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 : 13 - 41절
“예수님을 힘 입어”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와 단 둘이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 몇 명이 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바울과 바나바와 마가라는 요한. 이 세 사람은 함께 동행 했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그 세 사람 중에 마가라 하는 요한이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라는 마을에 이르러서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1차 전도 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나중에 절친했던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졌을 정도로 바울에게는 아주 큰 상처를 줬던 사건이 바로 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바나바와 사촌이었기 때문에 바나바는 끝까지 마가 요한을 챙기려고 했던 것이고 반면에 바울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 중도에 포기했던 사람을 또 데리고 갔다가 또 중도에 포기를 하게 되면 같이 고생하면서 선교하던 사람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바울은 바나바와 크게 싸워서 헤어질 정도로 마가 요한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가가 바나바의 사촌이었기 때문에 바울과 헤어지면서까지 마가 요한을 챙겼던 것은 아니고 다른 모든 제자들이 사울을 외면하고 두려워할 때도 바나바는 사울의 말에 귀를 기우려 주고 믿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 성품 때문에 마가 요한과 함께 선교를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성경이 마가복음입니다.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마가복음을 참고해서 기록된 성경들이기 때문에 마가가 보여 준 영적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마가를 보면서 어쩔 때 보면 저런 사람이 우리 공동체에 필요하겠어? 이런 회의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크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섣부르게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 드리고 바나바처럼 연약한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명절 때 보면 모든 가족들이 다 잘 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실패를 해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조금 더 성장하기 위해서 성장통을 겪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자신만의 이유와 사정 때문에 다른 가족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있을 텐데 잘못된 관심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상처를 덫 나게 하고 더 후벼 파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장을 위해서 맞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이성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바나바처럼 성숙한 영성을 가지고 지혜롭게 대화를 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보다 더 은혜로운 명절을 보내는 기독교인들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세요. 이성적으로 냉정했던 바울이 나중에 편지를 통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군에 입대하는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가족들이 훈련소를 방문 했습니다. 아들이 생활해야 하는 훈련소가 환경은 괜찮은지? 분위기가 험악하거나 위협 적이지는 않는지? 위생적으로 문제는 없는지? 여러 가지 걱정을 하며 가족들이 훈련소에 들어섰습니다. 훈련소에 들어서자 염려와는 다르게 모든 것이 잘 정돈 되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서 없이 걸어가기는 했지만 그 흔한 과자 봉지 하나 떨어진 것이 없었고, 줄이 쳐 진 것도 아닌데 잔디를 밟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훈련소 주변의 청결함에 놀란 가족들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병들이 집합 하는 운동장으로 들어가면서 그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운동장으로 들어가면서 뒤늦게 입구에서부터 놓여 있던 푯말을 발견 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귀하의 자식들이 청소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명절을 보내면 가족들끼리의 관계도 깨끗해 질 수밖에 없고 서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명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가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옮겨 다니면서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복음을 증거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이 오늘 본문 말씀의 전체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절대 빼먹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다윗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된 이유는 22절 말씀에 보면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시겠다. 이렇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구주이신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다윗을 내세우지 않으면 신빙성 있는 증거가 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봤던 베드로도, 스데반도 메시아를 증거 하면서 다윗을 빼어 놓지 않고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머지 내용은 우리가 앞에서 봤던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메시아가 오셨는데 사람들이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였으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증거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바울이 특별히 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38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이렇게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힘입어서 우리가 얻어야 할 최고의 은혜 중에 하나는 바로 죄사함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보다 더 중요한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천국은 죄 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회개이고 죄사함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예수님을 통해 얻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도 없고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죄사함의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는 강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전에 예수님의 일곱 가지 능력들을 배웠던 적이 있습니다. 병 고치는 능력, 자연을 정복하신 능력, 귀신을 쫓으시는 능력, 죄를 사하여 주시는 능력, 죽음을 이기신 능력, 어두움을 정복하신 능력, 이런 모든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능력! 모든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능력과 특별히 죄사함의 능력만큼은 예수님만이 가지셨던 능력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이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죄사함 받기 위해서!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이유이고 예수님을 힘입어서 반드시 얻어야 할 은혜이지 다른 것을 추구하는 믿음은 성숙한 믿음, 진정한 믿음이라고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가장 크게 돌려야 할 영광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 때문에 오늘도 기쁨으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로서의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예수님으로 힘입지 않으면 절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은혜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해야 하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은혜를 예수님을 힙 입었을 때 얻게 된다는 것이 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사함의 은혜 말고도 우리가 예수님을 힘입어서 얻어야 할 또 하나의 은혜가 있습니다. 39절 말씀에 보면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것이라” 우리가 아무리 완벽주의자들이라고 해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뛰어 넘어서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 보려고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던 바울의 이야기에 우리는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바울이 자신 있게 뭐라고 고백을 하고 있냐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지만 그러나 이 사람을 힘입으면, 예수님을 힘입으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로는 평생을 노력해도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은혜를 예수님을 힘입기만 하면 “믿는 자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반드시 내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힘입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을 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예수님을 힘입었을 때 그 이름을 통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고, 예수님을 힘입었을 때 은혜와 복과 기쁨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힘입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힘입는다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영어 성경에서는 힘입다는 표현을 “through”라는 단어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살았을 때 우리가 죄사함도 얻을 수 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막연히 믿음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런 믿음으로는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루를 시작할 때도 예수님을 통하여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행동이나 삶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는 거룩한 습관들이 몸에 배어 있어야지 이렇게 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힘입는 인생이 되어서 죄사함도 받고 의롭다 하심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힘입는 것이 은혜이고 능력입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을 힘입고, 자신을 힘입고, 물질을 힘입었던 모습을 다 내려놓고 이 시간부터는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참예배자들이 되시고, 명절에도 예수님을 힘입어서 가족들에게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평안과 사랑과 기쁨을 풍성하게 나누면서 가장 평안하고 기뻐할 수 있는 복된 명절을 보내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