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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의 선구자 전덕기 목사 ETC
2009/06/04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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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석(협성대학교 신학부 교수)
전덕기는 한말 격동기의 시대에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바쳤던 큰 인물이다. 단순히 기독교인으로서 교회의 울타리에서만 활동했던 인물이 아니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던 민족의 지도자였고 애국자였다. 당시 전덕기를 중심으로 국내 모든 민족운동이 주도되었고 상동교회 지하실을 거점으로 해서 민족운동이 전개되어 전덕기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후대에 상동파라고 부를 정도로 강력한 인맥이 형성되었다. 그의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구국운동은 한국교회사는 물론 한국사에서도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덕기의 입교 동기와 목회 배경
전덕기 목사는 1875년 12월 8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나이 9세 때에 부모를 다 잃고 숯장사를 하는 숙부 밑에서 성장하였고, 가난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총명한 사람이라 이웃집 서당에 가서 어깨 너머로 배워 약간의 한자를 알게 되는 수준까지 되었다. 전덕기의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당시의 지도자나 우국지사들과 같이 높은 교육수준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가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기 때문에 후에 민중을 위한 목회의 토대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전덕기가 17세 되던 1892년에 정동에서 선교사업을 하고 있던 스크랜튼 선교사와의 만남은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미 감리회 선교사이며 의사이자 목사인 스크랜튼은 1885년 5월에 내한하여 서울 정동에 일찍이 자리를 잡고 시병원이란 병원을 설립하고 의료선교를 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도 역시 정동에서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여성 교육과 선교에 진력하고 있었다. 전덕기는 스크랜튼 선교사의 집에서 기거하며 일하고 밤에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상동교회에 세례(1896년), 입교함으로서 상동교회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
스크랜튼은 정동에 있던 병원을 민중 선교의 본거지인 서민들이 많고 사람들이 밀집해 모여있는 남대문으로 옮겼다. 1893년 그는 병원교회를 정식 상동교회로 조직하며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된다. 전덕기는 스크랜튼이 민중중심의 선교를 해나갈 때에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도와 일했다. 전덕기는 스크랜튼과 함께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인품과 신앙을 본받게 되었다.
전덕기는 상동교회에서 크고 작은 일을 돌보며 청년회원과 회장으로서, 또는 속장과 교회 중견직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01년 상동교회의 새 예배당이 완공되던 날 권사로 임명되어 담임목사와 신도들로부터 촉망받는 일꾼이 되었다. 결국 그는 1902년 미 감리회 연회에서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감리교 협성신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신학회의 전도사 과정을 꾸준히 참석한 그는 1905년 집사목사(현재의 준회원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다. 스크랜튼이 사임한 후 뒤를 이어 전덕기 목사는 1910년에 장로목사(현재의 정회원 목사) 안수를 받고 상동교회를 맡아 목회하게 되었다.
--전덕기와 상동청년학원
전덕기는 1897년에 설립된 상동청년회에 임원 및 회장 등 주요직책을 맡으면서 활동을 주도해 나갔다. 1903년부터 전도사였던 전덕기는 부담임자로서 실질적으로 상동교회에서 설교, 심방, 교회 일들을 돌보았다. 상동교회에서 청년회를 주도할 때부터 그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보며 국운회복과 민중계몽에 힘쓰며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결국 수 천 여명의 애국 청년들이 전덕기가 있는 상동청년회로 모여들었다. 당시 독립협회의 해산으로 인해 구심점을 잃은 지도자들이 상동교회로 모여들고 포용력이 있었던 전덕기를 중심으로 다시 개화사상과 독립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게 되었다. 상동청년회에서는 기도회, 전도토론회, 연설회, 매일학교 운영 등의 활동으로 신앙함양뿐 아니라 근대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을 갖추도록 힘썼다.
상동청년회는 단순한 신앙활동과 친교에 만족하지 않고 교육을 통한 빈곤추방과 구세회복을 취지로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상동교회 안에는 이미 1897년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설립된 공옥여학교와 1899년 스크랜튼에 의해 설립된 공옥남학교가 있어 초등교육을 실시하고 있었지만 중등교육기관이 없었다. 이들의 노력의 결과로 상동청년학원이 시작되는데 이는 중등교육기관으로서 경천애인 사상에 근거하여 지, 덕, 체를 겸비한 이 나라의 참된 일꾼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04년 10월 15일 상동청년학원이 개교되었는데 설립자는 청년회 회장 전덕기였고 교장에는 이승만, 부교장에 박승규, 교사에 스크랜튼 대부인(영어), 주시경(국어), 헐버트(역사), 류일선(수학), 김창환(체육), 이필주(군사훈련), 전덕기(성경, 종교)등이 맡았다. 이러한 교과목은 당시 새로운 것이었고 교사진 역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애국지사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교과목에 군사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전투훈련을 통해 구국정신을 고취시키고 일제에 대항하려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의 준비라 볼 수 있다. 그 후에 류일선, 노병선, 이필주 김진호, 이동령, 장도빈 조성환, 최남선, 남궁억, 장지연, 여준 등의 교사들이 상동청년학원에 재직하며 인재양성에 힘썼다.
학원운영자금에 있어서도 설립자인 전덕기가 나서서 재무를 맡고 운영비를 조달하기 위해 자기의 생활비를 절약하던지, 사회로부터 성금을 호소하고 학원을 꾸려나갔다. 전덕기 목사의 상동청년학원은 일반에 환영을 받았는데 3년제의 중등학교로서 교사진이 뛰어났으며 민족주의 학교로서 당시 장안에 화제가 될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그 후 수업연한이 4년제로 연장되었고 철저한 기독교적 인격자를 양성하는 것과 전문 지식인을 양성하는 더욱 수준 높은 교육기관이 되었다.
--전덕기와 민족운동
상동청년회의 청년학원 운영이외의 구국활동도 놀라운 것이었다. 1905년 8월에는 멕시코에서 노예처럼 생활하고 있는 교포 노동자들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단을 청년회 이름으로 보낸 일은 당시 감히 정부에서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또한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발표되자 상동청년회에서는 연일 수 천명이 모여 구국기도회를 열었고 지방 청년까지 모여 함께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벌였다. 또한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구체적으로 모의하여 청년들이 도끼 메고 대한문 앞까지 상소를 하고 시위를 주도한 일, 나아가 전덕기, 정순만 등 청년 임원들이 평안도 장사 수십 인을 모집해 박제순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는 모의까지 했다. 이렇게 그 어느 애국단체에서도 쉽게 할 수 없는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한편 일본의 적극적인 공작과 압력, 그리고 친일적인 선교사들의 정책으로 상동청년회의 활동을 신앙적이기보다 정치적이라고 못 마땅히 여겨 청년회 대한 해산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상동청년학원은 계속 유지되면서 민족, 구국운동을 해나간다.
전덕기는 이제 청년학원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하는데 1906년 초부터 기독교 구국단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활동은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단체와 연결되는데 양기탁, 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그리고 전덕기 등 이미 상동교회나 상동청년학원과 직간접으로 인연이 있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1907년 9월에 신민회가 조직되지만 신민회의 결집력과 전국의 조직확대는 상동파의 인맥과 역할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로 점진적인 국권회복을 꾀하는 정치집단이 신민회였는데 이러한 취지는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에서 전덕기 목사가 추구하였던 노선과 일치하였고 많은 상동파 인사들이 신민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상동교회 청년과 신도들이 애국단체 신민회의 핵심구성원이 되었고 당시 상동교회는 우국지사들의 비밀본부였다. 전덕기는 신민회 조직이나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실질적인 상동교회와 상동청년학원의 지도자 및 목회자로서 회원들에게 정신 및 신앙적인 힘을 제공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제2차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정보를 듣고, 이에 전덕기 목사를 중심한 상동파 사람들은 헤이그에 밀사를 보내기로 모의했다. 이 사건의 온상이 된 것은 상동교회 청년회였고, 그 배후에는 전덕기 목사와 헐버트가 있었던 것이다. 전덕기 목사는 신민회에서 재무를 맡아 일하였고 서울의 총감직을, 그리고 황성기독교 청년회(YMCA)에서는 의사부와 종교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그가 계몽강연에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강사로 초빙되어 강연할 때 대성황을 이루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맹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총독 데라우찌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명목으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의 실체를 파악, 이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로써 신민회가 사실상 해체되는데 전덕기 목사와 상동파가 타격 받은 것은 물론이요, 신민회와 인연을 맺었던 여러 인사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극히 약화되었다.
전덕기 목사의 사회활동 가운데 특징적인 것은 청년학원에서 발간한 두 월간지 중 하나인 <가뎡잡지>의 회계 일을 보면서 사회적인 면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민중들을 계몽시키려 노력했다. 전덕기에게는 청년, 장년, 상류층, 하류층 모두가 고루 계몽의 대상이었고, 서재필, 이상재, 안창호, 이동휘 이준, 이승훈등과 함께 YMCA 연설, 국민연설회 연설 등 대외 계몽활동과 청년학원내 강습소 활동 등을 펼쳐나갔다.
--전덕기 목사의 말년
그러나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고 상동교회와 청년학원이 큰 타격을 받게 되는데 수많은 인사들이 취조를 받고 투옥되며 전덕기 목사도 병석에 누워 자유로운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표면적인 민족운동은 못하더라도 병상에서 그는 국내 민족 운동가들이나 은신중인 국내 민족 운동가들과 연락하며 영향력을 미쳤다. 결국 불행하게도 전덕기 목사의 병세 악화와 더불어 상동청년학원이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1913년 11월 19일 제 7회 졸업생을 배출시키고 문을 닫고 말았다. 전덕기 목사는 결핵과 늑막염에 걸려 병상목회를 하면서 민족정신과 신앙을 권면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결국 병과 싸우다가 가족들과 전 교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1914년 3월 23일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최후의 말은 “주여 주여, 이 죄인을 구원하여 주옵소서”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나는 천사와 더불어 돌아가노라”는 말이었다. 장례식에는 그를 존경하고 따르던 조객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고양에 안장되었다가 1934년 일제의 강요로 인해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이로 인해 현재 그의 위패만 동작동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
--전덕기 목사의 목회와 사상
첫째 전덕기 목사는 언행이 일치하는 인격자였다.
그는 설교나 말에만 그치는 목회자가 아니라 설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가였다. 그가 목회하는 상동교회가 주로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병든 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기에 전덕기는 구휼과 치료, 나아가 죽은 후에 장례까지도 책임지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그의 삶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덕기 목사에게 감화를 받고 그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되었다. 뜻있는 인사들이 구국운동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전덕기 목사의 상동교회 지하실로 모여 들었는데 전덕기 목사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그곳에 모여 비밀회합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실천적 삶을 가진 진실한 인격자였기 때문에 그의 활동은 타인들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었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둘째 전덕기 목사는 민족 구원에 관심 있는 목회자였다.
그는 신앙의 문제를 민족 구원에까지 연결시켜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구국운동에도 앞장을 서야함을 역설한다. 결국 그에게서 개인 구원은 사회구원으로 연결된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갇힌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계급적인 사회에 평등을” 준다는 성서의 말씀을 그가 처한 목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그대로 실천하려 한 것이다. 사회구원적인 입장에서 항일 투쟁방법도 적극적이고 다양했다. 전덕기가 오늘에도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당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분명히 기독교의 아이덴티티를 찾고 분명한 메시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셋째 전덕기 목사는 포용력 있는 지도자였다.
전덕기 목사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의 포용력 때문이었다. 민중계층이 상동교회로 많이 몰리게 된 것은 단지 지리적인 조건이나 외적인 위안처로 삼기 위해서였기보다는 전덕기 목사의 넓은 포용력과 지도력 덕분이었다. 또한 지식인계층의 인사들이 상동교회로 모여들고 전덕기를 중심하여 구국운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도 역시 전덕기 목사가 모든 애국인사들을 품어줄 수 있는 큰 그릇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실례로 전덕기 사후에 민족 지도자들의 분열현상이 그의 표용성을 알려주는 분명한 증거가 되었다.
전덕기 목사는 기도와 성경 말씀에 근거한 진실한 신앙인이며 목회자였다. 그는 민중 속에서 출발하여 민중 속에서 생을 마친 민중 목회자였다. 그의 민중을 위한 실천적이고 헌신적인 삶은 당시 교회와 일반 사회에서 그의 지도력을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민족운동 전면에 나선 적은 없으나 그가 상동청년회와 상동청년학원을 중심한 민족주의자들의 조직과 활동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인물로 활약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민족과 국가의 운명이 암울한 상황 가운데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몸소 느끼며 참다운 애국 신앙인의 길을 걸었다. 청년으로 또는 목회자로서 목회 일선에서 시대적 소명을 충실히 감당했던 그는 한국교회사에서 길이 빛날 뿐 아니라 한국 민족사에도 지워지지 않는 거목으로서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