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강원도와 충청도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어 경상도, 전라도로 확대되어 갔다. 원주, 제천, 단양의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춘천의 이소응(李昭應)이 먼저 의병을 일으켜 영월의 유인석(柳麟錫)이 이에 호응하였고
이어 강릉에서 민용호(閔龍鎬), 충청도 보은에서 문석봉(文錫鳳), 홍성의 김복한(金福漢), 경상도 안동의 권세연(權世淵), 선산의 허위(許僞), 진주에서 노응규(盧應奎), 전라도 장성에서 기우만(奇宇萬)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1904년 일제는 또다시 침략전쟁(러-일전쟁)을 도발하여 한반도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어 한국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독점권을 장악하였다. 두차례 침략전쟁에서 청국과 러시아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일제는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하여 외무, 내무, 재무에 고문정치를 시도하더니 급기야 1905년 을사5조약(乙巳五條約)을 강제체결하여 친일정부를 조직하고 1천만원의 차관을 강요함으로서 본격적인 식민지 개편작업을 착수하게 되었다.
제2차 의병전쟁은 1905년 을사오조약이 강제체결되기 전부터 강원도를 비롯한 중부와 남한 일대의 농촌에서 일어났다. 즉, 영월에서 원용석(元容奭), 남원에서 양한규(梁漢奎), 순천의 백낙구(白樂九), 보은의 노병대(盧炳大), 영천의 정환직(鄭煥直) 부자 등이 잇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대에는 민종식(閔宗植)과 최익현(崔益鉉) 등 전직관료가 의병을 일으켜 주목을 끌었다. 민종식의병은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천)을 점령하여 관군을 무찌르며 기관포와 지뢰폭발로 홍주성을 공격해온 일본군과 맞섰다.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의 순수 유생의병군은 관군과 전투하기를 거부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유배지 대마도에서 순국하여 민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또 한.중.일 동북아시아 세나라의 상호 주권존중만이 동양평화의 열쇠라 주장함으로서 의병전쟁의 정치이념을 제시하였다.
의병전쟁은 1907년 여름부터 확대되어 마침내 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강제해산당한 관군병사들이 의병에 가담함으로서 위병의 전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유생, 농민중심의 의병군이 병사, 농민중심의 의병으로 개편되어 갔다. 또 일본군이 주둔한 중요 도시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농촌이 의병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08년 3월 전국의 의병군이 집결하여 서울탈환작전을 시도하였다. 이인영(李麟榮)과 허위(許蔿)가 지휘하는 1만여명의 의병연합부대에는 원주 진위대의 민긍호(閔肯鎬)가 참여하고 있었다.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의병들은 서울 진격을 서두르는 한편,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섭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내는 등 의병은 정당한 독립군이라 주장하였으나 열강은 이를 묵살하였다.
의병전쟁은 1909년에 이르러 더욱 치열해졌다. 화승총으로 무장된 의병들은 우수한 신식소총으로 대항하는 일본군을 유격전으로 괴롭혔다. 특히 노령 연해주의 의병들은 신식소총을 가지고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여 훗날 독립군 항전의 전략적 모태가 되었다.
일제는 처음 2개사단을 중파하여 무자비한 초토작전을 벌이다가 실패하여 귀순정책을 쓰고 헌병보조원 및 일진회원 등을 동원하여 밀정으로 삼았다. 이것은 의병과 민중을 이간시키려는 교활한 민족분열책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이간책도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되자 대대적인 의병 섬멸작전을 벌였다. 1909년 9월의 남한 대토벌작전이 그것이었고 이어 1910년 8월 강제합병을 강행하였다.
병합후 무단정치(武斷政治)하에서도 무장항일비밀결사인 독립의 군부와 광복회가 조직되어 대대적인 무력항쟁이 계획되었다. 해외 의병들은 간도에 망명정부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