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감정학습의 의의
고대자기의 감정은 문물 감정의 중요 부분이다. 문물의 감정은 문물의 소장과 더불어 탄생되었다. 전국시대(B.C.475-B.C.221)《주례周禮》에 '춘관春官의 직무는 종묘의 수장품을 관리하는 것으로, 국가의 보물이 모두 여기에 저장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서晉書 장화전張華傳》에 원강元康4년(294년) 10월에 무고武庫에 불이 나서 "대대로 전해내려 온 보물 및 한고조漢高祖의 참사검斬蛇劍, 왕망王莽의 머리, 공자孔子의 신 등이 다 타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늦어도 봉건사회 초기, 역대의 궁실과 무고武庫와 사당祠堂 등은 제기祭器나 법기法器나 진기한 보물을 저장하고 진열하는 장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아울러 개인이 수집하고 수장하는 풍조도 일찍 나타났다. 송대宋代(960-1279)에 이르러, 골동의 수집과 수장이 유행하였다. 宋 원우元祐1年(1086년) 철종哲宗황제 때에, 하상주夏商周(B.C.2100-B.C.256년) 삼대三代의 고대기물과 진한秦漢시대의 기물 만여점을 수장하고 있었다. 12세기 초, 송대의 황실에서는 계고각稽古閣, 정고각情古閣, 상고각尙古閣 등을 짓고, 고옥古玉, 인장印章, 청동정靑銅鼎, 청동이靑銅彛, 예기禮器, 법서法書, 명화名畵 등을 저장하였으며, 골동해설서와 감상전문서적 등도 잇달아 간행되었다. 북송北宋(960-1127) 왕보王甫의 《선화박고도宣和博古圖》, 원우元祐7年(1092년) 여대림呂大臨의 《고고도考古圖》, 구양수歐陽修의 《집고록集古錄》, 조명원趙明誠과 이청조李淸照 부부의《종정이기관지鍾鼎彛器款識》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의 저명한 골동해설서이며, 아울러 골동감정의 전문가도 계속 나타났다. 명청시대에 골동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유행은 더 발전하였다.
고대자기의 수장은 고옥古玉과 인장印章과 청동기와 도서圖書와 서화書畵 등의 골동품 수장보다는 늦다. 당송唐宋시대에 이르러 도자업이 공전절후로 발전하여, 남북각지에 명요가 나타나고, 제자기술도 크게 진보하여, 생산품도 풍부해지고 아름다워졌다. 자기는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생활필수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왕과 신료와 서민들의 애호를 받았으며, 수장고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당대唐代(618-907)의 은銀과 같기도 하고 눈 같기도 한 형요邢窯백자, 화려하고 우아한 당삼채唐三彩, 오대五代(907-960) 월요越窯의 '비색자秘色瓷', 옥처럼 윤택한 송대宋代의 관요官窯자기, 비계덩이처럼 부드러운 느낌의 여요분청汝窯粉靑, 아침노을처럼 요염한 균요홍화유자鈞窯紅花釉瓷, 옥처럼 아름다운 경덕진의 영청자影靑瓷 등은 모두 당시의 수장가들이 찾아 헤매던 진귀한 제품이다.
이로 말미암아 고자기의 감정과 감상에 관한 저술과 전문가도 많아지게 되었다. 명明 조소曹昭의《격고요론格古要論》, 왕세무王世懋의《규천외승窺天外乘》, 고렴高濂의《준생팔전遵生八箋》, 장응문張應文의《청비장淸秘藏》, 황일정黃一正의《사물감주事物紺珠》, 곡응태谷應泰의《박물요람博物要覽》, 진미공陳眉公의《닐古瓷》, 도륭屠隆의《고반여사考盤餘事》, 송응성宋應星의《천공개물天工開物》등은 모두 전문적인 내용을 갖추고 있으며, '박아호고博雅好古'의 유행과 도자기무역의 흥성으로, 청대에서 민국에 이르도록 관련 전문서적이 끊임없이 세상에 출현하였다.
청대에는 남포藍浦의《경덕진도록景德鎭圖錄》,《남요필기南窯筆記》(무명씨), 오건吳騫의《양선명도록陽羨名圖錄》, 양동서梁同書의 《고동자기고古銅瓷器考, 고요기고古窯器考》, 주염朱琰의《도설陶說》, 적원수寂圓수의《도아陶雅》,정철程哲의《요기담窯器談》 等이 있다.
民國시기에는 허지형許之衡의《음류재설자飮流齋說瓷》,조여진趙汝珍의《고완지남자기古玩指南瓷器》,소칩민邵蟄民의《증보고금자원류고增補古今瓷源流考》, 양소곡楊嘯谷의《고월헌자고古月軒瓷考》,향작向작의 《경덕진도업기사景德鎭陶業紀事》, 곽보창郭보昌의《자기개설瓷器槪說》,오인경吳仁敬과 신안조辛安潮의《중국도자사中國陶瓷史》,《회자학繪瓷學》,강사청江思淸의《경덕진자업사景德鎭瓷業史》,장비연張斐然의《강서도자연혁江西陶瓷沿革》,진만리陳萬里의《자기여절강瓷器與浙江》 등은 모두 영향력이 컸던 전문저술이지만, 고대에 자기에 대한 수장과 감정은, 개인 한 사람의 감상과 애호를 피력한 것이거나, 혹은 골동상인이 고자기를 수집하여 폭리를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후에, 공산당과 정부의 중시와 관심하에, 문물사업도 발전하여, 고자기의 고고考古, 연구, 수집, 수장, 진열 등에 모두 전문적인 부서와 인력을 투입하여, 1980년 성립된 중국고도자中國古陶瓷, 고외소도자연구회古外銷陶瓷硏究會의 회원은 300여 명에 달하였으며, 그 가운데 저명한 고도자연구학자 들은 바로 고도자 감정의 전문가로서, 그들이 발표한 전문서적도 아주 많다.
오늘날, 고도자 감정의 중요한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고자기감정은 도자사연구의 기본이다. 도자사의 연구는 주로 문헌자료와 실물자료에 의거한다. 실물자료는 주로 고대 요지窯址와 유적지와 무덤과 사회에 흩어져 있는 기물의 수집에 근거한다. 이렇게 풍부한 실물자료를 잘 운용하면, 각 요지의 시대별 제품의 특징을 인식하여, 이 제품이 가지고 있는, 재료의 선택과 정제精製와 성형成型과 소성방법과 장식기법 등 일련의 공예기술을 알 수가 있다. 동시에 당시의 작업장 내부의 분업상황分業狀況 등도 엿볼 수가 있다.
2. 현장고고학에서 시대판단의 수단이 된다.
3. 고자기의 가치와 소장품의 등급을 비교적 정확하게 평가한다.
4. 도자미술의 영역에서, 더 깊이 계승과 창조의 관계를 인식하여 새로운 창조에 유리하게 된다.
5. 사회에 흩어져 있는 고대 자기의 수집에 더욱 유리하다.
6. 골동상인의 선전과 매매에 유리하다. 아울러 문화재규정에 따라 고대 자기의 수출에 신중하여, 정급定級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방지한다.
7. 방고도자倣古陶瓷의 생산을 지도할 수가 있으며, 방고도자의 질량과 경제적인 이익을 높일 수 있다. 예를 들면, 경덕진도자관의 전문가와 작은 공방의 도예가들은 원청화元靑華와 명대明代 영락永樂(1403-1424)과 선덕宣德(1426-1435) 관요청화와 명대의 민간청화를 연구하여 소량의 복제품을 만들었다. 이들은 각 시기의 청화가 가지고 있는 특징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복제품은 조형과 유약의 색과 문양 등의 여러 면에서 진품과 아주 유사하여 복제품의 수준이 진품의 수준에까지 도달하여, 전문가와 수장가의 칭찬과 환영을 얻었으며, 가치도 일반 방품보다 높았다.
2.고도자 감정의 주요 내용
1. 시대 확정 : 고대 도자의 상대적인 소성연대를 감별하는 것으로, 다수의 기물에는 관지가 없으므로 이 경우에는 먼저 시대를 판별해야 하며, 연호관지가 있는 기물의 경우에는 진위를 변별해야 하고 연호의 위조연대를 감별해야 한다. 경덕진 고도자는 아래와 같이 시대를 구분한다 : 오대五代, 송대宋代의 조기早期와 중기中期와 만기晩期, 원대元代의 전반기와 후반기, 명대明代와 청대淸代는 제왕의 연호에 따라 구분.
제왕의 연호에 따라 분기를 나누는 것은 표현상의 방편으로, 제품이 구비한 특징이 제왕의 교체와 더불어 변화하였음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신공예와 신재료의 출현과 미감美感과 생활습관의 변화 및 여러 대에 걸친 도공의 기술개량에 따라 점차로 변화한 것으로, 계승과 창조와 재계승과 재창조의 예술발전규칙에 따라 변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를 판별할 경우에, 제품생산의 총체적인 추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를 고고학에 응용하여, 근래에는 이미 적외선(TL)법을 이용하여 고자기의 소성연대를 측정하며, 오차는 10% 이내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왕왕 기물에 구멍을 뚫어 소량의 표본을 채취해야 하므로, 기물에 상처를 남기게 된다. 이 밖에 '후가채後加彩'와 '후가관지後加款識'한 기물이나, 과도하게 햇볕을 쪼이거나 가열한 기물에 대해서는 적용하기가 어렵다. 현재에도 눈으로 감정하는 방법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며, 과학기계를 이용하여 시대를 판정하는 방법의 확대도 반드시 사람의 실제감정 경험과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
2. 진위 판정 : 명요名窯의 제품이 다른 요의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상품생산에 늘 있는 일로, 오대五代에 경덕진에서 생산한 '해각蟹殼'청자는 태토와 유약과 조형 등에서 모두 월요越窯청자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나, 이는 결코 방품의 생산이 아니며, 고도자감정의 각도에서 보면, 요지판별에 속하는 문제로서, 진위판단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진위의 판단은 고의로 전 시기의 제품을 모방한 가짜를 구분하는 것이다. 즉 '고도자 방품'과 '진품'을 구별해야 한다. 경덕진에서 명대明代 성화成化(1465-1487)시기의 관요에서 모방한 宋代의 용천요龍泉窯 가요哥窯는 송대의 제품과 금사철선金絲鐵線이 아주 유사하였다. 정덕正德시기(1506-1521)에 '선덕년제宣德年制'라는 관지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가정嘉靖(1522-1566)과 만력萬歷(1573-1620)이래로 더욱 성하였다.
淸代에는 옹정雍正(1723-1735)과 건륭시기乾隆時期(1736-1795)의 방고倣古 수준이 아주 높았다. 청말淸末과 민국시기民國時期(1912-1949)에, 방품의 생산은 많은 전문적인 소규모 공방에서 이루어졌으며, 어떤 제품은 진품과 혼동되었으며, 이 시기의 대외무역도 거의 골동무역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후에, 방품생산은 여전히 도자업의 한 부분이었다. 이리하여, 전해내려 온 "고대자기" 가운데 가짜가 수두룩하여 진품과 혼동되게 되었다.
3. 우열 판단 : 고대자기의 품질과 가치를 감별. 질량은 고대 자기 자체가 소성시에 만들어졌거나 사용과정에서 조성된 여러 가지 결점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변형, 터진 흔적, 부딪친 흔적, 변색, 유약 엉김, 마유(磨釉-유약 갈림), 축유(縮釉-유약 수축), 박유(剝釉-유약 벗겨짐), 박채(剝彩-채색 벗겨짐), 탈채(脫彩-채색 떨어져 나감), 누채(漏彩-채색이 칠해지지 않고 빠짐), 보채(補彩-덧붙여 채색함) 등이다.
'가치'는 역사와 과학기술과 예술적인 면의 가치를 말한다. 역사가치는 그 기물이 가진 절대적인 소성연대나 시대판별의 근거가 되는 알려진 상대적인 연대를 말하며, 어느 품종의 창조연대나 쇠퇴연대를 증명할 수 있고, 중국과 외국의 과학기술교류나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반영할 수 있다. 과학기술가치는 그 기물이 고대의 도자기술의 발전과정과 과학기술의 발전성과를 반영할 수 있는가를 말하며, 도자업의 혁신과 창조와 고도의 기술 등을 반영한다. 예술가치는 제품의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3개의 기본요소를 보아야 한다 - 자기의 질, 조형, 예술적으로 장식되었는지의 여부.
4. 요지窯址 판단 : 기물의 생산지 감별이다. 요지의 명명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소조지점으로 명명. 절강浙江 용천요龍泉窯, 복건福建 덕화요德化窯, 강서江西 길주요吉州窯, 경덕진 호전요湖田窯 등으로, 보편적인 방법이다. 2). 가마의 관리자의 성씨로 명명. 경덕진의 唐代의 도요陶(玉)窯, 明代의 최공요崔公窯, 주요周(丹泉)窯, 청대의 낭요郞(廷極)窯, 연요年(希堯)窯, 당요唐(英)窯 등이다. 3). 소조연대로 명명. 경덕진의 명대明代의 어요御窯는 영락요永樂窯, 선덕요宣德窯, 성화요成化窯 등으로 분별한다. 4). 제품의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명명. 관요官窯, 민요民窯, 추부요樞府窯 등이다. 官窯라는 것은 조정과 황실(황제가 외국사신이나 신하나 친척에게 하사한 기물 포함)에서 사용하는 각종 자기를 전문적으로 제공한 가마로 어요御窯라고도 한다. 民窯라는 것은 국내외의 광대한 백성들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민간용자기를 생산한 민영수공업 공방이다. 《도아陶雅》에 " 민간에서 사고파는 자기를 도공들은 '객화客貨'라고 한다. 무릇 관요와 구별되는 것이다. 관요 가운데 더욱 정밀한 것은 '어요御窯'라고 한다. 어요라는 것은 지존至尊이 사용하는 것이며, 관요라는 것은 비빈妃嬪이하가 사용하는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동일한 시기의 서로 다른 요지의 제품에는 차이가 아주 분명한 것이 있으며, 아주 유사한 것도 있으므로 구분을 해야 한다. 제품의 지방특색은 주로 원료의 다름으로 인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요지를 판단할 경우 주로 태토와 유약의 특성을 관찰하며, 그 다음으로 공예와 조형과 장식 등의 여러 요소를 관찰해야 한다
3. 고도자 감정의 주요 근거 1. 정확한 연대가 표기되어 있는 자기와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있는 무덤에서 출토된 자기를 '표준기'로 하여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자기를 비교연구한다. 연대가 확실한 무덤에서 출토된 자기에 대하여, 간단히 무덤의 매장연대를 무덤에서 출토된 자기의 제작연대로 간주할 수는 없으며, 출토지점과 출토된 자기의 생산지와의 거리와 기물에 사용흔적이 있는가와 무덤주인의 신분 등의 여러 요소 및 감정경험을 종합하여 가장 가능성이 있는 제작연대를 판단해야한다. 왜냐하면, 고대인은 보존하고 있었거나 여러 해 사용한 예술자기와 일용자기를 순장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며, 특히 경덕진과 천리 이상 떨어진 무덤에서 출토된 경덕진 자기는 더욱 더 이와 같았다. 무덤의 매장연대는 다만 출토기물의 제작 하한연대만을 반영한다.
2. 문헌자료. 역사서에서, 왕왕 당시의 사람들이 직접간접으로 당시의 도자업에 대한 기록이나 자기에 대한 비평을 기록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3. 요지의 지층자료. 요지를 조사하고 발굴할 경우, 왕왕 어지럽게 묻혀 있는 퇴적층에서 연대가 표기되어 있는 파편이나 窯具나 연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제품의 파편 등을 발견하게 된다.
4. 관요와 민요 사이의 상호영향을 관찰한다.
5. 동시대 자매예술의 자기에 대한 영향을 고려한다. 일용공예품의 설계와 생산에 있어, 저렴한 재료의 공예품은 왕왕 귀중한 재료로 만든 공예품의 조형과 문양을 모방하여, 제품의 가치를 높인다. 예를 들어 송원시기宋元時期의 영청자影靑瓷의 각화문刻花紋과 인화문印花紋 자기의 조형과 문양은 당시의 금은기金銀器의 영향을 받았다. 청淸 강희康熙(1662-1722)의 자태법랑瓷胎法琅은 당시 동태법랑銅胎法琅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4. 고도자 감정방법 비교해야 감별할 수 있다. 유형학類型學의 분류하여 배열하는 방법을 응용하는 것은 눈으로 하는 보편적인 고대 자기의 감정방법이다. 일반적으로, 기물의 조형과 장식에 따라 분류하거나, 서로 다른 시대의 완碗을 가지고 계통적인 배열과 비교를 진행하거나, 서로 다른 시대의 오채五彩와 청화靑華와 단색유單色釉 등을 분별하여 계통적으로 배열하고 비교한다. 배열과 비교 가운데, 충분히 위에서 말한 고자기의 5가지 근거를 이용하여 감정의 네 가지 주요 내용을 해결한다.
어느 시대의 제품에 대하여 '표준기'가 없는 상황에서는, 양 쪽을 보아 중간을 인증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홍무洪武청화를 감정할 때, 먼저 원대元代 '지정형至正型'청화를 보고, 다시 명대明代 영락과 선덕의 관지가 있는 관요청화를 관찰하여, 원청화와 유사한 듯 하면서 명 영락과 선덕청화자기의 특징을 구비하고 있는 청화자를 홍무자기로 판정하였다. 왜냐하면, 어느 시기의 생산품이라도 반드시 여러 가지 '앞의 전통을 이어 뒤로 가르쳐 주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해야 할 기물이 앞에 놓여 있을 경우, 어떻게 제작연대와 요지를 분석할 것인가? 기물 자체의 어느 부분이 그 기물의 정확한 제작연대와 요지를 반영하고 있을까? 기물의 제작연대와 요지를 반영하고 있는 요소를 시대판별요소(斷代因素)라고 하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기형 : 기물의 口(주둥이), 頸(목), 肩(어깨), 腹(배), 壁(벽), 脛(다리), 底足(굽), 流(주구), 執(손잡이), 繫(고리) 등의 형태상의 특징과 태체胎體의 두께와 무게. 각 시대의 독특하고 유명한 기형은 하나하나 그 특징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위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락永樂의 압수배壓手杯, 성화成化의 계강배鷄腔杯, 청淸 강희康熙의 봉미준鳳尾樽, 건륭乾隆의 백록준百鹿樽과 전심병轉心甁 등이다.
2). 장식 : 장식방법(채회彩繪, 색유色釉, 각刻, 획劃, 조彫, 루鏤, 퇴堆, 날捏, 인印, 첩貼), 제재, 도안, 문양의 형상, 화풍畵風과 채색안료 등의 방면에 나타난 시대적인 특징과 요지특징 등을 포괄. 장식은 조형과 공예와 재료와 사람들의 미적요구의 변화를 따라 변화하므로, 장식에 나타난 새로운 기타 여러 변화는 기타 감정요소의 변화보다 분명하므로, 감정시에 이러한 요소의 분석이 매우 중요하다.
경덕진의 유상오채자釉上五彩瓷에 관해 말하자면, 원대元代의 중후기中後期에 출현하였으며, 당시에는 단지 홍황록紅黃綠의 3색 만을 사용하였으며, 화법畵法도 원청화元靑華와 유사하여 필치도 호방하고 생동하였다. 명초에는 원대의 화풍을 계승한 이외에, 홍무洪武시기(1368-1398)에 쌍면반홍채雙面礬紅彩가 출현하였다. 영락선덕永樂宣德시기에는 청화투채반홍채靑華鬪彩攀紅彩가 출현하였으며, 웅장한 기백의 문양에, 채색은 농염하였다. 성화成化시기에 풍미한 투채鬪彩는 필치가 공정工精하고 문양이 생동하며 채색이 풍부하고 옛스러웠다. 성화투채의 채색안료 칠하는 방법도 다양하여 점채点彩, 복채覆彩, 염채染彩, 가채加彩, 전채塡彩 등이 있었으며, 다만 모두 평평하게 칠하여 '꽃 그림에 명암이 없고, 잎 그림에 뒤집어진 면이 없는' 표현상태이었으나, 경묘하고 우아하였다. 가정嘉靖과 만력萬歷의 오채五彩는 주로 유상채釉上彩안료를 이용하여 문양을 그렸다. 청화靑華를 이용하여 국부의 문양을 그렸으나, 아주 적은 비율을 차지하였다. 이 시기에 취색翠色을 새로 창조하였는데, 아교물에 흑색안료를 섞어 선을 그렸으며, 흑색의 선 가운데 미미하게 황갈색이 나타났다. 문양의 배치는 성화투채보다 복잡하였으며, 필력은 거칠면서도 고졸古拙하였다.
강희오채康熙五彩는 명대와 청초의 인쇄본에 삽입되는 삽도揷圖의 영향을 깊이 받아, 구도는 균형이 잡히고 형상은 개괄적 이었다. 과장되고 부드러운 선 속에 강건함이 감추어져 있었으며, 색채는 맑고 영롱하게 아주 붉고 짙은 녹색으로 고색창연하였다. 강희오채 가운데의 흑색은 칠흑처럼 빛나며, 갈색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고, 기름을 사용하여 흑색안료와 반홍攀紅을 조제하였으며, 금金도 오채에 많이 사용하였다. 강희오채는 후대에 깊은 영향을 미쳐, 가경嘉慶(1796-1820)과 도광道光(1821-1850) 이후에 많이 모방하였지만, 모두 강희오채의 자연생동하고 고졸古拙한 아름다움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3). 태토와 유약 : 다른 요지와 다른 시대에 있어, 태토와 유약의 원료에 대한 선택과 배합 및 정제는 서로 다르며, 모양 만들기와 유약을 칠하는 방법에도 차이가 존재하고, 굽는 온도와 굽는 상황도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므로, 기물의 태토와 유약은 각기 특색이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경덕진의 송대宋代 중기의 영청자影靑瓷의 태토는 깨끗한 백색으로 아주 세밀하며, 얇아서 빛이 투과하고, 유면은 영롱하고 투명하기가 마치 물이나 옥과 같아, 동시대의 기타 요지의 영청자기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또 명대 영락永樂시기의 첨백유자기甛白釉瓷器는 태골이 은은하게 육홍색肉紅色(살코기 같은 붉은 색)을 띤다. 성화成化시기의 태토를 빛에 비추어 보면 아백牙白(상아와 같은 백색)이나 분백색粉白色(분가루 같은 백색)을 나타낸다. 청대淸代 강희康熙자기의 태토는 곱고 윤기가 나며 단단하다는 느낌을 준다. 옹정雍正자기의 태토는 빛에 비추어 보면 은은한 청백색이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은 모두 후대의 모조품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감정할 때에는 제품의 태토의 색택(色澤-색과 광택), 조세(粗細-굵기), 송긴(松緊-밀집도), 견취(堅脆-강도), 후박(厚薄-두께), 투광透光, 두드려 나는 소리 등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4). 제작공예와 장소裝燒방법 : 과학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제작공예와 장소방법도 끊임없이 개량되며, 신공예의 출현과 새로운 수요와 새로운 장소방법의 사용과 더불어 제품의 면모도 변화한다.
예를 들어, 경덕진에서 오대에 '다지정질소多支錠迭燒(여러 개의 빚음 눈을 사용하여 차례대로 받쳐 굽기)'라는 갑발을 사용하지 않는 방법을 채용하여, 기물의 권족圈足(둥근 굽)과 기물 내부에 약 7-18개의 받친 자욱을 남기게 되었다. 북송北宋 초에는 3-4개의 지정점으로 기물의 굽을 받치고 다시 갑발(갑발 하나에 기물 하나)에 넣어 소성하여, 완제품의 굽에 3-4개의 받친 자욱이 남았다. 이어서 빚음 눈을 없애고, 권족의 안지름보다 작고 권족보다 약간 높은 권식圈式의 점병(도지미)을 기물의 권족에 받쳐 갑발에 넣는 방법을 채용하여 완제품의 권족 내부 바닥에 점권이나 점병의 흔적을 남게 하였다. 북송 말기에는 복소법覆燒法(업어서 굽기)의 출현으로 망구자芒口瓷(구연부에 유약이 없어 꺼칠한 자기) 등이 생산되었다.
또 원대元代에서 명대明代 홍무시기洪武時期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병甁과 관罐의 굽 부분(器底)은 따로 만들어 붙인 것으로, 홍무이후에는 채용하지 않았으며, 원元과 홍무洪武의 고족배高足杯는 진흙을 이용하여 상부와 서로 접합하였으나, 홍무이후에는 유약을 이용하여 접합하는 방법으로 개선되었다. 명대의 병과 관을 만들 때에 드러나는 이은 자욱은 여러 개가 뚜렷하지만, 청대에는 기술의 진보로, 이은 자욱이 적고 뚜렷하지 않다. 이러한 공예와 장소방법의 세세한 특징도 감정시에 무시할 수 없다.
5). 관식款式 : 경덕진자기는 명대 영락관요자기로부터 정식으로 제왕의 연호관年號款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선덕시기에는 매우 보편화 되었으며, 이로부터 관식의 형식과 내용도 갈수록 풍부해졌는데, 자주 나타나는 형태로는, 제왕의 연호 본래의 관지, 제왕 연호의 기탁관寄託款, 위조관지, 간지연관지干支年款識, 재齋와 당堂과 헌軒과 거居 등의 관지, 인명관人名款, 찬송관讚訟款, 길상관吉祥款, 제화관題花款, 화압관花押款, 창령관窓木靈款 등이 있다.
명청 관요에는 전문적인 낙관을 쓰는 도공이 있어, 자체와 필치와 배열형식과 낙관의 위치 및 관지를 쓰는 채색안료 등에 모두 엄격한 규범이 존재하였으며, 후대의 위조자들이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명청관요제품을 감정할 경우,관지의 특징을 살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6). 자기의 총체적인 시대특징을 관찰. 자기는 기타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지방적인 특색과 개성이 시대특징 가운데에 융화되어 있지만, 또한 그 시대의 특징을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로 인하여 각 시대의 총체적인 시대특징을 파악하면, 감정할 경우에도 매우 유리하다.
종합하면, 어느 시대의 진품이건 모두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므로, 여러 곳에 만든 시대의 낙인이 찍혀있게 되며, 비록 후대의 모조품이 번다하여 간혹 진품과 혼동되는 수준에 이르더라도, 모조품은 결국 진품과 다른 시대에 생산된 모방품이므로, 끝내는 모방한 시대의 흔적을 남기게 되므로, 각종 요소를 종합하여 고려하면, 진품과 혼동되는 가짜도 감정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