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용당(金芙蓉堂)의 시(詩)
정필(停筆),붓을 놓고
천변청풍상(天邊淸風爽) 하늘 가 맑은 바람 시원하고
양소월영단(良宵月影團) 좋은 밤 달 그림자 둥글도다
안을수로원(雁應愁路遠) 기러기는 정녕 먼 길을 걱정하고
구역공맹한(鷗亦恐盟寒) 갈매기도 첫 추위를 두려워하는구나
강초인의식(江草因醫識) 강 가의 풀은 의학으로 알았고
산방체화간(山芳替畵看) 산의 방초는 그림을 대신하여 보았도다
암사심내사(暗思心內事) 마음 속 일을 곰곰이 생각하며
정필앙운단(停筆仰雲端) 붓을 놓고 구름 끝 쳐다보노라
향기(香氣) 운초(雲楚) 김부용당(金芙蓉:1813~1860)
조기부용숙우자(朝起芙蓉宿雨滋) 아침에 일어난 부용이 지난밤 비에 더 맑아지고,
사청고관연수지(乍晴高館燕羞池) 날개인 부용당 앞에는 제비가 못 위릉 날아오르네.
세락주기천만과(灑落珠璣千萬顆) 깨끗한 옥구슬 천만 알들이,
미풍경사벽유리(微風傾瀉碧琉璃) 갸날픈 바람에 쓸려 푸른 유리 위로 쏟아지네.
청가일곡해천사(淸歌一曲海天賖) 맑은 노래 한 가락을 바다와 하늘이 내려주고,
십이홍란범월화(十二紅欄泛月華) 붉은빛 열두 난간을 달빛이 띄웠네.
운모병두은촉하(雲母屛頭銀燭下) 운모병풍 머리 은 촛불 아래서,
주인보보출연화(住人步步出蓮花) 미인의 걸음걸음마다 연꽃이 피었네.
회가형(懷家兄), 오빠 생각
월정당루야갱한(月正堂樓夜更寒) 달은 바로 누대에 비치고 밤은 더욱 차가워
고원추사재운단(古園秋思在雲斷) 그리운 내 고향은 저 머리 구름 끝에 있도다.
창가수활음서단(蒼葭水闊音書斷) 갈대는 푸르고 강물은 넓은데 고향소식 끊어져
직도천명독의난(直到天明獨倚欄) 홀로 난간에 기댄 채로 날은 벌써 밝아오는구나
석춘(惜春),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고앵제헐우사사(孤鶯啼歇雨絲斜) 외로운 꾀꼬리 한 마리 울기를 그치고 가는 비 비껴 내리는데
창엄황혼난벽사(窓掩黃昏暖碧紗) 저녁노을이 창에 덮이자 푸른 비단이 따뜻해라
무계유춘춘기로(無計留春春己老) 가는 봄 붙잡아 둘 계책 하나도 없으니
옥병련삽가매화(玉甁聯揷假梅花) 꽃병에 매화 한 송이나 꽂아두어야지
풍시주객(諷詩酒客), 시와 술을 즐기는 사람애개 풍간하다.
주과능벌성(酒過能伐性) 술이 지나치면 성품을 해치고
시교필궁인(詩巧必窮人) 시가 정교하면 반드시 궁핍해지나니
시주수위우(詩酒雖爲友) 시와 술을 벗으로 삼되
불소역불친(不疎亦不親) 멀리 하지도 말고 너무 친하지도 말게
전춘(餞春, 봄을 보내다
방교전야전춘회(芳郊前夜餞春回) 어재밤 교외에서 봄을 보내고 돌아와
불내심수강파주(不耐深愁强把酒) 깊은 시름 견디지 못해 억지로 술잔을 잡았다
독유류화홍일수(獨有榴花紅一樹) 오직 붉은 한 나무에 석류꽃 남아
시간봉접도장래(時看蜂蝶度場來) 때때로 벌나비 담장 넘어 찾아오는 것 보인다
산행시치구한(山行時値久旱), 산행하다가 오랜 가뭄을 생각하며
동풍행도녹양만(東風行到綠楊灣) 봄바람이 푸른 버들 골짜기에 불어오니
중첩춘산벽사환(重疊春山碧四環) 겹겹 봄산에는 사방이 푸르르네
봉상비천천인간(峯上飛泉千仞磵) 봉우리 위에서 날아 떨어지는 샘물은 천길 물줄기
원성림우쇄인간(願成霖雨灑人間) 사흘 장맛비처럼 세상을 적셔주었으면
부벽루연유 응제사군구호운 1(浮碧樓宴遊 應諸使君口號韻 1)
부벽루 잔치 놀음에서 여러 산군들이 입으로 부른 운에 맞추어
관개요편옹화루(冠蓋聊翩擁畵樓) 수레 덮개 나부끼며 단청 누각 에워싸고
소년쟁척금전두(少年爭擲錦纏頭) 젊은 놈팽이들 다투어 전두 던지네
요간세류동서안(遙看細柳東西岸) 멀리 물가에 실버들 아득하게 보이고
진시유인재적주(盡是遊人載笛舟) 떠있는 배에서 풍악소리 들리누나
부용당 2(芙蓉堂 2)
조기부용숙우자(朝起芙蓉宿雨滋) 아침에 보니 연꽃은 밤새 내린 비에 더 많아지고
사청고관연차지(乍晴高館燕差池) 잠깐 비 개인 고관엔 제비가 오락가락
쇄락주기천만과(灑落珠璣千萬顆) 맑디 맑은 물방울 천만 알
미풍경사벽유리(微風傾瀉碧琉璃) 살랑 바람에 푸른 유리 위로 떨어지네
김부용3 (芙蓉堂 3)
청가일곡해천사(淸歌一曲海天賖) 맑은 노래 한 곡조 바다 하늘에 내려 주시니
십이홍란범월화(十二紅欄泛月華) 열두 구비 붉은 난간에 달빛이 출렁이네
운모병두은촉하(雲母屛頭銀燭下) 운모병풍 은촛불 아래
가인보보출연화 佳人步步出蓮花) 가인 걸음 걸음 마다 연꽃이 피어나네
운초 김부용이 회자되는 이유는 그녀의 시 때문도 있지만
당대에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운초가 성천기생으로 이름을 날리던 20대 후반,
77세 노년의 나이에 평안도로 유람 온 김이양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운초의 생존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시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180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유학자 집안으로, 성천에서는 대대로 향리로 살았다.
어릴 때 작은 숙부(叔父)에게서 글을 배웠고 어느 시기에 기생이 되었는데,
아마도 집안이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기녀가 된 운초는 성천에서 여러 문사,선비들과 교우하며 시를 주고받았다.
존재 박윤묵(1771~1849)은 성천태수를 만나러 갔다가 운초를 보고는
“무산 높은 곳에 한 시선(詩仙)이 있으니,천리에 그 이름이 전해진다„고 시를 읊었다.
그녀는 한양까지 이름이 알려졌고,사대부들로부터 기꺼이‘부산의 시선‚으로 불려질 정도였다.
한양,평북 귀성 등을 돌아다니다가 1830년 겨울 평양으로 돌아오는데,
그곳에서 김이양을 만나게 된다.
연천 김이양(1755~1845)응 예조,이조,병조,호조판서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고,
1826년6월 72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할 때는 순조 임금으로부터 봉조하(奉朝賀)를 하사받는다.
봉조하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하던 사람이 관직에서 물러날 때 받는 명예직으로 평생 녹봉을 받는다.
노후가 보장된 명예직인 샘이다.
30여년의 공직생활을 명예롭게 은퇴한 김이양은 평생동안 꿈꾸던 산수 유람을 떠나게 된다.
이때 평양에서 운초를 만나게 된 것이다.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사랑
1831년 당시 운초는 30세 전후의 젊은 여인이었고,
김이양은 77세였으니 50년 가까운 나이차가 나는 샘이다.
은퇴 후 김이양은 ‘풍류호걸‚이라 불릴 정도로 풍류와 산수를 좋아했고 신선시를 즐겼다.
정조 사후 당쟁으로 얼룩진 정계와 혼탁한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향인 신선세계를 지향했던
김이양은 시선(詩仙)을 자주하는 운초 김부용을 만나자 운명처럼 끌렸던 것이다.
마침 그는 3년 전 부인을 잃고 혼자된 상태였기 때문에 운초를 소실로 들이는데 큰 부담이 없었고
덕분에 운초는 정실부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연천과 운초가 주고받은 시들은 나이차를 초월한 로맨틱한 사랑의 편지였다.
문 앞의 연리나무
그 위에 까치가 깃들어.
집과 창문 은근히 비추어주고
가지와 줄기 빽빽이 맺어있네.
온화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오르락내리락 날며 춤추는 것 같다.
인간사 서로의 느낌이 있어야 하는 법
이를 바라보고 따스한 정을 보내네.
연천은 한 여인을 구속하지 않고 사랑하며 기다려 줄줄 아는 관대함의 풍류를 지닌 사람이었다.
15년의 사랑 그리고 이별
김이양은 1843년 2월 사마회갑(司馬回甲)을 맞게 된다.
사마회갑이란 과거에 급제한 지60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는 헌종 임금으로부터 하사품까지 받고 조상들께 인사드리러 성묘가는 길에
홍주(지급의 홍성).결성,천안 등 3군을 돌아보는데,
운초와 동행한다.
89세 노령의 그가 마지막일 수 있는 조상들과 친인척들께 인사드리는 공식적인 자리에
기생첩인 운초를 대동한 것이다.
그녀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 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이양의 부인 완산이씨 묘에도 들러,운초는“좀 더 사셨더라면 이러한 영광을 누리셨을 텐데„
하며 애도의 글을 남겼다.
고향에 다녀온 후 연천은 감기에 걸려 시름시름 앓더니 결국 을사년(1845) 5월 91세에 생을 마감한다.
연천 상공의 죽음에 통곡함
풍류와 기개는 산수의 주인이시고
경술과 문장은 재상이 될 재목이셨지.
모신 지 십오년에 오늘 눈물 흘리니
높고 넓은 덕 한번 끊어지면 누가 다시 이으리.
=운초 김부용,=
연천의 죽음 앞에서 운초는 통곡했다.
둘이 함께 산 것은 15년,
운초에게 김이양은 사랑하는 남자이자 스승이였고 동지였다.
양반의 딸이었지만 기생으로 살아야했던 그녀의 어긋난 운명을
김이양은 재능을 펼치며 당당히 살 수 있도록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남편을 애도한 만시(挽詩)에서“도(道)란 단순한 연분이 아니고 전세의 인연„이라면서
“기왕 인연을 맺으려면 어찌 늙기 전에 만나지 못했을까!„하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김이양이 젊은 시절에 운초를 만났다면 과얀 그토록 떳떳이 그녀를 대우해줄 수 있었을까?
천수를 누린 김이양의 말년은 오로지 김부용을 위해 주어진 제2의 인생이었다.
움초의 묘는 천안군 광덕면 광덕산 중턱 김이양 무덤 아래에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김이양 사망 후 운초는 절개를 지키며 살았고‘초당마마‚라 불렀으며,
그녀의 유언에 따라 김이양 무덤 가까이 묻었다고 한다.
김이양의 손자 김대근(1805~1879)의 ≪ 여인유고 ≫에 운초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후손들이 운초를 정실부인처럼 잘 모셧고
그 유지에 따라김이양의 묘 언저리에 묻어준 것으로 보인다.
1974년 천안문화원 등 지역단체들의 노력으로 그녀의 묘를 찾아,
시비(詩碑)와 안내판을 세우는 등 무덤을 정비하고 매년 추모 행사도 하고있다.
김부용당(金芙蓉堂)
김부용((金芙蓉:1813~1860) 조선 후기 호 운초(雲楚),평안도 겅천 출신
개성의 황진이,부안의 매창과 더불어 조선의3대명기로 알려져 있다.
조선역대 여류문집에 한시(漢詩)329수가 전해 온다.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난 김부용당은 숙부에게 당시와 사서삼경을 배웠으나
열살 때 고아가 되어 기생이 된 후 58세 연상인 김이양의 소실로 살았다.
사대부를 무색케 한다는 평을 들은 김부용당의 한시는 발랄하고 다채롭다.
시와 거문고에 능했다고 한다.
생존 연대가 정확하지 않음.
다만 그의 시와 말년에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1755~1845)의 소실로 생활했던 것을 추정하면
대략 1800년 초에 태어나서 1850년대 이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됨.
조선 중기 때 성천(成川)의 명기(名妓)였음.춤과노래.시문에 뛰어남.이능화의 기록에서는
운초를 성천의 기녀 부용으로 소개하고 연천김이양의 첩실이었음을 아울러 밝힘,
그러나 운초는 김이양의 나이 77세 때(1831) 그의 소실이 되어 약 15년 간 성천과 한양에서
각기 생활했는데,운초가 연천을 애도하는 시에서
“15년 함께 지내오다 오늘 돌아가시니/백아가 이미 끊은 거문고 내 다시 끊노라„라고 한
시구를 보면 운초에게 연천은 남편이기보다 그의 재능을 인정해 주던 지기(知己)로 볼 수 있음.
김운초(金雲楚)의 호(號) 부용(芙蓉) 또는 추수(秋水)이며,
황해도 성천에서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고 한다.
열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마저 잃게 된
김부용은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부용은 12세에 기적에 오른 기녀였지만 16세에 성천 군민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기를 얻으며,
한시*漢詩) 350여 수를 남겼다.
22세 때에 김부용은 평양감사와 호조판서를 지낸 김이양(金履陽)의 부실로 들어갔으며
죽어서는 김이양의 묘 옆에 묻혔다.
시문집으로는 『운초당시고(雲楚堂詩稿)』와 『오강루문집(五江樓文集)』등이 있다.
김부용은 송도의 황진이,부안의 이매창과 함께 조선 3대 여류 시인 중 한 명으로 불린다.
광덕사(廣德寺) 옆으로 200m 쯤 산을 향하여 들어가면 황진이(黃眞伊),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3 대 명기(名妓) 중의 한 사람이라는,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의 주인공 김부용(金芙蓉)의 시비가 있다.
거기에서 7~800m 쯤산으로 올라간 곳에 부용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초라한 한기의 부용의 무덤이 있다.
성천(成川) 기생이었던 부용(芙蓉)은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시문(詩文)에도 능해서 명성이 높았고,
그의 문집(文集)이“부용집(芙蓉集)„에 150 편의 시(詩)가 실려 전해 오고 있다.
정조 때 판서를 지낸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 이 77세일 때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인연을 맺었고
김이양이 죽은 후에 기생의 몸으로 어렵게 수절(守節)하다가 그의 묘 옆에 묻히고 싶어 이곳까지 찾아와 죽었지만,
끝내 그 옆에는 묻히지 못하고 같은 산자락인 이곳에 누웠다는 사연이 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절개를 기려 그의 묘를 ‘초당마마의 묘‚라고 불러 온단다.
부용화(芙蓉花) 꽃말:매혹,정숙한여인,아름다움,여인의 아름다움으로 상징하는 꽃
출처:비단공주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