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 김종익 이야기
*우석 김종익:
우석은 묵초 김학모의 장남으로 일제강점기인 1886년 순천시 월등면 대평리에서 태어났다.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제활동에 전념하며 교육사업가로서 활동하며 교육기관의 건립과 장학회 '목초 육영회'를 설립하여 불우한 학생들을 지원하였다. 또한 사회복지사업에도 관심을 가져 적십자사와 나병협회 등에 거액을 희사하였다.
교육사업으로는 1935년 조선성악사무실 건립,그 해 현 순천대학교의 전신(前身)인 순천농업학교(현 순천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38년 미국인 여의사 홀(Hall, R.S.)이 설립한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인수하여 재단법인 우석학원(友石學園)을 조직하고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와 순천중학교(현 순천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40년에 순천여학교(현 순천여자중고)를 설립하였다.
그의 사후 우석학원은, 1964년 국학대학(國學大學)을 인수·합병하여 종합대학인 ‘우석대학교’로 개편되었으나, 1960년대 말 경영난에 부딪쳐 1971년 고려대학교로 합병되었다.
호남의 거부로서 순천농업학교가 농업전문교로 승격비용 부담,서울중앙도서관에 기증,묵초육영회에 기부하는 등 당시로서는 거금인 일화150여만원을 기부하였으며 특히 1937년 5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는데, 유언으로 ‘불우한 한국 학도들에게 학비를 대줄 것’, ‘순천농업학교를 갑종학교로 승격시킬 것’, ‘순천 남녀고등학교를 설립해 줄 것’ 등을 당부하였다.임종직전에 175만원의 거금을 육영사업에 기부하였다.이에 그분의 뜻을 기리기위하여 우석기념사업회에서 1995년 동상을 건립하였고 우석과 부친의 묘소를 순천시 해룡면 해창리에 조성하였다.(순천시지)
*묵초 김학모:
호(號)는 묵초(墨樵), 본관은 김녕(金寧), 군수(郡守) 상변(商變)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30년에 사천(泗川)현감(縣監)으로서 흉년(凶年)을 당하여 많은 인민(人民)을 구제(救濟)했기에 선무사(宣撫使) 이중하(李重夏)가 선치(善治)로 추천(推薦)하여 의흥군수(義興郡守)로 승진(陞進)했다. 귀향(歸鄕)하여 일섭정(日涉亭)을 세워 형제(兄弟) 4인이 소요(逍遙)했는데 빈민(貧民)을 많이 구제(救濟)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여러 곳에 세워지고 또 일만4천금을 희습(喜拾)하여 군내(郡內) 14면에 분급(分給)하여 기본금(基本金)으로 하여 잡역(雜役)에 사용(使用)하도록 하였다.(순천지)
우석선생의 묘소
*조용헌의 명문가이야기
"순천에는 구한말 8만석 부자인 김사천씨가 있었죠. 김사천씨는 고리대금업자로 밥 먹을 시간이 없어 누룽지를 싸가지고 다니며 고리대금을 해 돈을 번 사람이지요.
장날에 고리채를 주고 땅 문서를 받아 돈을 번 사람입니다. '개 같이 벌어 정승 같이 쓰라'는 옛말처럼 김사천씨가 '개같이 번 돈'을 후손인 우석 김종익씨가 순천고등학교와 순천여고 순천농업학교를 세워 '정승같이 썼습니다. 우석 김종익씨에겐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고교시절 병으로 죽었지요.
그 뒤 우석은 여자 의사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에 수도여자의과전문학교 (현재 고려대병원)를 세웠습니다.이처럼 호남의 부자는 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힘썼습니다. 한편 영남지방의 LG나 삼성등 부자들은 6.25 이후에 생긴 부자입니다. 만석군이던 경주 최부자와 경북 칠곡의 장택상씨 집안을 제외하고는 일제 강점기 때 호남의 부자들처럼 학교를 세울 만한 부자가 없었습니다. 그당시 서울에다 대학교 하나를 세우려면 최소한 10만석이 있어야 했어요. 이런 10만석의 부자는 큰 들판을 끼고 있는 호남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지요."