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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 라인홀트 메스너가 벌써 70이 된다. 그는 기자 질문에 칠순 잔치로 친구 몇몇과 돌로미테에서 침낭 하나로 비박하겠다고 했다.
메스너는 지금도 8,000m를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었을 때, 에베레스트(8,848m)를 산소를 써가며 짐꾼 한둘 데리고 남들이 가는 루트를 따라 오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정 해보고 싶은 것은 6,000m 봉을 혼자 오르거나, 23세 아들과 함께 오르는 것이라고 했다.
- ▲ 친구들과 돌로미테에서 비박산행으로 칠순잔치를 대신하겠다는 세계 최강의 등산가 라인홀트 메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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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는 1978년 메스너가 하벨러와 둘이서 무산소로 등정했는데, 그는 에베레스트에서 내려와 3개월 뒤에 낭가파르밧(8,125m)을 알파인스타일로 6일 만에 단독 초등했다. 이처럼 한 시즌에 8,000m 고봉을 무산소로 연속 등반해낸 것은 알피니즘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이것으로 메스너는 히말라야에서 무산소·단독·연속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냈으며, ‘한 인간과 8,000m봉’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오늘날 세계 최강의 등산가가 누구인가 묻는다면 첫째로 라인홀트 메스너가 떠오른다. 메스너가 세계무대에 나타난 것은 지난 1970년 낭가파르밧 원정 때였다. 당시 그는 이탈리아의 파두아대학에 다니는 공학도였는데, 남달리 야성이 강해서 일찍부터 대자연과 만나면서 그의 운명이 열렸다. <모험으로의 출발>이라는 책은 그러한 메스너를 잘 말해 주고 있다.
메스너가 알피니스트로 돋보이고 등산 세계에 우뚝 서게 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물론 그의 행각의 절정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과 낭가파르밧 단독 알파인 등반이겠지만, 그렇게 이어진 히말라야 오딧세이가 끝내는 1986년에 가서 8,000m 최고봉급 14개 봉의 완등을 성취한 일일 것이다.
가장 큰 성과로 삼는 산악박물관 여섯 개째 개관
메스너는 히말라야 수직의 세계에서 남극대륙 수평의 세계로 이행하며 그가 남달리 주장하는 극한적 한계 상황에 도전했다. 그런데 이러한 메스너를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그의 저술 활동이다. 그 모두가 그가 아니면 펴낼 수 없는 극한의 세계에 대한 체험 기록이며, 그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것은 낭가파르밧 단독행기와 히말라야 자이언트 완등 기록이다. 특히 후자는 8,000m 14개 봉 완등자가 30명을 넘어섰지만 그런 기록을 제대로 정리한 사람은 메스너 외에는 없다.
그런데 칠순을 맞은 노등산가로서 메스너는 자기의 가장 큰 성과를 서슴지 않고 산악박물관 건립이라고 말했다. 산과 사람의 관계, 특히 산을 모르는 그들을 대자연이라는 환상적 세계로 이끄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산악박물관은 지금까지 남티롤 지방 다섯 곳에 세웠는데, 머지않아 여섯 번째 것이 보르넥에서 준공을 앞두고 있다. 산악박물관이 메스너 칠순 인생의 역사를 말해 준다는 것이 본인의 말이다.
메스너는 대등반에서 티롤의 깃발을 펼친 적이 없고 언제나 손수건을 높이 들었는데, 이것이 고향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알피니즘 세계의 선봉에 서 있으면서, 그는 전설적인 세로토레를 프리로 오른 데이비드 라마와, 한때의 알렉산더 후버 그리고 캘리포니아식 속공 클라이머 알렉스 호놀드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이들의 등반을 보면 떨어질 것같아 언제나 불안했다고 한다.
메스너는 일찍부터 한계에 도전하며 <죽음의 지대>라는 책을 썼지만, 본인 자신은 한번도 위기 속에서 헤매지 않았다. 그토록 그는 평소 가기 관리가 철저하고, 언제나 완벽하리 만큼 산행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했다. 그가 부딪쳤던 최대의 비극은 뭐니뭐니 해도 그의 첫 번째 8,000m 봉인 1970년 낭가파르밧 원정에서 동생 귄터를 잃은 일이다. 메스너는 이 일을 평생 잊지 못했으며, 그때 그 일로 당시의 대장과 오랜 세월 불화 속에서 법정 싸움까지 해왔다. 그가 남긴 <붉은 봉화>는 당시의 등반기다. 메스너는 그때 정상을 앞에 두고 돌아섰더라면 무사했겠지만, 동생이나 자기에게 낭가파르밧은 첫 8,000m 고봉이었고, 그들은 젊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메스너의 히말라야 자이언트 완등기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는 등반기로서 거의 완벽하다. 그것은 단순한 등반 기록이 아니고, 8,000m 거봉 등반역사 속에 자기 등반을 써넣는 식으로 저술했으며, 관계 문헌과 영상이 모두 짜임새 있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메스너의 그 많은 저술 가운데 내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1978년에 나온 <낭가파르바트 단독행(검은 고독 흰 고독)>이다. 이 책이 처음으로 제시한 산악계의 과제는 시대를 타지 않고 언제나 살아 있는 중요 과제다. ‘한 사람과 8,000m봉’과 ‘by fair means’가 내포하고 있는 핵심이 그것이다.
그 책에서 주장한 히말라야 고봉의 단독 등반은 이제 흔한 과제가 됐으며, 지나친 등반 보조구의 사용이 산을 작게 만들기 때문에 등반의 절대적 요청은 ‘바이 페어 민즈’를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메스너의 주장은 오늘날 산악계의 절대적 키워드로 작용하고 있다.
세상에 뛰어난 알피니스트는 많아도 메스너만큼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세우는 이는 없다. 특히 작금에 에베레스트의 이상이 땅에 떨어진 사실 앞에 진정 알피니즘은 사랑하고 추구하는 자들의 감회고 날로 심각하기만 하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알피니즘 세계의 거인이고 철인이다. 그의 산행은 언제나 한계 도전이고, 결코 패퇴를 몰랐다. 그런데 그러한 메스너가 평생 한 번 말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진 적이 있다. 1978년 그 유명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 후, 하산길 사우스콜에서 설맹과 극도의 피로로 오도가도 못하게 되자, 그는 페터 하벨러에게 살려달라고 울며 호소했다. 이때 장면이 하벨러의 등반기 <고독한 승리>에 나오지만, 그때 하벨러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메스너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메스너는 자기 말대로 죽음을 의식한 적이 없었다는데, 근자에는 “저녁에 잘 잠들고, 아침에 눈을 뜨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술회한다. 그도 필경은 철인이 아니라 범용한 보통 인간이라는 것이다. 평생을 생과 사의 한가운데서 살아온 한계 도전자 메스너에게 일찍이 동생 귄터의 죽음이 안겨준 충격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 출간한 저서를 통해 오은선에 대해 찬사 표시
그러나 그가 보는 인생은 언제나 죽음을 예상하고 전제로 하기 때문에 참아가며 이겨낼 가치가 있다는 것이 그가 등산에서 얻은 인생관이라고 그는 말한다. 70 인생의 고백인 셈이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서양인으로도 특이한 존재다.
그는 일찍이 폐허로 남아 있는 자그마한 고성(古城)을 당시 10만 마르크에 사들여, 10년에 걸쳐 혼자 보수하고, 거기를 산악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전시물은 거의 네팔과 몽골 등, 불교문화 것으로 채웠다. 마치 그가 불교에 관심이 있는 양 싶다.
그러나 메스너는 철저한 무신론자로 이른바 내세(來世)를 믿지 않는다. 산에서도 위기에 처하면 동행한 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현실을 보지 않고 미래에 희망을 두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까지 했다.
메스너의 저술은 주로 자기 체험기였는데, 근래에 와서 8,000m 14개 봉에 도전한 여성들에 대한 책을 썼다. 특히 <여성들이 드디어 정상에>라는 책은 전체 20개 장 중 마지막 4개 장을 온통 동양 여성 오은선 특집처럼 정리했다. 선진 등산국의 선두 주자들과 달리 묵묵히 죽음의 지대를 간 외로운 무명의 한국 여류 등반가에 보내는 메스너의 찬사로 주목된다.
저자 1924년생. 1976-1980년 제7대 대한산악연맹 회장,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 1978년 한국북극탐험대장, 한국등산연구소장을 역임했으며,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 등을 썼고, <검은 고독 흰 고독>, <제7급>, <8000미터의 위와 아래>, <죽음의 지대>, <내 생애의 산들>을 번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