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네오 섬에 약 2,3만년 전 사람들이 이주해 온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은 주로 오스트랄로이드(Australoid) 또는 네그리토스(Negritos)인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3000년 무렵 오스트로네시안 몽골로이드인(Austronesia Mongoloid)이 추가로 이주해 왔다.
브루나이 지역은 인도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개인의 영토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다양한 부족장에 의해 지배를 받아 왔다. 부르나이에 대한 역사는, 중국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 나라를 가리키는 명칭은 조여괄(趙如适)의 『제번지(諸蕃志)』에 '발니(渤泥)', 『송사(宋史)』에 '발니(浡尼)'라고 나온다.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태평흥국(太平興國) 2년(977)에 이 나라에서 사절을 보냈다고 하니 이것이 두 나라 접촉의 시작이다. 다만 동남아시아 역사를 구성할 때 자주 이용하는 고대 중국 사료에 따르면, 10세기경 중국은 동남아시아의 뿌니(Puni)라는 왕국과 무역 관계가 있었는데 이 왕국을 브루나이의 전신으로 추측한다.
브루나이는 지리적 여건상 자바(Jawa) 섬에서 흥기하는 왕조들과 경쟁해야 했지만, 주로 자바 왕국들(마자자빠힛, )의 통제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중국에 사절을 보내고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은 자바 왕국들을 견제하고자 함이었다.
9세기경에 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Sumatra)의 빨렘방(Palembang)을 중심으로 일어난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와 자바(Hawa) 섬의 마자빠힛(Majapahit) 왕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중국과의 접촉을 고려한다면 이미 10세기에 이곳에 중국인들이 이주해 와 살고 있었다고 사료된다. 왜냐하면 중국과의 교섭에 중국어나 한자 구사 능력이 필수이고, 그 일은 대부분 중국인들이 담당했기 때문이다. 중국과 무역이 행해졌었고, 통역 역시 중국인이 필요했다.
브루나이가 송 조정에 사절을 보낸 이후 브루나이와 중국과의 관계는 줄곧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명대에 이르면 이곳의 왕이 직접 수도 남경을 찾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감격 및 환대에 대한 사서의 묘사는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명사(明史)』에 의하면, 홍무(洪武) 3년(1370)에 중국에서 먼저 사절을 보내 조공하게 했다 하며, 이에 응해 사절이 오기 시작해 영락(永樂) 3년(1405)에는 브루나이의 왕이 왕후 및 자제들을 이끌고 직접 중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왕의 일행은 복건(福建)의 유명한 대외 교역 도시 천주(泉州)로 들어왔고, 오랜 여정을 경과하여 3년 뒤에 수도에 도착했다. 『명사(明史)』에는 이렇게 여정이 늘어진 이유가 중도 곳곳에서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왕이 중국을 직접 찾는 일은 동남아시아에서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이렇듯 왕비며 자제들을 모두 이끌고 긴 여행을 한 사례는 브루나이가 최초였다. 『명사(明史)』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왕은 남경에서 객사를 했고, 그 묘소는 아직도 남경에 있으니, 왕이 친조한 것은 확실하다. 왕위 계승 분쟁이나 내분 때문에 피신했던 것 같지는 않고, 단지 이 시기도 자바( Jawa)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그 세력을 견제할 후원자를 찾고자 함이었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왕이 목숨까지 바쳐야 했던 이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영락제는 극진히 브루나이 왕가 일행을 대접했고, 브루나이 왕실에 대한 보호 세력을 자처했다. 왕은 사망했지만, 왕자 일행은 중국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왕은 중국으로부터 책봉받았고, 3년 1공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왕으로 책봉을 받으면 적어도 중국의 황제 아래 태국이나 믈라까, 베트남, 참파 등 각국 왕과 동격으로 간주되는 것이니, 브루나이 왕실의 외교는 큰 수확을 거둔 셈이다.
명의 보호를 더 확고히 과시하고자 함이었는지 브루나이의 왕은 나라 안에 있는 성스러운 산에 기념비를 세워 줄 것을 부탁했고, 영락제는 "··· 예부터 먼 곳으로부터 천도(天道)를 받들고 성교(聖敎)를 듣고자 황제의 궁정을 직접 찾아온 자들은 있으나 처자, 형제, 친척, 신하들을 모두 이끌고 와 황제 앞에 신하됨을 청하고 엎드린 자는 발니(浡泥) 국왕 한 사람 뿐이다 ···."라는 내용이 포함된 장문을 새겨 넣은 비석을 세우고 '장령진국지산(長寧鎭國之山)'이라 봉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던 것 같은데, 1412년에 왕은 모친을 포함한 가솔들을 이끌고 다시 영락제를 찾았으니, 양국 사이 우호 관계의 절정이었다.
이후 조공 사절은 물론 양국 상인들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다. 중국인들의 활동도 활발해 브루나이 조정에서 고위직 관리를 맡았던 인물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특히 명말에 중국 남부 광동과 복건에서 들끓었던 해적들이 이곳으로 이동했다 하니, 중국과의 교류는 다방면에서 활발했다.
시기적으로, 명과의 교류가 빈번하던 15세기 이후에 브루나이에 이슬람교가 들어와 있음직도 하지만 『명사(明史)』에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씌어진 『수마 오리엔탈(Suma Oriental)』의 저자 똠 삐레(Tome Pires)는 브루나이의 왕이 "최근 개종을 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Ricklefs 2001 : 10). 브루나이는 이 세기에 전성기를 구가하며 지배 영역을 북부 보르네오는 물론 동북부로 필리핀의 일부까지 확대하였다(Sardesai 1997 : 306).
1300~1400년대(14세기, 15세기)에 마자빠힛 왕국에 속한 브루나이는 교역국이었다가 독립하였다. 15세기에 이르러 브루나이는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인 지위를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중반에 이곳 왕이 주변국을 견제할 세력으로 중국을 대신해서 그 당시 강력한 해상무역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믈라까와 우호관계를 맺어 믈라까 왕에게 딸을 보내 결혼을 시키고 이슬람교 받아들였다. 1473년부터 1524년까지 브루나이를 통치한 제6대 술탄 볼키아흐의 재직 기간 동안, 술탄령의 제해권은 사바를 넘어 술루 군도, 북으로는 마닐라, 심지어 사라왁(Sarawak)에 남쪽으로는 반자르마신까지 확대되었다. 1511년에, 포르투갈이 교역의 중심인 믈라까을 정복하여, 아랍 상린들과 이슬람 상인들의 믈라까 출입을 금지시켜 브루나이로 대거 몰려들었다.
16세기의 전성기시 해상 무역 거점지로 보르네오 해안 전체와 마닐라와 술루 일대까지 지배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백여년을 가지 못했다.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무역선들이 들이닦치기 시작했다. 16세기 말부터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동쪽에서 스페인과 서쪽에서 포르투갈의 진출로 인해 브루나이 왕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인들이 필리핀에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브루나이의 교역로의 팽창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단지 브루나이가 북부 보르네오 지역에서 다방면의 대외 접촉을 가지며 맹주 역할을 해 온 것은 분명한 것 같다.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첫 방문에서는 마젤란이 필리핀 제도에서 사망했으나, 50년 뒤 서쪽으로 진출한 스페인은 브루나이의 무역거점이었던 마닐라를 빼앗고(1578), 브루나이를 공격해 일시적으로 브루나이를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1658년 브루나이 술탄은 후반기 술탄령 내 시민 내전을 해결한 보상으로 보르네오의 북부 및 동부 지역을 술루 술탄에게 양도했다고 하지만, 많은 자료들이 브루나이는 사바의 그 어떠한 부분도 술루 술탄령에 양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Rozan Yunos (2013년 3월 7일). “Sabah and the Sulu claims”. The Brunei Times.).
사라왁 왕국(Kingdom of Sarawak:1841 ~ 1946)
15 세기후반에, 사라왁은 브루나이 술탄국의 영향아래 있었다. 사라왁을 관리하기 위해 지방행정장관들은 브루나이의 술탄에 의해 임명되었다. 그들은 브루나이 술탄국의 간섭없이 사라왁(Sarawak)을 관리하려고 애를 썼다.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이 새롭게 깔리만딴(Kalimantan) 북쪽 지역에 풍부한 천연자원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브루나이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 세기에, 브루나이의 술탄이 사라왁에 브루나이의 한 행정관을 인명했는데 곧 부르나이 술탄국의 대리 통치자로서 인드라 마꼬따(Indera Mahkoa) 왕자였다. 그는 지방관료의 정치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는 부당하게 관리했고, 이것이 사라왁(Sarawak) 지역 백성의 불만을 샀다. 그의 관리 실패로, 브루나이 술탄은 인드라 마꼬따(Indera Mahkota) 왕자를 도와 지역 백성들의 반란을 종료시키기 위해 하심(Raja Muda Hashim) 왕세자를 보냈다.
이 시기에 한 영국 무역상인이었던 제임스 부룩(James Brooke)이 1839년 8월 11일에 꾸찡(Kucing)에 도착하게 되었다. 하심(Raja Muda Hashim) 왕세자는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제임스 부룩(James Brooke)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했다. 하심(Rajah Muda Hashim) 왕세자는 만약 반란이 진압될 경우,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에게 사라왁에 대한 통치권을 할양하는 것을 약속한다. 제임스 부룩의 지원과 군사력으로 사라왁 강(Sungai Sarawak) 유역의 백성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고 사라왁(Sarawak)에 평화의 상태를 회복시켰다(Di antara kekasauan yang berlaku di Sarawak pada masa itu ialah pemberontakan menentang kekuasaan Brunei oleh Datu-datu dari Lidah Tanah bersama-sama dengan pengikut Melayu dan Dayak pada Tahun 1835, Pengiran Usop, anak luar nikah kepada datuk Sultan Brunei membangkitkan pemberontakan di kalangan komunitinya. Tujuannya ialah ining mewarisi kerajaan untuk keterangan lanjut, sila rujuk Bob Reece, Datu Bandar, hlm. 15-16. D.S. Ranjit Singh, Brunei 1839-1983: The Problem of Political Survival, (Singapore: Oxford Unibersity Press, 1984), hlm. 48-49. Lihat F.O. 12/3, General Correspondence: Borneo, 1842, terlampir Memorandum Brooke bertarikh 31 Mac 1845, hlm. 30-32. Mengenai tujuan pemberontakan Pengiran Usop, Lihat F.O. 12/3. General Correspondence: Borneo, 1842, terlampir Memorandum Brooke bertarikh 28 Jun 1845, hlm. 32-33.).
그러나 하심(Muda Hashim) 왕세자는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을 사라왁(Sarawak)의 통치자로 임명하는 것이 브루나이 술탄에 의해 승인되지 않을 그의 행동이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제임스 브룩의 임명을 지연시킨다. 왕세자의 그런 행동은 제임스 브룩을 화나게 했고, 꾸찡(Kucing)의 도시를 포격하게 했다. 이러한 상황은 하심(Raja Muda Hashim) 왕세자를 어쩔 수 없이 제임스 브룩(James Brooke)이 통치자와 사라왁(Sarawak)의 첫 번째 왕으로 임명되도록 만들었다. 사라왁 강 유역의 이 사건은 제임스 부룩(James Brooke)이 사라왁 정치에 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브루나이(Brunei) 왕은 1841년 9월 24일에 첫번째 사라왁(Sarawak)의 통치자로서 제임스 부룩(James Brooke)을 “사라왁 왕(Raja Sarawak)”의 직함을 공표했다(Satu perjanjian telah dibuat di antara Pengiran Muda Hashim dengan James Brooke berhubung dengan perkara penyerahan Sarawak kepada James Brooke pada 24 September 1841. Di antara isi kandungan perjanjian itu berbunyi “…Pengirang Muda Hashim bin Almerhun Sultan Mahmud dengan ini menyerahkan kepada Tuan James Brooke akan Kerajaan Sarawak bersama-sama dengan jajahan2-nya, kehasilan2 dan semua tanggungan2-nya.” Dalam perjanjian itu ditetapkan satu syarat bahawa Sarawak tidak boleh diserahkan kepada pihak ketiga tanpa persetujuan daripada Sultan Brunei Utusan Sarawak, 3 Oktober 1950, hlm 4; 13 November 1950, hlm 2. Rujuk juga Nanyang Siang Pau, 27 Ogos 1996, hlm A8. Radio Times of Sarawak, Programmes from 2 June to 15 June 1957, Vo;. 3, No 12, hlm 28-30; Programmes from 16 June to 29 June 1957, Vol, No. 13, hlm. 31. Henry Ling Roth, The Natives of Sarawak and British North Borneo, Vol. 1, (Kuala Lumpur: University of Malaysia Press, 1968), hlm xvi. Berikutan dengan perjanjian itu, James Brooke telah diberi kawasan yang menganjur dari Tangung Datu ke Sungai Samarahan sebagaimana yang dihuraikan oleh James Brooke dalam F.O. 12/4, General Correspondence: Borneo, 1842, hlm. 24-25. Penyerahan Sarawak kepada James Brooke oleh Sultan Brunei juga ada disebut dalam F.O. 12/2, General Correspondence: Borneo, 1842, terlampir Surat Henry Wise bertarikh 31 Oktober 1844 dan surat Brooke, hlm. 70. F.O. 12/3, General Correspondence: Borneo, 1842, hlm. 122. Lihat juga F.O. 12/1, General Correspondence Borneo, 1842, terlampir Letter From Borneo, hlm. 21-39.). 제임스 브룩은 자신의 위치를 합법화하기 위해서 브루나이 술탄을 대면했다. 사라왁 왕국(영어: Kingdom of Sarawak)은 1841년부터 1946년까지 사라왁 주에 존재하던 영국계 왕조로, 동남아시아 역사상 유일의 유럽계 왕조이다. 대략 100년간 브룩가(家)는 사라왁 화이트 킹으로서 사라왁을 통치하였다. 제임스 브룩(James Brooke) 그리고 조카인 찰스 브룩(Charles Brooke)과 찰스 Vyner 브룩이 백인왕(White Rajah)으로서 지배하였다. 1878년 사바(Sabah) 지역에 영국의 북보르네오회사(Chartered North Borneo Company)가 세워지면서 브루나이 왕국은 광대한 영토의 대부분을 잃고 소국이 되었다.
영국은 1888년 사바(Sabah), 사라왁(Sarawak), 브루나이(Brunei)를 자국의 보호령으로 선언하고, 1906년에 이르러 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술탄은 종교와 관습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실질적 권력을 상실했다. 제2차세계대전 중인 1941년 브루나이는 동남아시아를 점령한 일본의 지배를 받다가 전쟁이 끝난 후 복귀한 영국의 직간접적인 지배를 다시 받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까지 브루나이 술탄인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 3세(Omar Ali Saifuddien III)는 영국이 영국 보르네오 연맹(British Borneo Federation)이나 말레이시아로 영토를 합병시키려는 노력에 끈질기게 대항했다. 게다가 1962년 인도네시아 또한 브루나이와 말레이시아의 합병을 지지하며 브루나이 인민당이 일으킨 반란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주변국에 대한 우려로 인해 술탄 사이푸딘 3세는 브루나이 주변국들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독립을 속속 이룬 것과는 달리 고의적으로 영국의 보호를 선택하며 점진적인 독립을 추진했다. 1959년 헌법을 공포하고, 외교와 국방 분야를 제외하고는 왕국의 실권을 되찾았으며, 1979년 영국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와 국방을 포함하여 전 분야에 완전한 주권을 회복함으로써 결국 1984년 온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제임스 브룩은 1868년에 모국인 영국으로 돌아가서, 그 해에 잉글랜드의 데본 주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생을 마감하였지만, 그의 영지는 조카인 찰스 앤서니 존슨 브룩에게 상속되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찰스 바이너 브룩이 통치하던 1941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으로 사라왁(Sarawak) 지역 전역이 일본 제국에 점령 하에 놓였고, 그동안 사라왁(Sarawak) 국왕 일가 전원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로 망명하여, 일본 제국의 점령이 끝난 1945년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1945년에 사라왁 왕실이 복위하지만, 그로부터 1년 뒤인 1946년에 영국군령으로의 이양이 결정되어, 마지막 국왕인 찰스 바이너 브룩이 퇴위하고, 사라왁 왕국은 영국군령이 되어 사라왁 왕령식민지로 국명이 변경되었다.
사라왁 주민들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발을 가져왔고, 수차례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나, 모두 다 실패했다. 1963년 7월 22일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하였다. 결국 1963년 9월 16일 사바(Sabah), 싱가포르(Singapore), 말라야 연방(Malaya Federation)과 함께 합병되어 신생 국가인 말레이시아로 출범했다. 싱가포르(Singapore)는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가 탈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