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밴빌이 존 반빌로 소개되었을때 1부 정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노년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늙은 딜레탕트의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뭐랄까 내면의 웅성거림과 세세하세 다시 채색을 하는 예전에 그리다 만 밑그림들의 이미지를 독자가 알아서 추적해가고 또 그러면서 노년의 주인공의 어떤 힘없고 자의식 넘치는 목소리의 위악적이지만 근본적으로 부끄러움에 대한 예술적 한탄이 조금 버거웠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으로 나온 반빌은 밴빌로 표기가 바뀌었다 더 거리감 있는 듯 하지만 종이질이 모조지로 바뀌면서 행간의 간극과 웅성이는 목소리 회한과 상실의 과정이 플래시백으로 현실과 교차하면서 들리는 무시간성의 문체를 조금은 쉽게 파악하게 된 듯도하다 왜 이런 식으로 글을 쓰냐고 할때 우리는 간혹 헷깔린다 이 목소리가 작가의 그것인지 독자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인지 즉, 작가가 독자를 향해 쓴 것인지, 맥스가 맥스 자신을 행해 쓴 것인지 불분명한 부분들이 꽤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는 암투병으로 고통스럽게(모르핀 주사!) 죽은 아내 애나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딜레탕트로서 무책임한 인생을 회고하던 맥스가 아내가 죽은 이후 자신의 자의식이랄까 자기를 정의하던 자의식의 희미한 그림자가 어디서 어떻게 뚜렷해졌는가를 추적하기 위해서 평범한 어린 시절에 '신들의 군림'처럼 다가왔던 이란성 쌍둥이 남매를 보았던 시더스 가로 돌아가면서 시작된다 사실 이야기는 시작과 끝이 없기에 순전히 맥스가 자신의 자의식을 새로 명명하면서 그와중에 자기에 관한 추억의 결에 대한 진실 혹은 의혹을 해소하는 그런 글쓰기가 자체의 목적이라 할수 있다
밴빌의 묘사는 참으로 적절하다 숙련된 노년의 예술과 미술에 관한 독특한 관점에 더해 항상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자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의 시선에는 고정관념과 다소 위악적인 왜곡이 곁들여 있지만 그것을 그자체로 자연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세월의 더께같은게 풍부하다고 볼수 있을만큼의 노련함을 띤다는 뜻이다
돌려말했지만 이런 문체는 피로를 낳게 마련인데 나는 <바다>에서 작가가 마련한 반전이 과연 그의 산문 미학과 잘맞는지는 의아하다 이런 개인적 결산과 이내 놀라움을 남기지 않는 파국 아닌 파국이 성큼 다가오는 부분은 한 사건의 관련자들의 실존을 한번 뒤엉키게끔 만드는데 그렇다면 이런 최총 관찰자의 관조라는 것에는 숨김 없음의 미덕보다는 장악하고 우회하려는 미학이 앞서게 되고 따라서 불친절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세울수 있다
다시 읽으라면 밴빌을 집어들지 않겠지만 선택받은 독자나 선택을 강요하는 독서가라면 시도해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전혀 다른 스타일 이를테면 토마스 울프나 필립 로스의 경우가 그립다
첫댓글사람이 나이가 들면 귀가 순해진다고 (이순), 주변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도둑당한 것들이었던 게 어디엔가 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라고 (황현산), 나이처드신 훌륭한 예술가들의 내공은 깊을수록 묘사가 가만해져서 표현이 악보의 음표들처럼 소리 덩어리로 보인다고 (그런 게 나이듦의 속됨이라고 읽어볼게요)
첫댓글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귀가 순해진다고 (이순), 주변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도둑당한 것들이었던 게 어디엔가
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라고 (황현산), 나이처드신 훌륭한 예술가들의 내공은 깊을수록 묘사가
가만해져서 표현이 악보의 음표들처럼 소리 덩어리로 보인다고 (그런 게 나이듦의 속됨이라고 읽어볼게요)
네 문제는 노년과 죽음인데 다소 나르시시즘에 가까운 독백과 문체들이 조금 읽기 버겁게 만드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밴빌은 정말 잘 안 읽히는 작가인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