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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으로 가는 길 (1부)
1부; 상해에서 황산(광명정)까지
일정 ; 2008년3/22~3/26일
동행자; 김종석 , 염영호
글쓴이; 염영호
- 먼저 이글은 지금이 2011년 12월인데, 이 글을 쓴 배경은 지난 2008년 3월에 황산에 가는 길,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보고 느낀 것을 쓴 것이기 때문에 다소 시차가 헷갈리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읽기에 이를 미리 이해를 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
-. 용량 초과로 사진이 게재가 안되어 죄송합니다.-
1일차;2008년 3월22일 (토요일)
09:40분에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꼭 가보고 싶었던 황산에 드디어 가게 되었다는 기쁨에 젖어 헤어나질 못하는 행복한 얕은 꿈도 잠깐, 벌써 상해에 도착 했단다. 비행기로 2시간이면 충분한 우리와 중국이 이렇게 가깝다고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10:40분(중국과 시차가 1시간임)에 상해에 도착하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국 황산에 가는 방법은 지금부터 3년 전에 내가 갈 때는 상해에서 버스를 타고 황주를 지나 다시 황산시로 가야 했는데 상해에서 무려7시간에서 8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공항이 개설되어 비행기를 타고 갈수도 있게 되어 있다. 상해에서 2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2008년 8월은 북경올림픽이 개최 되는 해이다. 그해 3월에 나는 친구와 둘이서 그 유명하다는 황산에 가는 길이다.
도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 상해에 오게 된 것이 3번째이다. 지난번 2003년에도 왔었다. 그래서 그때와 자꾸만 비교되는 것이었다. 하긴 5년(2008년기준) 전 일이지만 그때와는 천지차이가 난다.
포동공항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황포 강을 가로지르는 남포대교를 지나 상해 서포동의 와이탄 거리의 남경로에 들어 왔다. 남포대교의 150m높이의
주 탑의 상부에는‘남포대교’라고 글씨가 있는데, 등소평이 쓴 글씨라고 한다.
91년 12.1일 만들어 졌고 총길이는 8346m 이다.
상해에는 지금 8월 8일 베이징올림픽계기로 공항에서 바로 들어오는 자기부상열차 그리고 지하철공사가 한창이란다.
그러고 보니 시내곳곳에서는 공사가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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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랑비가 흩날리는 상해의 번화가 남경로 주변의 중식당에서 우선 점심부터 해결해야했다.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다. 아마도 관광객이 많은가보다,
중식에다 가볍게 고량주한잔으로 긴장을 풀어 본다.
< 남포대교, 등소평이 썼다는 남포대교 글씨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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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일정은 오후에 홍구공원 답사,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를 둘러보고 밤에는 서커스를 관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5년 전에도 같은 코오스로 관광을 하였는데 그때는 호기심이 많아 잔뜩 기대 하면서 즐겼으나 오늘은 황산외 에는 별로 큰 기대와 관심이 가질 않았다.
< 남경로 주변의 중국전통거리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안개가 자욱하고 비 내리는 황포강은 낭만적이기보다는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와이탄 거리는 관광객이 넘쳐나는 가운데 건물과 거리가 온통 올림픽 관련 마무리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서 일하는 노무자들이 왠지 처량하게 비쳐진다.
버스가 홍구 공원에 도착하자 비를 피하기 위해 각자 우산을 하나씩 사서 쓰고 관광이라기보다 일정에 떠밀려 홍구 공원을 찾았다. 사람은 별로 없고 한적하기만하다
홍구 공원은 잘 알다시피, 1932년 4월29일 윤봉길의사께서 일본이 천장절의 전승기념식을 거행하는 단상에 폭탄을 투척하여 시라카와 대장 등 을 사망케 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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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유적비가 그때를 말없이 지키고 있었다. 마침 비가 와서 그런지 그때가 더욱 가슴 아픈 역사임을 느끼게 했다.
< 이 유적비가 있는 곳이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장소이다>
< 유적비에서 친구와나, 그때의 슬픔이 비가 말해주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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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를 기념하는 초라한 윤봉길 기념관도 있다. 기념관은 윤봉길 아호인 ‘매헌’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다.
기념관은 모두 2층인데 1층에는 간단한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고 2층에는 당시 유품 및 윤봉길 흉상이 모셔져 있었다.
< 윤봉길 기념관 >
< 윤봉길 흉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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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홍구 공원을 나와 상해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으로 갔다.
잘 알려진 곳이라 별도의 설명은 않겠지만 5년 전보다는 깨끗하고 짜임새 있게 새로 단장이 잘되어 있었다. 김구선생님과 당시 정부요원들의 검소함과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역사의 현장은 아무리 보아도 고개가 숙여진다, 진정한 대한민국의 인물들이다.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입구>
< 대한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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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당시 역사적인 인물들 >
< 검소한 회의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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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청사를 나와 우리는 상해에 오면 꼭 보게 되는 서커스를 구경하고
황포강 옆 와이탄 거리의 야경을 즐겼다.
중국에서는 서커스는 묘기자체가 기와 예이다 . 어린아이들의 발랄하고 날렵한 모습은 감탄 그 자체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그들의 모습에서 그늘진 모습이 감지되어 마음이 쨩~하는 것을
애써 참느라 혼이 났다.
< 서커스 묘기 >
남경로에서 있는 태가촌(傣家村)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규모가 꽤 큰 식당이라서인지 식탁전면에 있는 무대의 공연을 보면서 식사에 흥을 돋우니 술맛이 더 해저 맛 나는 만찬이었다. 옆에 앉은 일행 중 노인 한분이 계셨는데 내가 술을 정중히 권하니 무척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술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동부가주’였다.
이분은 80세가 넘는 고령인데도 황산에 오기 위하여 2달 전부터 몸 체력관리를 해왔단다, 이북이 고향인데 체구가 단단해보였고 내가 각별히 대하니까 무척 좋아하는 모습이 나를 기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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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장식 식당 태가촌에서 식사를 하다>
< 동부가주가 우리를 흥이 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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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를 보고난 후라서 그런지 무대공연은 별 관심이 가질 않았다. 오히려 다음 코오스인 와이탄 거리의 야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다.
황포강을 중심으로 지금 우리가 있는 곳, 와이탄은 서포동이고 강 건너편
포동은 동방명주탑이보이는 초고층빌딩의 야경은 상해를 대표하는 불야성이다.
우리는 그 빌딩의 야경을 감상하면서 황포강을 따라 와이탄 거리를 걷는다.
8월 올림픽 때문에 곳곳에 도로에 공사가 한창이라 야경을 감상하는 거리는 다소 거슬린다.
<상해 와이탄, 남경로의 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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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포강건너 포동에 있는 동방명주탑과 고층빌등의 야경 >
< 동방명주탑을 배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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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차; 2008년3월23일 일요일
호텔에서 조식을 한 후 전용버스를 타고 황산으로 향했다.
상해시내는 많이 변해 있었다. 물론 5년 전일이지만 그때와는 아주딴판으로 발전한 모습이다.
곳곳에 입체교차로와 지하차도가 생겨서 시내 교통이 원활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상해 중심부를 벋어나며 상해인근 주변고속도로(?)변은 온통 대형 광고 입간판이 많이 눈에 보인다. 이것은 단 적으로 중국이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상해 포동을 지나 항주로 가는 4차선고속도로에는 이정표가 세련되게 정비가 되어 있었다. 속도제한은 100km/h 이다. 항주까지는 가는 시간은 3시간 반이나 된다고 한다.
시내를 벋어나자 도로변의 농촌풍경은 5년 전에 항주에 갔을 때와 같은 도로였는데 그때는 허술한 3층 구조의 가옥들이 1층은 습기가 많아 주로 창고용으로 쓰이고 2,3층은 거실로 쓰이는 특유의 구조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아파트나 아니면 우리나라 팬션 가옥 같이 바뀌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상해와 항주사이 고속도로변 농촌 아파트 가옥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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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때문에 외국인에게 보여주는 효과도 감안 했겠지만 아무튼 농촌의 가옥들은 수도 많아졌고 모양도 모두 바뀌었다.
<상해와 항주간의 고속도로변은 팬션 같은 농촌가옥들 >
물론 항주은 서호 등, 유명한 많은 관광지가 있어 관광객이 많이 붐비기 때문에 항주와 상해구간은 살기 좋고 넉넉한 풍경으로 비쳐지게 정부에서도 많은 투자를 했겠지만 변하고 발전된 모습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항주를 벋어나 황산까지 가는 도로도 최근 새로 개통된 도로였다.
속도제한은 80km/h 이다. 여기서도 황산까지는 상해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항주는 상해와 황산시의 중간이다.
최근 개통되었다고는 하나 도로의 이정표나 안전관련 시설 입간판은 부족한 것 같고 어딘가 어설퍼 보이기도 했으나 험준한 산길에 황산으로 가는 길을 제법 투자를 한 샘이다 ,그리고 곧 황산으로 가는 하늘 길도 열린다고 한다, 지금 공항청사를 짓고 있단다.
깊은 산 협곡을 통과하는 길은 육교를 놓고 터널을 만들어 쉽게 황산으로 진입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황산개발에는 황산도 유명하지만 사실은 이곳이 등소평 고향이라서 개발이 가속도가 붙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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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들어진 시골 휴게소도 아주 훌륭하게 크게 지어져있었다.
특이한건 주차시설이 협소해 보였다. 그것은 아직도 자국인들의 자가용 족은 없고 외국인 관광버스만 다니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쉽다. 톨게이트도 있지만 별로 차량들이 붐비지 않는다.
< 항주에서 황산으로 가는 고속도로 휴게소>
휴게실에서 잠깐 쉬는 동안에 매점에 가보니 각종 포장된 건과류 등 먹을거리가 넘쳐난다.
심지어는 대나무 죽순까지 익혀서 포장해 팔고 있었다.
나는 술을 한 병 구입하였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술인데 아마도 이곳지방에서는 유명한가보다(?) 중국술 치고는 도수가 약하였고 상표는 여인이 그려져 있었다. 버스타고 가면서 취하지 않게 즐기려고 산 것이다.
버스 안에서 친구와 한잔씩 나누어 마시니 긴 시간의 버스여행의 지루함도 없어지고 기분이 한결 좋아지는 가 쉽더니 농촌 마을이 멀리 보이며 도로 곁에도 밭에도 먼 산에도 온통 유채꽃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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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라인강 옆 산기슭에는 동화 같은 집이 옹기종기 있다면 여기는 유채꽃 모습이 아기자기 한 것이 이채롭다. 유유히 흐르는 강가에서 드러누워서 풀을 되 삯이고 있는 소들도 유채향기에 여유롭게 보인다.
< 황산가는 길에는 산과 들에는 유채꽃이 많이 피어있었다>
먼 산에 있는 유채꽃은 우리나라에서 봄이 되면 산에서 붉게 피는 철죽 꽃이 생각난다, 색깔만 다르지 풍경은 비슷하게 보인다.
그런데 아까부터 산에도 밭에도 묘지가 보이질 않는다.
주은래 시절에 매장문화에 대하여 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인구가 많아 매장대신 화장을 하여 후손들에게 온전한 땅덩어리를 물려주어야한다는 비판과 함께 주은래가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라고 하여 화장 문화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지도자의 솔선수범이 문화를 바꾸어 놓은 좋은 사례가 아닌 가 쉽다.
항주에서 3시간여를 달려 황산시내로 접어든다.
황산시(黃山市)는 9개의 현으로 이루어져있고 옛 이름으로는 ‘휘주’이다.
인구는 150만정도이고 항주에서 버스로 3시간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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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주를 황산시로 바꾼 후부터 황산시가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황산둔계공항’이 있지만 우리가 갈 때만해도 공항이 없었고. 건설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인천에서 비행기로 2시간30분이면 가는데 우리가 갈 때는 상해에서 황산까지 버스로 7시간여나 걸렸다.
황산시에 도착하여 우리는 점심을 한식으로 김치찌개를 먹었다.
맛은 별로였으나 그래도 칼칼한 김치 국물 맛은 중국 특유의 느끼함을 가시게 해주어 맛나게 먹어 주었다.
가이드는 우리가 긴 시간 버스에 지친기색을 알았는지 휴식 겸 잠시 발 마사지를 하고나서 옛 명, 청 시대 거리를 구경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감한다고한다.
발 마사지로 휴식을 취한 후 황산시내를 가로지르는 신안강(江) 옆길을 따라 버스가 달리다가 멈춘다. 옛 명, 청 시대 거리로 들어가는 입구인 듯
노가(老街))라고 새겨진 대문을 통과하여 걸어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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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강은 황산에서 발원하여 강폭이 60~70m나 되는 꽤 큰 강이었다.
도시의 크기에 비하여 아직까지는 오염이 크게 되지는 않은듯하였고 강가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이 어린 시절에 보던 우리네 강가 모습이었다.
신안강은 다시 항주까지 흘러서 항주에서는 전단강으로 이름이 바뀌어 부르게 된다.
옛 명(明), 청(靑)대(代) 거리에는 문방사우가 많이 보이는데 주로 붓, 그리고 먹과 거대한 벼루 등이다. 이것은 황산을 대표하는 물건이란다. 특히 휘주(황산시)의 먹은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상품이라고 한다.
고풍스런 옛 거리의 모습은 시대를 초월하여 마치 진짜 고대 중국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듯하였다.
< 신안강을 배경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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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명,청시대의 거리 입구 노가(老街)라는 글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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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명청시대 거리 >
< 붓과 먹을 파는 문방사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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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 벼루들 뒤에 있는 아이와 비교 해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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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청대의 거리에서 대형 벼루를 보고는 실용성보다 선전용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겠지만 아무튼 그 크기가 어린아이보다도 더 큰 벼루가 대륙적 기질을 느끼게 한다.
명, 청대거리를 지나 우리는 황산에서 직접 채굴 하는 유명한 보석들 중에서도 수정, 비취, 옥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옥이 유명하단다.
그래서 보석 소핑센터로 가보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어마어마한 전시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핑셍터 입구에는 중국 황제가 타고 다녔다는 구룡호(九龍船)가 있는데 이것을 모두가 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무게가자그만치 11.3톤이나 된다고 한다. 아홉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앞뒤로 조각 되어있는 배가 그 위용이 황제가 탓을 만 했지만 그 모형이 11.3톤이 넘는 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중국 장인의 섬세한 조각솜씨와 크기에 대륙적 기질을 또 한 번 느끼게 하였다.
<순 옥(玉)으로 만든 황제만 타고 다닌다는 구룡호(九龍船)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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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타는 마차를 옥으로 모형을 만들었다>
< 보석상의 재물을 지켜준다는 옥으로 만든 이상한 모습의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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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차 ; 2008년 3월 24일
황산에서 첫 하루 밤을 보내고 오늘은 본격적인 황산(黃山)을 오르게 된다.
등산화에다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서 나서는 마음은 황산을 오른다는 비장한(?)마음까지 들게 한다.
일행과 함께 버스를 타고 황산이 있는 황산풍경구로 향하였다.
황산시(黃山市)에서도 황산이 있는 황산풍경구(黃山風景區)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황산풍경구는 황산의 핵심 산맥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풍광구역이다.
황산총면적(1200평방 키로미터)의 13%를 차지하는 154평방 키로미터가 황산풍경구로 지정되어있다.
여기서 황산(黃山)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국황산은 양자강하류 안휘성에 위치하고 겉모양새는 우리나라 설악산이나 금강산과 비슷하고 면적은 설악산의 3배나 된다고 한다.
4계절이 뚜렷하고 250일정도 안개가 끼고 180일 정도는 비가 내린다고한다. 그만큼 좋은 날씨를 만나기가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중국10대 명승지중 하나이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과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있고 지질공원으로도 지정되어있다.
72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루어져있고 각기 형상에 따라 이름이 붙어져있다고 한다.
황산은 산이 없으면 기이한 돌이 없으며, 돌이 없으면 소나무가 없고, 소나무가 없으면 기이함도 없다고 한다.
그것은 기이한 돌과 소나무가 많다는 뜻일 거다.
황산의 5대 경치로 꼽는다면 기송, 괴석, 운해, 온천, 설경으로 이야기 할 수가 있다.
그리고 황산은 중화민족을 상징하는 만리장성, 장강, 황화와 같은, 황산이 대표되고 있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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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산(黃山)은 원래 이산(移山)이었다고 한다.
중국인의 선조 헌원 황제가 이산에서 도를 닦으면서 황산에서 기를 받아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신선이 되어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당명황(唐明皇)이 이천보6년(기원747년)에 이산(移山)을 황산(黃山)고쳤고 그때부터 황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황산으로 가는 길>
황산으로 들어가는 길옆에는 냇가에 맑은 물이 흐르고 산세는 그리 험하지는 않았으나 특이하게 대나무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나무들이 일부가 휘어져있고 곳곳에 대나무가 죽어서 베어내고 있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도 지난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영동고속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차량이 도로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는데 중국이곳 황산에도 50년만에 최고의 폭설이 내려 대나무가 휘거나 쓰러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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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에는 많은 유명인이 다녀갔다고 했다.
등소평은 고령의 75세인데도 도보로 다녀갔고 강택민, 주용기, 이광요, 진의, 노태우 등이 다녀갔다.
등소평이 황산을 개발하라고 명하여 8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개발되고 있다.
20년이 넘게 말이다, 그 좋은 예로 황산으로 오는 비행장, 고속도로 그리고 황산의 이름난 곳과 풍경구를 둘러보는 협곡 옆을 지나는 트래킹 길, 그리고 최고봉, 연화봉을 비롯한 정상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이 완비되었고 지금도 새 길을 만들고 있다. 그것도 모두가 수작업으로 말이다. 서해대협곡 트래킹 길이 한 달 후면 완공된다고 한다. 우리가 3월에 갔을 때는 그 유명한 서해대협곡을 멀리서만 지켜볼 뿐이었다. 지금은 서해대협곡을 좀더 가까이 볼 수 있는 길이 완공되어 수많은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주석의 고향이기도한 이 산간 오지에 등소평이 미래를 보는 혜안의 덕 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관광객이 13억(?)명이 다녀갔고 수입도 년간 12억원이나 된다고 현지 가이드가 자랑한다.
그리고 예부터 전해오는 황산을 비롯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서 태어나 부자가(왕서방) 되려면 소주로 가고, 신선이(이태백) 되려면 항주로 가고, 미식가가 되려면 광주로 가고, 죽을 때는 유주(고목관목이유명)로 가고, 풍수(매장문화)를 보려면 휘주(황산)로 가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황산여자는 예쁘다. 13세부터 여자아이는 독립을 한다. 그리고 황산 주민은 돼지생고기를 말려서 먹는 습관이 있고 또 음식을 길거리에서 서서먹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가이드의 재미나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태평케이블카를 타는 송곡역 승강장에 도착하였다. 케이블카를 타기 위하여 잠시 쉬는데 실제로 승강장 주변 공터에 생 돼지고기에 소금을 뿌려서 말리는 것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황산을 오르는 케이블카가 3곳이나 있었다. 물론 도보로도 오르는 길도 있다.
우리는 송곡역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단아역으로 가서 광명정을 오르는 길로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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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계획은 물빛이 영롱한 비취계곡을 관광 후 운곡케이블카를 타고 황산으로 올라가 사자봉, 시신봉, 서해대협곡(원경), 광명정, 비래석, 몽생필화, 등을 관광 후 다시 운곡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가 독단적으로 코오스를 바꾸어 버린 것이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겠지만 경비(?)를 줄이기고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송곡역승강장- 케이블카-단아역승강장-배운정-비래석-광명정정상-단결송-서해빈관-서해협곡(원경)단아역-케이블카-비취못-송곡역-호텔로 되돌아가는 코오스를 밟은 것으로 나중에 혼자 알게 되었다.
광명정 정상에서 주변에 연화봉, 천도봉, 단아봉, 사자봉 등 몇몇 산은 멀리 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으나 그 외 황산의 유명한소나무 그리고 유명한 산을 직접 오르거나 가까이 볼 수는 없었지만 지면을 통해 사진으로 소개하고자한다.
< 태평케이블카를 타기위하여 송곡역 승강장으로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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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산을 오르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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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을 오를 때는 외국인은 반드시 여권을 첵크하고 있다. 물론 케이블카를 탈 때도 여권이 없으면 못 탄다.
케이블카는 차례를 기다려 한꺼번에 30~40명 정도타고 올라가는데 최고 50명까지 탈 수 있다고 한다. 다소 복잡한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서로가 전망 좋은 조망공간을 확보하려고 야단들이다.
바위와 소나무가 많은 황산의 경관은 과연 듣던 대로 정말 빼어난 경관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도보로 오를 수도 있지만 케이블카로 쉽게 오를 수 있다는 것도 바뿐 현대인에게는 필요한 수단이 아닐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에 그리고 남해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니까 일부 환경단체들이 자연보호의 이유로 반대를 하지만 , 나는 생각이 다르다 오히려 자연보호차원에서라도 케이블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직접 산에 오르면 자연보호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황산은 과거, 현재 누구든 갔다 온 사람들이 침이 마르도록 저마다 감탄의 글을 많이 남겼으니 나는 그저 내가 오르고 내려오고 멀리서 바라본 있는 그대로 소개를 할 것이다.
< 카에블카를 타고 황산으로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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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부터 黃山의 아름다움은 대시인인 이백 등에 의해 칭송되었으며
明(명)나라 때의 지리학자이며 여행가였던 徐霞客(서하객)은
30년에 걸쳐서 중국의 산하를 두루 여행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五岳歸來不看山, 黃山歸來不看五’
“「五岳(오악)」즉, 泰山(태산), 華山(화산), 衡山(형산), 恒山(항산), 嵩山(숭산)을 보고 온 사람은 평범한 산은 눈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황산(黃山)을 보고 돌아온 사람은 그 오악(五岳)도 눈에 차지 않는다“고 했다. -
- 인터넷에서 퍼온글-
아무튼 황산을 두고 이이상 무엇을 더 표현 하리요!
걸어서는 2~3시간이 족히 걸릴 것을 우리는 케이블카로 20여분 만에 단하역승강장에 도착하였다.
배운정을 지나 서해대협곡으로 가는 길과 비래석, 그리고 광명정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갑자기 가이드가 자기는 여기서 기다릴 것이라고 하고는 등산로를 대충 알려주고 우리들끼리 광명정으로 올라가 다시 단결송이 있는 방향으로 내려오면 서해반점에서 점심식사준비를 하고 기다리겠단다. 속으로 “무슨 가이드가 이 모양이야!” 하고 화를 낼 번한 것을 꾹 참고 말았다.
< 좌측이 비래석 가는 길 우측이 배운정 및 서해대협곡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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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모두가 개발되어 흙을 밟지 않고도 올라 갈수가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자연석바위를 쪼개어 계단으로 평지는 보도블록을 깔아 놓았고, 시멘트계단과 난간도 있다. 이는 모두가 등소평이 모든 곳을 개방하여 보여주라는 뜻 반영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계단이 14만 여개나 된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이 힘은 들지만 단순한 길이었다.
20년 전부터 개발하여 지금도 개발하고 있다니 돌 계단하나만 보아도 어지간히도 끈질긴 그들의 노력에 감복할 따름이다.
그것도 모든 자재와 공구는 거의가 현대화된 장비가 아닌 수작업으로 이루어 진다고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는 자재운반도 헬리곱터로 운반하면 간단한데도 모두가 사람이 계단을 이용하여 운반 한단다.
비래석으로 오르는 길은 정말 힘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매일 운동을 한 탓인지 모르지만 친구가 매우 힘차해 하고 있어 잠시 쉬어가며 보조를 맞추어 갔다. 그리고 상해에서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였든 노인부부의 생각이 언뜻 낫다. 순간적으로 걱정이 된 마음에서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밑에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바위모양이 하늘로 나를 듯 하는 비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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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래석에서 >
< 비래석 아래 부분에는 화경 (畵境)이라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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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런데 혼자가 아닌가?
“할머니는요?” 하고 물으니까, 뒤에 따라 오르고 있다고 하며 그냥 지나가신다. 할아버지는 많이 지친 모습 이었으나, 애써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 가 엿보였다. 너희들에게 걱정을 주지 않겠다는 뜻일 게다. 조금 뒤에 따라오시는 할머님도 당당하시고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분이시다.
나이 드셨다고 혹시나 애물단지 취급받기가 싫으신 모양이다. 그래서 오시기 전에 체력훈련을 나름대로 많이 터득 하셨던 것인가?
그런 걱정을 하면서 오르다 보니 하늘을 나르는듯한 자세로 서있는 바위가 보인다.
아 ! 말로만 듣던 비래석인가 보다.
비래석(飛來石)은 하늘에서 날아와 서있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바위모양이 마치 하늘을 나르는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높이가 12m이고 무게가 360톤이라고 한다.
우리는 조심 스래 비래석을 올라갔다.
바위아래는 화경(畵境)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는데 과연 그림 같은 경치가 비래석 뒤로 세해대협곡(西海大峽谷)이 멀리까지 웅장하게 펼쳐져있다.
여기서 ‘해(海)를 쓰는 이유는 협곡의 구름(운해)이 바다와 같다고 비유해서 바다 海 를 써서 西海大峽谷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서해대협곡으로 가는 트래캥 로드가 4월 하순에 개통된다는데 오늘이 3월22일이니까 우리는 서해대협곡으로 가는 길을 갈수가 없었다. 한 달 후에 개통되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나와 친구는 비래석에서 서해대협곡을 바라보면서 협곡수직절벽에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트래킹 로드 마무리 공사를 하고 있는 것을 멀리서 볼 수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중국 무협소설에서 상상이나 하던 험준한 절벽 길을 내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니 여행이란 이래서 자꾸만 떠나가고 싶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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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서해대협곡의 절벽 산허리를 지나가는 트래킹 로드가 아련히 보인다>
< 서해대협곡 트래캥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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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운정에서 서해대협곡을 이어주는 보선교>
< 멀리서본 서해대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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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대협곡을 배경으로 한컷 >
< 서해대협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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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대협곡 배경으로 한컷 >
비래석을 내려와서 멀리서나마 눈앞에 펼쳐지는 서해대협곡을 아쉬운 마음으로 감상하면서 그 배경을 함께 사진으로 담았다.
지금은 광명정과 서해대협곡 갈림길로 들어가 배운정을 지나 서해대협곡으로 가는 첫 관문인 바위산허리를 뚫어 다리를 놓아 이어주는 보선교를 통하여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서해대협곡을 감상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런 아쉬움이 오히려 신비감을 더해주는 대협곡이었다.
그리고 비래석에서 멀리보이는 사자봉, 단아봉도 볼 수가 있었는데 직접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사진으로 소개하겠다.
다시 광명정(光明頂)으로 오르는데 정상에는 야구공같이 생긴 둥근 모형 건물과 안테나와 철탑이 있는 건축물이 보인다. 그것은 황산 기상대라고 한다.
광명정에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비래석을 지나고부터는 그리 큰 힘이 들지는 않았다.
<비래석에서 본 사자봉, 그 아래쪽이 서해빈관(호텔)이다>
< 비래석에서 본 단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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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래석에서 본 광명정, 좌측이 기상대이고 우측이 기상관리소와 산장이다>
< 광명정정상에 있는 가상대 관리소와 산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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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정 정상 해발 1860m 황산에서 2번째 높은 봉우리다 >
드디어 광명정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관광객들이 와있었다.
생각보다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광명정은 해발 1860m로 황산에서 연화봉 다음가는 두 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그래서 봉우리지체는 다른 봉우리와 달리 화려하지는 않으나 광명정에서 주변에 있는 산봉우리들을 사방으로 바라보는 광경은 최고였다.
광명정정상은 평탄하고 높아서 기상대가 설치되어 있고 동해의 기이한 전경과 서해의 주변 천도봉, 연화봉, 옥병루 .. 등 여러 봉우리의 경관을 볼 수가 있고 일출의 장관도 볼 수 있는 봉우리이다.
그리고 황산의 3대 주봉(主峰)으로서 연화(蓮花峰) 1864m, 광명정(光明頂) 1860m, 천도봉(天都峰) 1810m 로 최고봉으로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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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명정 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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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정에서본 태평케이블카 승강장과 단아봉 >
< 광명정에서, 뒤에가 단아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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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명정정상에서 천도봉과 연화봉을 바라보면서 >
< 좌측이 천도봉, 우측이 황산의 최고봉인 연화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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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정에서본 비래석과 태평케이블카가 아스라이 보인다.>
< 광명정주변의 사자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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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명정주변의 시신봉 >
<가운데가 비래석 좌측이 석인봉, 우측이 서해협곡으로가는 북쪽 출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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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의 광명정 정상에는 기상대관리소, 산장이 거의 완공단계에 마무리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이 공사자재를 나르는 인부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보인다.
중국은 어느 곳에나 그 지역 사람들의 생활수입을 보장하기위해 정부에서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 그 지역의 특산물판매독점, 관광 코오스의 차량운행, 등 관광수입을 보장해주는데 유명한 산에서는 짐꾼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곳황산에도 정상으로 나르는 왼 만한 물자는 사람이 직접 나르게 한다. 그래서인지 트래킹로드의 물자도 모두가 사람이 직접운반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수작업공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빨리빨리 조급증에 공기단축을 자랑할 만도 한데 중국은 끈질기게 수작업을 고집하고 있었다.
마침 한사람이 지렛대하나로 무게가 20kg정도 되는 봇짐을 양쪽에 2개씩이나 지고서 이곳 광명정 정상을 올라오고 있었다. 관광객으로서 혼자 오르기도 힘 드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 묻어나는 모습은 고단함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도 신기한데 순박하고 순 하디, 순한 모습은 내 마음을 짱~하게 한다.
정상 아래부근에는 빈관(호텔)이 10여개나 있어 일출을 보려거나 트래킹코오스 관광일정에 따라 숙박을 할 수도 있게 편의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잠시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고는 다시 올라 올 때와 다른 길로 하산을 하였다.
멀리 동해협곡이 보이는 방향 아래로 단결송을 지나 서해빈관으로 내려 갈 것이다. 그런데 가이드가 없어서 가이드가 일러준 대로 각자가 시간에 맞추어 내려가는 것이라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였는데 내려가는 길이 오르는 길보다 수월한 편이라 그냥 친구와 둘이서 내려갔다.
- 여기서 소개되는 사진 일부는 인터넷에서 퍼온 것입니다, 물론 허용된 사진만 발췌하여 편집하였습니다. 사진 관련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넓으신 아량으로 이해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45-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