륭한 탈 것이!"라는 감동이 먼저 솟구쳤다. 아마도 오래 전 일본 유학시절에 도쿄에서 타 보았던 하네다공항 가는 모노레일의 감상이 오버랩 된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도쿄 오다이바 행의 '유리카모메'란 경전철을 타보았기에 운전석이 없는 것에 새삼 놀랄 것은 없었으나, 앞뒤좌우로 펼쳐지는 경치는 지금까지의 김해와 전혀 달리 보여 필자를 더욱 설레게 했다. 대부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의 승객들 때문에 혼자 흥분을 삭일 수밖에 없었으나, <김해뉴스>의 주장처럼 이미 개통한 이상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훌륭한 자산을 자랑하고 지혜롭게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6월 시민들 앞에서 타 보지도 않은 '경전철의 문화관광 자원화'를 발표했던 게 새삼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왜, 안 돼?"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며 관광자원화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남해고속도로를 달리거나, 장유쪽에서 오다 보면 김해시가 거대한 콘크리트벨트에 꽁꽁 묶여 있다는 인상도 있었지만, 높은 데서 내려다보는 김해평야, 인제로, 시청, 흥부암, 봉황대유적공원, 해반천, 내외동의 아파트 숲, 대성동고분군, 시민의 종, 국립김해박물관, 문화의 전당, 연지공원은 아름다웠다. 공짜로 몇 번을 오가는 사이에 국립박물관을 관람하고 박물관역에서 사상으로 간다는 일본인 2명을 만났다. 다짜고짜 어떠냐 물었더니 자리가 좀 딱딱하긴 하지만 승차감도 좋고 훌륭하단다. 자기가 사는 치바(千葉)에도 모노레일이 있는데, 케이블카처럼 차량이 선로에 매달리는 형식이라 승차감이 좋지 않은데, 그에 비해 경전철은 참 좋다는 거다. 예상 적자를 얘기하자, 일본에서도 모노레일은 당연히 적자라면서, 좋고 편리한 것은 분명하니, 그 이용을 위해 우리가 돈 벌어 세금 내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덧붙여 주었다.
새 탈 것에 대한 흥분도 잠시, 내외동의 답사 시작을 위해 박물관역에서 하차한다. 계단을 내려 오른 쪽으로 접어들자 발밑의 쿠션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곧잘 일어나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시멘트벽돌의 보도블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처음 타탄트랙 같은 이 감촉을 느꼈을 때는 내외동만 잘 해준다고 불평했던 적도 있다. 내외동의 발걸음을 어디에서 시작할까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시내는 분산에서, 동김해는 신어산에서 각각 시작했던 것처럼, 내외동의 발걸음은 당연히 마을이 기대고 있는 경운산에서 시작하는 게 당연했다. 다만 이번에는 새로 시작된 '김해의 산을 거닐다'와 중복될 수도 있다는 핑계로 종주는 사양한다. 수인사 뒤의 전망대에 올라 내외동을 내려다보고, 남쪽의 주촌고개로 내려와 내외동의 아파트 숲이 시작되었던 외동주공아파트에서부터 발걸음을 시작하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수인사를 향하기에 제일 가까이 있는 박물관역에서 차를 내렸던 것이다. 해반천 위에 걸쳐진 경원교를 등지고 구지로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며 연지마을의 동부(1996.12, 402세대), 현대1차(1995.9, 402세대) 아파트를 지나, 파출소와 연지우체국에서 연지사거리를 건너면서 하이마트와 삼성디지털을 넘겨다 보고, 오른쪽의 대우아파트(1996.6, 504세대)와 왼쪽의 가야웨딩홀을 지난다. 내동사거리에서 연립주택과 작은 상가들이 늘어선 비탈길을 올라 수인공원에 이른다. 수인공원을 가로지르면 수인사로 올라가는 도로가 열리는데, 조금 앞에 왼쪽으로 수인사가 보이고, 오른쪽에 수인사유치원의 철제교문이 보인다. 비스듬히 수인사로 들어가는 시멘트다리 밑에는 비단잉어들이 헤엄치는 연못이 있다. 마침 흰색의 단아한 연꽃 몇 송이가 철 지난 꽃을 피우고 있다. 맨날 이 모양이다. 경운산은 커녕 수인사에도 들어서지 못했는데 벌써 지면이 다 되었다. 경운산에서 시작하는 본격적인 내외동 돌아보기는 다음으로 돌려야 할 모양이다.
이영식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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