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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 242년 가을 중반, 해모수 20세
고열가 임금은 자신의 칠십칠 회 생신을 조촐하게 치르려 했으나, 조정은 국중의 명망있는 인사들과 각국 왕들, 제후들, 장당경의 유력한 백성들, 문무백관을 초빙하고 불러 모아 이를 성대하게 거행하고자 했다.
벌써 수개월 전, 오가五加의 대신들과 무관들, 황가의 사람들, 번조선과 막조선 왕가, 화하의 연나라, 제나라, 진나라 등의 왕가, 북막北漠과 기타 북쪽 지방의 제후들, 삼도三島(일본)의 왕가, 그 밖에 나라의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유력한 인사들이 대거 황궁의 임금 생신 연회에 초대되었다.
오가의 대신들은 먼저 제관祭官들로 하여금, 이른 아침에 정결한 흰 소를 제물로 삼아, 황궁의 맨 북쪽에 설치된 제단에서 하나님께 천제를 올리게 했다.
연후에, 천지인 궁궐들의 남단에 있는 커다란 대시전大始殿에서 만백성이 모인 가운데 정오부터 연회가 시작되었다. 이곳은 예전 여루 임금과 다물 임금이 대회를 연 곳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는 한 달 전부터 와서 대기하고 있던 삼칠성주와 해모수, 연은소, 백선의, 청아련, 여을과 해로운, 번조선 왕가의 기비 기진 남매, 연나라의 단 왕자 일행, 삼칠성 마병대장 오탁, 여강을 비롯한 동아리하 십대성의 대표단, 기타 여러 나라의 왕족 인물들과 제후들, 나라 안의 중요 명사, 오가의 대신들과 문무백관, 황녀 설이매를 포함한 황가의 인물 등 근 천여 명에 가까운 인사들이 참석했다.
막조선에서도 황금 일만 냥 어치의 곡물을 내는 조건으로 사면 받은 왕세자 맹성과 몇몇 인사들이 동참했다.
아직은 장당경 환화궁의 위세가 꺾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촛불이 꺼지기 직전의 마지막 한 차례 밝게 타오름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뜰에는 박석薄石이 새로 깔리고 각종 색깔의 차양과 깃발이 내걸리며 화려한 의자들이 준비되었다. 대시전 밖의 뜰 전면에는 거대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시원한 가을의 향기가 누리를 수놓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했다.
악대의 연주와 함께 친위무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임금이 등장해 높은 자리에 좌정했다. 사회자의 인도에 따라 군중은 먼저 서쪽을 향해, 삼신일체 천제 하나님께 삼배를 올리고, 이어서 임금께 일배를 올렸다.
삼신일체 상제께 절을 올릴 때 서쪽을 향하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 원래 서쪽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군왕검 시대에 쌓은 강화도 마니산의 제천단도 서쪽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훗날 조상들의 최초 발상지인 서쪽 지역에, 태일太一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다는 전승과 관련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국 사절들의 축문 낭송을 뒤이어 각종 선물 헌상식이 있었고, 고열가 임금의 사례 답사, 무희들의 가무와 악단들의 연주도 화려하게 펼쳐졌다.
각양 음식과 술이 만인에게 풍족히 주어지고, 오후 늦게는 조선 무사들의 무예 시범이 있었다. 맨손 무예를 선보이는 무사들이, 차돌과 단단한 흙벽돌을 손날과 맨주먹으로 깨뜨릴 때는 각국의 사절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날아가는 새들을 떨어뜨리는 무사들의 활 솜씨에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마지막으로 삼조선의 황가를 대표해 해모수가 검술 시범을 보였다. 여러 고장에서 온 대표들은 해모수의 검법에 넋을 잃은 것 같았다. 그의 몸은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듯했으며 팽이나 바람개비처럼 돌고, 회리바람처럼 먼지를 일으키며 물결처럼 파문을 연달아 만들어내었다.
해모수가 도중에 한 소리 크게 지르며 검을 휘두르는데, 우선 그 목소리의 장엄함과 위력에 사람들이 움찔 놀랐다. 그의 몸은 갑자기 불길에 휩싸인 듯하고 검에서 뜨거운 불이 나오는 것 같았다. 하늘의 장수가 내려와 불 칼을 휩쓸며 지옥의 악마들을 제압하는 듯, 무서운 분노가 검 끝에서 솟아나오고 있었다.
쏟아지는 가을 햇살이 검신에서 반사되자 그 현란함은 군중의 눈을 황홀하게 하고, 그 위력은 무리의 가슴을 떨리게 하며, 그 곧음과 통쾌함은 만백성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으며, 그 장려한 박진감은 구경꾼들의 손에 땀이 흐르게 했다.
대략 일다경一茶頃 정도의 시간 동안 해모수는 순숙완미純熟完美의 검술을 선보인 후 임금과 군중에게 인사를 올리고 무대에서 내려오려 했다. 그 때 임금은 명을 내려 잠깐 그를 무대 위에 세운다. 임금은 새로 얻은 해모수를 무척 대견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해모수는 무예 시범을 보이지 않은 사람처럼 안온한 자태로 고른 숨을 쉬고 있었는데, 얼굴은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해모수가 똑바로 서 있자 그제야 각 지방에서 온 군웅들과 축하 사절들은 해모수의 면모를 낱낱이 훑어볼 수 있었다.
영웅의 기상이 깃든 두 눈썹 사이로 사람의 심령을 꿰뚫는 듯한, 흑진주 속의 눈빛이 허공을 향해 작열한다. 아름답고 선한 얼굴은 젊은이답지 않게 성현의 풍모까지 은은하게 비치고 있다. 과연 임금이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번조선의 경국지색 기진과 연은소 등은 가슴을 졸이며 해모수의 검법을 지켜보다가 그가 만인 앞에 의젓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자, 마치 한 그루 푸른 소나무가 마른 수풀 속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 늠름한 장수가 백만 대군 앞에서 호령하고 있는 것 같은 환영에 사로잡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처럼 속이 떨렸다. 연은소는 해모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뻔했다.
임금이 어좌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그 옆의 내시에게 무어라고 속삭였다.
내시가 임금의 말을 받아 군중을 향해 외쳤다.
“폐하께서 방금 검술 시연을 보인 해모수 공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십니다.”
일순간 장내는 고요해졌다.
임금이 다시 내시에게 무어라고 말하자 내시가 해모수를 향해 큰 소리로 임금의 말을 대언했다.
“그대는 만인 앞에서 짐과 내빈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소. 삼신천제 하나님의 크신 은덕이 평생 그대와 함께 하기를 비는 바요.”
해모수가 임금께 사례했다.
다시 임금이 내시를 통해 말했다.
“오늘 만인 앞에서 짐은 그대의 지혜를 시험해 보고 싶소. 그대는 여러 나라 내빈들께 우리 조선의 선비들이 지닌 훌륭한 지혜를 보여주기 바라오.”
“폐하, 황공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것은 무슨 의미가 있소?”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가을의 바람만이 가끔씩 뜰을 스치며 깃발들과 각양각색의 휘황한 차양들을 춤추게 했다.
임금의 예상 외 돌발적 질문에 해모수는 잠시 긴장했으나 이내 천제님을 부르며 하늘의 지혜를 구했다.
“폐하, 오늘의 모임은 폐하의 생신 축하연을 계기로 삼아, 만국 백성의 평화와 사랑을 다지기 위한 모임인줄 아옵니다.”
외국의 통역관들은 임금과 해모수의 말을 각각 자기 대표단에게 통역하고 있었다.
단 아래 군중은 과연 그렇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만국 간 평화와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고?”
이것은 전보다 더 애매하고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해모수는 한편으로 상제를 부르며 생각을 가다듬고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첫째, 만국이 서로를 믿고 신뢰해야 가능합니다. 불신과 의심이, 허다한 분쟁을 가져다줍니다.”
해모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난 후 말을 이었다.
“둘째는, 이기적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 자국의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데서 온갖 싸움이 일어납니다. 군주에게 탐심이 없다면, 다른 나라를 정복해 세금이나 조공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남의 나라 땅을 자기 땅이라고 우기지도 않을 것이옵니다. 오늘날 국가 간 모든 쟁투의 시발점은 바로 이 군주들의 탐심이옵니다.”
해모수는 번갯불 같은 시선으로 장내를 휩쓸어 본 후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아가, 패권주의적 권력욕, 명예욕, 영웅심, 천하를 정복하겠다는 어리석은 망상이 영원한 화근입니다. 이것 때문에 고래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국가들이 서로 싸우며 만백성을 죽이고 괴롭혔습니까? 무릇 군주 된 자는 이것을 물욕 다음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물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오. 하나 어찌하여 알면서도 세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계속해서 그런 탐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그것은, 머리로 알고 있어도 가슴으로 실천할 의지와 의향,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실천의 능력은, 탐심과 권력욕을 버리고 평화와 사랑을 추구하려는, 거룩하고 깨끗한 의지 안에 깃들어 있나이다.”
“그렇다면 그 거룩하고 깨끗한 의지를 어떻게 가질 수 있을꼬?”
“소인이 성현들의 글에서 읽기로, 인간의 타고난 악성惡性은 그 거룩하고 깨끗한 의지를 가질 수 없나이다. 오로지 상제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 안에 받아서 그것을 자신의 선성善性과 융화시킴으로써 자기 의지와 자기 욕구로 삼아야만, 즉 <삼일신고>의 가르침대로, 성통공완性通功完해야만 그 일이 가능하옵니다.”
임금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천제님의 그 거룩하고 깨끗한 성품을 어떻게 우리 마음 안에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옵니다. 일찍이 환웅임금께서 갈파하셨듯이, 인간이 삼신일체 하나님을 가슴에 환영하고 모셔 들인 후 그분을 진실하게 섬기면서, 소리와 기운으로 원하고 빌어야 합니다‘聲氣願禱성기원도.’ 그건 <삼일신고>와 <삼백육십육사>에서 잘 설명하고 있사옵니다.”
해모수는 잠깐 하늘을 쳐다보았다가 덧붙였다.
“상제님을 부를 때,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부르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사옵니다. 오로지 천제 하나님의 그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거룩하고 황홀하고 행복한 성품을 본받고자 하는 일념으로 하나님을 계속 불러야 하옵니다. 그리하면 삼신상제께서는 반드시 우리 마음 속에 영으로 내려오셔서‘강재이뇌降在爾腦’ 우리에게 자신의 그 거룩하고 깨끗하고 자비롭고 이타적인 성품을 나누어주십니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는 고개를 끄덕이는 자도 있고, 의문의 빛을 띠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자도 있었다. 덧붙인 위의 말은, <삼일신고>와 <행심록>의 가르침이었다.
“어찌하여 대지대력大智大力을 지니신 천제님은, 마치 봄이 오면 자연 속에 저절로 푸름이 생성되듯, 인간 모두에게 그런 거룩한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조처하지 않으시는가?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이 세상은 악이 사라지고 선이 지배하는, 신향神鄕으로 변할 것 같은데?”
“폐하, 그것은 불가하옵니다. 봄이 올 때 초목이 저절로 푸르러지는 것은, 그 안의 살아있는 생명력이 스스로의 힘으로 수분과 따스한 대기와 태양의 빛을 받아들이는 까닭이옵니다. 죽은 나무는 생명력이 없으므로 봄이 돌아와도 그 푸름을 회복하지 못합니다.”
해모수는 잠시 숨을 돌린 후 대답을 거침없이 이어간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신의 의지로 천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의 성품을 가질 수 없사옵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닌 인격체로서 자기 의지를 통해, 역시 인격체이신 신과 일대일로 교통하도록 창조되었나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임금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모든 탐욕과 권력욕을 버린다면, 서로 화평하게 사랑하며 살 수 있는데, 어찌하여 때로는 전쟁이 필요한고?”
“그것은 물론, 탐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무리들을 제압하고 나머지 만백성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혹시 탐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무리들을 제압해 백성을 평안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실상 스스로가 탐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도 있사오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사옵니다. 예컨대 집에 강도가 침입해, 온 가족을 위협하며 모든 재물을 다 앗아가고자 할 때, 강도를 제압하는 것은, 재물을 지켜 가족을 평안하게 하기 위함이지, 무슨 탐욕이나 권력욕의 발로가 아니옵니다. 나라에도 이런 큰 도둑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군주가 그들을 억제할 힘이 없다면, 의로운 뜻을 가진 이들이 천제 하나님과 폐하의 명을 받아 그들을 소탕함으로써 만백성을 평안하게 해야 하옵니다.”
“지금 이 나라는 아직 어느 정도의 평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처처에 도적들이 들끓고, 또 많은 이들이 탐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혀 나라를 세우겠다고 속으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대는 어찌 하겠는가?”
해모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임금이 유도심문을 하고 있는가?
“삼신일체 천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말씀 드리옵니다. 하나님과 폐하께서 명하신다면, 도적들을 쓸어버리고 나라를 평안하게 할 것이옵니다.”
사람들은 해모수의 말을 들으며 젊은 놈이 겁도 없이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다고 내심 혀를 끌끌 찼다. 해모수의 말은 어떤 면에서, 대사를 은밀히 도모해 보겠다는 사람들에 대한, 모종의 선전포고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각국의 영웅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이 해모수의 어투에서 어찌 이를 짐작하지 못했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임금이 특별히 총애하는 듯한, 젊은 해모수의 범상치 않은 외모와 웅변에 경계심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평화와 사랑이 깨어지는데, 어찌 할꼬?”
“세상에 평화와 사랑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만민이 동의해주고 따라주는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옵니다. 만일 국가를 해체하고 모든 사람을 개개인의 힘으로 살게 한다면, 이 세상이 어찌 되겠사옵니까?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으며, 세인들은 탐욕과 권력욕을 가지고 있으므로 상제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국가라는 권력의 제도를 만드신 것이라 판단되옵니다.”
“그렇다면, 무력에 의한 평화와 사랑의 유지는, 필요악이라는 뜻인가?”
“그것은 필요한 선이지, 악이 아니옵니다. 천제 하나님께서도 대지대력大智大力에 의해 하늘의 신령제철神灵諸哲들과 저 악마들의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네. 그러면 무력으로 평화와 사랑이 유지되니, 무력만 있으면 되는가? 무력이 최고인가?”
“아니옵니다. 사랑과 평화가 최고입니다. 무력은 사랑과 평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리고 실은, 사랑과 평화가 가장 강한 무력이옵니다.”
마지막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째서 사랑과 평화가 가장 강력한 무력인가?”
“인간의 모든 무력은, 자기보다 더 센 무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거나, 거짓으로 복종하는 체 하지만, 진정한 사랑과 평화의 사람 앞에서는 진심으로 감복하기 때문입니다. 폭군이 성현 앞에 무릎을 꿇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옵니다.”
최후의 한 마디가 사람들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 한바탕 청량한 가을바람이 장내를 휩쓸었다. 깃발들이 펄럭거리고 형형색색의 차양이 울렁거린다.
그 때 한쪽 귀퉁이에서 박수소리가 들리더니, 곧 장내는 요란한 박수갈채가 진동했다. 고열가 임금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해모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관 스물의 젊은이가 이 정도의 식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장차 대성할 것 같았다.
박수갈채가 잦아들자 해모수는 인사를 하며 말했다.
“외람되지만, 한 마디만 더 드리겠사옵니다. 무武는 사랑을 위한 수단이고 또 사랑이 가장 강력한 무력이니, 사랑이 곧 무武입니다. 애愛와 무武는 하나입니다.”
만장한 군중은 다시금 해모수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임금은 내시를 시켜 해모수에게 말했다.
“오늘 내가 그대의 지혜와 무예를 충분히 시험해 보았으니, 그대를 나의 친위무사단 장수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하노라.”
말과 함께 임금은 해모수에게 임명장과 어검御劍을 한 자루 하사했다. 이 검은 고열가 임금이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명검名劍이다. 내시가 임명장과 어검을 받아 해모수에게 전달하자 다시 장내에는 환화궁이 떠나갈 듯한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해모수는 임금과 군중에게 절을 한 후 단상에서 내려왔다.
임금의 생신 축하연이 파한 후 여러 사람이 해모수를 만나러 왔다.
해모수는 그들을 일일이 한 사람씩 접견하며 대화와 사귐의 시간을 가졌다. 저녁 늦게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그에게 인사했는데, 해모수는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마침내 이마를 두드렸다.
“아참, 이거 아불한 아닌가!?”
“네 그렇사옵니다. 작은 나리.”
“이거 얼마만인가? 우리가 아남성에서 헤어지고 아직 만나보지 못했군.”
“그러게 말예요. 헤아려보니 벌써 삼년 하고도 여섯 달이 지났는가 봅니다.”
“그래, 지금도 장형의 가신으로 장형을 섬기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또한 폐하의 친위무사단에서 열두 부장副將중 한 사람으로 폐하를 모시고 있습니다.”
“오, 그렇군. 그렇다면 여전히 친위무사단장인 장형의 지휘를 받고 있겠군. 그리고 나도 오늘 친위무사단 장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임명받았는데, 그대는 나보다 먼저 들어온 선임이 되겠군요.”
“아니옵니다. 작은 나리께서는 친위무사단장 다음 서열인, 친위무사단 부단장 격의 장수로 임명 받을 것이라고 어제 해로운 나리께 통보를 받았습니다.”
“오, 그런가? 난 그런 얘길 듣지 못해서. 좌우간 잘 부탁하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신참 아닌가?”
“해로운 나리께서 잘 지도해 주실 것입니다.”
잠시 후 아불한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해모수에게 칭찬의 말을 늘어놓았다.
“오늘 저는 작은 나리의 무예를 보고 아연했습니다.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고절한 기예였습니다.”
“이 사람,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먼.”
“진심입니다. 기회가 되면 작은 나리를 모시고 싶습니다.”
아불한이 목소리를 낮추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해모수를 쳐다보았다.
“그런 소리 말게. 상제께 의탁하면 상제께서 자네 앞날을 잘 인도해 주실 거네. 그리고 결단코 장형을 배반해서는 안 되네. 알겠는가?”
해모수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큰 나리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래도 그런 소린 부담스럽네. 자, 밤이 늦었으니 다음에 또 만나세.”
해모수는 그와 굳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가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손님이 또 찾아왔다. 뜻 밖에도 그들은 삼칠성 기병대장 오탁과 동아리하 강변의 백기대장 여강이었다.
“두 분이 어인 일로 이렇게 밤늦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하지만 남의 이목이 있어서.”
“무슨 중대사라도 생긴 건가요?”
“아닙니다. 저희들은, 기회가 주어지면 공자님과 함께 목숨을 바쳐 나라를 섬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건 해모수가 큰 뜻을 품고 있다면 그에게 가담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섬기고 계시는 주군主君들을 배신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부터 임금 폐하를 모시는 몸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해모수의 의중을 떠보았다가 해모수가 의외로 선선하게 나오자 내심 평안함을 느꼈다. 해모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그들의 말이 속에서 우러난 진심임을 깨닫고 역시 자기 속을 털어놓았다.
“언젠가 이 나라에는 우리의 힘이 꼭 필요할 때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 때 함께 힘을 합한다면, 나라의 안녕을 위해 우리가 작은 도움이나마 보탤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모두 자중해야 합니다.”
해모수는 그들을 보내고 난 후 잠자리에 들려다 문득 임금이 하사한 임명장과 어사검御賜劍이 생각났다. 끈을 풀어 임명장을 펴 보려다 말고 검을 먼저 살펴보았다. 검 집과 검신에 검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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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2. 6. 24.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