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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조씨 병사공(휘 緬)파
연봉 조경환 | 2014.07.13 09:27 목록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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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조계룡(曺繼龍)
<氏族의 연원>
시조 조계룡(曺繼龍)은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 벼슬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주국(上柱國) 대도독(大都督)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라 창성부원군(昌成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그의 후손들이 조계룡(曺繼龍)을 시조로 하고 창녕(昌寧)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本貫地 연혁>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比自火郡)-비사벌(比斯伐)인데 뒤에 경덕왕이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23년 창녕군(昌寧郡)으로 개칭하고 현종9년 밀성군(密城郡)에 예속되었다.
조선 인조9년 영산군(靈山郡)에 편입시킨 뒤 인조15년 복구하여 현(縣)이 되었다. 고종32년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영산군(靈山郡)을 합쳤다.
주요 성씨로는 曺, 成, 張, 鄭씨 등이 있었다.
<派名錄>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중추공파(中樞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양평공파(襄平公派),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문익공파(文翊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장양공파(壯襄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낭장공파(郎將公派)
<주요 世居地>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시조 조계룡(曺繼龍) 이래로 관향(貫鄕)인 창녕(昌寧)에 오랫동안 세거해왔다.
조선 명종조 조식(曺植)이 만년(晩年)에 경남 산청(山淸)의 시천(矢川)에 퇴거한 이래로 일부 자손들이 그곳에 터를 잡았다고 믿어진다.
1930년경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전북 고창군(高敞郡) 고창읍(高敞邑), 전남 담양군(潭陽郡) 고서면(古西面), 보성군(寶城郡)·화순군(和順郡)·영암군(靈岩郡)·진도군(珍島郡) 일원, 경북 영천군(永川郡) 일원, 칠곡군(漆谷郡) 동명면(東明面), 상주군(尙州郡) 매호면(梅湖面), 금릉군(金陵郡) 봉산면(鳳山面), 고령군(高靈郡) 다산면(茶山面), 경남 의령군(義寧郡) 화정읍(華正邑), 창녕군(昌寧郡) 고암면(高岩面), 산청군(山淸郡)·합천군(陜川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988년 현재에는 경남 昌寧·密陽·陜川·山淸·咸安·金海·巨濟, 경북 永川·金陵·漆谷·尙州·慶山·高靈·星州·淸道, 전남 和順·珍島·靈岩·潭陽·羅州·靈光·海南, 전북 高敞, 충북 玉川·鎭川·槐山, 경기도 水原·驪州·華城·坡州, 강원도 江陵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氏族史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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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昌寧)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조씨득성(曺氏得姓)과 시조 태사공(太師公에 관한 설화가 있다.
신라 진평왕 대의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 우연히 병을 얻었다. 그는 창녕(昌寧)의 화왕산(火王山) 정상에 있는 용지(龍池)라는 연못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치병하던 중, 용자(龍子) 옥결(玉玦)과 만나 잉태, 집에 돌아가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겨드랑이에는 조자(曺字)와 비슷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광옥(李光玉)이 진평왕에게 고하니, 왕은 이를 신기하게 여겨 아기에게 조(曺)성을 내리고 계룡(繼龍)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계룡(繼龍)은 자람에 따라 매우 총명하였으므로 王이 사랑하여 여러 가지 관직을 내리고 드디어 부마를 삼으니, 곧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이다.
태사공(太師公)은 그 후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이 되어 이들을 물리쳤고, 삼국통일의 주인공 김춘추(金春秋)·김유신(金庾信) 등을 배후에서 지도한 인물이었다고 ‘창녕조씨시조기(昌寧曺氏始祖記)’는 전한다.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신라·고려조에 걸쳐 현관(顯官)·거신(巨臣)들이 많았고, 조선조에 들어서는 절개 높은 선비를 적지 않게 배출했다.
신라말기 아간(阿干) 조흠(曺欽)은 신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벼슬을 버리고 ‘천년왕업일조진(千年王業一朝塵) 백수고신루만중(白首孤臣淚滿中) 차문수양하처시(借問首陽何處是) 토극명월자상친(吐亟明月自相親)’이란 시문을 남기고 경주(慶州) 토함산에 들어가 여생을 보냄으로써 신라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
그런데 조흠(曺欽)의 아들 조겸(曺謙)은 고려태조 왕건(王建)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결혼, 태조부마(駙馬)가 되었고 대악서승(大樂暑丞)의 벼슬을 지냈으니, 그가 곧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중시조이다.
이후 조겸(曺謙)의 손자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다시 6代 뒤에 조송무(曺松茂)·조송군(曺松君)·조송학(曺松鶴)의 삼형제를 위시하여 6代에 걸쳐 소감(少監)을 배출, 문중(門中)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조자기(曺自奇)는 고려 현종조에 계단(契丹)과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여러차례 토벌한 명장(名將)으로서, 여말(麗末)에 활약했던 무장(武將) 조민수(曺敏修)와 더불어 창녕조문(昌寧曺門)이 자랑하는 인물이다.
조민수(曺敏修)는 공민왕 때에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맞아 이를 섬멸하였고, 우왕 초에는 경상도 순문사(巡問使)로 도처에 들끓던 왜구(倭寇)를 토벌한 명장(名將)이었으며,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뒤에 정권을 장악하려는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야심에 반기를 들었다가 창녕(昌寧)으로 귀양가서 죽은 지조있는 장군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조인(曺璘) 역시 조선조 태종이 한성부윤(漢城府尹)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불응하여 여조(麗朝)에 대한 절개를 고수하였다.
창녕조문(昌寧曺門)이 내세우는 고려조의 인물의 한 사람으로 벼슬이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렀던 양평공(襄平公) 조익청(曺益淸)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충숙왕 때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3代의 王을 모시면서 나라의 기둥으로 사직(社稷)을 보필한 공(功)으로 창녕조문(昌寧曺門)에서는 유일하게 王廟(恭愍王)에 함께 배향(配享)되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조민수(曺敏修) 장군의 영향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손들이 벼슬을 멀리하고 초야(草野)로 많이 돌아갔다고는 하나, 조석문(曺錫文)은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까지 지낸 명신(名臣)이었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 도승지(都承旨)가 되었고,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뒤, 영의정의 벼슬에 올랐다. 청렴한 대신으로 알려졌으며, 충간공(忠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성종조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 널리 알려진 매계(梅溪) 조위(曺偉)는 당시 사림(士林)의 거유(巨儒)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처남(妻男)이며 수제자(首弟子)로서, ‘두시언해(杜詩諺解)’ ‘유배가사(流配歌辭)’ ‘만분가(晩憤歌)’를 지었으며 성리학에도 깊이 통달한 대표적 학자이다.
조위(曺偉)의 동생인 적암(適庵), 조신(曺伸) 역시 문장가(文章家)로서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역관(譯官)으로 10여 차례 일본(日本)·연경(燕京) 등지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 외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다.
한편 조선조 중엽의 대표적 석학(碩學)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창녕조문(昌寧曺門)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학문이 뛰어났으나 벼슬을 탐하지 않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면서 사림(士林)들에게 불의(不義)에 항거(抗拒)할 줄 아는 선비정신을 심어 주었으니, 그가 죽은 지 5년만에 임진란(壬辰亂)이 일어났을 때, 그의 제자였던 홍의(紅衣)장군 곽재우(郭再祐)를 위시한 57명의 문하생(門下生)이 의병을 일으켰던 것도 그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남명(南冥)은 조정(朝廷)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고, 경남 산청(山淸)의 두류산(頭流山) 기슭에 있는 속칭 덕산(德山)마을로 은거, 후학들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사후(死後) 손조 때에 대사간(大司諫)에, 광해군 때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자손들이 창녕조문(昌寧曺門)의 정신을 이어받아 문중을 빛냈다.
양평공(襄平公) 조익청(曺益淸)의 맏아들 조의충(曺義忠)이 상호군(上護軍)을, 둘째아들 조신충(曺信忠)은 희천군수(熙川郡守)를 지냈으며, 조신충(曺信忠)의 다섯 아들 가운데 조상보(曺尙保)가 사의(司議)였고 조상정(曺尙貞)이 현감(縣監), 조상치(曺尙治)가 부제학(副提學)의 벼슬을 지냈다.
특히 조상치(曺尙治)는 세종·문종·단종조에 걸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王의 총애를 받다가 세조가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영천(永川)으로 은거(隱居), <노산조부제학보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는 묘비(묘비)를 미리 써놓고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스스로 밝혀 절의를 지켰다. 정조조에 충정(忠貞)의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조상치(曺尙治)의 증손 조계은(曺繼殷)·조계상(曺繼商) 형제는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각각 정국공신창산군(靖國功臣昌山君)·정국공신창녕군(靖國功臣昌寧君)에 봉해졌으며, 조계상(曺繼商)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이르렀다.
특히 조계상(曺繼商)의 직계후손들 가운데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조계상(曺繼商)의 아들 조광원(曺光遠)이 명종 때에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했고, 증손 조문수(曺文秀)는 시문(詩文)에 능할 뿐 아니라 글씨로도 당대에 이름을 날렸다.
조문수(曺文秀)의 아들인 회곡(晦谷) 조한영(曺漢英)은 인조 때 배청파(排淸派)로 지목되어 김상헌(金尙憲)·최명길(崔鳴吉) 등과 함께 심양(瀋陽)까지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고초를 겪었으며, 조한영(曺漢英)의 현손 동포(東浦) 조윤대(曺允大)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명필가(名筆家)로 이름을 떨쳤다.
조윤대(曺允大)의 아들 신암(愼庵) 조봉진(曺鳳振)과, 조봉진의 조카 연암(烟岩) 조석우(曺錫雨)·하강(荷江) 조석여(曺錫輿) 등이 모두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중종조에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낸 조치우(曺致虞)는 청백리(淸白吏)에 올랐고 효성이 지극하기로도 이름이 났다.
조치우(曺致虞)에게 증손이 되는 조광익(曺光益)·조호익(曺好益)이 모두 성리학에 통달한 대가(大家)로서 특히 조호익(曺好益)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성리학을 연구, 관서(關西)지방의 학풍진작(學風振作)에 기여하였다.
공민왕 때 예조참판(禮曹參判)이던 조서(曺庶)는 태조 때 홍범대전(洪範大全)을 써올려 나라의 규범을 바로잡고, 태종 때 왕명으로 明나라에 가서 명제(明帝)로부터 도해배(桃亥盃)를 하사받아 지금도 전북 고창(高敞)의 정산사(鼎山祠)에 보존되어 있다.
역시 중종조에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한 조세우(曺世虞)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 당시에 우의정(右議政) 김안로(金安老)와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세도를 앞세워 갖은 비리와 폭정을 일삼는 것을 목격하고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들과 뜻을 모아 거듭 상소한 끝에 그 일당을 몰아내고 관(官)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또 재종손(再從孫)인 응남(應南)·진남(鎭南) 형제와 종손인 열(悅)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창녕 대산진(昌寧 臺山陣)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뒤 형제가 순절, 그 충공(忠功)으로 정려(旌閭)되고 열(悅)은 훈정(訓正)에 서수(除授)되었다.
연산군 때에 사헌(司憲)을 지낸 조숙소(曺淑泝)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조에 왜구(倭寇)와 여진족(女眞族) 토벌(討伐)에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조몽정(曺夢禎)의 아들 조탁(曺倬)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 정난선무공신(靖難宣武功臣)에 책록되었다. 그는 왕에게 부흥책십조(復興策十條)를 올려 국무(國務)에 실시케 하였으며 광해군 때, 그가 소장했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진헌(進獻), 이 책을 대본(臺本) 삼아 다시 간행함으로써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데 공헌을 했다.
조숙소(曺淑泝)의 손자인 장호공(莊湖公) 조윤손(曺潤孫), 중종반정 때의 공신 조계형(曺繼衡), 인조 때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내고 시(詩)·서(書)·화(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으로 불리웠던 매호(梅湖) 조우인(曺友仁) 등도 두드러진 인물들이다.
또한 소감(少監) 조송학(曺松鶴)의 증손이며 진사(進士) 조적(曺適)의 아들 조익순(曺益順)은 고려조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영의정(領議政)이었고, 그의 후손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조광한(調匡漢)·직제학(直提學) 청구당(靑邱堂) 조계방(曺繼芳)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조박(曺珀)의 아들 이판(吏判) 조수익(曺受益)과, 역시 이판(吏判)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로도 이름이 났던 조문택(曺文澤), 시중(侍中) 조목남(曺目南)의 손자이며 여말(麗末)에 신돈(辛旽)을 탄핵했던 철야군(鐵冶君) 조정통(曺精通), 그의 다섯 아들인 조경룡(曺慶龍)·조응룡(曺應龍)·조한용(曺漢龍)·조변용(曺變龍)·조견용(曺見龍) 등이 두드러진 인물들이며, 이들에게서 비롯된 자손들이 번창하다.
감무공(監務公) 조신의(曺臣義)의 증손 조유인(曺由仁)은 판부사(判府事)로 대과(大科)급제하여 문중을 빛냈으며, 평장사(平章事) 조용기(曺用奇)의 후손인 상서(尙書) 조희우(曺希遇)에게 6대손이 되는 조홍립(曺弘立)은 문과에 급제, 병조·형조정랑(兵曹·刑曹正郞)을 거쳐 여주목사(驪州牧使)를 지냈고 뒤에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嘉善)에 올랐다.
한말(韓末)에 와서 창녕조문(昌寧曺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 청애 조성환(曺成煥)과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을 꼽는다.
조성환(曺成煥)은 육군참위(陸軍參尉)로 국운(國運)이 다하자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과 더불어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군정부장(軍政部長)과 정무위원(政務委員)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근세(近世)의 거목(巨木)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은 한일합병이 되던 무렵 20대 청년이었다. 고당(古堂)은 안도산(安島山)의 국내투쟁이론에 큰 감화를 받아 민족지도이념 노선을 결정했다.
고당(古堂)은 일제치하에서도 국내에 머물면서 ‘민족산업증진·생활조건 개선·배일(排日)독립정신함양’을 지표로 한 민족주의운동을 전개했다.
광복후 북한(北韓)이 공산화(共産化)된 뒤에도 동포를 버리고 혼자 월남(越南)할 수 없다며 끝까지 북한에 남았던 민족사(民族史)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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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현재 전체인구 299,642명
창녕 조씨(昌寧曺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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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은 경상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인데 555년(진흥왕 16) 하주(下州)라 칭하고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는 화왕군(火王郡) 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태조때 창녕으로 고치고 1018년(현종 9) 밀성군(密城郡 : 밀양)에 귀속되었다가 인조에 현(縣)으로 복귀,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으며 1914년 영산군(靈山郡)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창녕 조씨의 시조는 신라 진평왕(제 26대, 재위기간 579-632년)의 사위로 전하는 조계룡(曺繼龍)이다.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는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며, 그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 속에 장부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용의 아들 옥결(玉 )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니 용모가 준수한 사내아이로 겨드랑이 밑에「조(曺)」자가 뚜렷하게 씌어져 있었다. 이것을 본 이 학사가 이상이 여겨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도 기이하게 생각하며 성(姓)을 조(曺)로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계룡은 자라서 진평왕의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창녕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문헌의 실전으로 계룡의 후손 겸(謙)을 일세조로 하여 계대하고 있다. 겸은 신라 말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낸 흠(欽)의 아들로 고려 태조의 딸 덕공 공주와 혼인하고 대악서승(大樂署丞)을 지냈다. 「창녕 조씨가 첩」에 의하면 겸이 손자인 연우(延祐)로부터 10세손 자기(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배출하여 가문의 번성을 누린 것으로 전한다.
고려 말에 와서 크게 이름을 떨친 민수(敏修)는 공민왕 때 순주부사(順州府使)로 여러 장군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치고 이등공신에 올라 우왕 초 경상도 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왜구를 물리쳐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어 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역임하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의 좌군도통사(左軍 都統使)로 출정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 회군하여 창왕을 세우는데 공을 세워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이 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관찰사를 지낸 항(沆)의 아들 석문(錫文)이 유명하였는데,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형조·예조의 정랑 (正郞)을 지냈고,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삼등공신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올라 창녕군에 봉해졌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 때는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적개일등공신이 되어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이듬해 왕명으로 노사신과 함께「북정록」을 편찬하였고, 성종 때 좌리일등공신을 거쳐, 1476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위(偉)는 현감(縣監) 계문(繼門)의 아들로 김종직에게 글을 배우고 성종 때 문과에 올라 검열(檢閱)을 거쳐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며,사가독서를 한 뒤 성종대에서 성리학의 대가로 신진사류의 지도자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석학 식(植)은 편교 언형(彦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당대 유학계 대학자로 추앙되었으며, 뛰어난 학행으로 여러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여 문하에서 김효원· 김우옹· 정인홍 등 저명한 학자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한편 중종 때 무신으로 이름난 윤손(潤孫)은 대사헌 숙기(淑沂)의 아들이다. 수차에 걸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워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계상(繼商)과 계은(繼殷) 형제는 영흥판관을 지낸 구서(九敍)의 아들로, 계상은 공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을 지냈고, 계은은 목사(牧使)를 거쳐 종부사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계상의 아들 광원(光遠)은 명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고 우찬성(右贊成)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 문수(文秀)는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시문과 서예에 능하여 명필로 손꼽혔다.
그 밖의 인물로는 영조 때 교리(校理)·이조정랑(吏曹正郞)· 이조판서(吏曹判書)등을 지낸 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에 오른 명교(命敎)가 글씨에 뛰어나「능가사사적비」를 비롯한 많은 비문을 남겼으며, 윤형(允亨)도 초서와 예서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은 풀·돌·대나무를 잘 그려 많은 작품을 남겼다. 중종 때에는 청백리에 녹선된 치우와 그 의 증손 광익(光益)·호익(好益)이 이름났다. 호익은 임진왜란 때 소모관(召募官)으로 군민을 규합하여 중화(中和)·상원(祥原) 등지에 전공을 세워 녹비를 하사 받았고, 정유재란때는 다시 강동(江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후 안주(安州)·성천(成川)·정주(定州) 등지의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연산군 때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숙기(叔沂)는 주역에 정통했고, 중종때의 반정공신 계형(繼衡)과 인조 때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고 시·서·화에 능하여 삼절로 일컬어진 우인(友仁), 이조판서 석우(錫雨) 등이 뛰어났으며, 근대에 와서는 만식(晩植)이 민족독립운동가로 조선일보사장을 역임하며 민족 언론 창달에 공헌하여 명망높은 창녕 조씨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창녕 조씨는 남한에 총 72,203가구, 299,6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