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양산 통도사는 영남알프스의 영축산 아래에 있는 불보사찰이다. 통도사 산문에서 청류동천까지의 길인 무풍한송 길은 두 발로 사유하며 걷기에 좋은 길이다. 그 길 주변의 바위에는 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름바위는 역사의 방명록이다.
바위에 새긴 이름 중엔 오욕의 인물도
세월의 찬바람 맞고 휘청이는 소나무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가져온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금강계단에 모신 곳이기에 대웅전에 불상이 없는 사찰이다. 1983년에 세운 통도사 산문은 사찰에 들어가는 문이자, 이곳과 저곳을 구분하는 경계이다. 깨달음의 길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세상에 깨달음을 실현하려는 출구이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집착을 버리는 길이다. 부처님에게로 이르는 길은 짧지도 길지도 절대 않다. 물리적 거리와 인문 문화적인 거리는 시간에 비례한다.
무풍한송 길은 찬 바람에 소나무가 춤추는 길이다.
산문을 들어서면 무풍교 위에 바람에 춤추는 소나무를 볼 수 있다. 무풍한송 길이다. 한눈에 보아도 소나무들이 휘어진 길 따라 보인다. 굵은 나무는 적어도 150년이 된 나무들이다. 청류동천을 따라 노송과 계곡이 어우러진 길이다. 허리 굽은 늙은 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서늘한 바람이 휘청 지나가면 마디마디 가지가지가 휘늘어져 춤을 춘다. 나무들은 서로 다정하게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어깨를 기대기도 하고, 용이 하늘로 승천하듯 휘어져 힘차게 오르기도 한다. 새색시같은 비 오는 듯 하는 날, 안개가 흐릿한 날 그리고 이른 아침 이 길을 걷노라면 마치 신세계로 가는 느낌이 든다. 흙향, 솔향, 풍향이 섞인 길이다.
노송 사이에는 경봉스님이 1935년부터 38년까지 1정(町)인 109미터 마다 세운 석등이 있다. 중간 중간 없어진 석등을 최근 새로이 세웠다. 등은 밤길을 밝히기 위한 것, 번뇌와 무지로 가득한 세계를 광명의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이 석등의 형식이 왜식이라면, 최근 석등은 한식이다. 왜식도 우리 문화의 비극적인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청류동천, 통도사 자장동천에 비견할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길을 걷노라면 오른쪽 바위에 나무아미타불과 천포담(千抱潭)이란 글씨가 보인다. 천포담 스님은 일제강점기 인근 지산 평산 마을 집에 임산부가 출산일이 가까웠다는 말을 들으면, 항상 ‘미역 한 줄, 쌀 닷 되’를 보내주는 자비행을 베풀었다. 조금 더 가면, 너럭바위가 산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검붉은 빛을 하고 있다. 용피바위(용혈암)다.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때 구룡지에 있던 아홉 마리 용 중 여덟이 도망가다 부딪힌 바위다. 다섯 용은 양산 오룡골로, 용 셋은 울산 삼동골로 도망을 갔다. 눈먼 용 한 마리만 통도사를 수호하겠다고 구룡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소나무는 용틀임하듯 하늘을 향해 치솟아있다. 붉은빛은 띤 육송이다. 한국인은 소나무와 더불어 태어나고 살다가 죽는다. 태어나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생솔가지 꽂은 금줄을 쳤다. 소나무 집에서 솔가지 불을 때고, 송기와 송편 등을 먹고, 나중에 소나무 관에 묻혔다. 나무의 몸통을 자르면 다른 나무는 자라지만 소나무는 죽는다. 오로지 햇살 같은 정의로움만 추구하는 나무이다. 하여 그 아래에는 여타의 나무들이 자라기 어렵다. 문제는 소나무 이외의 나무를 잡목이라 하는 데 있다. 잡목은 민중과 같은 나무이다. 소나무 같은 사람도 잡목과 같은 사람도 모두가 깨달으면 부처이다.
노천정 근처에 약수가 있어 목을 축이며 걷는다. 길은 물소리와 같이 한다. 소나무 있는 길이 지겹다고 중간 중간 맑은 물길을 보여준다. 족탁하며 여유를 가지는 길이다. 하천의 소나무는 물을 향해 솔가지를 축 내려뜨리고, 길 양쪽의 나무들은 나그네를 위해 여름 햇빛을 막고 서있다. 두 번째 정자인 청류동 맞은편 길은 다비장 가는 길이다. 입구에 “올 때 한 물건 가져온 것 없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 온갖 것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지은 업에 따른 몸이 있을 뿐!”이란 글이 있다.
길 주변의 바위에는 어김없이 이름이 새겨있다. 통도사를 방문한 방명록이다. 석수장이는 일정한 돈을 받고 이름 새겼다. 영·정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인물들이 많다. 길 오른편 솔숲에 우뚝 솟은 바위는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중에 최시명의 이름이 있다. 고종 때(1899) 언양군수로 부임하여 문학단체인 헌양시사(獻陽詩社)를 정비하고 작천정(酌川亭)을 1902년 건립하였다. 또 그해 반구대 근처 반고서원 옛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비명을 짓는 등 문풍(文風)을 진작시켰다. 그는 인근 바위에 칠언율시를 남겼다. “出洞門時回首見(출동문시회수견) 마을 문 나올 때에 고개 돌려 보니, 水聲猶在梵鐘樓(수성유재범종루) 물소리는 여전히 범종루에 있구나.”
청류동천은 여름날 족탁하기에 좋은 곳이다.
청류교 근처에 오면 이름바위들이 모여 있다. 바위 면마다 틈이 없을 정도다. 이름을 남겼으나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그들은 알았을까. 양반, 관료, 친일매국노, 일본인, 스님, 기생 등 다양한 사람들의 방명록이다. 대종교 2대 교주인 김교헌, 통도사 명신학교 교장이었던 윤치오, 일제강점기 통도사 구하스님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목은 이색,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의 이름을 누군가 새겨 놓았다. 중앙의 큰 바위 민치헌 이름 옆에 ‘경주 경월, 난향, 은량, 추파, 경주 옥선’이 보인다. 경주부윤이었던 그를 따라왔던 경주 관기의 이름이다.
청류교를 지나면 영축총림 바위가 보인다. 말 탄 자 내리라는 하마비 뒤의 큰 너럭바위가 부채형상을 한 선자바위이다. 서예 연습하듯 이름이 가득하다. 숲 속의 선자바위에는 을사오적 이근택, 울산 장대벌에서 천주교인을 참수한 윤선응도 있다. 하지만 도로 쪽 바위에 더 많은 역사적 인물이 많다. 1910년 양산 내원사에서 49일 기도를 한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는 내원사와 같이 통도사에도 포덕 51년 1월에 그와 수행인 이름을 새겨놓았다. 그 옆에는 백산 안희제와 같이 활동한 전석준이 있다.
선자바위 도로변에 있는 김홍조, 박영효 바위이다.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인물들이
이 주변 바위에 많이 발견된다. 이름이 빛나기도 하지만 오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 다른 바위에는 1789년 정조의 명을 받아 일본지도를 그릴 임무를 띠고 김응환과 같이 온 김홍도가 있다. 그 옆에는 전라도 관찰사로 전봉준을 체포하는 공을 세운 이도재도 있고, 다소 누운 바위에는 갑오년 동학 농민군을 토벌한 공로로 동래부사가 된 후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이 있다. 지석영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추도사를 읽었지만, 경술국치가 되자 일제가 불법으로 조선을 병탄했고 자신이 일제를 위한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인식한 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여러 차례 총독부로부터 수많은 공직을 권유받아도 단 한 번도 수락하지 않았다.
또 김정훈, 김홍조, 박영효 바위도 있다. 박영효(1861~1939)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지만 일본 귀족으로 친일의 길을 죽을 때까지 걸었다. 그의 의형제인 김홍조(1863~1922)는 반상의 차별 철폐, 종의 폐지와 해방, 적자와 서자의 차별철폐, 의복개량과 색옷 장려, 자작농 육성, 교육권장을 한 울산의 선각자이다. 박상진의 대한광복단 비밀요원으로 군자금을 지원하였고,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이었고, 지방신문의 효시인 경남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사장과 발행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철저한 불교 신자였던 그는 통도사 자장암 마애불 조성에 시주하기도 하였다. 또 작천정과 학성공원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김정훈은 그의 사위인 듯 보인다. 이 밖에도 많은 역사적 인물이 통도사 이름바위에는 있다. 이름바위들은 여름이면 이끼가 껴 잘 보이지 않는다. 부끄러운 혹은 자랑스러운 이름이지만 감추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인가 보다.
통도사 창건설화를 간직한 용피바위, 저 빗물은 마치 용의 핏물 같다.
모퉁이를 돌면 통도사 부도원이 보이고 실질적인 통도사 산문이 보인다. 솔향에 취하다 이름을 보며 역사를 생각하며 걷는 무풍한송 길의 끝에는 부처님이 기다리신다.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일제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가진 자만이 통도할 수 있다.
첫댓글 비바람 세차게 부니
작년 이맘때쯤
첫 산행이 기억납니다.
안녕하시지요?
역사공부의 장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